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짓는 플레이어-169화 (169/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169화

    살사를 추는 법(4)

    백주월은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온몸의 털이 곤두설 만큼 선명한 악의였다.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마물, 누자베스는 지금까지 처리해 온 잔챙이들과 격이 달랐다.

    ‘괴물 놈들 우두머리라고 나름 그럴싸한데.’

    눈을 가늘게 뜨며 누자베스와의 거리를 가늠했다. 거리는 고작 10여 미터 남짓. 근접전에 자신이 없는 것도 아니었지만, 백주월의 능력은 장거리 타격에 특화되어 있었다.

    만약 누자베스가 추격과 근접전에 특화된 마물이라면 손을 쓰기 까다로울 수밖에 없다.

    특히나 이런 비좁은 지하 공간이라면 시야의 사각으로 은폐할 수도 있으며, 장거리에서 일방적으로 타격하는 전술을 취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화력이 너무 강한 무기를 꺼냈다간 통째로 지하가 붕괴되어 매몰될 수 있지 않나?

    그야말로 백주월에게는 최악의 장소 선정이었고, 반대로 누자베스에겐 백주월을 상대하기에 최고의 장소였다.

    누자베스는 백주월을 지긋이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이쪽도 꽤나 바쁘거든. 용무가 없으면 비켜줬으면 좋겠다만.”

    “용무가 왜 없겠냐? 슬프게도 너 같은 괴물놈 찢어죽이는 게 내 일인데.”

    “세상엔 빌어먹을 직업이 너무 많군.”

    검을 뽑아들며 누자베스가 피식 웃었다.

    마치 용사가 지니고 있는 위압이 전혀 통하지 않는 듯 했다.

    일반적인 마물이라면 백주월에게 걸려 있는 태양의 가호에 짓눌려 덤벼들긴 커녕 도망치지도 못한 채 숨을 죽이는 게 고작이다.

    하지만 누자베스는 그런 백주월을 눈앞에 두고도 태연했다.

    “시간이 별로 없으니 잠깐만 놀아주지.”

    “나도 남자 놈하고 뒹굴면서 노는 취미는 없어. 금방 끝내줄게.”

    콰과과광!!

    어떻게 반응할 새도 없이 무반동포의 포탄 수십 발이 소환되어 누자베스를 향해 꽂혔다.

    전차의 장갑까지 꿰뚫을 정도의 위력을 갖춘 근대의 병기는 이쪽 세계에서 보자면 고위급의 마법처럼 보인다.

    아무런 영창도 없이 5서클 마법인 ‘블러스트 스피어’에 필적하는 위력을 지닌 공격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도 한 발이 아닌, 수십 발을 동시에 말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백주월을 상대하는 게 누자베스가 아니라 궁정의 수석마법사였다면, 마나 배리어로 한두 발 정도 방어해낸 후 폭사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누자베스는?

    이런 미적지근한 포격에 당할 만큼 약골은 아니었다.

    헬베르카의 혈액이 한계치까지 발화한 전쟁 군주이며, 동시에 용사와의 1:1 결투를 염두에 두고 진화를 거듭한 마물이다.

    게다가 상속 신분과의 유대 관계를 통해 고대의 혈술을 어느 정도 다룰 수도 있지 않나?

    오로지 이 순간만을 위해 갈고 닦아진 흉기였다. 백주월이 손대중을 한 공격에 맥없이 당해 죽었을 리 없었다.

    지하 공간을 가득 채운 폭연을 뚫고 누자베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자세를 낮춘 채 순식간에 도약하여 치켜 들었던 검을 내려쳤다.

    카앙!

    강철제의 전술 방패가 검격을 막아냈고, 누자베스가 뒤로 물러나려던 찰나.

    이번엔 백주월 쪽에서 거리를 좁혀왔다.

    ‘여리여리하게 생겨서는 완전 괴물놈이잖아.’

    백주월의 머릿속에서 ‘적당히’라는 단어가 삭제되었다. 어쩌면 이쪽 세계로 소환된 뒤 처음으로 전력을 다해 상대해야 하는 호적수일지도 모른다.

    쉬익!

    누자베스가 휘두른 검이 백주월의 머리카락 끝자락을 베어냈고, 검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해낸 백주월이 누자베스의 얼굴을 움켜쥐었다.

    스텔라가 용사에게 준 것은 고유 권능뿐만이 아니다. 반신에 필적할 만큼의 육체 능력이 베이스로 깔려 있었다.

    우드득!

    목뼈가 으스러지는 섬뜩한 소리가 울린 것과 동시에 누자베스의 몸뚱이가 내던져져 벽면에 처박혔다.

    콰과광!!

    그리고 누자베스가 내던져진 방향으로 다섯 발의 대인 유탄이 꽂혔고, 붉은색 화염과 폭연이 꽃을 피웠다.

    “크리스마스 선물은 마음에 드냐?”

    연기가 걷히며, 만신창이가 된 누자베스의 모습이 드러났다.

    목이 기괴한 각도로 꺾여 있었고, 양쪽 다리와 왼쪽 팔은 폭발의 충격으로 날아가고 없었다. 유일하게 남은 오른쪽 팔조차 넝마조각처럼 찢겨져 붉은 살점이 선명히 보였다.

    파열된 복부에서는 끈적한 혈액과 내장이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아직 완전히 숨이 끊어지지 않은 것인지 누자베스가 헐떡이며 핏물 섞인 날숨을 토해내고 있었다.

    “번거롭게 하기는…….”

    내출혈로 붉게 변색되어 있었지만, 누자베스의 저 눈동자 색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비올리네를 떠올리게 만드는 호박빛의 눈동자가 가증스러워 보일 뿐이었다.

    백주월은 혀를 차며 허공에서 권총을 한 정 뽑았다. 그리고는 누자베스를 향해 다가가 미간에 총알을 박아줄 생각이었다.

    여기서 숨을 끊어주는 것이 백주월이 베풀 수 있는 유일한 자비였다.

    저벅.

    발소리가 울렸고, 백주월과 누자베스의 거리가 한 걸음의 거리만큼 가까워졌다.

    저벅.

    다시 한 번, 발소리.

    이번에도 거리가 가까워졌고.

    저벅.

    슬슬 총구를 들어 올리려던 찰나.

    백주월은 자신과 누자베스의 거리가 다시 멀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저벅.

    의식하지도 않은 채 발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도 한 걸음 만큼 거리가 멀어져 있었다.

    ‘이게 무슨……?’

    끼기기기기긱!!

    시공이 뒤틀리는 굉음과 함께 누자베스가 웃음을 터뜨렸다.

    “벨 파르논의 시간추 조차도 원죄의 아버지의 의지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지.”

    누자베스가 이 자리에서 구현하려 하는 것은 큰 범주에서 보자면 흡혈귀의 ‘혈술’의 일종이었다.

    혈액을 이용하여 법칙에 간섭하는 능력이었지만. 혈액의 주인이 원초의 죄악을 상속받은 흡혈귀라면 혈술의 위력과 구현 범주 역시 상식을 초월하게 되는 법이다.

    메를로는 가장 순수한 ‘관념’에 간섭할 수 있는 유일한 흡혈귀다. 불변의 원리라고 불리는 시간의 항속성과 생사의 구분까지 조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와 유대를 맺은 누자베스 역시 동등한 능력과 기적을 발현시킬 수 있었다.

    누자베스의 몸에서 흘러나온 핏물이 고여 만들어진 웅덩이가 새빨간 빛을 발하며 광채를 내뿜었다.

    동시에 시간이 역재생되었다.

    세상이 마치 동영상을 빠르게 되감는 것처럼 보였다. 정확하게 백주월이 누자베스를 향해 손을 뻗는 순간까지 되감아졌고.

    “답례로 나도 선물 좀 준비해 봤어.”

    콰득!

    백주월의 손목을 낚아챈 누자베스는 주저 없이 머리로 백주월의 안면을 들이박았다.

    “큭!”

    붙잡힌 오른쪽 손목에서 기력이 급속하게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코에서 쏟아지는 피를 닦아낼 여유 따윈 없었다.

    반대편 손으로 권총을 한 정 꺼내려던 찰나.

    파앗!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한 충격파가 이 좁은 쉘터 안을 가득 채웠다.

    ‘권능이…….’

    침묵의 밤이 발동되며 백주월의 고유 권능 ‘에임페리얼 콜’이 캔슬되었다. 당혹감을 느낄 새도 없이 누자베스의 주먹이 날아들었다.

    퍼억!

    복부의 측면에 깊게 박힌 주먹은 창자를 통째로 철렁거리게 만들 만큼 위력적이었다!

    그 충격에 백주월의 상체가 일순 고꾸라졌지만.

    “이 개자식이……!”

    빠악!

    백주월은 어금니를 악물며 버텨냈고, 그대로 누자베스의 턱에 어퍼컷을 꽂았다.

    누자베스의 시야가 새하얗게 물들었고, 중심을 잃고 휘청였다. 과장을 더해 코끼리조차 한 방에 기절시킬 수 있을 정도의 펀치였다.

    빠악, 빡!

    기세를 몰아붙이듯 백주월이 누자베스의 안면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주먹이 휘둘러질 때마다 핏물과 부러진 치아가 허공에 흩뿌려졌다.

    빠악!

    크게 휘두른 주먹에 맞은 누자베스가 뒤로 넘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상체가 완전히 백주월의 시야에서 사라진 순간.

    터엉!

    얼굴뼈가 산산이 부서진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위력적인 발차기가 백주월의 측두부를 강타했다. 누자베스가 쓰러지기 직전 몸의 반동을 이용해 크게 먹인 것이다.

    처절한 난투 끝에 둘은 거리를 벌린 채 쓰러졌고, 상대보다 먼저 일어나려 필사적으로 바둥거렸다.

    몇 번이고 몸에 힘이 풀려 쓰러졌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누자베스와 백주월은 서로를 시야에서 놓치려 하지 않았다.

    표독스러운 시선이 교차했고, 핏물이 번져 새빨갛게 물든 시야에서 명확한 적의가 깃들었다.

    둘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저것만이 자신과 닮은 유일한 적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창자가 뒤틀릴 만큼 끔찍하고 혐오스러운 적이다. 동족혐오가 아닌, 자기혐오와 닮은 분노와 증오에 몸이 떨렸다.

    오늘 당장이 아니더라도.

    ‘저런 것’과 같은 하늘 아래에서 숨을 쉬는 걸 피차 용납할 생각은 없었다.

    “빌어먹을, 볼수록 역겨운 낯짝이야. 납탄 좀 박아주면 봐줄만 할 것 같은데.”

    먼저 일어난 건 백주월 쪽이었다.

    여전히 누적된 충격이 가시지 않은지 비틀거리는 모습이었지만, 침묵의 밤의 지속 시간도 끝난 상태다.

    균열에서 권총을 한 정 꺼내 주저 없이 총구를 누자베스에게 향했다.

    탕탕, 타앙!

    총구에서 불이 뿜어졌고, 발포된 총탄이 정확하게 누자베스를 향해 날아들었지만.

    와르륵!

    어둠의 뒤편에서 달려든 스켈레톤 병사들이 몸으로 총탄을 막아냈다.

    “이런 치졸한 새끼가…….”

    “하…… 하핫! 치졸이고 뭐고 원래 이게 내 스타일이야.”

    누자베스는 스켈레톤 병사들을 방패처럼 삼아 뒤편에 숨었다.

    “여기 있는 마물들은 생산된지 얼마 안 된 것들이라. 부수지 않고 교단의 소생세례를 받으면 인간으로 되돌아 올 수 있거든. 같은 인간을 죽일 셈이 아니라면 흉흉한 물건은 내려놓지그래?”

    누자베스는 짐짓 백주월을 위협하듯 그렇게 말했다. 스켈레톤 병사를 죽인다는 건 살인과 다를 바 없다.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백주월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딴 걸 신경 쓸 놈처럼 보였냐?”

    콰앙!

    대인유탄 한 발이 날아와 꽂히기가 무섭게 뼛조각이 팝콘처럼 튀어 올랐다.

    살인에 대한 거부감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다. 게다가 누자베스는 확실히 위험한 냄새가 나는 마물이다.

    저런 위험한 마물을 놓칠 바에는 소수의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이 자리에서 처리해야만 했다.

    다시 한 번 균열에서 대인유탄이 뽑혀져 나왔고, 백주월이 손끝으로 타격 지점을 지정하려던 찰나.

    삐거덕거리며 후열에 있던 스켈레톤 병사들이 새롭게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백주월의 눈에 똑똑히 보였다.

    뇌리에 기억된 하녀복이다.

    엉망진창으로 찢어져 있었지만, 저 하녀복은 분명히 기억에 존재했다. 어째서 저 스켈레톤 병사가 그 옷을 입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게다가 백주월의 피어스로 만든 목걸이까지 목에 걸려 있지 않은가?

    노골적인 정황상의 증거가 절망적인 간접 추론을 유도하고 있었다. 백주월이 치솟는 헛구역질을 되삼키며, 그 자리에서 얼어붙자.

    누자베스가 백주월의 시선을 통해 상황을 파악한듯 입을 열었다.

    “아 혹시 이 녀석하고 아는 사이야? 과연…… 이 인간 계집이 말하던 용사가 네놈이었나 보군.”

    누자베스는 재미난 이야기라도 떠오른 것인지 킬킬 웃으며 말했다.

    “용사님이 구하러 와줄 거라고 얼마나 시끄럽던지. 용사님, 용사님 하며 울부짖던 모습이 꽤나 볼만했어. 정신나간 미친년이라고 생각했는데 진짜 용사가 있었네? 그런데 어쩌나…… 언제나 바쁘신 용사님께서 약속 시간에 너무 늦어서 내가 좀 놀아주다가 이 꼴이 됐는데.”

    “비올리네…….”

    누자베스는 하녀복을 걸친 스켈레톤 병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비열한 웃음을 머금었다.

    “이름이 비올리네였구나. 다행이네, 비올리네. 용사님하고 다시 만나게 돼서!”

    누자베스는 비올리네라고 불린 스켈레톤 병사의 뒤에 바짝 붙어 숨었다. 쏴볼 테면 쏴보라는 듯이 말이다.

    “아참! 이러면 안 되는 건 아는데. 나중에 삼각관계 같은 게 되면 골치 아프니까 미리 말해줄게.”

    따악.

    누자베스가 손가락을 튕기자 블러드 골렘 한 마리가 앞으로 나섰다.

    “용사님도 인사해. 용사님의 구멍동서 부머 씨야.”

    누자베스가 미친 사람처럼 유쾌한 웃음을 토해냈다.

    하지만 백주월에겐 들리지 않았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지워져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고, 그 무엇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비올리네가 마지막 순간까지 얼마나 무서웠을지, 얼마나 아팠을지, 얼마나 자신을 기다렸을지, 구해주러 오지 않았던 자신을 얼마나 원망했을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가까스로 떠올려 보는 게 고작이었다.

    가까스로 토해낸 날숨의 끄트머리에 탄식이 맺혀 떨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