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짓는 플레이어-161화 (161/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161화

    잔불 정리(5)

    전차의 내부는 의외로 쾌적했다.

    생각만큼 비좁지도 않았고, 좌석의 측면에는 홍차를 끓이는 포트까지 달려 있었다!

    ‘이 새끼들은 영국군인가…… 왜 전차에 이런 걸 달아놨지?’

    만약 두르난이 베놈에 이딴 걸 달아놨으면 연료 낭비하지 말라고 호통을 쳤겠지만. 할칸 기갑 연대의 전차는 모조리 에르멜의 신성력으로 움직이는 병기들 아닌가?

    그야말로 에코! 친환경적이며 연료 걱정 없이 굴러가는 꿈의 병기들이었다. 이런 쓰잘데기 없는 홍차 포트를 달아놔도 될 만큼 말이다.

    “엘베제 변경백 그거 재밌어? 아까부터 계속 읽고 있는데.”

    “응? 이거? 스텔라 교단의 성서가 재밌을 리가 없잖아.”

    “하핫, 미안하네. 기갑 연대의 병사들은 성서 외의 서적을 소지하는 건 군법으로 금지되어 있어서.”

    에르멜은 바로 옆에 바짝 붙어 앉아, 내가 넘기고 있는 책장을 살펴봤다.

    ……아까는 전차의 내부가 의외로 넓고 쾌적하다고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베놈이나 통상 전차에 비해 넓은 것뿐이지 진짜 중형차처럼 내부가 널찍한 건 아니었다.

    참고로 에르멜은 전차에 탑승한 직후 답답하다고 셔츠 한 장만 걸친 채 모조리 벗어 던진 상태다.

    얇은 셔츠를 사이에 두고 느껴지는 감촉이…… 아니 이건 구태여 일일이 묘사하지 않겠다!

    그리고 쐐기를 박아두지만, 에르멜이 이런 행동을 하는 건 결코 이쪽을 유혹하려거나 꼬시려는 게 아니다.

    지금까지 에르멜과 함께 13차폐구에서 접촉하며 깨달은 사실이다. 그냥 이 녀석은 자기가 여자라는 자각이 전혀 없는 것뿐이다.

    지금 같은 행동이 남자에게 어떻게 받여들여질 수 있을지 전혀 예상이 안 되는 것이고 말이다.

    “이러다 누자베스 경이 스텔라 교단의 교리에 푹 빠져서 포교되는 거 아냐? 그러면 하이브 마인드 신도1호 확정인데.”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한다만.”

    “이해가 안 되는 거 있으면 팍팍 물어봐! 누나가 이래봬도 교단의 성처녀야. 성처녀가 뭔지 알아?”

    교단의 얼굴 마담 같은 거 아닌가?

    그리고 재수 없으면 마굿간에서 갑자기 신의 아이를 잉태하고 말이다.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와 두 줄이 뜬 임신테스트기를 건네준다거나.

    “내가 스텔라의 신도가 되는 일은 없어. 나는 밤의 어머니의 자식이야.”

    “지상의 모든 생물은 태양의 아이들이야. 마물들도 예외는 아니지.”

    “그럼 테네브레는 뭔데?”

    “그건, 음…… 친모가 아니라 계모?”

    “테네브레 맙소사.”

    남의 엄마를 멋대로 계모로 만드는 종교 집단이라니……! 이 무슨 패륜적 교리란 말인가.

    “그래도 이렇게 성서를 읽어보니 스텔라가 마음에 드네. 이 녀석 머리가 좀 맛이 간 게 마음에 들어.”

    “크흠, 크흠!”

    앞열의 좌석에 앉아 있던 에르멜의 부관 펜리르가 심기가 불편하다는 듯 헛기침을 했다.

    “특히 이 순교자가 죽으면 천국에 간다는 부분이.”

    성서에도 분명히 적힌 내용이다.

    스텔라의 뜻을 지상에서 행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교자는 죽어서 천국에 가게 된다.

    놀랍게도 천국에 가면 12명의 숫처녀를 첩으로 삼을 수 있고, 그 처녀들은 매일 밤마다 처녀성이 회복된다고 한다!

    이게 제정신인 여신의 머리에서 나올 수 있는 발상인가? 아마 스텔라가 전날 밤 애인들하고 행복해지는 풍선 좀 거하게 빨다가, 다음날 계시를 받으러 온 신관 놈한테 취해서 아무 소리나 내뱉은 게 틀림없다!

    ‘어…… 음, 아몰랑. 대충 천국 오면 처녀들 잔뜩 준다고 꼬드겨, 히히…… 아! 매일 회복되니까 영원한 처녀라는 설정도 덧붙일까? 응? 그럼 더 좋아하겠징?’

    이딴 약에 취한 헛소리를 신관이 그대로 받아 적은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분명히 신관이 되물었을 것이다.

    ‘그, 그럼 여성 순교자는 뭐 해준다고 하죠?’

    아마도 성서에 별다른 예외 사항이 없는 걸 보니 남자들하고 똑같이 숫처녀 12명을 받게 될 것 같았다.

    뭐 이딴 천국이 다 있나 싶다.

    “뭐야, 누자베스 경. 왜 갑자기 나를 측은한 눈빛으로 바라보는데?”

    “가엾게도…… 에르멜 네가 순교해도 쓰잘데기 없는 처녀애들만 받게 되잖아.”

    “아! 그런 얘기구나. 그거야 당연히, 음…… 전능하신 스텔라 님께서 즐길 수 있게 달아주시지 않을까?”

    “크흠! 크흠, 크흐음!!”

    펜리르의 헛기침 소리에 당혹스러움이 묻어나고 있었다.

    “그, 그나저나 누자베스 경을 어디에 숨겨 놓을 생각이십니까? 이번 작전 개시까지 적당한 위치의 여관을 물색해 놓을 수도 있습니다만.”

    펜리르가 묻자, 에르멜이 베시시 웃으며 갑자기 내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내 턱을 가볍게 쥐더니 이리저리 돌려보며 대답했다.

    “당연히 내가 데리고 있어야지. 이번 작전의 파트너니까 말이야.”

    “에르멜 님께서도 아시겠지만…… 태양의 정원은 금남의 영역. 남자인 누자베스 경의 출입이 허가될 리 없습니다. 하이브 마인드라는 사실을 숨기더라도.”

    “펜리르 경. 나도 빡대가리 아냐.”

    에르멜은 키득키득 웃으며 불길한 눈빛으로 내 얼굴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누자베스 경. 혹시 여자애 같다는 소리 자주 듣지 않아?”

    도리도리.

    필사적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마초맨이다! 여자애 같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에르멜은 거침없이 생각해 둔 작전을 내뱉었다.

    “비올리네? 에르멜 언니라고 불러볼래?”

    “아, 안 해! 이런 작전이라고 한적 없잖아! 웃기지 마라, 에르멜! 아리카의 엘베제를 모욕할 셈이냐! 전쟁 군주를 모욕한 대가가 값쌀 것이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모욕이라니. 잘 생각해 봐, 누자베스 경. 금남의 영역에 발을 들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잖아? 무방비하고 순수한 시스터들과 알콩달콩 두근두근 합숙 생활이라니까.”

    ……일순.

    그래, 일순간 카를린과 밀리아의 거대한 흉부 윤곽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들의 무방비한 일상에 섞일 수 있는 기회가 드디어 찾아온 것이다.

    “에, 에르멜…….”

    “응?”

    “에르멜 언니! 비올리네는 벌써부터 두근두근해영! 스텔라 만세! 태양 만세! 비올리네는 이미 계모 따윈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어여!”

    “이 자식 진짜 욕망에 충실한 놈이구만…….”

    오해하지 말아주길 바란다.

    이건 어디까지나 타르틸리엇을 무사히 탈취하기 위한 희생이었다. 정말, 정말 내키지도 않고 하고싶지도 않지만!

    태양의 정원에 잠입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여장을 할 수밖에 없었다.

    에르멜은 홍차 포트에서 찻잔에 홍차를 한 잔 따라내더니, 손가락만한 플라스크를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정체불명의 액체를 홍차에 섞더니 내쪽으로 불쑥 내밀었다.

    “그럼 마셔.”

    “뭔데 이거? 고산병에 효과가 있어서 청와대에서 샀던 약물 같은 건가? 하긴 남자가 나밖에 없으니 시스터들을 모두 상대해 주려면 필요하긴 하지, 촤하핫!”

    “아니, 성별반전의 비약인데. 적당히 양을 조절했으니까 타르틸리엇을 탈취할 때까지 정도만 유지될 거야.”

    흠.

    아무리 내가 비범한 두뇌로 상정 가능한 모든 상황을 예측하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땅콩을 떼버리는 전개는 예상 못 했는데.

    * * *

    “포로는 필요 없다! 모조리 죽여라!”

    비명을 내지르는 리자드맨의 복부를 몇 번이고 더 쑤시며 루칸다가 소리쳤다.

    검붉은 피를 뒤집어 쓴 루칸다의 모습은 악귀나찰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아릿카사의 병사들은 그런 루칸다의 뒤를 따르며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저런 악귀가 적이 아니라 다행이라는 생각과, 루칸다와 함께 나선 전장에선 지고 싶어도 질 수 없다는 생각 말이다.

    루칸다는 전장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병사들의 사기를 크게 진작시키는 챔피언이었다.

    그리고 저런 카리스마는 태생적으로 타고나는 재능에 가까웠다.

    ‘직접 써보니 알겠군. 피르에나 왕녀가 애용했을 만큼 휘두르는 맛이 있는 검이야.’

    우렌은 다시금 루칸다의 모습에 감탄했다. 이렇게 전장에서 써보니 얼마나 우수한 검인지 실감할 수 있었다.

    ‘눈에 띄는 결점도 없고. 어디에서든 어떻게 써도 기대 이상의 결과를 내주겠군.’

    뒤이어 이번 전투에서 타우저 백작의 본대를 타격했던 ‘그레이브 야드’ 부대와 스칼렛의 평가도 빼놓지 않았다.

    ‘전설처럼 구전되는 상속 신분의 권능에 비할 수 없을 만큼 쇠약해져 있군.’

    만약 스칼렛이 상속 신분의 흡혈귀의 전설 그대로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면 이번 전투는 일찍이 콜드 게임으로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스칼렛은 그녀의 전설에 비해 상당히 약화되어 있는 상태. 반쪽짜리 불사성을 지닌 구울 머스킷티어들을 정교하게 움직이는 게 고작이었다.

    물론 비교 대상이 일반적인 야전 지휘자라면, 스칼렛 역시 뛰어난 지휘자 그룹에 속할 것이다. 어디까지나 그녀의 전성기에 비해 볼품이 없었을 뿐이다.

    ‘마지막으로…… 이 둥지의 문제아.’

    로아는 모든면에서 훌륭한 챔피언이었다.

    무력 자체도 뛰어나며, 병력의 운용에도 상당히 능숙한 모습을 보였다. 루칸다와 비슷할 만큼 병력의 사기를 북돋는 능력도 갖추고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 루칸다의 상위호환 챔피언이라고 볼 수도 있었지만.

    우렌의 평가에선 로아가 루칸다에 비해 한없이 아래에 속했다.

    ‘감정의 기복이 심하고. 무엇에 쫓기는 것인지 항상 겁에 질려 있어. 그 조바심이 언젠가 일을 그르칠 것 같다는 예감을 들게 하는군.’

    물론 로아가 적의 병사들을 눈앞에 두고 겁을 먹는 건 아니다. 하지만 로아가 두려워하고 있는 무언가가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그때문에 감정이 격해지면 명령을 무시하거나, 독자적인 판단으로 움직이려는 경향도 있었다.

    우렌은 인정 따위로 병사를 운용하는 지휘관이 아니다. 만약 이후의 전투에서도 로아가 자신의 결점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둥지에서 퇴출시키는 것 역시 진지하게 고려할 작정이었다.

    유능한 지휘관은 상대의 틈새를 간파하여 파고들테니까. 현재 우렌이 생각하는 아릿카사의 가장 큰 빈틈은 로아였다.

    [우렌 : 각 챔피언 보고해 주십시오.]

    [루칸다 : 후우! 간만에 운동 잘했군. 전진 기지에 배치되어 있던 병력 중 잔존한 놈들은 모조리 퇴각중이다.]

    [로아 : 놈들이 진격로에 부비트랩을 설치해 놓은 덕분에 합류가 좀 늦었지만…… 이쪽도 별 문제는 없이 정리됐어.]

    [스칼렛 : 아쉽게도 대포는 모조리 탈취하지 못했군. 남은 2정은 박격포 사격에 휩쓸려 반파된 모양이야. 그나저나 다른 한 놈은 붙잡았나?]

    [우렌 : 팬토르칸 소령의 신변 확보는 실패했습니다. 타우저 백작이 나름 현명하게 빠른 결단을 내렸군요.]

    에르멜의 기갑 연대가 빠지며 생긴 동측에 공백이 생기게 되었지만. 이번 전진 기지를 탈환하며 방어선 구축에 여유가 생기게 되었다.

    이즈미 령의 병력이 진격해 올 수 있는 루트가 손에 꼽을 수 있을 만큼 제한된 것이다.

    이대로 시간만 벌어도 13차폐구의 시설을 점차 흡수해가며 교환비에서 앞설 수 있었다. 하지만 우렌은 타우저 백작에게 그런 안락한 시간을 허락할 생각이 없었다.

    한 번 붙었다면, 끝장이 날 때까지 집요하게 괴롭히며 정신적으로 몰아붙이는 게 우렌의 방식이었으니까.

    [우렌 : 그럼 붙잡은 애송이를 요리해 봅시다. 타우저 백작이 제대로 애를 돌보지 못했다고 부모들에게 알려줄 시간입니다.]

    타우저 백작은 느긋하게 다음 공세를 준비할 수 없을 것이다. 패배할 수밖에 없는 전장으로 내몰리는 느낌이 무엇인지 가르쳐줄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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