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짓는 플레이어-165화 (165/210)

던전 짓는 플레이어 165화

태양의 영지에서(4)

백주월.

고려계 러시아인이라는 설정이다.

한국어와 중국어 그리고 러시아어를 수준급으로 구사할 수 있다. 그리고 그에게 ‘백주월’이라는 이름을 선물한 건 중국인 양아버지였다.

한자를 그대로 풀이하자면 ‘한낮의 달’이 된다.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

존재할 필요가 없는 것.

한낮에 떠 있는 달이란 그런 의미일 뿐이다. 어느쪽이든 양아들의 이름으로 삼기엔 취미가 고약한 이름이다.

물론 내 관점에서 그렇게 해석된다는 것뿐이고, 실제의 의미는 ‘와룡과 봉추와 백주월’이라는 구절에 가까웠다.

힘을 숨긴 채 때를 기다리는 주역.

그런 뜻으로 지어준 이름이 아닐까 싶다.

‘백주월 그 녀석이 힘순찐 캐릭은 아니었지만 말이야.’

백주월은 오히려 능력 이상의 퍼포먼스를 발휘하는 캐릭터였다. 그런 식으로 조성된 공포 분위기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만큼 교활한 놈이었고 말이다.

“공화정파의 용사가 이미 소환되었어. 오늘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왔으니까 확실해.”

“뭘 보고 그 녀석이 용사라고 확신한 거야? 세간에 풀린 정보는 없을텐데.”

에르멜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런 반응이 어쩌면 당연하긴 하다.

‘백주월은 내가 만든 캐릭터고, 내가 이 세상을 만든 작가라고 설명해도 믿기 힘들겠지.’

대충 메모리얼 전투의 개요와 그곳에서 용사들을 만난 적이 있다는 사실을 설명했다. 에르멜은 적당히 납득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타르틸리엇이 보관된 창고의 경비 병력은 어느 정도 빼놓을 수 있을 것 같은데. 하나를 해결하니 또 다른 문제가 튀어나오네.”

“그래, 만약 결전 병기가 도둑맞는다는 대규모 이벤트가 벌어진다면 용사도 분명 얼굴을 들이밀겠지.”

만약 백주월이 타르틸리엇 탈취를 방해하려 한다면, 이쪽은 목숨을 걸거나 얌전히 포기하고 도망쳐야 한다.

그게 이성적인 판단이라는 것이다.

에르멜은 잠시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워넣은 채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이내 깊은 한숨과 함께 말했다.

“마킹을 해두자. 용사의 실력이 어느 정도일지는 몰라도 변칙 요소는 그다지 섞이지 않는 게 바람직하니까.”

“뭐…… 병력 생산 준비는 끝났고, 앞으로 병력이 생산될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됐지만. 나는 정원 내에서 할 일도 있으니까 에르멜 네가 맡을거지?”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나 같은 유명인사가 남자랑 단둘이 돌아다니는 걸 사람들이 보면 바로 소문날텐데.”

“…….”

“당연히 우리 비올리네가 마킹해야지.”

눈물이 바들바들 떨리고 손발이 난다.

참고로 나는 백주월 트라우마를 앓고 있는 환우란 말이다. 오늘도 길거리에서 오줌 안 지린 내가 대견스럽다고 생각될 만큼이란 말이다!

“마킹하는 김에 애교 좀 부리고 아양 떨면서 정보라도 더 캐내 보던가.”

“우, 웃기지 마라 에르멜! 나는 아리카의 전쟁 군주 누자베스다! 용사 따위에게 떨 아양은 없다!”

“그렇게 귀여운 목소리로 앙앙거려도 전혀 위엄이 안 느껴지는데.”

에르멜은 키득키득 웃으며 담뱃재를 툭툭 털었다.

“앞으로 일주일 뒤야. 그때까지 병력 생산을 완료하고 탈취 작전을 개시해야 돼.”

“알고 있어, 젠장. 버디버디 시절 갈고 닦은 넷카마 기술을 이렇게 쓰게 될 줄이야.”

덤으로 이번 작전에 걸림돌이 될 수 있는 용사 백주월을 감시하고 향후의 동선을 확인하는 작업도 추가된 참이다.

담배를 깊게 빨아들이며, 오늘 목격한 백주월의 모습을 천천히 떠올려 봤다.

‘미완성.’

지금의 백주월을 평가하자면 그 한 마디밖에 떠오르지 않았지만.

* * *

이세계로 소환된 뒤 백주월은 줄곧 명령 대기 상태였다. 본래대로라면 류시혁과 마찬가지로 마왕 토벌의 여정에 나서야 했지만 말이다.

공화정파의 늙은이들도 아주 멍청이들은 아니었다. 이미 류시혁이 엄청난 속도로 마왕성 근처까지 접근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뒤늦게 백주월을 투입해도 결과가 바뀌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렇기에 소환해낸 용사를 다른 식으로 활용할 방법을 궁리하고 있었다.

덕분이라고 해야할지, 그런 사정 때문에 수도에 발이 묶이게 된 백주월은 매일 같이 한가한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정오가 다 되어서야 침대에서 일어나 번화가의 대로변에 위치한 찻집에서 책을 읽는 게 유일한 일과가 되어가고 있었다.

“…….”

그런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변화가 찾아온 건 소환된지 사흘째가 되던 날이었다.

‘뭘 하고 싶은 거야?’

백주월은 책에서 시선을 거두며 슬쩍 고개를 돌렸다. 찻집의 창문 너머로 기웃거리는 그림자가 보였다.

솔직히 말해서 전문성이라곤 눈꼽 만큼도 느낄 수 없다. 제대로 된 첩보원이라면 저렇게 손쉽게 위치를 노출할 리도 없고, 노출되었다면 바로 자리를 이탈하는 게 상식 아닌가?

그냥 총탄 맞고 미간에 구멍 뚫리고 싶은 자살 희망자가 아니라면 말이다.

‘어제 그 꼬맹이잖아?’

백주월은 자신을 훔쳐보고 있는 게 누군지 단번에 기억해냈다. 어제 골목에서 우연히 구해준 하녀복의 소녀였다.

‘신경 쓰이게 만드네.’

창문 옆에 바짝 붙어서 눈만 빼꼼히 내밀은 채 백주월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리려고 하면 호다닥 숨는 걸 몇 번이고 반복하고 있었다.

백주월은 쯧, 하고 혀를 차며 책장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지체없이 비올리네 쪽으로 다가갔다.

비올리네는 백주월이 다가오는 걸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라 도망치려 했지만. 역시나 백주월 쪽이 더 빨랐다.

비올리네가 도망치려는 방향으로 손을 뻗어 벽을 쳤다. 순식간에 퇴로가 가로막힌 비올리네는 눈을 질끈 감으며 어깨를 움츠렸다.

“뭐야, 꼬맹이. 재미난 구경거리라도 있냐?”

“아니, 그게, 아니…… 이거…….”

비올리네는 품에 안고 있던 종이 봉투를 내밀었다. 백주월은 종이 봉투 안쪽을 들여다 봤다.

내용물은 보이지 않았지만 시나몬 향과 달콤한 흑설탕의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어제 구해주신 답례로…… 만들었는데…… 혹시, 저 혹시 괜찮으시면! 받아주세요!”

백주월이 빼앗듯이 종이 봉투를 낚아채자, 비올리네가 멋쩍은 듯 뺨을 긁적이며 베시시 웃었다.

우기 직전의 계절이라 아직 쌀쌀한 날씨였지만, 받아든 종이 봉투에는 따스한 온기가 남아 있었다.

여기까지 가져오며 혹여나 빵이 식을까봐 얼마나 소중하게 끌어 안고 왔는지 싫어도 알 수밖에 없을 만큼 말이다.

그리고 백주월은 이런 걸 받았을 때 뭐라고 말해줘야 하는지 모르는 남자였다.

비올리네의 손끝에 맺힌 물집과 선홍색 화상 자국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누구를 돼지 새끼로 아나. 이렇게 많이 가져오면 어떻게 다 먹어? 빡대가리냐?”

“죄송해요…….”

“그리고 설마 이거 하나 가져다주려고 찾아온 건 아니겠지.”

비올리네가 고개를 도리도리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해야 할 심부름이 있어서 온 김에 혹시나 계실까 해서 가져왔어요.”

“그럼 이것 좀 같이 처리하자. 먹고 난 다음에 심부름 같이 가줄 테니까.”

“예? 정말 그래되 되나요……?“

“짜증나게 같은 말을 또 하게 만들지마라.“

대답할 새도 없이 백주월이 비올리네의 손목을 붙잡아 끌었다. 또 어제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으니까.

이렇게 가까이에서 다시 보니 어제 비올리네를 덮친 양아치 무리가 아주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본인은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비올리네는 인간의 욕정을 자극하는 기묘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눈꼬리를 따라 희미하게 흐르는 요염함과 나이브한 미소가 아이러니하게 어울리는 소녀다.

그런 시답잖은 감상을 떠올리며 백주월이 비올리네를 데리고 도착한 곳은 멀지 않은 분수대 쪽이었다.

분수대 근처의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아 빵을 하나 건네주자. 비올리네는 입가에 녹은 설탕을 덕지덕지 묻혀가며 와구와구 먹기 시작했다.

빵을 먹으면서도 쉴 새 없이 떠들며 해맑게 웃는 비올리네의 옆모습을 바라보던 백주월은 문득 생각했다.

이런 멍청한 애를 위해서라면 천국이 있어도 나쁘지 않겠다고 말이다. 원리주의자들의 헛소리처럼 백주월 자신이 지옥의 유황불 가장 깊은 곳에 처박히게 되더라도.

신에게 최소한의 인의가 있다면, 마땅히 그리 되어야 했다.

“돼지처럼 처먹는구만.”

백주월은 피식 웃으며 몇 개비 안 남은 말보로를 입에 물었다. 이렇게 마음 놓고 담배를 태운 적이 있었던가? 그런 의문이 문득 떠오를 만큼 평화로운 날의 오후였다.

어쩐지, 철이 든 이후부터 느껴본 적 없었던 잠기운이 백주월의 긴 속눈썹 위에 내리 앉았다.

* * *

매일 같이 비올리네의 심부름에 어울려 주는 게 백주월의 일과가 되었다.

어차피 찻집에 틀어박혀 몇 번이고 읽은 책을 다시 읽는 것밖에 할 일이 없기도 했으니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렇게 며칠 동안 백주월이 비올리네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깨달은 사실이 몇 가진가 있었다.

비올리네는 예상한 것 이상으로 감정 표현이 풍부한 소녀였다. 늘상 뚱한 표정을 짓고 있는 백주월과 너무나 대조적일 만큼 말이다.

거기에 감정을 숨길 줄도 모르니 옆에서 바라보고만 있어도 지루할 틈이 없었다.

작은 일에도 놀라고, 기뻐하고, 사소한 일에도 풀이 죽거나, 화내거나, 이제는 어찌되어도 좋은 백주월의 과거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슬퍼해줬고, 마음 아파했고, 때때로 공감해 주며 스스럼없이 거리를 좁혀오는 소녀였다.

마치 갓난아이에게 말을 가르치는 어머니처럼, 비올리네는 백주월에게 솔직한 감정을 드러내는 법을 가르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때때로.

비올리네는 백주월의 가장 깊은 고독에 닿았다. 당신과 나는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속삭이듯 말이다.

동질감이라는 더러운 농담으로 자신을 누군가와 묶어 본 적이 없었던 백주월에겐 낯선 시간이 계속되었다.

‘내일부터 바빠진다고 했지. 태양의 정원이라고 했나? 연락할 방법이 없는지 모니카가 오면 물어봐야겠네.’

백주월은 자신을 위해 마련된 저택에 돌아온 뒤에도 비올리네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오늘밤 헤어지기 직전 비올리네는 백주월의 귀에 걸려 있던 피어스 하나를 받아갔다.

‘이 피어스를 용사님이라고 생각하고 소중히 간직할게요!’

마치 대단한 보물인 듯 피어스를 꼭 쥐던 비올리네를 떠올리며, 백주월은 피어스가 달려 있던 자신의 귓가를 매만졌다.

“나를 얼마나 더 알게 되면 용사님이라고 부르는 걸 그만두려나.“

백주월은 일평생 누군가를 구원해 본 적이 없는 인간이다. 오히려 백주월로 인하여 삶과 가족을 잃고,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진 인간의 수가 더 많았으니까.

들려주고 싶지 않은 이야기였고, 어쩌면 비올리네에게 만큼은 모두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였다.

그리하여.

아니, 그리하면.

백주월은 처음으로 용서를 받고, 평생 속죄할 기회를 얻을지도 모른다. 그런 분수에 걸맞지 않는 욕심을 품고 말았던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