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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짓는 플레이어-172화 (172/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172화

    그리하여 폭풍 속에서(1)

    대수림.

    바체트 열도의 본도 론트라의 2할을 차지하고 있는 이 거대한 숲은 일찍이 엘프들의 서식지였다.

    글로레나 왕조가 바체트 열도에 진출하기 이전부터, 마왕 아일라드가 바체트의 새로운 주인을 자처하기도 이전부터.

    그리고 윤왕 루아 카날다가 도래하기 이전부터 말이다.

    그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자면 슬레뷔네가 중재자의 역할을 맡기도 이전. 테네브레의 전령으로써 ‘이름 없는 아이’의 다섯 파편을 옮기다 분실한 것이 원인이었다.

    살랍의 고어로 ‘미아 나크랏’이라 불리던 이 존재는 최초의 소녀이기도 했다.

    미아 나크랏이 어디서 왔는지, 어떻게 생겨난 것인지 무엇 하나 분명하게 규명된 사실은 없었지만.

    미아 나크랏은 대륙의 북쪽 끝에 위치한 영구동토의 고대 왕국 ‘안다밀란’을 순식간에 집어 삼켰고, 스스로의 피를 흩뿌려 역병을 일으켰다.

    역병에 감염된 인간과 마물들은 이성을 잃고, 기괴한 형태로 일그러져 끔찍한 괴물이 되어갔다.

    미아 나크랏의 사생아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그 규모가 수천만에 달할 만큼 불어났다.

    이 기괴하고 끔찍한 사태에 테네브레는 직접 계시를 내려 미아 나크랏의 토벌을 명했고, 세 사람의 사내가 테네브레의 계시를 받들었다.

    첫 번째가 로메니우스의 현왕 나르시안.

    두 번째가 대공국 팔란디아의 제3왕자 루아 카날다.

    마지막 세 번째가 헬베르카 가문의 신예 집무정관 오르키아나였다.

    세 사내는 곧장 군사를 이끌고 안다밀란으로 향했고, 처절하고 긴 전투 끝에 마침내 미아 나크랏을 무릎 꿇리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들이 미아 나크랏 토벌을 위해 치른 대가는 적지 않았다.

    가장 노련하고 냉철했던 로메니우스의 왕 나르시안은 최후의 순간 미아 나크랏이 뿜어낸 피를 뒤집어 쓴 것이다.

    그 이후 나르시안은 편집적으로 피를 두려워하는 동시에 아이러니하게도 혈액을 갈구하게 되었다.

    그리고 용맹한 사자와 같다고 명성이 자자했던 팔란디아의 왕자 ‘루아 카날다’는 미아 나크랏의 비명 소리를 가까운 거리에서 듣게 되었다.

    루아 카날다는 햇빛과 파국으로 끝나게 될 모든 관계에 공포와 염세의 감정을 품게 되었다. 그 때문인지 루아 카날다가 돌연 고국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 것은 미아 나크랏 토벌 직후였다.

    마지막으로 헬베르카의 직계 출신으로 두각을 드러내며, 차기 당주의 자리에 오를 수 있을 것이라 기대받던 집무정관 ‘오르키아나’는 미아 나크랏이 마지막으로 쥐어짜낸 저주에 걸리게 된다.

    ‘가장 사랑하는 이의 손에 의해 가장 비참한 형태로 살해당할 것이다.’

    그런 저주였다.

    오르키아나는 신실한 세피로스의 신봉자였고, 그런 저주 따위보다 ‘마땅히 도달해야 될 형태’를 믿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마지막 순간 메를로의 꼬드김에 속아 죽음에 이른 것을 생각해 보자면 저주의 효과가 아주 없었던 것도 아니었던 모양이다.

    어찌됐든.

    세 영웅들에 의해 봉인된 미아 나크랏은 다섯 조각으로 나눠졌고, 테네브레의 명으로 슬레뷔네는 그 조각을 세상의 끝으로 옮겨 묻게 되었지만.

    조각을 옮기던 중 하나를 바체트 열도 어딘가에 떨어뜨리고 만 것이다.

    미아 나크랏의 파편이 떨어진 자리에 풀과 나무가 무성히 자라났고, 본 적이 없던 생물이 태어났다고 한다.

    그것이 바로 ‘엘프’라고 불리는 종족의 기원이었다. 엘프들은 최초의 소녀였던 미아 나크랏의 형태와 닮아 있었다.

    짧은 성장기를 거쳐 성체가 되면 소녀의 모습으로 영원에 가까운 시간을 살아가는 종족이었다.

    수만 년에 걸쳐 엘프들은 대수림에 서식해 왔고, 초대 여왕 ‘메르세데스’는 전란의 풍파 속에서 엘프들의 왕국을 소중히 지켜왔지만.

    마왕 아일라드의 피조물 ‘하이브 마인드’ 한 마리가 대수림을 침식해 나갔고, 이윽고 그 하이브 마인드는 메르세데스의 여왕 자리를 빼앗는 데 성공했다.

    그 전쟁 군주가 바로 현재 대수림의 지배자 ‘유리아’였다.

    유리아는 메르세데스와 달리 매우 호전적이며, 짙은 야망을 지닌 여왕이었다.

    그런 유리아에게 바체트 열도의 절반을 주겠다는 제안이 통용될까? 유리아의 평소 성격을 알고 있는 자라면 바로 부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유리아는 우렌의 제안을 듣더니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카쿠쟈 경. 거래라는 것은 결국은 체급이 비슷해야 성립하는 것인데.”

    우렌이 유리아에게 바라는 것은 하나 뿐이었다. 누자베스의 둥지 아릿카사가 동쪽의 인간 왕국을 집어 삼킬 때까지 일시적 동맹을 맺자는 것이다.

    그사이에 유리아가 바체트 령의 서쪽을 집어 삼키는 것을 묵과해준다는 게 조건이었다.

    서로 등을 맞댄 채 배를 불린 후 나중에 다시 보자는 제안이었지만.

    “대수림에 등을 맡기고 동쪽으로 진격한다면 꽤나 든든하겠지. 이 섬에서 대수림 이상으로 튼튼한 방어선은 없을 테니.”

    유리아는 자신의 영지 대수림의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 알고 있었다. 만약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누자베스는 바체트 열도에서 가장 믿음직한 벽에 등을 맞댄 채 싸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유리아는 어떨까?

    이제야 고작 중부의 일부를 차지한 하이브 마인드에게 등을 맡길 수 있을까?

    “오히려 가장 먹기 좋게 차려진 먹잇감으로 보이는 걸. 솔리엔 령부터 꿀꺽 삼키고 움직여 볼까?”

    “여왕 폐하의 관점에서 보자면 확실히 저희는 별 볼 일 없는 오합지졸에 불과하겠지만. 이 늙은이의 어줍잖은 견해로는 그리 집어 삼키기 쉬운 먹잇감은 아닐 겁니다.”

    “우렌. 지금부터 잘 생각해서 말해야 될 거야. 네 한 마디에 내 군대가 움직이느냐 움직이지 않느냐가 결정될 테니까.”

    “검토해 보시겠습니까?”

    “지금 그 발언은 객기에 불과해 보이네.”

    “구태여 군대를 움직이지 않아도 카르케샤를 통해 검토해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카르케샤는 ‘대전쟁’이라는 의미의 보드 게임이다.

    기본적으론 체스와 큰 틀은 같지만, 여러 개의 판과 가변적인 장기말을 쓸 수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복잡한 게임이었다.

    유리아는 카르케샤는 말을 듣더니 깔깔 웃으며 시종을 불렀다.

    시종들이 재빠르게 카르케샤의 판과 장기말을 옮겨 왔고, 우렌은 유리아의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고 정중한 자세로 앉았다.

    이윽고 둘의 사이에 첫 번째 붉은 판이 깔렸다.

    “양심이 있다면 르안 리그는 아니겠지?”

    유리아가 말하는 사이에 붉은 판의 좌측에 청색 판이 하나 더 깔렸다.

    붉은 판은 우렌의 진영.

    청색 판은 유리아의 진영이었다.

    우렌은 겸허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트릴카 리그부터.”

    청색 판의 위아래로 같은 색의 판이 하나씩 더 깔렸다. 이걸로 청색 판은 3개. 붉은 판은 1개인 채였다.

    “쿼르펜.”

    이번엔 청색 판이 붉은 판의 위쪽과 아래에도 깔렸다. 이걸로 5배의 싸움이 된 것이다.

    보통 카르케샤는 동등한 규모를 지닌 전력으로 싸우는 두뇌 게임이다. 하지만 유리아가 하려는 건 게임이 아닌, 실전의 모의 검토였다.

    누자베스의 둥지 아릿카사가 지닌 병력과 영지. 그리고 유리아가 지닌 병력과 영지를 카르케샤로 재현하여 모의전을 치룰 작정이었다.

    이어서 붉은 판의 우측 하단의 대각선 방향에도 새로운 판이 깔렸고, 우렌은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지 지랄 맞군. 이런 식으로 힘의 차이를 과시해야만 직성이 풀린단 말인가?’

    카르케샤의 판이 완성되어 가는 걸 뒤에서 지켜보며 루칸다가 혀를 찼다.

    카르케샤는 판의 규모가 2배만 되어도 압도적으로 상대를 농락하며 가지고 놀 수 있었다.

    그런데 이미 유리아의 판은 우렌의 6배에 도달했다. 모의전으로 가장한 짓밟기에 불과했다.

    “아 위쪽은 시트란테 서도였지. 이쪽은 내 영향력 밖이네. 여긴 빼줄게.”

    그리고 붉은 판의 우측에도 자연스럽게 청색 판을 놓으려 했지만, 그 순간 처음으로 우렌이 시종의 움직임을 저지했다.

    “이곳 역시 여왕 폐하의 군대가 간섭하기 힘든 곳입니다.”

    “여기에 뭐가 있는데? 내가 모르는 사이에 확장한 건 아닐테고…….”

    유리아가 의아하다는 듯 되묻자, 우렌이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불사의 왕 브람스의 영지입니다.”

    “그게 뭐 어쨌다고? 브람스 그 썩은 시체놈이 뒤 좀 봐주겠다고 생색이라도 냈어?”

    불사의 왕 브람스라면 확실히 유리아도 가벼이 여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하지만 브람스가 누자베스의 둥지 아릿카사를 위해 발벗고 나서서 유리아와 대치할 이유도 없었다.

    무슨 이득을 보겠다고 유리아의 포식을 방해하려 하겠나?

    “만약 전면전이 확실시 된다면 브람스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수림에 선전 포고를 할 것입니다.”

    “내가 납득할만하게 설명해 봐.”

    “피의 규율에 따라 상속 신분은 가장 고귀한 대접과 대우를 받아야하기 때문이죠.”

    “아…… 진짜 상속 신분이었구나. 어쩐지 냄새가 짙더라니…….”

    유리아도 연회장에서 스칼렛을 본 기억이 있었다. 상당한 고위급의 흡혈귀라는 건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지만, 상속 신분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유리아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슥이며 우렌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우측 상단의 대각선 방향과 우측을 빼자면 모두 청색 판이 깔린 상황.

    6배의 병력을 상대로 분투해야 하는 것이다. 오히려 뒤에서 지켜보던 루칸다가 안절부절 못하기 시작했다.

    “이봐, 우렌. 제정신인가? 이거 완전…….”

    “여, 여기에 제발로 기어 들어온 순간부터 제정신 아니었네. 가만히 있게.”

    루칸다가 우렌의 귓가에 작은 목소리로 묻자, 우렌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루칸다는 눈을 질끈 감으며 ‘테네브레 맙소사…….’라고 중얼거렸을 뿐이다.

    “그래서 게임을 시작하기 전에 조건부터 들어보지.”

    “만약 256수까지 본관이 버틴다면 불가침 조약의 제안을 받아들여 주셨으면 합니다.”

    우렌이 말하기가 무섭게 유리아가 유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64수도 아니고, 128수도 아닌 256수다!

    바보천치가 아닌 이상 6배의 판을 깔고 256수까지 갈 리가 없지 않나?

    완전히 시작부터 이긴 게임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건 유리아 뿐만이 아닌지, 루칸다 역시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미쳤군, 완전히 미쳤어. 도대체 무슨 생각이냐…….’

    루칸다는 손수건으로 식은땀을 훔치고 있는 우렌을 내려다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만약 카쿠쟈 경께서 256수까지 버티지 못한다면?”

    “그 경우엔 바로 솔리엔 령을 집어 삼키셔도 됩니다. 더불어 저 역시 여왕 폐하의 휘하에서 미력하게나마 조력하겠습니다.”

    “밤의 어머니깨 맹세코?”

    “밤의 어머니의 이름에 맹세하겠습니다.”

    이제는 경악할 기력도 없었다.

    루칸다는 뇌리가 아찔했다.

    아주 그냥 우렌이 누자베스의 뒤통수를 치려고 작정한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솔리엔 령의 제압이 끝난 직후 가장 먼저 꺼야하는 불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우렌은 유리아의 침략을 이미 상정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렇게 먼저 찾아와 선수를 친 것이다.

    우렌은 판 위에 깔리기 시작한 장기말들을 하나씩 살펴보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내가 평소에 착하게 살아서 이런 행운이 찾아오는 모양이야. 안 그래, 카쿠쟈 경?”

    유리아는 쥘부채로 장기말들을 하나씩 가리켰고, 시종들이 분주하게 각 판에 깔린 장기말을 움직였다.

    사방에서 거리를 좁혀오는 적의 대군을 상대로 우렌은 소수의 병력만 가지고 대항해야 했다.

    ‘역시 128수라고 할 걸 그랬나…….’

    우렌은 뺨을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훔쳐내며 뒤늦게 후회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지금 이 자리에선.

    철혈의 중재자 카쿠쟈의 능력을 보여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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