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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짓는 플레이어-160화 (160/210)

던전 짓는 플레이어 160화

잔불 정리(4)

우렌이 총지휘를 맡은 아릿카사의 모습은 사뭇 달라져 있었다.

둥지의 챔피언들은 물론이고, 국지적 충돌을 지켜보고 있던 타우저 백작도 눈치를 챌 수 있을 만큼 말이다.

누자베스는 병력을 다룰 때 거북이 등껍질을 뒤집어 쓴 이리처럼 행동했다. 견디고, 또 견디다 허를 보인 순간 저돌적으로 달려들어 목덜미를 물어뜯는 게 주력 전술이었다.

일부 상대에 한해서는 꽤나 유효했지만, 체급 차이가 크거나 시간제한이 걸린 상황에선 한계가 명확한 전술이다.

그에 비해.

우렌이 총지휘를 맡은 아릿카사의 모습을 비유하자면 메뚜기 떼에 가까웠다. 일점 타격이 아닌, 지역 전체를 휘몰아치는 공세!

상대방이 어디부터 먼저 어떻게 대응할지 고심하는 동안 무너져내리는 것이다.

모든 병력이 최대 효용 가치를 발휘하게 만드는 전술이 우렌의 주특기였다. 병력 한 마리, 한 마리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며 유기적인 군체로서 움직였다.

“애송이 하나 붙잡으려고 병력을 움직일 만큼 낭비벽이 심하진 않아서 말이야.”

설마 했던 크라울 비젠 부대가 쉴리너의 병력 쪽이 아닌 동측 제3초소 인근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동시에 3000여 마리의 구울 머스킷티어가 참호에서 이탈하여 돌격을 개시.

이미 이즈미 령의 전진 기지에 잠입해 있던 고블린 살수들이 탄약고를 폭파시키며 퇴각중이었다.

동시다발적으로 타격을 입히고 있는 순간에도 우렌의 시선은 항상 다음 페이즈를 향하고 있었다.

상정 가능한 모든 가능성을 검토하며, 부대와 부대가 유기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 고리를 찾아내 즉시 명령을 하달했다.

“누자베스…… 아니, 이건 설마 우렌 상무관인가?”

타우저 백작은 이미 북쪽 언덕을 너머 방벽을 뚫고 들어온 오크 돌격병들을 멍하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막아라, 놈들이 더 이상 전진 기지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아!!”

리자드맨 머스킷티어 부대가 재빠르게 대열을 갖춰 오크 돌격병들을 향해 일제 사격을 가하려던 찰나!

“쮸!”

터엉!

중갑으로 무장한 렛맨 부대. 언더 케이지가 측면의 수풀을 헤치고 모습을 드러냈다. 완전히 무방비하게 측면을 내주고, 접근을 허용한 것이다.

리자드맨 머스킷티어들이 당황하며 착검을 했지만, 이미 거리가 좁혀진 이상 승기는 렛맨들에게 넘어가 있었다.

“쮸, 쮸우!”

“쮸쮸!”

퍼억!

방패로 후려쳐 넘어뜨린 후 후열에 있던 렛맨이 숏소드로 빠르게 목덜미와 가슴을 쑤셨다. 2인1조의 완벽한 연계. 전투 경험이 극한까지 축적된 렛맨 부대는 근접전에서 상상 이상의 위력을 발휘했다.

어설픈 대검술로 대적할 수 없을 만큼 말이다.

“쮸, 쮸쮸쮸- 쮸우!”

텅텅!

햄토리가 검등으로 방패를 두들기며 킬킬 웃었다. 햄토리의 도발적인 언사를 들은 리자드맨들이 눈을 까뒤집으며 흥분했다!

니네 엄마 양서류라니!

리자드맨들은 지금까지 저런 모욕적인 막말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리자드맨은 엄연한 파충류란 말이다.

“키에에에에!!”

“키엑, 키에!!”

선두에 있던 리자드맨 두 마리가 햄토리를 향해 착검하여 돌격했다! 아무리 도련님들의 놀이터라고 불리는 노르카리움이라고 해도 명색이 ‘집행 기관’이다.

리자드맨 머스킷티어들은 그런 집행 기관에 소속될 정도의 병력이었고 말이다. 일반병 이상으로 훈련 비용과 시간이 투자된 정예병이다.

하지만.

터엉!

햄토리가 리자드맨의 머스킷을 방패로 쳐내자, 크게 휘청이며 자세가 무너졌고.

“쮸쮸, 쮸우?”

푹, 푹푹!

목에 한 번, 가슴을 두 번 찌르며 햄토리가 뒤로 폴짝 백스탭을 밟았다.

타닷!

그리고는 지체 없이 상체를 숙여 나머지 한 마리를 향해 무자비한 방패 돌격을 가했다.

우지끈!!

늑골이 모조리 바스라지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리자드맨이 흙바닥을 나뒹굴었다.

“쮸, 쮸우- 쮸쮸, 쮸우우.”

애송이들은 올챙이 엉덩이나 쓰다듬으러 가라니!

하지만 이번만큼은 리자드맨들이 섣부르게 햄토리를 향해 달려들지 못했다.

방금 전 먼저 달려든 두 마리가 순식간에 도륙당한 걸 똑똑히 목격했기 때문이다!

[보르가 : 키륵, 키르륵.]

[우렌 : 실수하지 않길 바라지, 보르가 부대장.]

[보르가 : 키륵!]

그러는 사이에 고블린 서비스 부대의 고블린 사수들이 포격지를 헤치며 이동 중이었다.

지금도 쉴 새 없이 쏟아지고 있는 포탄의 발포지는 전진 기지의 뒤편에 위치한 절벽 위였다.

철저하게 은폐시켜 놨기에 방어선 근방에선 관측되지 않았지만, 우렌은 대포의 배치 지역을 예상했고 이번에 잠입한 루칸다가 그 실제 위치를 파악해 냈다.

남은 건 대포 부대를 무력화하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이 작전의 적임 부대는 보르가의 고블린 서비스였다.

“망할놈들! 쏴도 쏴도 끝이 없어!”

“오늘 아주 끝장을 보려는 건가? 참다 못 해 뛰쳐나온 모양이구만.”

“알게 뭐야! 관측병! 관측병! 탄착지 확…… 끅!?”

푸슉.

대포를 운용 중이던 포병의 목에 날카로운 볼트가 날아와 꽂혔다.

포병은 목의 측면을 꿰뚫고 튀어나온 볼트를 뽑아 보려 바둥거렸지만, 이내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적습! 적습이다!”

“젠장, 안 보이잖아! 불가시 타입의 부대다!”

“호위 부대 뭐하는 건데! 제압 사격 안 하냐 개자슥들아!”

물론 대포의 설치지대에 포병만 달랑 놓고 운용하고 있을 리는 없었다. 대포의 근방에서 대기 중이던 보병들이 석궁이 날아온 방향을 향해 일면 타격을 가했다.

“키륵키륵.”

보르가와 고블린 사수들이 이미 포복하여 뿔뿔이 흩어진 상황이었기에 별다른 피해는 입지 않았다.

공포는 지금부터였다.

발포음도, 섬광도 내지 않고 수풀 속에서 포병들을 집요하게 괴롭힐 부대가 도착한 것이다.

이즈미 령의 포병들은 언제 또 석궁 볼트가 날아올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여 냉정을 잃기 시작했다.

[타우저 : 좋지 않군.]

타우저 백작은 호위병들과 주변의 보병들을 모아 뒤쪽 언덕 숲을 다시 장악하려 했다.

대포는 방위전의 핵심 병기다. 이대로 포병들이 겁을 먹은 채라면, 기세에서 밀리게 될 것이다.

보르가와 그의 부대는 타우저 백작의 목에 걸린 잔가시처럼 성가신 존재가 되었다.

[타우저 : 최악의 경우 전진 기지를 버리고 둥지로 퇴각해야 합니다. 퇴로를 확보하겠습니다.]

만약 지금 아릿카사를 지휘하고 있는 지휘관이 우렌이라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우렌은 비아 엘티나 지역에서 ‘대수림의 여왕’과 ‘마제’를 상대로 싸워 판정승을 거둔 지휘관이다.

아무리 늙고 쇠했다고 해도 사내가 지닌 본질은 변치 않는다.

이 정도 규모의 전투라면 이미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마음대로 주무르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잠시 타우저 백작과 협력했으니 이즈미 령의 병력 규모와 상황에 빠삭하지 않겠나?

타우저 백작의 판단은 한없이 이성적이고, 현실적이었지만.

[팬토르칸 : 개소리! 입 닥쳐라, 타우저 백작! 이깟 코딱지만 한 전진 기지도 지키지 못하고 퇴주했다는 경력을 남기라는 소린가!]

[타우저 : 상대가 좋지 않습니다. 그 악명이 자자한 카쿠쟈가 저쪽 둥지에 붙은 모양입니다.]

[팬토르칸 : 우렌 상무관? 그 늙은이가 무서워서 도망치자는 소린가? 젠장, 쉴리너 그 망할 새끼가 멋대로 이탈하지만 않았어도…….]

팬토르칸이 기억하고 있는 우렌은 무능하고 무기력한 늙은이였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총둔영의 제재가 걸려 마음대로 활개를 치지 못했던 것에 불과했다.

[우렌 : 크하핫! 역시나 버텨보려는 셈이군. 아무리 늙었어도 채찍질 솜씨가 죽은 건 아닌 모양이야.]

우렌은 힘조절을 하고 있었다.

단번에 몰아붙이면 지레 겁을 먹고 도망치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우렌은 아직 승산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싸우고 있는 것이었다.

채찍은 검과 상이한 무기다.

일격에 죽이거나, 죽이지 못하는 검과 달리. 채찍은 힘 조절만 하면 상대를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할 수 있지 않나?

아직 희망을 미끼삼아 꼬리를 흔들어야 했다. 더 버틸 수 있다고, 어쩌면 이 공세를 성공적으로 막아낼 수 있다고 말이다.

그런 희망으로 발을 묶어 놓고, 만신창이가 될 때까지 채찍질을 하는 게 우렌의 스타일이었다.

결국 죽음이 목전까지 다가온 뒤에야 깨다는 것이다. 필사적으로 쥐고 있던 희망은 결국 자신의 발목에 채워진 족쇄에 불과했다고 말이다.

물론 그때면 도망칠 수 없을 만큼 망가져 죽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겠지만.

“자비로운 싸움은 그다지 취향이 아닌지라. 도련님들을 상냥하게 대접해드릴 순 없겠군.”

우렌은 눈을 가늘게 뜨며 궐련에 불을 붙였다. 깊게 빨아들인 후 느긋하게 연기를 뿜어내며 전장의 상황을 확인했다.

이미 우렌의 눈빛은 돌아와 있었다.

그가 ‘카쿠쟈’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경외받았던 시절의 눈빛이었다.

군청빛을 머금은 바람을 짓밟으며 우렌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타우저 백작에게 전하시오. 열도 제일의 전쟁 군주 사냥꾼이 이렇게 돌아왔노라고.”

더 이상 그를 옭아맬 쇠사슬은 없었다.

누자베스가 준비해 준 무대는 청량감이 느껴질 만큼 자유로웠다.

“전진 기지를 사수하든, 쥐새끼처럼 둥지로 도망치든! 얕은 꾀를 부려 허를 찌르든! 투항하여 목숨을 구걸하든! 어쭙잖은 협상을 제안하든! 마음가는대로 행하라 전하시오. 그러나 얄팍한 자비는 없을 것이며, 동포로써 마땅히 지녀야 할 연민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며, 속물적인 탐욕에 혹할 만큼 가볍지 않을 것이며, 선인들의 윤리와 도덕에 감히 어울리지 않을 만큼 천박한 사냥꾼이라 전하시오.”

우렌은 야전 코트의 앞섬을 풀어 헤친 뒤 목을 옭아매고 있던 넥타이를 거칠게 풀었다.

청량한 저녁의 공기를 들이마시며, 우렌은 한창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전진 기지를 똑바로 직시하였다.

“지옥의 밑바닥까지 쫓아가 가죽을 벗겨주마, 타우저 백작.”

카쿠쟈의 눈에 찍혀 곱게 끝난 하이브 마인드는 없다. 그 말이 결코 과장된 헛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타우저 백작은 오늘부터 깨닫게 될 것이다.

우렌은 평생 동안 전쟁 군주를 사냥하고, 둥지를 부숴 온 사내다. 전쟁 군주를 요리할 레시피는 얼마든지 지니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쉴리너 쪽은 로아에 의해 정리되어 있었다.

[루칸다 : 이봐, 루스날. 말해두지만 쉴리너는 죽이면 안 된다. 본영을 협박할 수단을 확보하라는 각하의 지시다.]

[로아 : 알게 뭐야! 알게 뭐냐고, 얼간아!]

[루칸다 : 기분은 이해한다만…….]

이미 로아가 200여 마리의 리자드맨 머스킷티어를 상대로 학살극을 벌인 후였다.

머리끝까지 피가 치솟은 로아를 상대로 리자드맨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물론 쉴리너 소령도 그 광경을 목격하고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 앉아 오줌을 지리는 게 전부였다.

“진짜 손이 많이 가는 애새끼군.”

루칸다는 머리를 긁적이며 적당히 로아를 어르고달랠 말을 떠올렸다. 이대로 놔뒀다간 로아의 엄한 화풀이에 쉴리너가 맞아 죽을 상황이었으니까.

[루칸다 : 사실, 각하는 인간박이가 아니라……. 그, 젠장 뭐냐…… 피가 이어진 혈육에게만 흥분하는 빌어먹을 변태 자식이란 말이다. 이건 비밀이라 되도록이면 말하지 않으려 했지만.]

[로아 : 정말……?]

[루칸다 : 그, 그래.]

루칸다는 잠시 눈을 감고 마음속으로 ‘각하 죄송합니다’를 되뇌이며 말을 이었다.

[루칸다 : 쉴리너를 생포했으면 병사들에게 맡기고 전진 기지의 남측 진격로를 지원한다. 그 중간에서 합류하지.]

[로아 : 아, 알았어…….]

그 둘의 대화를 들으며 스칼렛은 내심 감탄했다.

‘오르키아나의 곁에 저 필멸종이 있었다면 테르미어와 그런 식으로 결별하진 않았겠군.’

로아를 구슬리는 솜씨가 날이 갈 수록 좋아지고 있었다. 스칼렛은 그런 식으로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는 사이에 구울 머스킷티어 부대도 충돌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스칼렛 : 자, 그럼 이 늙은이도 일을 시작하도록 하지. 명령만 내리게.]

[우렌 : 대모 님께서 제 명령에 충실히 따라주셨다는 사실은 각하께 꼭 보고드리겠습니다.]

[스칼렛 : 상세하게.]

[우렌 : 물론입죠.]

타우저 백작이 전진 기지를 어느 타이밍에 포기하느냐. 그것만이 이번 전투의 분기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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