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짓는 플레이어 156화
간화-아릿카사 둥지의 휴일(중편)
“이, 이게 뭐야? 저 고블린들 뭐하는 거야?”
루칸다와 함께 젖소 축사를 방문한 로아의 눈동자가 떨리고 있었다.
마침 들어오면서 받은 유리잔에는 신선한 우유가 가득 담겨 있었지만, 이런 광경을 목격하자면 우유가 목으로 넘어갈 리 없었다.
지금까지 로아는 단순히 젖소 축사가 우유 공급을 위해 둥지에 존재한다고 생각해 온 것이다.
로아나 누자베스 같은 헬베르카 계열의 마물은 유당에 취하는 체질을 지니고 있었고, 둥지 관리자인 누자베스의 기호품으로 사용하기 위해 젖소를 기르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오늘 젖소 축사의 분위기는 뭔가가 이질적이었다.
“잘 들어라, 로아. 젖소 축사는 이 둥지 고블린 병사들을 위한 환락 시설이다. 우유는 부수적인 수입이고 말이다.”
“어……? 환락?”
로아는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정보량을 미처 다 처리하지 못하는 것인지, 입을 반쯤 벌린 채 광란의 파티 현장을 지켜봤다.
그러고는 자신이 들고 있던 우유 잔을 힐끔힐끔 내려보다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그래서 왜 나한테 이런 걸 보여주는 건데? 저 고블린들이 젖소 뒤에 달라붙어 있는 거랑 무슨 상관이야?”
루칸다는 담배를 입에 물고는 불을 붙이며 설명했다.
“유성생식이 디폴트 개념인 포유류 수컷은 원래 저런 생물이다.”
“그건 나도 알고 있어. 그런데 고블린하고 소가 짝짓기를 한다고 번식을 할 수 있을 리 없고…….”
“젠장, 이래서 고귀하신 상위종 놈들을 이해시키는 게 어렵다니까.”
애초에 헬베르카는 유성생식을 통해 자손을 남기는 종족이 아니다. 인간과 닮았지만, 행동 원리가 상이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성욕 같은 것도 없을 뿐더러, 욕망에 기인하는 유희 같은 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번식이 목적이 아니라, 저건 그냥 유희의 일종이다. 저런 식으로 욕망을 분출하지 않으면 제대로 작동하지 않게 되는 불완전한 생물이지.”
“그래서 이게 무슨 상관이냐니까?”
루칸다는 담배 연기를 깊게 뿜어내며 진중한 어조로 대답했다.
“각하는 헬베르카의 마물이지만, 포유류의 습성을 지니고 있다는 말이다. 잘 생각해 봐라, 로아. 어째서 네놈보다 그 흡혈귀가 더 각하의 관심을 받고 있는지.”
“그럴 리가 없어! 각하는 순혈 헬베르카인데…… 저런 추잡한 욕망을 지니고 있을 리가…….”
“멍청한 놈! 그런 식으로 현실에서 눈을 돌린다고 뭐가 바뀐단 말이냐! 각하가 오늘 아침부터 지금 이 시간까지 거대한 유방에 대해 떠든 게 몇 번인지 모른다고는 하지 않겠지?”
비단 오늘뿐만이 아니었다.
누자베스가 거대한 가슴이 둥지에 없다는 사실에 한탄하거나, 서큐버스는 언제 오냐고 노래를 부른 건 작금의 일이 아니었다!
확실히 루칸다의 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순혈에 가까운 헬베르카인 누자베스가 하위종의 저열한 본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럴 수가…….”
“드디어 이해한 건가. 각하에게 있어서 궁극적으로 사이가 좋아진다는 건 저런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다!”
루칸다는 젖소의 뒤에 달라붙어 있는 고블린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소리쳤다.
“짝짓기! 교미다! 각하는 저기서 젖소들과 나뒹굴고 있는 고블린들과 다르지 않다!”
“거짓말!! 각하께서 그럴 리 없어!”
“아니! 솔직히 말해서 그 이상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각하는 수컷 고블린보다 더 추잡하다! 그냥 성욕에 팔다리 붙어 있는 놈이란 말이다! 젖소가 아니라, 숫소라도 망설임 없이 가능하다고 단언할 정도로!”
“아니야!! 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루칸다 너, 넌…… 너어는 진짜 병신이야!”
로아는 사뭇 충격을 받았는지 그대로 축사의 출입구 쪽으로 달려나갔다. 그러다 우연히 출입구 쪽에 서 있던 우렌과 부딪힐 뻔했다!
“뭘 봐? 구경났어? 구경거리냐고! 이 돼지 자식아!? 너도 젖소랑 짝짓기하러 왔냐, 어!”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어디서 뺨을 맞고 와서 여기다 화풀이를 하는 건지 이해가 안 됐지만. 우렌은 얌전히 로아가 축사에서 나갈 수 있게 옆으로 자리를 비켜줬다.
로아는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손등으로 문질러 훔쳐내며 축사에서 도망치듯 빠져나갔다.
우렌은 머쓱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루칸다를 향해 말을 걸었다.
“아이고…… 유격대장. 너무 심한 짓을 한 거 아닌가?”
루칸다는 로아가 놓고 간 우유 잔을 들더니, 벌컥벌컥 들이켜 목을 축였다.
“아니. 녀석에겐 이 정도의 충격 요법이 적당했다. 이대로 감정이 증식되는 걸 방치해 두다가 이상한 방향으로 폭주라도 한다면 뒷감당하기 힘들지 않겠나? 이렇게 쐐기를 박아두면 어느 정도의 상한선은 될 수 있겠지.”
“그건 그렇지만.”
“그나저나 여기서 뭘 하고 있던 건가?”
루칸다가 묻자, 우렌이 둥둥 떠 있는 크리스탈을 가리키며 대충 설명했다.
루칸다와 로아가 축사로 들어온지 얼마 되지 않아 바로 뒤따라 들어왔고 이곳의 풍경을 기록하는 중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우렌의 이야기를 듣고 루칸다는 흥미가 없다는 듯 적당히 대답했다.
“그럼 오늘은 피차 한가한 모양이니 한잔하지 않겠나?”
이렇게 둥지의 챔피언 모두가 한가한 날은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었다.
오늘은 그야말로 아릿카사의 전면 휴업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우렌은 잠시 혹한 눈빛이었지만,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늘은 이렇게 휴일을 기록하고 싶으니 그만두겠네.”
“그런가? 그럼 다음에 한 잔 걸치도록 하지.”
루칸다도 축사를 빠져나갔고, 홀로 남은 우렌은 고블린 서비스 부대의 고블린들이 젖소와 나뒹굴고 있는 모습을 촬영하며 흡족한 미소를 머금었다.
작품에 쓸 만한 소재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 * *
“어? 나는 그런 거 받은 적 없는데? 어디서 잃어버린 거 아냐?”
“그럴 리가 없네! 분명히 근처에 지나가던 쥐 자식에게 건네주라고 시켰는데.”
“쥐 자식이라니…… 렛맨? 언더 케이지 쪽 애들인가?”
오늘은 드물게도 비비큐 클럽의 부대장 두르난이 수련장을 찾아왔다. 오늘은 스칼렛이나 루칸다에게 별도로 교육을 받는 날이 아니었기 때문에 누자베스가 홀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누자베스는 상체를 타고 흐르는 땀을 수건으로 적당히 닦으며 대답했다.
“나중에 언더 케이지 애들 막사 들르면 물어볼게. 그리고 그런 걸 전해줄 땐 밑에 애들 말고 챔피언 불러다가 시켜야 확실하지.”
누자베스가 그렇게 말하자, 두르난이 답답한 듯 자신의 가슴을 두들기며 한탄했다.
“하이고! 도대체 누가 그런 심부름을 하겠나? 하나같이 자존심만 드럽게 세서 내 말을 듣겠냔 말일세!”
“내가 애들 불러다가 말해둘 테니까. 그래도 말 안 듣는 애가 있으면 따로 보고해.”
“특히 로아 그 녀석이 가장 시건방지네! 아주 그냥 안하무인이 따로 없어! 혈육이라고 너무 싸고도는 거 아닌가? 기술자들 종놈 취급하는 솜씨를 보니 영락없는 귀족 집 도련님이야!”
“두르난 아재…… 좀 진정하고. 로아는 나중에 내가 따끔하게 혼낼 테니까.”
“정말인가?”
“응? 당연하지!”
“퍽이나 잘도 혼내겠네! 아주 귀여워 죽으려고 하더만!”
“퍼, 퍽은 안 해…… 남동생이잖아.”
“그게 무슨 개소린가?”
“아니, 아무것도 아냐.”
누자베스는 화가 난 두르난을 어르고달래기 시작했다. 둥지의 규모가 커지며, 중재는 누자베스의 주요 업무 중 하나가 되어 있었다.
특히나 챔피언들이 하나같이 견원지간인 이 둥지에선 누자베스가 조금만 마음을 놓고 있다간 사고가 터지기 십상이었다.
게다가 부대장들과 챔피언들의 갈등이라거나, 병력들의 불만 사항도 누자베스가 골머리를 앓는 요인들이었고 말이다.
“어쨌거나 최대한 빨리 찾아주게! 늦어도 내일 아침까지는 찾아서 가져와 주지 않으면 곤란해!”
“알았다니까! 두르난 아재도 오늘은 푹 쉬어도 되니까,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어.”
“그럼 그리 알고 가겠네.”
두르난이 수련장을 떠난 뒤.
누자베스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마룻바닥에 주저 앉아 담배를 입에 물었다.
“염병……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 짓거리를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네. 시부랄, 그냥 집에 돌아가고 싶다…….”
요즘 들어 박태준 팀장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그렇게나 증오스러웠던 박태준 팀장에게 욕을 먹어가며 소설을 쓰던 때가 지금보다 나았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누자베스 자신도 모르게 향수병이 조금씩 마음의 언저리부터 번지고 있었다.
“시공석 구할 때까지만 힘내자. 원고도 다 써놨으니까.”
이쪽 세계로 끌려와서 아무런 수확도 없었던 건 아니다. 누자베스는 간간이 시간이 날 때면 이곳에서 겪은 일을 원고로 적어 보관해 두고 있었다.
그러니까 본래의 세계로 돌아가게 되었을 때 얻어갈 건 착실히 쌓이고 있다는 말이다. 그게 유일한 위안이었다.
“읏차!”
담배를 태우며 마음을 다잡은 후.
누자베스가 바닥에서 일어나자, 수련장의 문이 살짝 열리는 게 보였다.
“이번엔 누구냐? 각하는 이제 씻으러 가야 되니까 급한 거 아니면 나중에 하자.”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누자베스가 천천히 출입문의 틈새 쪽이 보이도록 발걸음을 옮기자. 로아가 문틀에 바짝 붙어 안쪽을 빼꼼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뭐야? 왔으면 왔다고 말을 하지.”
“…….”
“엉? 우리 동생 울었어? 눈이 왜 그래?”
“…….”
누자베스는 뒤늦게 어젯밤의 일이 떠올랐다.
‘아차…….’
확실히 로아의 심경까지 헤아릴 만큼의 여유가 없었다. 백경의 쓸개 가루가 발휘한 최음 효과는 상상 이상이었으니까!
누자베스는 필사적으로 이성의 끈을 붙잡으며 자리에서 이탈하는 게 고작이었다.
지금에 이르러 천천히 돌이켜 보자면, 로아가 화를 내거나 삐졌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작전을 성공시킨 포상으로 함께 자기로 약속해 놓고, 그렇게 도망쳐 버렸으니 말이다.
“저기, 로아? 어젯밤은 각하가 잘못했지? 그게 실은 각하가 기름진 것만 먹으면 배탈이 나서 급똥이…… 하꼬 둥지 운영 시절에 잘 못 먹어서 장이 약해졌나?”
어쭙잖은 변명을 늘어놔 봤지만, 로아는 여전히 누자베스를 뚫어지라 쳐다볼 뿐 입을 열어주지 않았다.
“혹시 흉흉한 물건 들고 온 건 아니지?”
혹여나 로아가 앙심을 품고 흉기를 들고 달려든다면 누자베스가 손을 쓸 도리는 없었다.
이 수련장 근처엔 병력도 없었고, 루칸다나 스칼렛도 가까이 있지 않았으니까.
단순한 전투력만 두고 비교하자면 로아가 누자베스를 씹어 먹기에 충분했다.
“각하는 보트 타기 싫은데…… 하하…….”
다행히도 로아가 뭔가를 들고 온 기색은 없었다. 하지만 로아는 한참 동안 누자베스를 뚫어지라 쳐다보더니 입술을 오물거리며 우물쭈물 말했다.
“목욕하러 가시나요?”
“아, 응. 땀을 좀 흘렸으니까.”
“각하는 이제 저랑 목욕한다거나, 같이 잔다거나 그런 건 싫으신가요?”
“왜, 왜 싫겠어? 당연히 좋지! 서로 등도 밀어주고, 형제애도 돈독하게 하고!”
로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하지만 이내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리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오늘같이 목욕탕에 들어가 주시면…… 어젯밤 일은 용서해 드릴게요.”
로아의 뺨이 묘하게 상기되어 있었다.
* * *
“쮸쮸! 쮸우!”
“음? 보기 드문 조합이군.”
루칸다는 그레이브 야드 부대의 대규모 막사 입구 앞에서 햄토리와 스칼렛, 둘과 우연히 마주쳤다.
햄토리는 루칸다와 만나서 반가운지 방방 뛰며 지금까지 뭘 하고 있었는지 주절주절 떠들기 시작했다.
처음 만났을 때와는 사뭇 다른 반응이다.
지금은 햄토리도 루칸다가 전사로써 존경받을 만한 고블린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뭘 하고 있던 겐가?”
스칼렛이 눈을 찌푸리며 루칸다를 미심쩍은 듯 노려봤다. 루칸다는 그런 시선은 이제 익숙하다는 듯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모처럼 한가해진 탓에 할 일도 없이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있었다만.”
“흥. 말은 그렇게 해도 또 음흉한 수작을 꾸미고 있겠지.”
“역시 상속 신분이신 분이라 칼침 맞고 싶다는 소리도 참으로 고상하게 하는군.”
루칸다와 스칼렛 사이에 팽팽해진 살의의 기류가 흘렀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좀처럼 좁혀지지 않은 관계였다.
“쮸우! 쮸, 쮸쮸! 쮸!”
햄토리는 그런 둘의 사이에 끼어들어 일갈을 했다! 그러고는 스칼렛과 루칸다의 손을 붙잡아 이어서 위아래로 흔들었다.
싸우지 말고 악수하라는 제스쳐인가?
루칸다는 미간을 찌푸리며 스칼렛에게 닿은 손을 재빨리 거뒀다.
“그나저나 두르난에게 받은 그 물건은 언제 분실한 건가? 아마도 요즘 개발 중이던 것이라면 페토르늄 축약탄일 텐데.”
“쮸, 쮸쮸!”
“어제? 지금 어젯밤이라고 했나?”
루칸다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 기색을 보고 스칼렛도 뭔가 일이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뭔가? 페토르늄 축약탄이라는 게? 그걸 잃어버린 시간이랑 무슨 상관이 있는 건가?”
루칸다는 재빠르게 설명을 요약했다.
“상온에서 산소와 반응하여 임계점을 넘기면 연쇄 분열한다.”
“그 말인즉.”
“그대로 놔두다간 둥지 어딘가에서 폭발한다는 의미지.”
“쮸우…….”
“햄토리 공! 지금 주군에게 혼날 걸 걱정할 때가 아닐세!”
스칼렛마저 안절부절못하고 발을 동동 구르기 시작했다.
루칸다는 침착하게 어제부터 햄토리의 행동 동선을 하나씩 물었고, 오늘 탐색한 구역이 어딘지를 확인했다.
이런 일의 전문가다운 체계적인 추론 과정을 거쳐 루칸다가 해답을 도출해 냈다.
“서측 목욕탕인가……!!”
그렇게 말하기가 무섭게 셋이 서측 목욕탕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한시라도 빨리 축약탄을 회수하여 두르난의 연구소로 돌려보내거나, 안전한 곳에서 격발시키지 않으면 둥지의 시설이 상당히 파괴될 가능성이 있었다.
순식간에 서측 목욕탕의 입구에 도달한 세 사람은 욕장으로 이어지는 문 앞에서 멈춰섰다.
“여기 있다는 게 확실한 건가!?”
“가장 가능성이 높을 뿐이다. 여기가 아니라면 다음 순위의 장소로 이동한다.”
“쮸우, 쮸쮸! 쮸…… 해모미 이몸! 쥐떼끼!”
“아니, 각하한테 혼나는 건 나중에 생각하지.”
루칸다가 그렇게 말하며 문을 열려던 찰나. 욕장의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누자베스와 로아의 목소리였다.
그 희미한 목소리를 감지한 루칸다의 몸이 굳었고, 바로 시선을 돌려 스칼렛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필멸종! 뭘 하고 있나!? 얼른 열지 않고!”
“으, 음…….”
이건.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루칸다의 직감이 속삭이고 있었다.
이건, 틀림없는 수라장의 예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