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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짓는 플레이어-170화 (170/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170화

    살사를 추는 법(5)

    봄이면 살구꽃이 흐드러지게 피던 작은 촌락이 백주월의 고향이었다. 두 칸짜리 노면 전차가 하루에 여섯 번 정도 왕래할 뿐인 작은 마을이기도 했다.

    소련 시대의 잔재처럼 남은 목욕 시설의 가장자리를 따라 이어진 작은 샛길. 그곳은 유난히 봄의 햇살이 따스하게 내리쬐는 곳이었다.

    눈이 부실 만큼 따뜻한 오솔길을 따라 걷다 보면, 서쪽으로 길게 이어지는 아무르 강이 보이기 시작한다.

    햇빛은 강의 수표면에 부딪혀 산산이 부서지는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9살짜리 아이의 눈에는 하늘에 있는 누군가가 하염없이 보석을 흩뿌리는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봄의 태양빛에 반짝이는 강가를 바라보며 다시 노면 전차의 선로로 향하는 것이 백주월의 오후 일과였다.

    열차의 승객들이 차창 밖으로 버린 쓰레기 속에서 먹을 수 있는 걸 골라내는 일 말이다.

    영원히 서쪽으로 흐를 것만 같은 아무르 강이 붉게 물들 때쯤이면, 그럭저럭 저녁을 넘길 수 있을 만큼의 음식을 얻을 수 있었다.

    운이 좋다면 쓰다 남은 보습용 로션이나 향수 같은 물건도 주울 수 있었고 말이다.

    그런 것들은 한 병을 모아서 팔면 30루블에서 50루블 정도를 받을 수 있었다.

    공업용 메탄올을 보드카 대신 마시는 건 이 마을에서 드물지도 않은 일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운이 좋은 날이었다.

    이날은 꽤나 운이 좋았다. 승객이 버리고 간 보야리쉬닉 한 병을 통째로 주웠으니 말이다.

    보야리쉬닉은 흔히 ‘사신과 합석’이라고 불릴 만큼의 독성을 지닌 보습제였지만, 제대로 된 정제 과정을 거치면 보드카 대용으로 마실 수 있는 물건이었다.

    백주월은 보석이라도 주운 것처럼 보습제 병을 품속에 소중히 넣었고, 음식물 쓰레기를 담은 비닐 봉투를 한 손에 들고 걸었다.

    오후의 미열을 머금은 봄바람이 기분 좋게 뺨을 스쳤다.

    목욕 시설의 가장자리를 따라 이어진 오솔길에는 살구꽃이 만개해 있었다.

    살구꽃의 꽃말은 처녀의 수줍음이라고 한다.

    백주월은 떨어지는 꽃잎 사이를 걸으며 사샤가 들려주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사샤는 백주월보다 4살이나 더 많은 슬라브계의 여자아이였다. 의지할 곳 없는 고아들이 서로에게 의지하며 함께 생활하는 건 흔한 일이었고 말이다.

    사샤는 언제나 백주월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백주월은 사샤의 목소리가 좋았다. 봄의 햇살만큼이나 따뜻했고, 상냥한 그녀의 목소리는…… 아마도 백주월의 비루한 삶 속에서 유일하게 위안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이었다.

    석면 슬레이트를 세워 만든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오늘 선로 근처에서 주워온 걸 보여주면 사샤도 분명 기뻐해 줄 것이다.

    언제나처럼.

    백주월의 머리카락 위에 소복이 쌓인 새하얀 꽃잎을 털어내 주며, 봄날의 햇살만큼이나 따뜻한 미소로 그를 맞이해 줄 것이다.

    집에 발을 들이기 전 백주월은 사샤와의 약속을 떠올렸다.

    손님이 왔을 때는 얌전히 밖에서 기다릴 것.

    그런 약속을 떠올리며 백주월은 얌전히 흙바닥에 앉아 소리가 멎길 기다렸다.

    멍하니 살구의 꽃잎이 흩날리는 오솔길 쪽을 바라보며 어서 시간이 지나가길 기다리는 것이다.

    때때로 사샤를 찾아오는 손님들이 있었다. 그 남자들이 무슨 연유로 이런 누추한 집을 찾아오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남자들이 놓고 가는 식료품과 몇 푼 안 되는 돈은 어린애 둘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것들이었다.

    낡고 허름한 침대가 삐걱거리는 소리.

    입을 꽉 틀어막은 채 흘러나오는 헛구역질과 닮은 소리.

    그런 소리들은 이미 익숙했지만 말이다.

    그날만큼은 어쩐지 집안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달랐다.

    이질적이게도, 낮고 짧게도 숨소리가 짙게 섞인 비명처럼 들렸다.

    정신이 몽롱해질 만큼 짙었던 살구꽃 향기가 상기되었고, 백주월의 의식이 전환되었다.

    눈앞의 풍경은 이미 지하 깊숙히 위치해 어두컴컴한 쉘터로 변해 있었다.

    무엇을 믿고 있었단 말인가?

    평생 누군가를 믿어본 적이 없었던 삶이었다. 구원과 용서 따위를 바란 적도 없었고, 감히 바랄 수도 없는 삶이었다.

    그런 백주월 자신이 정체도 모를 태양의 목소리를 맹신했다는 것이 우습지 않나?

    용서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개소리에 불과하다.

    이 세계가 마지막 기회를 얻을 연옥이다?

    차라리 지옥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타당할지도 모른다.

    백주월은 그 봄날의 첫 살인으로부터 무엇 하나 바뀌지 않았다.

    짐승은 짐승처럼 살아가야 하는 법이고.

    행복해 지고 싶다는 분에 걸맞지 않는 욕망을 품어서는 안 되는 법이다.

    이 비좁은 쉘터 안에 이미 인간은 없었다.

    용서받을 수도 없고, 행복해져서도 안 되는 짐승만이 두 마리뿐이다.

    상처투성이의 수컷 짐승들이 서로의 상처를 핥으며, 서로의 비참한 삶을 보듬으며 살아갈 수 있을까?

    흘러내릴 만큼 그득히 맺힌 눈물은 보이지 않을 것이다.

    토해낼 수 없을 만큼 잔뜩 응어리진 울음소리는 들리지 않을 것이다.

    이해받을 수도 없고, 이해해서도 안 되는 악의의 이유에 대하여 무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누자베스와 백주월은 그런 식으로 닮아 있었다.

    지독한 자기혐오와 증오와 원한과 회한과 책망과 애증과 집착과 부정할 수 없을 만큼의 동질감이 둘을 옭아매고 있었다.

    백주월은 마지막 남은 한 개비의 말보로를 입에 물었다. 말보로가 무슨 뜻이었는지 들어 본 기억이 있었다.

    어째선지 머릿속이 멍하여 떠오르지 않았지만. 백주월은 그저 생각할 뿐이었다.

    무슨 뜻이었던지 간에 불태워서 잿더미가 되어, 그 누구에게도 소중하게 대해질 리 없는 쓰레기가 될 뿐이라고 말이다.

    “더 남길 말은 없냐?”

    백주월은 누자베스를 향해 물었다.

    기묘하게도 감정의 동요는 크지 않았다.

    오히려 이제야 숨이 트인 것처럼 후련한 기분이었다.

    그를 속박하고 있던 알량한 희망을 빼앗긴 지금에 이르러. 백주월은 스스로의 본연에 가까워져 있었다.

    누자베스는 그런 백주월을 바라보며, 눈동자에 만족감이 깃들었다.

    ‘이제야 완성됐군. 당장 무대에 올려도 손색이 없을 만큼.’

    저것이야말로 누자베스가 구상하고 기획했던 진짜 ‘백주월’이다. 지금까지의 백주월은 독기가 빠진 시시한 사내에 불과했다.

    ‘이 세상의 만인 모두가 용서받더라도.’

    누자베스는 ‘에임페리얼 콜’을 발동시키며 백주월을 향해 한 걸음 내디뎠다.

    ‘나와 너만큼은 용서받아선 안 되잖아.’

    가장 추악한 짐승 두 마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고통 속에서 숨을 거둬야 한다.

    그것이 마땅히 지켜져야 할 정의였다.

    “나는 이 순간을 기다렸어. 용사님은 몰랐겠지만, 나는 줄곧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고.”

    푸른색의 균열에서 수십 자루의 냉병기가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스칼렛과의 유대 덕분에 고대 전쟁에 사용되었던 유물급 무기를 소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한 자루, 한 자루가 모두 리제가 사용하던 ‘아르테간트’와 동급의 무기였다.

    백주월 역시 손대중을 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그의 등 뒤에 펼쳐진 균열에서 대전차 미사일 ‘헬파이어’가 윤각을 드러냈다.

    “악의를 죽이는 건 언제나 또 다른 악의일 뿐이니까.”

    정의 따위가 끼어들 수 있는 투기장이 아니었다. 고대 병기 수십 자루와 헬파이어 미사일이 충돌하며 섬광과 열기를 흩뿌렸다.

    폭발의 여파로 진공 상태가 되었고, 직후 모든 것을 집어삼킬 만큼의 후폭풍이 휘몰아쳤다.

    만약 종말 이후의 지옥도가 펼쳐진다면, 이런 광경이 아닐까? 그런 감상이 들 만큼 처절하고도 선명한 전장이었다.

    폭음과 비명.

    증오에 젖은 목소리.

    흩뿌려지는 피와 살점.

    지면과 벽을 적신 혈액이 폭발의 열기에 증발하고, 쉴 새도 없이 무수한 선혈이 흘렀다.

    줄어들지 않는 것이라곤 서로를 향하는 살의와 적의뿐이다. 변하지 않는 것은 기세와 악의였다.

    몇 번이고 시간이 되감아졌다.

    마치 영원히 반복되는 지옥처럼 둘은 고통 속에서 몸부림쳤다.

    얼마나 긴 시간이 흘렀을지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만신창이가 되어갔고.

    털썩.

    결국 먼저 무릎을 꿇은 건 누자베스였다.

    무릎을 꿇은 채 비틀거리더니 이내 풀썩 쓰러져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절개된 목과 찢어진 입에서 검붉은 피가 왈칵왈칵 쏟아져 나왔다.

    더 이상 시간을 되돌릴 수도 없을 만큼 엉망이 된 것이다. 누자베스는 단검을 쥔 손을 바들거리며 들어 올리려 했지만.

    빠득!

    가느다란 팔목이 짓밟혀 으깨졌다.

    누자베스의 입에서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토해졌다. 이제는 몇 번이고, 수천수만 번을 들었던 비명 소리다.

    백주월은 그 옆에 쓰러졌고, 두 눈이 완전히 기능을 잃은 상태였기에 바닥을 더듬으며 누자베스가 떨어뜨린 단검을 찾았다.

    이내 단검을 찾아냈고, 역수로 쥔 채 쓰러진 누자베스의 위에 올라탔다. 백주월은 왼손으로 누자베스의 얼굴을 더듬었다.

    일순간 손끝이 입술에 스쳤고, 이내 턱선을 따라 목덜미에 닿은 순간.

    꾸우욱.

    “끄, 하아…… 하…… 끄윽!”

    백주월이 누자베스의 목덜미를 조르자,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몸을 비틀며 다리를 바둥거렸다.

    그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백주월은 단검을 쥔 손을 치켜들었다.

    몇 번이고 반복해 온 일상의 연속일 뿐이다. 백주월의 삶에선 이런 것만이 일상이었다.

    이제와서 새삼스럽게 감상에 젖을 일은 없었다.

    간단한 일이다.

    녀석이 조용해질 때까지 단검을 쑤셔 박을 뿐이다. 이후에 찾아오는 두려울 만큼의 적막은 오로지 백주월만의 것이었다.

    사샤를 죽인 남자는 약에 취해 있었다.

    그날 운이 좋게도 손에 넣었던 보습제병으로 남자의 머리를 후려 갈겼고. 나이프를 빼앗아 남자가 사샤에게 했던 짓을 똑같이 되갚아준 것뿐이다.

    새하얀 침대 시트 위에서 죽어 있던 사샤는 살구꽃처럼 보였다.

    “빼앗긴 만큼 갚아줄 뿐이다. 내가 나의 삶에서 배운 건 그런 것뿐이야.”

    백주월이 누자베스의 목덜미에 단검을 내리찍으려던 찰나.

    희미한 시나몬향과 달콤한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상체를 숙여 누자베스와의 거리를 좁힐수록 짙어지는 향기였다.

    축 늘어진 누자베스의 목에서 손을 떼며, 다시금 입술을 손끝으로 더듬었다.

    “…….”

    기묘한 퍼즐이 완성되고 있었다.

    비올리네와 빼닮은 호박빛의 눈동자.

    그리고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느꼈던, 부자연스러운 어깨와 골반의 움직임.

    퍼즐 조각이 말도 안 되는 결과물을 도출해 내려 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두 눈이 완전히 찢겨 실명되어 있는 탓이다. 오로지 촉각과 후각만으로 백주월은 필사적으로 그 사실을 부정할 단서를 찾아내려 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 속에서.

    백주월은 사샤를 난도질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아니야…….”

    그럴 리 없었다.

    기억에 혼선이 생긴 것뿐이다.

    어디까지나 진실이고, 어디부터가 허구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자신이 비올리네를 죽이려 하고 있는 것이라면? 지금까지 미치도록 죽이고 싶었던 마물이 비올리네라면?

    그런 의문이 뒤섞여 머릿속을 헤집고 있었다. 백주월은 터져 나올 것 같은 울음을 되삼켰다.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었고.

    그저 부드럽게 끌어 안아주며 ‘괜찮아’라고 다독여 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세상은 그런 사소한 다정함조차 백주월에게 허락해 준 적이 없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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