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짓는 플레이어-166화 (166/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166화

    살사를 추는 법(1)

    키예스 서무장의 방에서 잠깐 볼일을 보고 나온 후 곧장 에르멜의 방으로 돌아왔다.

    땀에 젖어 흐트러진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안으로 발을 들이자, 에르멜이 창틀에 걸터앉아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우리 애들을 몇이나 망가뜨릴 생각이야? 벌써 여덟 명이나 정신이 붕괴돼서 의료원 지하 병실에 수감되었다는데.”

    “어쭙잖은 신앙심 때문에 실패작이 좀 생겼을 뿐이야. 빈큐럼에 저항하려고 하니까 그런 식으로 폐인이 되는 거지.”

    스텔라 교단의 성직자들은 신앙심을 바탕으로 한 강인한 정신력을 지니고 있었다. 흡혈귀의 매혹과 빈큐럼에 상당한 저항력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다.

    어쭙잖은 흡혈귀였다면 태양의 정원에 상주하고 있는 수녀들을 타락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유대를 맺고 있는 흡혈귀는 나르시안의 직계손이자 상속 신분인 스칼렛이다. 어지간한 정신력으로 버티려고 해봤자 폐인이 될 뿐이었다.

    ‘스칼렛이었으면 좀 더 능숙하게 해냈을 것 같지만.’

    키예스 서무장을 완전히 내 노예로 만들기 전에 몇몇 애들로 연습을 해본 것뿐이다.

    미안하게도 살짝 실패한 덕분에 평생 광인으로 살게 된 애들이 조금 있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키예스 서무장을 완전히 노예, 아니 블러드 돌로 만드는데 성공했으니 오케이 아니겠나?

    엘더들의 고어로 블러드 돌은 피걸레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이쪽의 목적은 흡혈이 아니라 완전한 복종 상태였다.

    “키예스 서무장이 완전히 피의 결속에 굴복했다. 그리고 성공적으로 빈큐럼에 걸린 아이들이 20여 명. 내일 동이 틀 때쯤이면 태양의 정원은 온전히 내 소유가 되겠군.”

    “그리고 정원의 부속 시설인 의료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부상병들은?”

    “스켈레톤 병사로 재취업 시켜줘야지.”

    상해보험금도 안 나오는 왕국군에 있어 봤자 백수밖에 더 되겠나? 부상병 형씨들도 급성장 중인 스타트업 기업에 이직할 수 있게 되어 모두가 해피겠지.

    에르멜은 쓴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너는 지옥에 갈 거야, 누자베스. 이번 일은 자애로운 스텔라 누님도 용서 못 할 걸?”

    “그래? 그럼 옆자리 맡아 놓을게. 사이 좋게 사탄 뿔이나 턱 빠지게 빨아 보자고.”

    테이블에 놓인 목함을 열어 담배 한 개비를 꺼내들었다. 그대로 입에 물지 않고, 잠시 손가락 사이에 끼운 채. 오늘 줄곧 함께 있었던 백주월의 얼굴을 떠올렸다.

    “…….”

    어쩌면.

    상처입은 채 오물을 뒤집어 쓴 짐승끼리 서로의 상처를 핥아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주 늦은 건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서로가 서로와 닮은 만큼 뻔뻔하게 서로를 용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잠깐 그런 헛소리 같은 주저를 품었고, 이내 농담조차 되지 못하는 잡념이었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가 출발선은 같았을지 몰라도, 내가 먼저 너무 멀리까지 와버렸네.’

    이제 남은 건 백주월이 내가 도달한 곳까지 따라올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것뿐이었다.

    백주월의 피어스를 손끝으로 더듬으며 의식을 전환시켰다.

    “용서받을 권리 따위 엿이나 먹으라고 해.”

    희뿌연 담배 연기와 함께 망설임을 토해냈다. 나는 작가로서, 혹은 전쟁 군주로서 해야 할 일을 끝마칠 뿐이었다.

    * * *

    태월의 18일.

    타르틸리엇 탈취 작전의 개시일이었다.

    글로레나 왕조가 지니고 있는 비장의 카드이자 결전 병기, 타르틸리엇이 제3세력의 손아귀에 떨어진다는 건.

    바체트 열도에서 줄곧 유지되던 균형의 붕괴를 의미했다.

    비올리네는 먹구름이 껴서 우중충한 시가지를 걸으며 해야 할 일들을 하나씩 머릿속에서 정리해 나갔다.

    곧 비가 쏟아질 것 같은 하늘이었다.

    건기의 끝자락이 머지 않았음을 알리듯 도시의 풍경은 온통 잿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비올리네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잿빛의 거리를 걸었다. 품에는 백주월에게 마지막으로 건내 줄 종이 봉투를 안은 채로.

    발을 내딛을 때마다 구두굽 소리가 청명하게 울렸다. 일정한 리듬을 머금은 발소리는 어쩌면 길로틴의 절삭음처럼 들린다.

    오래된 기억과 희미하게 남아 있던 인간성의 선단을 잘라내는 단두대의 소리다.

    그런 식으로 다듬어져, 그렇게 인간의 부스러기처럼 남아, 누자베스는 자신이 무엇이었는지 떠올리길 포기하게 되었다.

    언제부터?

    잘 모르겠다.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류시혁에게 모든 걸 부정당하여 스스로를 잃게 된다는 공포에 휩싸였을 때부터 였을까?

    조금 더 이전일지도 모른다.

    자신이 빚어낸 소녀가 부숴져 가는 것을 방조하며, 그녀가 용서받지 못한 채 숨을 거뒀을 때일까?

    조금 더 이전일지도 모른다.

    타인의 온정과 호의에 거짓말로 답하며 그들을 기만하려 했던 게 문제일까?

    조금 더 이전일지도 모른다.

    스스로의 손으로 인간을 죽였을 때?

    조금 더 이전일지도 모른다.

    영문도 모른 채 이 세계로 끌려왔던 건?

    조금 더 이전일지도 모른다.

    비올리네의 의식이 내면 깊숙한 곳으로 향하려 하는 것과 반대로, 구두굽 소리는 기억과 죄의식을 지워나갔다.

    백주월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찻집에 가까워질 수록 비올리네의 마음 속을 흐리던 의혹의 안개가 희미해졌다.

    ‘백주월 너는 내 최후의 걸작이야.’

    최초의 졸작이었던 류시혁에게 부정당해 생겨난 상처를 백주월이라면 이해해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만들어진 캐릭터였으니까.

    가장 순수하고 치졸할 악의에 공감해 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었다.

    ‘하지만 아직 조형이 완성된 건 아니었으니, 내가 책임을 지고 완성시켜 줘야겠지.’

    누자베스가 이 세상을 그려낸 작가였기에 품을 수밖에 없는 책임감이었다. 그리고 완성된 백주월은 류시혁에 대한 훌륭한 견제 수단이 될 수 있었다.

    전쟁 군주로써, 혹은 작가로써 어느쪽이든 간에 누자베스는 백주월이라는 캐릭터를 완성시켜야만 했다.

    딸랑.

    찻집의 출입문이 열며 안으로 발을 들이자, 오늘도 언제나 앉아 있던 자리에 백주월이 보였다.

    비올리네는 방긋 웃으며 백주월이 앉아 있는 테이블 쪽으로 다가갔다. 백주월도 오늘은 비올리네가 찾아올 줄 몰랐던 것인지 조금은 놀란 눈치였다.

    “사람 놀래키는 재주도 있었네. 오늘부터 바빠질 거라고 하지 않았냐?”

    퉁명스럽게 내뱉는 백주월의 표정에서 희미한 반가움이 묻어났다.

    “오후까진 시간이 좀 남아서요. 아! 그리고 이거 용사님이 맛있다고 해주셔서 또 만들어 봤어요.”

    “너무 달아서 치과 의사를 찾아 봐야겠다고 한 적은 있지만, 맛있다고 한 적은 없어.”

    비올리네가 가져온 종이봉투를 소중하게 받아들며 백주월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빵은 여전히 달았다. 달콤함에 내성이 전혀 없는 백주월이 삼키기엔 말이다.

    비올리네가 가져온 빵을 오물오물 씹으며 백주월은 생각했다. 지금까지 너무 달아서 토해낸 달콤함이 얼마나 많았을지.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입안에 든 빵을 삼켰다.

    빵을 만들며 들인 시간과 희미하게 남은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백주월은 묵묵히 빵을 삼키고 있는 자신을 생글생글 웃으며 바라보고 있는 비올리네를 흘깃 쳐다봤다.

    뭔가 말해주길 기대하고 있는 걸까?

    백주월은 멋쩍은 듯 냅킨으로 입가를 적당히 닦아내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한 마디를 뱉어냈다.

    “그럭저럭…… 먹을 만은 하네.”

    “정말요?”

    “빌어먹을, 내가 무슨 맛 따지면서 먹는 샌님이냐. 이런 건 배만 채우면 그만이야.”

    백주월이 퉁명스럽게 쏘아붙이며 고개를 홱 돌렸다.

    소중하게 대해진 적이 없었기에, 누군가를 소중히 여기는 방법 역시 모를 수밖에 없었다.

    백주월에겐 비올리네와 함께했던 시간이 외줄타기처럼 위태롭게 느껴졌을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혹여나 자신의 무심한 언행이 어떤 식으로 비올리네를 상처 입힐지 모르는 일 아닌가?

    그런 식으로 불안해하는 백주월을 안심시키듯 비올리네는 활짝 웃으며 솔직히 기뻐하는 모습이었다.

    “용사님이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기뻐요. 사실 저 요리 담당이 아니라, 고작 이런 걸로 용사님에게 보답이 될지 많이 불안했거든요…….”

    “그런 것치고는 실력이 괜찮네.”

    “아, 전부 다 드셔도 돼요! 오늘은 용사님 드리려고 가져온 거니까…… 저는 안 먹어도 괜찮아요.”

    “돼지도 아니고 이걸 다 어떻게 먹냐.”

    백주월은 빵을 하나 더 꺼내 반으로 나눈 후 비올리네에게 내밀었다. 비올리네가 빵을 받으려는 순간 백주월은 몇 가진가 새로운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첫 번째로 어젯밤 자신이 준 피어스를 노끈에 엮어 목걸이처럼 목에 걸었다는 것.

    그리고 두 번째는.

    “사실 설탕이 귀해서 용사님 드린다는 핑계가 아니면 도저히 못 만들거든요!”

    “완전히 내 이름 팔아서 자기 배 채우고 있었던 거잖아.”

    “죄, 죄송해요…… 그치만 이 빵 맛있잖아요? 용사님도 맛있다고 그랬잖아요?”

    “맛있다고는 안 했다. 그리고 기왕 이름 팔 거면 고작 설탕 말고 더 값어치 있는 걸 해먹던가.”

    “사실 버터도 썼어요…….”

    “평소에 도대체 무슨 빵을 먹고 사는지 궁금해질 정도잖냐.”

    백주월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이렇게나 순수한 안도감을 주는 사람이 또 있었던가?

    처음으로 마음을 놓고 웃음을 보일 수 있는 시간이었고, 그런 시간일수록 빠르게 흐르는 법이었다.

    솨아아아아아.

    우기의 시작을 알리듯 잿빛의 거리에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거대한 커튼이 온 세상을 뒤덮은 것처럼 느껴질 만큼 기세 좋은 호우였다.

    비올리네는 창밖을 바라보다 문득 떠오른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슬슬 돌아갈게요. 늦으면 또 혼날지도 모르니까.”

    비올리네가 베시시 웃으며 그렇게 말했지만. 백주월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비올리네의 얼굴을 올려다 봤다.

    오늘 아침 그의 서포터이자 감시역으로 붙은 ‘모니카’의 보고가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출신 성분이 불분명한 천민은 가장 더러운 일에 쓰이기 마련입니다. 성녀 시성식을 앞두고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지 않습니까? 천민 계집을 용사님께 접근시키다니, 너무 뻔해 헛웃음이 나올 정도입니다.’

    백주월은 창밖에서 느껴지는 기척을 하나씩 헤아렸다.

    ‘다섯 놈.’

    모니카의 휘하에서 쓰레기를 청소하거나 잡무를 담당하는 놈들일 것이다. 그래, 대의라는 얼토당토 않은 걸 믿는 놈들의 눈에 비올리네는 하찮은 천민 계집에 불과했다.

    ‘배신자 이마누엘이 모든 걸 실토했습니다. 감히 용사님의 행적을 감시하기 위해 그런 버러지를 붙여 놓다니. 심문을 통하여 마땅한 죗값을 치루게 하겠습니다. 이번에 용사님은 그저 가만히 계시면 됩니다.’

    가만히 있을 수 있을 리가 없었지만.

    비올리네가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한 후 출입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선 순간.

    백주월이 뒤를 쫓아가 비올리네의 손목을 붙잡았다. 어떻게 반응할 수 없을 만큼 순식간이었다.

    “예, 어? 용사님……?”

    비올리네의 손을 끌어당기며, 허리를 반대편 팔로 부드럽게 감싸 끌어 안았다. 빗줄기 속에서 입술이 포개졌고, 비올리네는 까치발을 든 채 몸을 파르르 떨었다.

    눈을 꼭 감고 있는 비올리네와 반대로, 백주월의 시선은 빗줄기 너머를 향하고 있었다.

    시선은 명백한 경고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굵직한 빗방울도 채 가릴 수 없을 만큼 섬뜩한 살의였으니까.

    비올리네는 혀가 얽혀오는 와중에도 유쾌한 웃음을 참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그렇게 소중히 여기던 게 부서져야만 너는 완성되겠지, 주월아?’

    이번엔 성공할 수 있었다.

    류시혁은 실패했지만, 백주월 만큼은 자신과 같은 구렁텅이 속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황홀한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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