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짓는 플레이어 159화
잔불 정리(3)
“비천익?”
“그래, 비천익을 운용하고 있는 부대가 있는지 묻고 있잖냐.”
에르멜은 내 질문이 그렇게나 재밌었는지 깔깔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 애들 장난감을 전쟁에 사용하는 얼간이는 없어. 아, 대륙제의 물건은 비행기라고 해서 조금 더 발전된 형태인 것 같지만 나도 그쪽엔 문외한이고.”
“흠…… 아직까진 공군 병력을 갖춘 건 아니라는 말이지.”
“재밌는 소리를 하네. 군대는 육군과 해군이 전부야. 공군 같은 건 없어.”
“그래, 그렇겠지.”
에르멜이 내게 거짓말을 하는 기색은 없었다. 진짜 비행기 따위를 전쟁에 사용할 수 없다고 진지하게 믿는 분위기다.
‘우렌이 가져온 정보를 보자면 마왕군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였지.’
마왕군에서도 공중 전력 양성에 관한 계획에 상당히 부정적이었다.
대충 정보를 종합해 보자면 이러했다.
바체트 열도에는 ‘비천익’이라는 공중을 비행하는 공학기가 존재하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돈 많은 몇몇 귀족들의 해괴한 취미 용품 수준이었다.
대륙에서는 이보다 발전된 형태의 비행기를 생산하고 있는 것 같지만, 역시나 이 일대에선 공군의 기반은 틀이 닦이지 않은 상황.
“그러면 드래곤이나 와이번 부대는 공군으로 취급하지 않는 거야?”
“아, 하늘을 날긴 하지만 결국 싸우는 곳은 지상이잖아? 엄밀히 따지자면 육군 소속이지.”
애초에 이쪽 세계의 놈들은 하늘을 날기 위해 해괴한 기계 장치를 개발할 필요가 없었지.
드래곤 라이더 부대 같은 게 뻔히 존재하는 세계였으니까! 하지만 드래곤이나 와이번을 전문적인 공중 전력으로 취급하기엔 여러모로 문제점이 있었다.
‘결국 비행 고도의 문제지. 화망에 걸리지 않을 만큼 높은 고도를 비행할 수 있는 부대가 필요한데.’
게다가 드래곤이라고 해봤자 원거리 공격 수단이 전무하지 않나? 지면에 착지해서 파이어 브레스를 뿜는 게 고작이다.
그런 식으로 싸울 거면 비행 능력은 돼지 목의 진주 목걸이 아닌가?
물론 스칼렛의 이야기를 들어보자면 고대의 드래곤들은 낙뢰나 혜성을 떨구는 마법 능력도 갖추고 있었다지만.
그런 고대의 드래곤을 구하는 것도 힘들고, 구한다 하더라도 양산하여 정식 편제의 부대로 만드는 건 불가능하다.
‘알렉스트라자를 붙잡아서 알을 낳게 하는 게 아닌 이상은…….’
아차! 이건 실언이다! 나는 결코 알렉스트라자를 그런 식으로 생각한 적이 없다!
“고대 병기 중엔 비행기와 흡사한 게 남아 있지 않을까?”
에르멜은 팔짱을 낀 채로 잠시 뜸을 들였다. 마치 애매한 기억을 끄집어내듯 말이다.
“정확한 정보는 아닌데.”
“괜찮아, 알아서 걸러 듣고 있으니까.”
“과거의 작전 보고 기록을 훑어보던 중에 기묘하다고 생각한 게 있거든. 전투 중 괴조를 봤다는 병사들의 공통적인 보고가 있었어. 물론 이게 누자베스 네가 말하는 비행기라거나 고대 병기의 일종일지는 확실치 않아.”
“마물이거나, 멀리서 드래곤을 잘못 본 걸 수도 있겠지.”
“그래. 잘 아네? 어쨌든 괴조의 목격 보고는 40년 전쯤에 있었던 쿠르헨 내란의 진압 때였으니까. 아! 그러고 보니 그 지역은 대륙하고 교역로가 연결된 항구 도시가 있어서 비공정이나 비천익의 주요 수입 루트거든.”
“그 말은 즉?”
“내란 진압전 때 목격된 괴조가 대륙에서 유입된 최신예 전투용 비행기거나? 아니면 네 말대로 고대 병기의 일종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뿐이야.”
괴조의 정보라.
이건 예상하지 못한 수확이다.
쿠르헨 내란은 바체트 열도의 북동쪽 섬에 오랫동안 살아온 소수 민족이 일으킨 반란이었다.
글로레나 왕조는 본보기로 삼기 위해 쿠르헨 섬을 필요 이상으로 잔학하게 진압했다고 한다.
독립을 요구하며 행진하던 섬의 원주민들을 잔인하게 도륙하여, 하루에도 수천 구의 시체가 꼬챙이 꿰인 채 전시되었다.
무력 진압이 도화선이 되었고, 평화롭게 행진할 뿐이었던 원주민들 역시 근방의 군부대를 점령하고 무장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내란이 시작된 이후.
당시 전투에 참여했던 병사들은 괴조를 목격했다는 보고를 차례대로 올리기 시작한 것이다.
‘쿠르헨 섬. 우렌이 제안한 공중 전력의 양성을 위해 사찰할 필요가 있겠어.’
에르멜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여 내 얼굴을 살폈다.
“그나저나 정말 이대로 우리가 빠져도 되겠어?”
“이번에 믿을 만한 지휘관을 손에 넣었으니까. 당분간 내가 자리를 비워도 그럭저럭 버틸 수 있겠지.”
“그렇다면 다행이네. 아, 그리고 일단 말해두지만 수도에서는 내 명령을 따라줘야겠어. 누자베스 넌 어디까지나 이쪽의 보조 역할이야.”
“그걸로 타르틸리엇만 무사히 탈취할 수 있다면 발가락 사이를 핥으라는 명령에도 따를 수 있어.”
“오, 정말? 증명할 수 있어?”
에르멜은 테이블 위로 가느다란 다리를 쭉 뻗더니, 내 얼굴에 발바닥을 가져다 댔다.
속살이 반쯤 투과되어 보일 만큼 얇은 스타킹의 감촉이 뺨으로부터 전해졌다.
“……말이 그렇다는 거다, 말이! 누가 진짜 발가락을 핥겠냐!”
에르멜의 발을 쳐내며 역정을 내봤지만,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지 에르멜은 키득키득 웃으며 눈앞에서 발끝을 흔들었다.
“정말? 안 핥아줄 거야?”
“하루 종일 군화를 신고 있어서 농후하게 응축된 스타킹 냄새를 맡으며 즐거워 할 놈이 어디 있겠냐.”
“미안한데, 하루가 아니라 이틀 동안 못 벗었어.”
“…….”
“그렇게 심해? 나는 잘 모르겠는데…… 맡아 볼래?”
에르멜의 유혹을 애써 무시하며.
탁자 아래로 스스로의 허벅지를 꽉 꼬집으며 어금니를 악 물었다.
‘누자베스, 진정해라. 진정, 진정하는 거다. 아리카의 엘베제가 여군 스타킹 냄새에 환장하는 정신병자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체면과 위신의 문제가…….’
그래!
나는 아리카의 엘베제 누자베스 변경백이다. 그것도 헬베르카의 적통 후계이며, 국화의 문양을 계승하는 일족 아닌가?
“꺄하핫! 표정 너무 웃기잖아, 누자베스. 미안, 장난 그만 칠 테니까 화내지 마.”
에르멜이 꺄르륵 웃으며 다리를 거두려던 찰나였다. 날아드는 용사의 검을 피하던 때보다 더 기민하게 몸이 움직였다.
에르멜의 발목을 붙잡았고, 순식간에 머릿속에서 적당한 핑계거리가 떠올랐다.
“바, 발의 악취는…… 건강상의 문제로 생길 수도 있는 현상이니까. 그, 뭐냐…… 만에 하나를 대비해서 일단 확인해 줄게.”
“누자베스는 상냥하네. 이 누나를 그렇게나 걱정해 줄 줄은 몰랐는데.”
턱을 괸 채로 에르멜이 짓궂은 미소를 머금었다. 좋다, 좋아! 진짜로 건강 체크만 하는 것처럼 순식간에 한 번 냄새만 맡고 끝내자.
그래도 이런 기회는 흔치 않을 테니까…… 기왕 맡을 거면 크게 숨을 들이마셔서 뇌리에 각인시켜 두자!
“누자베스 각하! 긴급 보고입니다! 이즈미 령의 쉴리너 소령이 병력을 움직였습니다. 별도의 공격 루트가 확보되었는지 검토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에르멜의 발바닥에 얼굴을 묻기 직전이었다!
천막 안으로 헬베르카 정예 척탄병 한 놈이 허겁지겁 뛰어 들어와 보고를 올렸다.
“지자스! 지자아아쓰으으으!! 타이밍 진짜 왜 이러냐 진짜!”
“각하!? 왜 그러십니까?”
“아무것도 아냐. 각하는 가끔 눈물이 나네…… 이 빌어먹을 짓거리에 염증이 나서 그런가 봐.”
작전 지도에 급하게 그려진 예상 루트를 살펴보며, 우렌의 수를 읽어 봤다.
“그래, 이런 산지에선 곡사 화기와 공수 부대가 깡패지. 어딜 감히 직사 화기밖에 없는 놈들이 머릿수만 믿고 깝치겠냐.”
재료는 마련되어 있었고, 남은 건 우렌의 마무리 솜씨를 느긋하게 감상하는 것뿐이었다.
* * *
규모는 50여 마리.
소대 규모의 병력이었다.
게다가 이동중이며, 적의 접근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는 점.
그야말로 먹기 좋게 차려진 밥상 아닌가?
먼저 자리를 잡고 급습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제압할 수 있었다.
쉴리너 소령은 모노스코프로 이동중인 오크 소대를 바라보며 음흉한 웃음을 흘렸다.
“팬토르칸 놈. 이런 맛난 걸 혼자 집어 삼키려고 하다니. 동기로써 꽤나 섭섭하군.”
먼저 병력을 끌고 나선 쉴리너는 팬토르칸보다 먼저 이동 중인 오크 소대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도 방어선에서 상당히 떨어진 협곡까지 나온 오크 소대다. 한 마리도 남김없이 모조리 피떡으로 만들 수 있는 거리였다.
물론 저것이 그냥 오크 소대였다면 여기서 전멸시켜도 큰 전공이 되진 않을 것이다.
무슨 목적인진 몰라도 고작해야 오크 수십 마리 죽인 게 대단한 전공이 될 리 없지 않나?
하지만 쉴리너의 눈에도 선명히 목격되었다. 지금 저 오크 소대를 이끌고 있는 게 누구인지 말이다.
“확실한가? 저 녀석이 아릿카사의 챔피언이란 말이지? 지금까지 방어선에 나선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예! 아릿카사의 챔피언 중 하나인 로아입니다. 헬베르카의 분가 출신이라는 소문도 있는데, 거기까진 확실치 않습니다.”
부관이 바로 쉴리너의 물음에 대답했다.
쉴리너는 아무런 경계도 하지 않고 유유히 병력을 대동하여 이동 중인 로아를 바라봤다.
“헬베르카라. 확실히 눈이 멀어버릴 만큼 아름답군. 그러고 보니 왕녀 전하께서 국화의 아이를 수집하시는 취미가 있으셨지?”
“시종으로 수집할 수 있는 건 결국 분파 계열의 헬베르카뿐입니다. 분가쯤만 되더라도 배경이 어마어마해지니 말이죠.”
“이렇게 직접 보니 왕녀 전하의 취미도 이해가 가는군.”
로아 정도만 되더라도 본가와 비교했을 때 혈액의 농도가 크게 차이나지 않는다.
거의 한 끗 차이로 분가로 나뉜 케이스에 속했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저 만큼 순혈성이 짙은 헬베르카는 상당히 희소했다.
저런 마족을 생포하여 왕녀에게 직접 헌상한다면? 헬베르카의 분가를 생포했다는 전공은 물론이고, 왕녀의 점수도 쏠쏠히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전까진 나도 재미를 봐도 괜찮겠지? 조금 맛 좀 본다고 닳는 건 아닐 테니까.”
쉴리너는 음흉하게 킬킬 웃으며 지휘용 검을 뽑아 들었다. 고작해야 소대 규모의 오크 병력이다.
정예 리자드맨 머스킷티어 300마리를 대동하여 나선 쉴리너가 겁을 먹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로아 : 우렌, 저거 완전 병신 새낀데? 제압 사격도 없이 돌격한다고?]
[우렌 : 크하핫! 상처를 입히고 싶지 않은 전리품을 섞은 게 정답이었군.]
[로아 : 응? 그게 무슨 말이야?]
[루칸다 : 그래, 루스날이 자각은 없지만 그쪽 방면에서 재능이 뛰어나지.]
[로아 : 그러니까 무슨 뜻이냐고 묻고 있잖아.]
로아가 뾰루퉁해 있는 사이. 예상대로 리자드맨 머스킷티어들이 착검을 한 후 저지대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누자베스 : 우렌! 이 망할 돼지 자식아! 왜 애들이 아직도 나한테 보고하러 찾아오는 거야! 나는 이번 전투에서 상관없는 옆집 아저씨라고 전해둬라, 진짜. 진짜로.]
[우렌 : 아이고, 죄송합니다, 각하.]
[누자베스 : 그리고 너희들이 수고가 많다. 각하는 이번에 새로 사귄 애인하고 수도 패키지 관광을 다녀올 거거든? 고생 좀 더 하고 있어라.]
[스칼렛 : 주군?]
[로아 : 예? 각하? 애인이요?]
[루칸다 :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셨군요, 각하께서 역겨운 인간박이였을 줄이야…….]
[누자베스 : 아니, 인간박이는 또 뭐야 미친놈아.]
누자베스가 잠깐 마인드 모드로 로아의 부대가 위치한 곳을 살폈다. 리자드맨들이 거리를 좁혀왔고, 그 거리가 50미터까지 좁혀진 순간!
[두르난 : 이봐들! 바베큐 파티를 즐길 준비는 됐나? 오늘의 특선 메뉴는 도마뱀 스테이크일세!]
봉우리 뒤편에서 완전히 은폐한 채 대기하고 있던 자주 박격포가 불을 뿜었다.
[로아 : 각하? 각하……?]
누자베스에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고, 로아의 표정이 급격하게 굳었다. 불편한 심기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듯 얼굴이 구겨졌다.
착검하여 돌격해온 리자드맨들에겐 비극 같은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