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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짓는 플레이어-173화 (173/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173화

    그리하여 폭풍 속에서(2)

    쿠르헨 섬은 수심이 굉장히 얕은 만의 중앙에 위치한 작은 섬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섬’이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처음 이름을 붙여줄 때는 분명히 만의 중앙에 위치한 작은 섬이었는데.

    “섬이라기보다는 그냥 육지잖아.”

    나뭇가지 위에 걸터앉아 모노스코프로 쿠르헨 섬을 살펴보자, 진짜 그렇게 보였다.

    쿠르헨 섬의 사면을 둘러싸던 얕은 만은 이미 모두 증발했는지 무성한 수림이 되어 있었다.

    “설마 몰랐어? 저게 진짜 섬이었던 건 수백 년도 이전의 이야기인데.”

    “알 리가 있겠냐. 섬이라니까 진짜 섬인 줄 알았지. 게다가 저건 뭐야? 저 흉흉한 탑은 뭐냐고.”

    “아, 저거?”

    에르멜도 모노스코프를 펼쳐 내가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더니 이내 대답했다.

    “고대 병기의 일종인데. 배치된 지 좀 됐어. 카세 기간토투스라고 북진 군단의 장교들이 그렇게 부르더라.”

    “거신의 분노라…… 거 참 바짓가랑이 축축하게 만드는 이름이구만.”

    쿠르헨 내란이 글로레나 왕국의 군인들에 의해 제압된 이후. 글로레나 왕조는 쿠르헨족이 독립을 위해 외세의 힘을 빌릴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휩싸이게 된다.

    가장 유력한 후보는 바체트 열도의 북동쪽에 위치한 ‘사르카나 제7 제국’이었다.

    사르카나 제국은 지금도 글로레나 왕조와 군비 확장 경쟁을 거듭하고 있었다.

    마왕 아일라드만이 글로레나 왕조의 적이 아니었단 말이다.

    어쨌거나 글로레나 왕국은 사르카나 제국이 쿠르헨족의 독립을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무력 개입을 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고려하고 있었다.

    “아마도 바체트 열도를 포함해서 동쪽 대륙에서는 손에 꼽힐 정도의 요격 병기겠지.”

    “알게 뭐야. 우리는 타르틸리엇이 있잖아. 대충 타르틸리엇 끌고 가서 쳐부숴 버리자고.”

    내가 그렇게 말하자, 에르멜이 노골적으로 경멸하는 눈빛을 보내기 시작했다.

    “왜?”

    “누자베스 너 말이야. 타르틸리엇이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몰라, 알게 뭐야! 대포가 수백 개 달린 거대한 거미 병기잖아! 저런 고물 포탑 같은 건 철거할 수 있잖아!”

    “타르틸리엇은 가장 정교하고 예술적이며 심미성을 지닌 섬세한 병기야. 저런 어마어마한 포탑에 무식하게 돌진하라고 있는 병기가 아니라고.”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면서요.”

    “상대가 안 좋아. 카세 기간토투스가 상대라면 불가시 상태에서도 탐지될 수도 있고…….”

    “우리가 쳐발려?”

    “그 정도까진 아닌데. 확률적으로 7:3이 아닐까? 물론 타르틸리엇의 승률이 7할인 건 알지?”

    에르멜이 뭘 말하고 싶은지 단번에 이해했다.

    내가 이번에 쿠르헨 섬을 향한 건 괴조의 소문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애석하게도 쿠르헨 섬에는 사르카나 제국의 전함을 요격하기 위해 세워진 고대 병기 ‘카세 기간토투스’가 있었고 말이다.

    지역 방위를 위한 고정 포탑.

    타르틸리엇과 맞붙는다면 70%의 확률로 타르틸리엇이 파괴할 수 있는 수준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30%의 확률로 타르틸리엇이 파괴당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즉, 괴조의 소문을 확인하기 위해 타르틸리엇이 30%의 확률로 파괴당할 수 있는 짓을 할 수 있냐는 말이다.

    확실히 겨우 소문 하나를 확인하기 위해 그런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었다.

    타르틸리엇은 대수림 정벌에 불가결하게 필요한 핵심 병기였으니까.

    “게다가 수도에서 그 용사 누구였더라?”

    “……백주월이다.”

    녀석은 오롯이 나만의 선명한 악몽이다.

    솔직히 말해서 두 번 다시 재회하고 싶지 않았다! 백주월은 나와 초면이라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나는 이미 3번이나 만났단 말이다!

    만날 때마다 죽기 직전까지 처맞는데 누가 좋아서 또 만나고 싶겠나?

    내가 극한의 마조히스트라면 모를까.

    그래, 뭐 솔직히 백주월에겐 마조히스트 여친이 어울린다. 아주 천생연분일 것이다.

    안 봐도 비디오다! 아차, 요즘 애들은 비디오가 뭔지 모르니 표현을 수정하자.

    보지 않아도 블루레이다!

    내가 딱히 작가라서 상상력이 풍부한 게 아니라, 머릿속에서 백주월 녀석에게 여자친구가 생기면, 무슨 대화를 나눌지 또렷하게 들린다.

    ‘주월 오빠는 무슨 빵이 제일 좋아영?’

    ‘배빵.’

    ‘오늘 무슨 공연 보기로 했죠?’

    ‘난타.’

    ‘오빠 우리 정말 결혼하는 거예요오?’

    ‘응, 집은 내가 준비할 게 넌 맷집만 준비해.’

    ‘정말여어!? 혼수 필요없어영?’

    ‘필요 없어, 혼수상태로 만들어 줄 테니까.’

    ‘와아! 그럼 신혼 여행은 어디로 가요오?’

    ‘페루.’

    ‘그, 그럼…… 신혼 여행 가면 뭐하고 싶어영?’

    ‘맞고.’

    뭐, 이런 아주 지랄 맞은 새끼란 말이다!

    솔직히. 그래, 진짜 솔직히 까놓고 말하겠다.

    현실에서든 픽션에서든 쓰레기 놈이나, 피도 눈물도 없는 악당 놈들이 많지만, 여자 친구에게 무자비한 팔콘 펀치를 날릴 수 있을 것 같은 놈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내가 알고 있는 남자 중에선 백주월이 유일하다.

    그놈은 여자 친구가 데이트 약속 시각에 30초만 늦어도 아담을 대신해서 갈빗대 회수해 갈 놈이다.

    덤으로 팔콘 펀치도 한 방 먹이고…….

    여자를 때리다니! 진짜 구제할 길 없는 쓰레기다!

    말해두지만 나는 진지하게 페미니스트라서 팔콘 펀치 같은 건 상상도 못 한다.

    차라리 같은 궤도로 주먹을 휘두른다면 사랑을 담은 피스…… 아니, 이 얘기는 됐다.

    어서 빨리 내 둥지에도 여성 할당제가 도입되어 가슴이 멜론만 한 여성분들의 사회 활동 진출에 이바지하고 싶은 마음뿐이다.

    에르멜은 팔짱을 낀 채로 얕은 신음을 흘리며 생각에 잠겼다.

    저렇게 팔을 안쪽으로 모았는데 볼륨이 전혀 없다니.

    내 둥지에 입사 지원한다면 입사지원서는 세절기 직통행이다.

    “그 녀석이 추격해 올 가능성도 있잖아?”

    “그, 그렇지…….”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오히려 가능성 자체는 굉장히 높은 편이었다.

    실제로 나와 접촉했을 때도 마땅한 임무가 없었기에 줄곧 대기 상태였고 말이다.

    글로레나 왕국의 결전 병기가 탈취당했다는 대사건이다. 용사가 나서도 이상하진 않았다.

    ‘타르틸리엇을 운용하기 위해서는 백주월의 추격을 달고 살아야 된다는 건가…….’

    눈물이 찔끔 나온다.

    팔콘 펀치를 맞는 건 나였고, 갈빗대 으깨져서 혼수상태가 되는 것도 나였다.

    백주월은 라면도 끓여 먹지 않고 부셔 먹을 사이코패스란 말이다…….

    “어쨌든 타르틸리엇은 지금 은폐 상태지?”

    “그래. 이 정도 거리라면 지하에 숨은 것만으로도 탐지되지 않을 테니까.”

    문제는 타르틸리엇을 끌고 쿠르헨 섬으로 접근한 순간 저 거대한 포탑의 포격 세례를 받는다는 것이다.

    이번에도 어쩔 수 없이 몸뚱이만 끌고 가서 쿠르헨 섬을 정찰하고 올 수밖에 없었다.

    “나는 타르틸리엇을 지키고 있어야되니까 자리를 못 비워. 이번엔 너 혼자 다녀와야겠네, 누자베스.”

    “알고 있어.”

    괜찮다.

    인간들 사이에 숨어들어 움직이는 법은 이미 통달해 있었다.

    괴조의 실체만 확인하고 후딱 돌아오자.

    * * *

    “오우야…….”

    쿠르헨 섬에 도착한 직후.

    번화가의 대로변에 도착하자 나무쐐기에 꿰뚫린 채 전시된 시체 수십 구가 내 방문을 환영하고 있었다.

    까마귀의 울음소리와 흐릿한 잿빛 하늘이 어우러져 더욱 섬뜩했다.

    “뭐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섬의 영주가 관광사업에 흥미가 없다는 건 확실하구만.”

    시체들이 꿰뚫린 쐐기 쪽으로 가까이 다가가 살펴봤다.

    시체의 연령대는 1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까지 다양했다.

    시체 중에는 여자도 몇몇 있었지만, 대다수가 젊은 남성이었다.

    그리고 배와 가슴에는 ‘이교도의 말로’라는 공용어가 붉은 글씨로 새겨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쿠르헨 섬은 영주가 아니라, 총독이 지배하고 있는 괴뢰 지역이었지.’

    그리고 쿠르헨 내란이 진압되고 수십 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러서도 독립을 꾀하기 위해 활동하고 있는 파르티잔이 남아 있음을 의미했다.

    ‘내가 하면 독립운동이고, 남이 하면 테러 활동이라.’

    인간들이란 참으로 오만한 놈들뿐이다.

    민족의 정체성과 신앙의 가치를 천칭 저울에 올려두고, 가치의 상하 관계를 결정지으려는 짓이 얼마나 오만한 행위인지 모르는 것일까?

    뭐, 내가 쿠르헨족의 독립이라든가 스텔라 교단의 극성적인 포교 활동에 이러쿵저러쿵 떠들 입장은 아니지만 말이다.

    인간들은 정말 시답잖은 문제로 수천 년 동안 다투며 살아왔구나, 같은 감상을 품을 뿐이다.

    “외지인이세요? 그런 곳에서 서성이다 주둔대의 눈에 띄면 위험한데…….”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자, 머리를 한 가닥으로 땋은 소녀가 걱정스러운 눈초리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오른편에는 소녀의 남동생인지 9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애가 손을 붙잡힌 채 서 있었다. 외지인은 좀처럼 보기 힘든 것인지 꽤나 호기심이 동한 눈빛으로 말이다.

    “잠깐 용무가 있어서 들른 것뿐이다. 왕국의 군대가 무고한 사람을 붙잡아 고초를 겪게 할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는다만.”

    적당히 대답해 준 후 자리를 벗어나려 했지만, 소녀와 남동생이 내 뒤를 졸졸 따라오며 말을 걸어왔다.

    “혹시 귀족님이세요?”

    “왜? 귀족은 얼굴에 귀족이라고 쓰고 다니나?”

    “떠돌이 여행자 같지 않게 좋은 향기가 나서요. 옷도 고급스러워 보이시고…….”

    후줄근한 소녀의 목소리에 걱정스러운 기색이 묻어났다.

    그러고 보니 이 섬에 도착한 이후부터 묘한 시선이 느껴지고 있었다.

    ‘치안이 좋은 것 같지 않군.’

    훈련받은 살수나 요원은 아니다.

    하물며 백주월이 벌써 내 뒤를 바짝 쫓아왔을 리도 없다.

    그저 이 섬에 살고 있는 양아치 놈들이 내 옷차림에 흥미를 느끼고, 어떻게 뜯어 먹을지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하기야 이런 소수민족 놈들의 의식 수준이 뻔하지. 스텔라 교단에서 눈에 불을 켜고 교화시키려는 이유를 좀 알겠어.’

    선악은 강약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오히려 약한 놈들일수록 더 치졸하고 비열해지는 법이다.

    ‘괴조의 소문만 조사하고 조용히 뜰 생각이라 소동을 피우고 싶진 않은데.’

    양아치 몇 놈을 저기 꼬챙이 모둠에 추가시켜 주는 건 어렵지 않다.

    하지만 쿠르헨 섬을 점령하고 있는 주둔군의 눈에 띄는 건 되도록 지양하고 싶었다.

    “키르마샤 시간이라 돌아다니시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너도 돌아다니고 있잖냐.”

    “저는 태양교가 아니니까…….”

    “나도 방금 스텔라 님한테 기도해서 돌아다녀도 된다고 쇼부봤으니까 괜찮다.”

    태양교는 스텔라교의 다른 이름이었다.

    스텔라교가 글로레나 왕국의 국교로 지정되어 있었기에, 스텔라의 교리를 믿지 않는다는 건 거의 살인범만큼이나 혐오 받는 일이지만.

    소녀는 내 뒤를 졸졸 따라오며 가끔 골목길 구석에 들러 식당에서 내놓은 쓰레기를 주섬주섬 챙겨왔다.

    “젠장, 더러워 죽겠구만. 그딴 걸 왜 자꾸 주워오는 거야? 무슨 괴롭힘이냐? 음식물 쓰레기 들고 뒤쫓아 오는 신종 괴롭힘이냐고.”

    소녀는 멋쩍은 듯 배시시 웃으며 뺨을 긁적였다.

    “이상한 아저씨 쫓아다니면 엄마한테 혼난다. 집으로 돌아가.”

    “엄마 없어요.”

    “그, 뭐냐…… 이게 그 탈룰라 카운터라는 것인가……. 아니, 엄마가 없으면 아빠한테라도 혼나겠지.”

    “아빠도 없어요.”

    “젠장. 하기야 부모가 있었으면 자기 자식이 음식물 쓰레기 줍고 다니는 걸 방치하진 않았겠지.”

    꾀죄죄한 어린애 둘을 달고 다니는 것도 번거로운 일이다.

    “…….”

    기묘하게도 오늘 이 섬에서 처음 만난 저 꼬맹이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기억에도 없는 데자뷰가 느껴졌다.

    ‘기분 탓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주변을 살폈다.

    마침 가까운 곳에 적당한 식당이 보였다.

    “밥은 먹었냐? 밥 사줄 테니까 먹으면 집으로 얌전히 돌아가라. 알았지? 젠장, 그리고 그 녀석은 남동생이야? 짜증 날 만큼 더럽게 잘생겼네. 나중에 여자 여럿 울리겠어.”

    “친동생 아니에요.”

    “그래그래, 애인이었구나. 이제 알았으니까 밥이나 먹으러 가자.”

    이쪽을 지켜보고 있는 시선이 몇 갠가 더 추가된 걸 확인한 후 곧장 애들을 데리고 식당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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