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짓는 플레이어 171화
살사를 추는 법(6)
우리는.
아니, 우리라고 해야 할지 나를 포함한 대다수의 사람들이라고 칭해야 할지 애매하긴 하지만 말이다.
삶 속에서 정의란 무엇인지 한 번쯤은 고민해 봤을 것이다. 마이클 샌델 같은 유명한 교수만이 품을 수 있는 고뇌가 아니란 말이다.
그러니까.
젠장, 그 망할 정의가 도대체 무엇인지에 대해 대다수의 인간이 금쪽같은 시간을 할애하며 고민하는 이유가 뭔지부터 짚고 넘어가 보자.
인간이 본성적으로 선을 추구하는 지성체이기 때문일까?
글쎄다. 산타클로스의 존재를 진지하게 긍정하고 있는 유치원생도 그렇게 생각하진 않을 것이다.
모두가 알고 있을 것이다.
인간은 가장 추악하고 저열한 형태로 태어나, 그 끔찍한 본성을 감추고 포장하는 행위를 반복하며 어른이 되어가는 것뿐이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당신과 내가 정의가 도대체 무엇인지 고심해 왔던 시간이 어떤 의의를 지니는지 대충 견적이 나온다.
그저, 더 효율적으로 타고난 악취를 숨기기 위한 연구의 일환이다. 정의 그 자체보다, 어떤 모습이 정의롭게 보이는지 궁리한 것에 불과하다.
정의란 방향성을 지닌 악의의 다른 이름이다. 편협성과 아집이 함유된 악의일 뿐이다. 죄책감이 동반되지 않는 악의를 정의라고 부르기도 한다.
나는 적어도 그렇게 생각한다.
완벽한 정의를 집행하는 용사란 수학적 문제처럼 관념의 영역 안에서만 이해되어야 한다. 아니면 픽션 같은 가상의 세계에서만 표현되어야 하는 법이다.
그것을 실제의 세계에 반영하려 해봤자 대다수의 동조를 얻기 힘든 실패작이 되기 마련이니까.
나는 백주월에게 지극히 현실적인 충고를 해주고 싶었을 뿐이다.
그 냄새나는 거적때기를 벗겨주고 싶었다. 백주월은 내가 조형해낸 캐릭터 중에서 가장 걸작에 가까운 존재였으니까.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말해주고 싶었다.
너는 너 자신의 나신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다고. 필요 없는 불순물을 내려놔도 된다고.
맞닿은 피부를 통해 녹아내린 감정의 침전물이 느껴졌다.
“이제야 알겠군…….”
백주월이 나지막이 그렇게 말하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차분하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네놈과 나는 같은 결함을 지닌 것뿐이야.”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백주월은 나의 상처를 투영하듯 만들어진 캐릭터였다. 거울에 반사된 듯한 닮은꼴이다.
그렇기에 녀석과 나는 서로에게 끌릴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아직 괜찮다고, 이런 상처쯤은 별것도 아니라고 과시하게 위해 서로가 필요했다.
자신과 똑같은 상흔을 지닌 상대의 상처를 후벼 파내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해야만 살아갈 수 있었으니까.
입을 꾹 다문 채 상대의 비명 소리를 들어야만 가까스로 살아갈 수 있는 짐승들일 뿐이다.
단검을 쥔 백주월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어째서?’
그런 의문이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올랐다. 마치 살인에 저항감이 남은 것처럼 보이지 않나?
아니, 애초에 나는 인간도 아니니 살인의 범주에도 들어가지 못한다. 인간들의 관점에서 보자면 하이브 마인드란 그저 ‘유해조수’에 불과하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주월은 마치 이쪽을 죽이는데 주저를 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뭔가가 잘못되었다.
그런 예감이 들었다.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작전에 결함이 있었던 것이다.
내가 백주월을 완성시키지 못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그 직후.
쿠웅!
굉음과 함께 천장이 무너졌고, 거대한 묵빛의 철판이 백주월과 내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것과 동시에 멀리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용사님! 타르틸리엇이 탈취되었습니다! 지금은 물러나셔야 됩니다!”
희미해지는 의식 속에서 들려온 건 그 목소리가 마지막이었다.
* * *
땅속에서 치솟은 건 거대한 강철의 거미였다. 지상에서 보자면 그 형태조차 한눈에 담기 힘들 만큼 거대한 병기.
대륙간 결전 병기 중 하나인 ‘타르틸리엇’이었다.
그 크기만 580미터에 달하는데, 종래의 무기 중에서 타르틸리엇에 유효한 타격을 줄 수 있는 건 손에 꼽힐 정도였다.
대륙제의 병기를 제외하자면, 바체트 열도 내에선 최강의 병기인 것이다.
게다가 타르틸리엇은 성녀의 신성력에 비례한 전투 능력을 지닌다. 성처녀 에르멜의 강대한 신성력을 기반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타르틸리엇은 역대 최고급의 퍼포먼스를 발휘할 수 있는 상태였다.
제대로 된 요격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이계의 용사 두 사람을 상대로도 비등하게 싸울 수 있을 정도다.
글로레나 왕국의 병사들은 움직이기 시작한 타르틸리엇을 멍하니 올려다 볼 수밖에 없었다.
저런 결전 병기에 덤벼들 얼간이는 한 사람도 없었으니까.
“흡혈귀라는 건 대단하네. 구해냈을 때는 거의 고기반죽 같은 상태였잖아? 어떻게 이렇게 금방 멀쩡해지는 거야?”
“수혈만 제대로 되면 고기 파편이 되어도 회복될 수 있으니까.”
지휘 브릿지의 구석에 주저앉아 있던 누자베스가 안도의 한숨을 크게 토해내며 말했다.
“그나저나 너무 늦었잖아. 조금만 더 늦었으면 진짜 요단강 건널 뻔했어.”
“솔직히 진짜 혼자서 용사의 발을 묶을 수 있을 줄은 몰랐지.”
“그럼 뭔데?”
“이미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럼 어차피 죽었을 테니까 천천히 온 건 아니지?”
에르멜은 큭큭 웃으며 어깨를 으슥였다.
“대단하네. 완전히 약골일 줄 알았는데.”
“약골은 맞지만, 그렇게 약골은 아니야.”
주변에 있는 비교 대상들이 강한 것뿐이다. 일반적인 상대들과 비교하자면 누자베스 역시 충분히 강자의 영역에 들어갈 정도의 전투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번에도 백주월의 7할 정도의 전투력을 발휘했고, 포 힐케인 섬에서 만났던 류시혁의 능력은 일찍이 뛰어 넘었다.
물론 류시혁은 그 이후에도 무서울 정도의 성장을 거듭했겠지만 말이다.
누자베스는 의식을 되찾은 후 바로 몸을 수복시켰고, 백주월과의 접전이 악몽이었던 것처럼 멀쩡해져 있었다.
브릿지에서 내려다보이는 수도의 전경을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
“지금은 내가 타고 있지만…… 만약 이런 괴물 같은 병기가 내 둥지로 쳐들어 왔으면 하이브 마인드 때려쳤다, 진짜…….”
“타르틸리엇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지. 그래서 엘베제 변경백? 바로 솔리엔 령으로 돌아갈까?”
누자베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해야 할 일이 하나 더 있지.”
둥지에 우렌이 영입된 후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리고 에르멜이 지니고 있었던 정보에서 그 단서를 붙잡았던 것이다.
“쿠르헨 섬으로 향하자. 괴조의 실체를 확인해 둬야지.”
수도에서 북동쪽 방향으로 30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섬이었다.
그리고 수십여 년 전 있었던 내란 진압 당시 ‘괴조’가 목격되었다는 보고가 있었던 지역이다.
타르틸리엇 정도라면 항공모함의 역할도 충분히 해낼 수 있을 테고, 당장은 서둘러 둥지에 돌아갈 필요는 없었다.
* * *
누자베스가 수도에서 타르틸리엇을 탈취한 후 쿠르헨 섬으로 향하던 사이.
솔리엔 령과 이즈미 령의 제압이 완전히 끝맺어졌고, 이 정보 역시 실시간으로 글로레나 왕국에 전해졌다.
지금까지 아리카의 엘베제로 알려져 있던 덕분에 그 위세가 상대적으로 과소평가되고 있었지만.
중부의 북부 지역을 집어 삼킨 지금에 이르러선 마왕군에서도 누자베스의 직위를 바로 갱신시켰다.
시트란테 총독 대신이자, 아리카의 그란델 누자베스 후작으로 말이다. 드디어 중부의 강호들과 나란히 설 수 있을 만큼의 위세를 갖춘 것이다.
중부의 1/3이 누자베스 후작령이 되었고, 덕분에 바로 접경하게 된 이웃사촌 ‘유리아’는 불쾌한 기색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식으로 다시 만나게 됐네, 우렌.”
“대수림의 여왕 유리아 님의 존안을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지역을 정리한 직후 우렌은 바로 대수림의 둥지를 방문했다.
대수림에 군림하는 최강의 전쟁 군주 ‘유리아’는 우렌과 구면인 사이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비아 엘티나 제압전에서 몇 번이고 나뒹굴었던 사이 아닌가?
당장 찢어 죽이고 싶을 만큼 증오스럽기도 했지만, 유리아는 우렌에게 어느 정도의 경의 역시 지니고 있었다.
유리아가 경험했던 수많은 전쟁과 전투 중 그녀를 전율하게 만들었던 건 오로지 비아 엘티나의 격전 뿐이었으니까.
“그나저나 그 콧대 높으신 카쿠쟈께서 전쟁 군주 따위의 오합지졸을 이끄실 줄이야.”
전쟁 군주가 항상 아쉬워하는 자원이란.
병력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실력 있는 지휘관이다. 그리고 대수림의 여왕인 유리아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우렌은 유리아도 바로 한 자리를 마련해 주겠다고 나설 만큼 유능한 지휘관이었다.
실제로 비아 엘티나에서 격전을 치루던 와중에도 몇 차례고 우렌을 설득하여 자신의 휘하에 두고 싶어했지만. 우렌은 유리아의 제안을 모두 거절했던 것이다.
‘번견이 어찌 들개들과 어울릴 수 있겠습니까?’
당시의 우렌은 유리아와 그녀의 군단을 들개 무리라 일축하며 거절했다. 우렌은 바체트 열도에서 그 누구와도 비견될 수 없을 만큼 우수했고, 우수한 만큼 거만한 장교였다.
그런 우렌이 신흥 전쟁 군주인 ‘누자베스’의 밑에서 일하고 있다니? 유리아에겐 사뭇 불쾌한 일이었다.
“국화의 가문은 편리해서 좋겠어. 태어나면서 당연히 지니고 있는 숭고함이 모든 일의 당위성을 보장할테니.”
“그렇게 말씀하시는 유리아 님 역시 고결한 혈통을 타고나신 분이 아니십니까?”
“윤왕이란 숭고함이라든가 고결함과 거리가 멀지. 그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라면 모를까.”
유리아는 3인의 윤왕 중 한 사람인 ‘유스티아’의 그릇이었다.
맹약에 의하여 영원한 윤회를 약속받은 인간들의 왕. 윤회가 완성되는 순간이 오면, 고대의 군단과 함께 재림하여 이 세상을 집어 삼킨다는 전설의 주인공들이었다.
검의 무덤 제필프.
월광의 아이 유스티아.
그림자 시해자 루아 카날다.
이 셋 중 한 사람이라도 윤회를 완성시킨 순간, 세상의 절반이 통일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윤왕은 시한폭탄 취급을 받는 게 당연했고, 윤왕 본인들 역시 자기 이외의 윤왕이 윤회를 완성시키는 걸 극도로 두려워하고 있었다.
유리아는 우렌의 우측에 서있는 애꾸눈 고블린에게 잠시 시선을 향했다. 루칸다는 유리아에게 예를 갖추듯 고개를 숙였다.
“고블린이라. 그러고 보니 루아가 이 열도를 집어 삼켰을 때 유일하게 자치를 인정받은 종족이 고블린들이었다는데.”
유리아는 흥미가 동한 듯 루칸다를 향해 되물었다.
“이봐, 고블린. 네놈들 같이 하찮은 종족이 어찌하여 윤왕의 군대를 물렸지? 루아가 그렇게 호락호락하고 인정 넘치는 사내는 아닐 텐데.”
루칸다는 고개를 숙인 채 정중하게 대답했다.
“열도의 모든 고블린이 자치를 인정받은 것은 아닙니다. 아카르타 산맥 중부에 위치한 요새 도시 페이드레트의 고블린들만이 지배에서 자유로웠을 뿐이죠.”
“어떻게 그럴 수 있었냐고 묻고 있잖아.”
“반 르낙시아의 은혜로 태어난 하위종이 어찌 감히 윤왕의 군대를 물릴 수 있었겠습니까. 그저 지배할 만큼의 가치도 없었을 뿐입니다.”
타당하고도 당연한 대답이다.
고블린 따위의 하위종이 어찌 루아 카날다의 그림자 군세를 물리칠 수 있겠나?
그 따분한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유리아는 혀를 차며 루칸다에게 흥미를 거뒀다.
“그래서 카쿠쟈께서 이 비루한 둥지를 찾아오신 이유가 뭘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는데.”
유리아가 묻자, 우렌이 일말의 주저도 없이 대답했다.
“차기 마왕의 자리에 흥미가 있으신지 여쭙고자 찾아 왔습니다.”
서로에게 등을 맡긴 채 열도의 절반씩을 집어 삼키자는 제안 말이다. 유리아의 눈이 가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