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짓는 플레이어-167화 (167/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167화

    살사를 추는 법(2)

    에르멜이 책상 밑에 달린 서랍장에서 종이 뭉텅이를 발견한 건 우연의 일치였다.

    누자베스가 돌아오기 전에 먼저 정원으로 돌아와 마지막 채비를 하려던 찰나였다.

    “뭐야 이게?”

    에르멜은 눈을 찌푸리며 종이 위에 휘갈겨진 문자를 천천히 훑어 봤다. 첫장엔 공용어와 알 수 없는 문자열이 뒤섞인 지리멸렬한 문장이 나열되어 있었다.

    드문드문 읽을 수 있는 구절만 읽던 중, 에르멜은 지난 밤 이 책상 앞에 앉아서 무언가를 끄적이던 누자베스의 모습을 떠올렸다.

    ‘믿기 힘들겠지만 내가 이래뵈도 소설가였거든. 여기서 겪은 일을 기록해 뒀다가 출판하면 베스트셀러 확정 아니겠냐?’

    그런 농담을 침대에 누워 들었던 것 같았다. 에르멜은 당연히 누자베스의 시시한 농담이라고 생각했지만, 종이에 적힌 문장을 보니 비교적 진담이었던 모양이다.

    뒷장으로 넘어갈 수록 공용어의 비중이 높아졌고, 에르멜도 어느 정도 내용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마침 에르멜과 함께 수도로 넘어와 타르틸리엇 탈취를 준비하는 씬이 적혀 있었다.

    “진짜 더럽게 못 쓰네…… 진짜 그 녀석이 쓴 거 맞아?”

    아무리 좋게 봐줘도 중학생 정도의 어린애가 휘갈긴 습작 수준이었다. 어이 없는 웃음을 머금은 채 누자베스의 소설을 읽던 에르멜의 얼굴에 웃음기가 가셨다.

    솔직히 말해 소름이 돋을 정도다.

    행동과 현실이 도저히 맞물리지 않는다는 괴리가 기묘한 공포를 자아냈다.

    이런 실력으로 진짜 소설가였을 리도 없고, 설령 소설가였다고 해도 세간에서 인정받긴 커녕 밥벌이도 불가능할 정도 아닌가?

    점점 문장은 붕괴되어 갔고, 오로지 공용어로 쓰였지만 제정신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단어의 나열들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에르멜이 세 번째 장을 넘긴 순간.

    “…….”

    죽이고 싶지 않아.

    그렇게 적혀 있었다.

    죽고 싶지 않아.

    그런 문장이 흘러내리듯 적혀 있었다.

    죽이고 싶지 않아.

    죽고 싶지 않아.

    죽이고 싶지 않아.

    죽기 싫어.

    죽이고 싶지 않아.

    죽고 싶지 않아.

    죽이고 싶지 않았어.

    죽고 싶지 않아.

    죽이고 싶지 않아.

    죽고 싶지 않아.

    …….

    마지막에 이르러선 ‘죽어’인지 ‘죽여’인지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엉망진창으로 써갈겨진 단어만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마치 우주의 한복판에서 표류하고 있는 우주비행사가 구조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들어주는 이도 없고, 누구도 들을 수 없는 비명처럼 들리기도 했다.

    ‘하이브 마인드가? 죄책감을 지닐 수 있다고?’

    하물며 죽음에 대한 공포라니.

    하이브 마인드는 합리성을 기반으로 행동하는 합성 생물이다. 그런 생물에게 죽음이란 그저 존속 불가능한 상태를 의미한다.

    인간처럼 필요 이상의 공포를 지니고 있지도 않았고, 죄책감이나 자비를 지니지 못했기에 전쟁 수행에 적합한 생물로 선별된 게 아니던가?

    하지만 누자베스는 마치 어울리지 않는 가면을 뒤집어 쓴 어린애처럼 느껴졌다. 하이브 마인드의 가면을 뒤집어 썼지만, 공포와 죄책감에 울부짖고 있는 것이다.

    ‘에르멜 언니는 인간의 영혼을 지닌 하이브 마인드가 있다는 얘길 들으면 믿을 수 있겠나요?’

    밀리아의 편지 내용 중 일부가 떠올랐고.

    에르멜은 깊은 한숨을 내쉰 뒤, 누자베스의 원고를 다시 서랍장에 넣어놨다.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진 인간은 신앙과 믿음으로 성취되는 구원에 맹목적으로 매달리게 되는 법이다.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인간은 순수한 신앙만으로 치유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구렁텅이의 밑바닥까지 추락한 인간은 신앙조차 염세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렇게 된 인간은 다른 이들을 자신과 같은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뜨리기 위해 혈안이 될 뿐이었다.

    “또 저를 개좆같은 시험에 들게 하시네요, 스텔라 님.”

    에르멜은 씁쓸한 웃음을 삼키며 머리를 긁적였다. 마치 성녀의 자격을 증명해 보라고 태양이 윽박지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을 뿐이다.

    * * *

    “브리핑을 시작하지.”

    태양의 정원에 돌아온 직후 비약의 효과가 딱 맞게 끝났다. 하마터면 메이드복을 입고 거리를 활보하는 여장 성벽의 전쟁 군주라고 소문이 날 뻔한 거 아닌가?

    만약 그런 소문이라도 났다간 칭호도 변경될지 모른다. 아리카의 드랙퀸 누자베스 변경백이라던가…… 젠장, 알게 뭔가? 나는 타르틸리엇 탈취를 위해 용사하고 키스도 한 놈인데.

    말해두지만 불가항력이었다.

    거기까진 예상하지도 않았고, 예상할 수도 없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그 이상은 없었지만!

    그래, 마치 이건 살을 주고 뼈를 취하는 고도의 노림수란 말이다. 논개도 왜장하고 동귀어진 하기 전에 두세 번은 박혔을텐데 이 정도면 값싸게 넘어간 거다.

    ……그러니까 논개가 왜장의 칼에 박혔다는 말이다. 오해하지 좀 마라.

    “브리핑한다면서 왜 기분 나쁘게 얼굴 붉히고 지랄이십니까?”

    “시끄러워! 에르멜 너는 모를 거다. 내가 이번 작전을 위해 얼마나 큰 희생을 감수했는지!”

    “뭐야, 설마…… 청년막 개통당했어?”

    “아냐! 아니라고! 큰 희생이긴 한데, 그 정도로 큰 희생은 아니었어!”

    “아! 용사랑 함께 있을 때까진 여자의 몸이었지?”

    “아니야! 그 이상 말하면 코코아페이퍼 검열팀의 일거리가 늘어나니까 제발 그만해.”

    “그런데 얼굴이 왜 붉어지냐고.”

    “…….”

    솔직히 고백하자면.

    논개가 왜장의 크고 두꺼운 칼에 거칠게 박히는 장면을 조금 상상하고 있었다.

    다들 납득했다면 어서 본론으로 넘어가자.

    “병력의 준비는 완료됐어. 뭐, 태양의 정원과 부속 시설인 의료원의 이변을 누군가가 조만간 눈치채겠지만. 당장이 아니라면 우리의 문제가 되진 못하겠지.”

    잠깐 마인드 모드로 집결시켜 놓은 부대 병력과 정보를 읽어들였다.

    [확장형 제1부대 : 페오락시아(헬베르카)]

    -부대장 : 부머(블러드 골렘)

    -부대원 : 스켈레톤 병사 280체, 블러드 골렘 5체, 하급 흡혈귀 10체

    -정보 : 이 지옥의 병대는 헬베르카의 정당한 부름에 응하여 징집되었습니다. 스켈레톤 병사는 유대의 효과로 일정 명도 이하에서 불사성을 지닙니다. 블러드 골렘은 흡혈귀의 수혈로 자연회복 능력이 일시적 상승할 수 있습니다.

    아주 우수한 정예 병대는 아니지만, 이번 탈취 작전에서 그럭저럭 요긴하게 써먹을 정도의 완성도는 되었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타르틸리엇이 보관되고 있는 창고까지 이어지는 지하 수도만 뚫고 들어갈 수 있으면 되니까.

    내가 걸어놓을 수 있는 버프는 모조리 걸어놓았으니 통상적인 스켈레톤 병사보다는 쓸만할 것이다.

    그리고 타르틸리엇 탈취 외의 서브 미션도 미리 준비를 해놔야겠지.

    브리핑 전에 스켈레톤 병사 중 조그마한 놈을 한 마리를 미리 데리고 왔다.

    스켈레톤 병사에게 지금까지 내가 입고 있던 하녀복을 대충 걸쳐주자, 에르멜이 뭘 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에르멜을 위해 적당히 설명이나 해주자.

    “지금부터 얘가 비올리네야.”

    “여기 멍청하게 있다가 누자베스 너한테 잡혀서 스켈레톤 병사가 됐다는 설정으로?”

    “그래, 해골되기 전에 험한 꼴 좀 당하고.”

    하녀복의 가슴 부분을 붙잡아 거칠게 찢은 후 백주월의 피어스로 만든 목걸이를 걸어줬다.

    에르멜은 재밌는 걸 구경하는 사람처럼 유심히 바라보다 뒤늦게 떠오른 건지 의견을 냈다.

    “팔꿈치 부분을 돌벽에 문질러서 찢어놓으면 어때?”

    “천재냐…….”

    에르멜의 의견에 순순히 따라 하녀복의 팔꿈치 부분도 벽에 문질러 찢었다. 넝마 조각이 된 하녀복을 걸치고 있는 해골 병사는 멍하니 방안을 배회하기 시작했다.

    “가엾은 비올리네…… 살해당하기 직전까지 애타게 찾던 용사님은 결국 와주지 않았구나.”

    나는 백주월에게 가르쳐 줄 뿐이다.

    너는 그 무엇도 지킬 수 없다고 말이다.

    서있는 위치가 달라졌다고, 태생적인 본질마저 달라질 수는 없다고 말이다.

    “그 누구도 누군가를 구원할 수 없어. 그저 함께 몰락할 뿐이잖냐.”

    용사라는 것은 고작 그런 존재다.

    무지하고, 연약하여 스스로의 삶조차 똑바로 바라볼 수 없는 백성들을 위해 존재하는 허구의 관념일 뿐이다.

    나는 그 당연한 사실을 새삼스럽게 다시 가르쳐줄 뿐이다. 그런 역할을 맡은 것뿐이다.

    스스로의 입술을 손끝으로 더듬으며 의식을 전환시켰다.

    “자, 그럼 슬슬 몸 비틀러 가자.”

    짙은 담배 냄새에 뒤덮여 그 누구에게도 상기될 수 없을 만큼 고약한 추억이 될 뿐이라면. 깔끔하게 불태워지는 편이 나았다.

    * * *

    “아리카의 엘베제 누자베스 변경백. 현재 판데믹급의 경계 경보가 걸려 있는 전쟁 군주입니다. 중부의 강호들과 비교하자면 터무니 없이 작은 규모지만, 세력의 확장세가 이상하리만큼 빠릅니다.”

    “엘베제라면 일전에 있었던 헬베르카의 혈액 도난 사건에 연관된 게 아닌가?”

    “카타쿨라 남작은 처리되었네. 사후 처리 보고가 있었으니 틀림없지.”

    “식별 네임은 지정되었나?”

    “재난방무청에선 7차 쉬라와이흐를 육군총령원에선 필록세라를 주장하고 있습니다만, 아직 의견 차이가 좁혀지지 않은 모양이라…….”

    “교단에서는 ‘3차 키프로스’를 밀고 있는 듯 하다만.”

    “키프로스라니. 꽤나 살벌한 이름을 지어주고 싶어하는군! 그 정도로 대단한 하이브 마인드인가?”

    어느 정도 위세를 갖춘 전쟁 군주에게는 식별 네임이 붙는다. 왕국군에서 하이브 마인드들을 구분하기 위한 명명법이다.

    모니카는 웅성거리는 군의 장성들 사이에 비스듬히 앉아 있는 백주월을 바라봤다.

    평소에도 이런 탁상 행정에 큰 관심을 보이진 않았지만, 오늘은 유독 붕 떠있는 느낌이었다.

    ‘고작 천민 계집 하나에 저렇게나 정신이 팔려 계시다니. 역시 오늘 처리해두는 게 정답이었을지도 모르겠어.’

    성처녀의 첩보원일지도 모르는 비올리네를 처리하기 위해 암살자들을 미리 파견해 놨지만.

    백주월에게 들킨 덕분에 결국 실행까지 할 수는 없었다. 만에 하나 백주월의 심기를 크게 건드리기라도 했다간, 그를 제어할 수단은 전무했으니까.

    백주월은 류시혁과 마찬가지로 스텔라에게 고유한 권능을 하사받은 용사다.

    단신으로 수도의 방위군 전부를 초토화시키는 것도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를 만큼 강대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 누자베스 제압의 적임자로 용사님께서 신탁을 받으셨습니다. 각 부처의 적극적인 협조와 협력 부탁드립니다.”

    모니카는 자리에 모인 늙은이들에게 일방적으로 통보하듯 말했다. 백주월은 여전히 흥미가 없는지 팔짱을 낀 채로 눈을 감고 있었지만 말이다.

    “이거야 원…… 수지타산이 안 맞는군. 왕정파의 용사는 마왕 토벌을 목전에 두고 있지 않나? 고작 전쟁 군주 하나 잡아봤자…….”

    그 순간 백주월이 눈을 떴다.

    시선이 마주친 것만으로도 입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을 만큼 섬뜩한 눈빛이었다.

    평소의 성격 같았으면 멋대로 떠들고 있는 저 늙은이의 머리통을 케찹으로 만들어 놨겠지만.

    ‘비올리네는 용사님이 저랑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 누구도 용사님께 사람을 사람으로써 대하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았을 뿐인 걸요. 용사님을 믿고 있으니까, 너무 조급해하지 말아요.’

    사람과 사람의 관계라.

    백주월은 비올리네의 얼굴을 떠올리며 화를 삭이듯 크게 숨을 내쉬었다.

    “수지타산이 안 맞는 용사라 미안한데. 이대로 잠자코 있는 것보단 뭐라도 하는 게 낫지 않겠냐?”

    백주월은 의자에서 일어나, 자리에 모인 늙은이들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백주월의 평소 성격을 알고 있는 모니카가 사뭇 놀란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주월은 최대한 공손한 어조로 말했다.

    “이쪽도 나름대로 노력해 볼 테니까, 잘 부탁한다.”

    달라지고 싶었다.

    과오를 지워낼 수는 없었지만, 지금 이 순간부터라도 조금씩 바뀌고 싶었다.

    다시 비올리네와 만나게 되었을 때.

    조금 더 솔직하게 기뻐하고, 조금 더 순수하게 웃을 수 있는 인간이 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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