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짓는 플레이어-162화 (162/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162화

    태양의 영지에서(1)

    땅콩을 떼였다는 상실감에 몸부림칠 여유는 없었다. 에르멜의 할칸 기갑 연대가 수도에 귀환한 직후부터 작전은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당장 타르틸리엇을 보관하고 있는 곳으로 쳐들어가서 그걸 타고 냅다 튄다는 작전이 좋았는데.”

    “기회가 여러 번 있다면 한 번쯤은 시도해 볼 만한 작전이네.”

    에르멜은 내 허리에 가터벨트 고리를 거는 허리띠를 채우며 대답했다.

    “만약 탈취에 실패할 시 경비는 더욱 엄중해질 테고. 너는 붙잡혀서 평생 지하 감옥의 밑바닥에서 썩거나, 사형당할 테지만.”

    “나만? 에르멜 넌?”

    “농담이지? 난 왕의 뺨따귀를 때려도 자숙 처분인데, 사형당할 리가 없잖아.”

    “뭐 그딴…….”

    “여긴 스텔라 교가 국교인 종교 국가거든. 왕의 뺨을 후려갈기고 대충 구라 좀 치면 문제없어. 방금 전 뺨을 후린 건 내가 아니라, 내 몸을 빌린 스텔라 님이었다고 말이야.”

    에르멜이 능숙하게 허리띠와 스타킹의 끝자락을 벨트로 연결한 후, 시종이 미리 준비해 놓았던 속옷을 하나 골라 내 쪽으로 휙 던졌다.

    “이 언니가 팬티까지 입혀줘야 되는 건 아니겠지, 비올리네?”

    “팬티 정도는 입을 줄 알아. 아니, 그보다 이거 순서 반대 아냐?”

    “팬티를 입고 가터벨트를 하는 얼간이가 어딨어? 화장실은 어떻게 가게?”

    “아하…… 현명하신 고견이십니다.”

    스르륵.

    부드러운 실크의 감촉에 머리카락이 모조리 곤두설 뻔했다. 살다 살다 여자 속옷을 입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물론 내 소설을 읽는 독자님들은 여자 팬티 정도는 한두 번 입어 봤을 분들뿐이겠지만, 하핫!

    그렇지 않은 독자분들은 이미 숏박꼼 구간에서 모조리 하차했을 것이다. 틀림없다.

    “흠.”

    적당히 속옷을 걸치고 거울 앞에 서자.

    어딜 어떻게 보나 완벽한 미소녀였다.

    엉덩이까지 닿을 만큼 긴 흑발과 유대의 영향으로 창백해진 피부가 완벽하게 색채적 대조를 이룬 모습이다.

    얼핏 보자면 흡혈귀 같은 외견 말이다.

    “얼굴은 별로 안 달라지네.”

    “당연하지. 그건 그냥 성별만 바뀌는 효과니까.”

    “가슴 크기는 랜덤이야 뭐야?”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카를린이나 밀리아와 비교하자면 한없이 조촐한 사이즈 아닌가?

    “일단은 내 시종으로 쓰겠다고 데려온 거니까 수도복이 아니라 하녀복을 입고 행동하면 돼.”

    “행동 중에 의심을 받으면?”

    “내 이름을 들먹이면 아무도 참견 안 할걸.”

    그건 꽤나 편리하다.

    비유하자면 군부대 내에서 뭔 개짓거리를 해도 사단장님 지시라고 구라를 쳐버리면 아무도 터치를 못 하는 것과 비슷하지 않나?

    “나는 지금부터 여기저기 불려 다닐 곳이 많으니까. 경비 병력을 돌파할 수단은 맡겨 놓을게.”

    “이곳에도 하수 처리 시설은 있겠지?”

    태양의 정원이라는 교단의 수도 시설이라고 해도 화장실 정도는 필요할 테니까.

    ‘상황을 정리하자.’

    나는 현재 성별 반전의 비약을 마시고 일시적으로 여자의 모습이 되었고. 에르멜의 시종인 ‘비올리네’를 연기하여 태양의 정원으로 잠입하는 데 성공했다.

    에르멜과 같은 방에서 머물며 시중을 든다는 설정이니, 긴밀하게 정보를 교환하기 용이했다.

    에르멜이 군부의 인간들과 이번 출전에 관한 보고 및 사후 처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나는 타르틸리엇 탈취의 준비를 끝마친다.

    “아마 스텔라도 화들짝 놀랄 만큼 감쪽같을걸. 설마하니 태양의 정원 지하에 하이브 마인드의 군단이 육성되고 있었을 줄이야.”

    킬킬 웃으며 하녀복을 대충 걸쳤다.

    “잘 어울리는데? 나중에 다른 애한테 머리카락 정리하는 방법도 배워놔.”

    에르멜도 슬슬 시간이 다 됐는지 군화의 끈을 묶은 후, 침대에 대충 던져놨던 군용 코트를 어깨에 걸쳤다.

    담배를 입에 문 채로 걸어놨던 각모를 대충 머리에 얹더니, 거울 앞에 서 있는 내 뒤로 은근슬쩍 다가왔다.

    “뭐야? 이상한 장난치려고 하지 말고, 해야 할 일이나…….”

    말을 끝마치기도 전이었다.

    허벅지에 에르멜의 손끝이 닿았고, 부드럽게 쓸어 올리듯 천천히 손이 위쪽으로 향했다. 스타킹의 영역에서 벗어난 손은 치마 안쪽으로 파고들더니, 이쪽의 엉덩이를 거칠게 꽉 움켜쥐었다.

    에르멜은 상체를 내 등 쪽에 완전히 밀착시킨 채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 비올리네 보고 싶어서 밤까지 못 기다리면 어쩌지?”

    “장난인 건 아는데, 왜 숨이 거칠어지는 거야? 젠장 날숨이 목덜미에 닿아서 소름 돋잖아!”

    에르멜을 밀쳐내며 녀석이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빼앗아 한 모금 들이켰다.

    “성처녀님. 피차 스마트한 비즈니스를 기대하도록 하지.”

    “흥, 재미없긴.”

    에르멜이 어깨를 늘어뜨리며 방을 나서는 걸 확인한 후. 흐트러진 치마 끝자락을 정리하며 생각을 가다듬었다.

    “하수 처리 시설의 위치도 확인해야 될 테고, 에르멜 외에 이 정원에서 써먹을 수 있는 인간도 필요할 텐데.”

    핵심은 언제나 신속, 정확, 은밀이다.

    먼저 이 주변을 천천히 돌아다니며 지리를 파악하는 것부터 시작해 보자.

    * * *

    태양의 정원은 철저하게 폐쇄된 사회다.

    300여 명의 수녀들이 공동으로 생활하며 교단의 기밀 서류를 관리하거나, 의료 지원을 주 업무로 삼고 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스텔라 교단의 ‘성처녀’를 관리하기 위해 마련된 개인 숙박 시설에 가까웠다.

    성처녀로 지정된 소녀는 교단에서 정식적으로 성녀 자격을 부여할 때까지 태양의 정원에서 관리를 받게 된다.

    이 거대한 건물과 토지, 그리고 300여 명의 인력이 단 한 사람의 안락한 생활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태양의 정원이 금남의 영역인 이유 역시, 성처녀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물론 빈번히 군부의 요청으로 출전하는 에르멜에게 그다지 의미 있는 일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누자베스가 비올리네라는 이름으로 태양의 정원에 잠입한지 일주일이 되던 차였다.

    태양의 정원 내에서도 비올리네의 이야기는 삽시간에 퍼졌다.

    어느날의 오후. 채광이 잘 되는 안뜰에서 세탁물을 널던 수녀들도 자연스럽게 비올리네의 이야기를 떠들기 시작했다.

    “비올리네?”

    “응, 본 적 없어? 저번주에 에르멜 님께서 데리고 오신 아이인데.”

    “뭐? 에르멜 님께서 직접!?”

    에르멜이 친히 데리고 돌아온 아이라는 점도 태양의 정원에 거주하고 있는 수녀들 사이에서 큰 화제가 되기 충분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 정원의 주인은 에르멜이다. 이곳의 수녀들은 그녀의 총애는 꿈도 못 꾸며, 끊임없이 헌신하며 한 줌의 관심이라도 받아 보는 게 평생의 소원이었으니까.

    그런데 비올리네는 출전했던 에르멜이 갑자기 데리고 돌아온 아이다. 그것도 모자라 전속 시종으로 삼겠다고 같은 방에서 재우고 있다니?

    정원의 수녀들이 비올리네에게 관심을 갖게 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 관심이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말이다.

    “나도 어제 처음 봤는데.”

    “어땠는데? 그렇게 예뻐?”

    어제 처음으로 비올리네를 목격한 수녀는 뺨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분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비올리네는 성별을 불문하고 사람을 홀리는 소녀였다. 고양이 같은 호박빛의 눈은 보는 이마다 넋을 잃고 바라보고 싶게 만드는 기묘한 매력이 있었다.

    비단 눈빛 뿐만이 아니라, 몸에서 흘러 나오는 고혹적인 분위기는 어떤 의미에서 요염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물론 이 정원에 흡혈귀 전문가가 있었다면, 단번에 그 실체를 간파해 낼 수 있었을 것이다.

    비올리네가 지닌 매력은 ‘상속 신분’의 흡혈귀가 지닌 패시브 스킬 같은 것이었으니까.

    기본적으로 헬베르카의 수려한 외모를 고스란히 이어받은 외견에 흡혈귀의 매혹이 추가된 것이다. 아무리 스토익한 인간이라도 비올리네를 본 순간 욕정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정원 내에서 비올리네에 대한 증오와 시기, 그리고 연심과 흑심이 퍼져 나가는 사이.

    “크엑! 크학, 우웩! 염병, 우웨엑! 펜리르 이 개자식……!! 여긴 화장실 배관이었잖아! 우웩! 내가, 이 짬 먹고 스캇 플레이를 할 줄이야……! 우웨엑! 하, 염병…… 완결이 코앞일 텐데 난 언제까지 이 지랄을 해야만 하는가…….”

    비올리네는 정원의 하수 시설의 노선 파악에 열중하고 있었다. 하수도로 이어지는 환기구 쪽으로 올라와 철창을 들어 올리더니, 바로 풀밭에서 나뒹굴었다.

    “갸아아악! 콧구멍에 들어간 덩어리가 안 빠지잖아아!! 파, 파내려고 하면 자꾸 더 안쪽으로 들어가서…… 내, 냄새가…… 우웨엑!”

    비올리네가 필사적으로 코를 풀어 이물을 배출한 후 풀밭에 얼굴을 문질러 대충 닦아냈다.

    그러고는 품속에 소중히 품고 있던 양피지 두루마리를 꺼내 펼쳤다. 양피지에는 기록해 온 하수 시설의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하…… 내일쯤이면 파악이 다 되겠고, 진격 루트는 에르멜하고 상의를 해봐야겠지.”

    비올리네는 다시 양피지를 말아 품속에 넣었다.

    ‘확장 부화장 정도는 설치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해왔으니까. 설마하니 녀석들도 태양의 정원 쪽의 하수도에서 마물이 쏟아져 나올 줄은 모르겠지.’

    외부의 침입에는 철저하게 대응할 수 있겠지만, 내부에서 생겨난 적은 기민하게 대응할 수 없는 법이다.

    애초에 이런 성소에서 마물의 군대가 생겨나 진격해 올 것이라 예상할 놈이 어디 있겠나?

    그리고 당연한 얘기지만 비올리네, 아니, 누자베스에게도 상당한 제약이 있었다.

    둥지의 영역이 아니기에 제대로 된 부화장이 아닌, 확장 부화장을 만들어야 한다는 점이다.

    확장 부화장은 둥지의 영역 바깥에도 설치할 수 있지만, 설치 후 길어야 일주일 정도밖에 유지되지 않는다.

    게다가 양질의 병력을 생산하기 위한 소재와 마나의 수급에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다.

    결국은 그럭저럭 쓸 만한 소수의 병력만으로 타르틸리엇 탈취를 해내야만 한다.

    ‘그럼 부화장의 설치 위치나 진격 루트는 오늘 밤에 다시 상의해 보도록 하고. 일단 돌아가서 씻고 옷이나 갈아입자.’

    비올리네는 몸에서 풍겨오는 악취에 얼굴을 찌푸리며 발걸음을 서둘렀다.

    적당히 인적이 드문 곳만 골라서 이동하던 중. 누군가 측면에서 불쑥 나타나 비올리네의 손목을 붙잡았다.

    “시발 깜…… 아니, 무슨 일이신가요……?”

    비올리네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리자.

    일전에 한두 번 정도 마주쳤던 수녀들 대여섯 명이 보였다.

    그중에 한 명은 비올리네도 기억하고 있었다. 수녀복은 다 엇비슷하게 생겼지만, 소매에 새겨진 자수의 모양은 서열이나 직책을 나타내고 있었다.

    지금 비올리네를 붙잡은 수녀들의 무리 중의 우두머리는 ‘키예스’ 서무장이었다.

    이 태양의 정원에서 에르멜을 제외하자면, 넘버10 안에 들 정도로 높은 직위를 지닌 수녀였다.

    “이 년이라고? 이런 출생 성분도 불분명한 천민 계집이?”

    “네…… 분명 들리는 소문으로는 그랬습니다, 키예스 서무장님.”

    비올리네는 키예스의 풍만한 가슴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했다.

    혹시 이건 그거 아닐까?

    금남의 영역에서 가끔씩 일어난다는 농후한 민달팽이 집단…… 아니, 이런 서술은 그만두도록 하자.

    비올리네는 정신을 차리며 단호하게 말했다.

    “용무가 없으시다면 놔주세요. 지금 에르멜 님께서 지시하신 일을 해야만 해서.”

    짜악!

    매서운 소리와 함께 귀 안쪽에서 날카로운 이명이 울렸다. 비올리네의 뺨이 화끈거렸고, 이내 뺨을 맞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더러운 년 주제에……! 감히 주제도 모르고 에르멜 님께 꼬리를 쳐?”

    비올리네는 생각했다.

    전쟁 군주의 뺨을 후려친 대가는 값싸지 않지만. 가슴 한번 주무르게 해주면 용서해 줄 수도 있다고 말이다.

    “끌고 와. 내가 직접 조련해 줘야겠어. 다시는 에르멜 님께 추근거릴 수 없게 말이야.”

    비올리네를 가운데에 두고 수녀들이 둘러싸듯 몰려들었다. 물론 힘을 조금만 쓴다면 전투 훈련도 받지 않은 수녀들 정도는 충분히 제압할 수 있었다.

    아무리 누자베스가 둥지에서 최약체 취급을 받는다지만, 일반인 여성과 비교될 만큼 약한 건 아니었다.

    이대로 끌려가서 무슨 체벌을 받게 될지 조금 두근거리긴 했지만, 그런 플레이를 즐길 여유는 없었다.

    그렇게 비올리네가 위험에 처한 순간.

    “거기서 뭣들 해? 우리 애한테 볼일 있어?”

    “에, 에르멜 님!?”

    기둥의 뒤편에서 나타난 에르멜이 터덜터덜 걸어와 비올리네의 어깨에 팔을 툭 걸쳤다.

    “응? 볼일 있냐고 물었잖아, 키예스 서무장.”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 언니가 성깔 지랄 맞은 거 알면서 왜 그럴까. 내 물건에 손도 대고 말이야. 요즘 맞은 지 오래돼서 감을 잃었나 봐.”

    “죄송합니다!”

    “한 번만 더 걸려봐. 개먹이로 만들어서 오크 여물통에 쑤셔 박아버릴 테니까. 알았으면 얼쩡거리지 말고 꺼져.”

    에르멜이 으르렁거리기가 무섭게 키예스와 수녀들이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났다. 비올리네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타이밍 좋네. 마침 상의할 게 있었던 참이야.”

    “비올리네는 언니가 구해줬는데 고맙다는 말도 없네? 언니 섭섭해서 울어버릴 거 같네.”

    비올리네는 잠시 에르멜을 노려보다 입을 열었다.

    “닥쳐, 너 때문에 모처럼 다가와준 거유 시스터가 도망갔잖아.”

    꽤나 진심으로 억울한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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