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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짓는 플레이어-155화 (155/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155화

    간화-아릿카사 둥지의 휴일(상편)

    “야, 우렌 못 봤어?”

    우렌이 둥지의 새로운 챔피언으로 영입된 지 이튿날. 루칸다의 방에 로아가 불쑥 찾아와 물었다.

    루칸다는 검을 손질하며 대답했다.

    “침대 밑에 숨겨놨으니까 알아서 가져가라.”

    “죽었어, 이 망할 새끼……!”

    로아가 루칸다의 방에 성큼성큼 들어오더니 바로 엎드려 침대 밑을 살폈다. 하지만 우렌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에이 씨…… 없잖아! 어디다 숨겼어!”

    “내 방에 있을 리가 없잖나. 어깨 위에 달린 건 장식품인 모양이군.”

    루칸다는 로아를 놀리는 게 꽤나 즐거운지 낄낄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유쾌해 보이는 루칸다와 달리 로아는 진지하게 화가 난 표정이었다.

    루칸다는 검을 손질하던 걸 멈추며 로아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그 자식이 나를 속였어! 이거 말이야, 이거! 처음부터 나하고 각하 사이를 시기하고 있었던 거야.”

    “흠…….”

    로아가 가져온 건 고급스러운 실크로 만든 주머니였다. 그 안에는 자색의 고운 가루가 한 웅큼 들어 있었고 말이다.

    “이건 우렌이 온 날 나눠준 선물이군.”

    “그래!”

    선물을 받은 건 로아뿐만이 아니었다.

    모두 같은 선물은 아니지만, 루칸다와 스칼렛도 우렌에게서 하나씩 선물을 받았다.

    선배 챔피언들에 대한 예우라며 준비해 온 물건들이었다.

    그리고 선물을 받고 가장 기뻐했던 건 로아였고 말이다.

    ‘백경의 쓸개 가루. 꽤나 귀한 물건이었지.’

    루칸다는 이 가루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평소엔 무취의 가루에 불과하지만, 일정한 온도 이상에 노출되면 특별한 향을 내는 가루다.

    이 가루의 용도는 매우 단순하고 심플하다. 바로 강력한 최음 효과다.

    체온이 높은 곳에 얇게 펴서 바르면, 상대가 누구라도 짐승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분명히 각하하고 사이가 좋아지는 가루라고 했잖아? 너도 들었지?”

    “그래. 이 가루의 효과는 확실할 것 같다만.”

    “그, 그런데 오히려 역효과였어…….”

    로아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어젯밤의 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번 작전을 성공시키고 돌아온 포상으로 사이 좋게 목욕을 한 것까진 좋았다.

    하지만 침대에 눕기 전에 이 가루를 사용한 게 화근이었다.

    “각하가 갑자기 숨이 거칠어지더니…… 막 바들바들 떨고…….”

    “잠깐, 그런 얘기까지 상세하게 할 필요는 없다만. 젠장! 듣고 싶지 않다! 역겹다!”

    “들어봐! 그래서 내가 괜찮냐고 물으려고 가까이 다가가니까…… 비명을 내지르면서 나를 밀쳐내고, 그대로 도망가버렸어!”

    로아는 거의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울먹이며 말했다. 커다란 눈망울에 이미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이 가루 때문에…… 이거 때문에 각하한테 미움받은 게 틀림없어! 우렌의 함정이었던 거야!”

    “환장하겠군.”

    루칸다는 대충 어젯밤의 상황을 유추할 수 있었다. 그리고 솔직히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각하의 정신력이 기괴할 만큼 강력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백경의 쓸개 가루를 사용한 최음 효과까지 버텨내다니…….’

    매일 같이 서큐버스는 언제 오냐고 노래를 부르는 누자베스지만. 아마도 그 정도의 정신력이라면 어줍잖은 서큐버스의 음몽에도 완전 면역 상태일 것이다.

    솔직히 어젯밤의 자제력만 보자면 누자베스는 초극에 도전할 정도의 자격을 갖췄다고 볼 수 있었다.

    “각하는…… 이제 내가 싫으신 걸까……?”

    로아는 풀죽은 강아지처럼 고개를 떨구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런 로아를 바라보며 루칸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봐, 로아. 진지하게 묻는데 사이가 좋아진다는 건 어디까지 상정하고 있지?”

    단순한 사실 관계의 확인이다.

    로아의 지식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한 후 얘기를 이어나갈 생각이었다.

    “응? 그게 무슨 의미야?”

    “그, 젠장 설명하기도 역겹군 진짜. 그래, 포옹! 포옹이나 입맞춤까지 하고 싶은 건가?”

    “이, 입맞춤……!?”

    로아가 얼굴을 붉히며 화들짝 놀랐다.

    생후 7개월의 암컷 고블린도 저렇게 놀라지는 않을 것이다.

    ‘이 자식…… 절망적일 정도의 수준이군.’

    루칸다가 눈을 질끈 감으며 숨을 고르는 동안 로아가 입술을 오물거리며 대답했다.

    “각하께서 나랑 하고 싶으시다면…….”

    여기서 적나라한 현실을 알려줄 것인가.

    아니면 적당히 둘러대서 로아의 순수함을 지켜줄 것인가.

    그 선택의 기로에서 루칸다는 깊게 신음했다.

    ‘어머니시여…… 어째서 제게 이런 시련을 주시는 겁니까…….’

    루칸다는 각오를 다진 후 짧게 입을 열었다.

    “젖소 축사로 따라 와라. 그 다음이 뭔지 보여주마. 지금 막 고블린 서비스 부대원들이 사용하고 있을테니.”

    “너하고는 우유 안 마셔.”

    “나도 네놈하고는 안 마신다! 젠장! 애초에 우유 마시고 취하는 건 네놈들밖에 없고!”

    루칸다는 짜증스럽게 뒷머리를 긁적이며 앞서 방을 나섰다.

    * * *

    “우렌. 내 선물은 서큐버스가 좋았는데. 누자베스는 서큐버스가 받고 싶었는데. 각하는 서큐버스가 좋았을 것 같네. 아아, 서큐버스 어디 없나?”

    “각하…… 서큐버스는 그냥 음몽을 보여주는 것뿐이지 실제로 뭔가를 해주진 않습니다.”

    “닥쳐! 이 음흉한 돼지 자식아! 각하는 그냥 음몽을 꾸고 싶은 거라고! 각하를 아주 파렴치한 호색한이라고 생각하는 거냐! 이 자식 이거, 지금 보니까 각하를 아주 아리카의 엘베제가 아니라 아리카의 난봉꾼 애니바디 페니스 변경백이라고 생각하는 거 아냐!?”

    “자, 잠깐 왜 갑자기 혼자 찔려서 발작하는 겁니까!?”

    “그리고 너 임마, 우리 남동생한테 뭘 준 거야!? 어? 내가 어제 까딱했으면 여수 갈 뻔 했다고! 각하 정도의 자제력이 아니었으면…… 무발…… 아니, 이런 말을 하면 안 되지. 클레임 메일 오니까.”

    누자베스는 어젯밤 로아가 애절하게 올려다 보는 눈빛을 떠올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쨌든 그건 오늘 압수해야겠어. 안 그러면 소설 타이틀도 변경해야 될 거 같아. 던전 짓는 플레이어가 아니라, 여수 가는 플레이어로 말이야. 아니면 던전 짓는 피코겠지, 젠장 알게 뭐야.”

    불평을 투덜거리며 담배를 뻑뻑 피우고 있는 누자베스의 앞에서 우렌은 주먹보다 조금 작은 크리스탈은 꺼내들었다.

    그리고 허공에 놓고 가볍게 던지자 크리스탈이 둥둥 떠서 회전하기 시작했다.

    “뭐하는 건데?”

    “아니, 이건 그냥 제 취미입니다.”

    우렌이 손짓을 하자 크리스탈이 그에 응하듯 허공에서 이동하며 누자베스의 주변을 맴돌았다.

    “이 크리스탈을 사용해서 현재의 풍경을 기록해 둘 수 있습니다. 저 같은 중년 사내는 이런 소소한 취미 생활이라도 있어야 무료하지 않죠.”

    “아, 드론 같은 거란 말이지?”

    “드론이 뭡니까?”

    “아무것도 아냐. 서큐버스 얼른 데려오란 소리야.”

    아무래도 우렌은 크리스탈을 이용해서 누자베스를 촬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누자베스는 크리스탈을 향해 손으로 브이자를 그리며 방긋 웃어 보였다.

    “야, 우렌. 그럼 모처럼이니까 이 각하가 개쩔었던 얘기 해줄까? 이거 소리도 녹음 되냐?”

    “소리도 기록됩니다.”

    “그래? 그럼 각하가 이계의 용사하고 2:1로 다이다이 뜬 얘기 해줄까? 각하가 그 새끼들 면상을 씹다 뱉은 만두처럼 패버렸는데, 그게 어떻게 패줬냐면…….”

    우렌은 누자베스의 얘기를 경청하듯 연신 맞장구를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누자베스가 더 신나서 이런저런 허세 섞인 얘기를 떠드는 동안, 스칼렛이 잠에서 깨어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 * *

    흡혈귀의 하루는 이른 저녁에 시작된다.

    장미관 속에서 짙어지는 어둠을 한껏 음미한 후, 의식이 완전히 돌아오면 천천히 관밖으로 나와 행동을 시작하는 것이다.

    이 일련의 작업은 고요함과 적막이 필수적으로 동반되어야 한다. 특히나 시간 그 자체의 심미성을 중시하는 스칼렛은 더욱 공을 들이는 편이었고 말이다.

    “쮸, 쮸쮸! 쮸우-!”

    스칼렛의 의식이 절반쯤 돌아왔을 무렵.

    관짝 밖에서 소음이 들려왔다. 스칼렛은 미간을 찌푸리긴 했지만, 이 정도의 소음으로 하루를 망칠 수는 없었다.

    다시 천천히 의식을 가라 앉히며, 정신을 평온하게 가다듬으려던 찰나.

    “쮸!! 쮸쮸!”

    햄토리의 다급한 외침 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얼마나 뛰어다니고 있는 건지 관속에서도 쿵쿵울리는 게 등으로 전해질 정도였다.

    ‘오늘따라 시끄럽군. 이 시간의 내 침실에는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말해뒀는데.’

    스칼렛은 한숨을 푹 내쉬며 관짝의 뚜껑을 발로 거칠게 밀어냈다.

    “무슨 일인가, 햄토리 공? 흡혈귀의 단잠을 방해하는 건 그다지 현명한 일이 아닐 터인데.”

    스칼렛이 관 밖으로 나온 후. 반쯤 열린 관짝의 뚜껑에 걸터 앉으며 묻자. 햄토리가 스칼렛의 앞으로 호다닥 뛰어와 방방 뛰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쮸! 쮸쮸! 쮸우으, 쮸? 쮸- 쮸- 쮸우- 쮸쮸!”

    “흠흠…… 그래서 내 침실까지 와서 그걸 찾고 있었단 말인가?”

    “쮸!”

    “미안하지만 이 늙은이도 그런 물건을 본 적이 없네. 애초에 여기 와서 찾을 물건이 아니지 않나?”

    스칼렛이 햄토리의 복실복실한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며 그렇게 말했지만. 햄토리는 여전히 안절부절 못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어쩔 수 없구만. 찾는 걸 도와주도록 하지. 둥지 어딘가에 있을테니 말일세.”

    “쮸쮸!?”

    “이 늙은이가 언제 빈말한 적이 있었나?”

    스칼렛이 빙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속살이 비쳐 보이는 시스루 란제리 위에 한 치수 큰 가디건을 대충 어깨에 걸쳤다.

    “모처럼의 휴일이라 느긋하게 보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일이 생기는구만.”

    “쮸우, 쮸!”

    “괜찮네. 햄토리 공의 물건을 찾을 겸 둥지나 오랜만에 둘러보도록 하지.”

    스칼렛이 햄토리와 함께 침실을 나서자, 복도에서 곧장 우렌과 마주쳤다.

    우렌은 스칼렛을 발견하자 마자 예를 갖춰 허리를 숙였다. 스칼렛은 지면을 향하고 있는 우렌의 시선이 닿을 만큼 다가가, 오른쪽 발의 발끝을 왼쪽 뒤꿈치 쪽에 톡 쳤다.

    예를 갖춘 걸 확인했으니 고개를 들어도 된다는 의미였다.

    “이제는 같은 둥지의 챔피언이니 그렇게 격식을 차리지 않아도 되네.”

    “아직도 상속 신분은 익숙해지지가 않는군요. 군부에도 한 분이 계신 탓에.”

    “브람스에게 얘기는 들었지. 하지만 나와 그 아이는 항렬이 다르네만. 동급 취급을 당하면 조금 불쾌하군.”

    “주의하겠습니다.”

    거기까지 말한 후 스칼렛은 우렌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고 있는 크리스탈을 발견했다.

    “그건 뭔가?”

    스칼렛이 공중에 떠다니는 크리스탈에 흥미를 보였고, 우렌이 바로 설명을 했다.

    설명을 들은 후 스칼렛은 고개를 끄덕였다.

    “신기한 물건이 많이 생겼군. 시간을 기록할 수 있다니, 어쩌면 내가 도달하려 했던 극의에 닮았을지도 모르겠어.”

    스칼렛은 인자한 미소를 지어보인 후 이어 말했다.

    “그럼 이 늙은이는 할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보겠네. 멋진 휴일을 기록해주게.”

    “쮸!”

    스칼렛이 그렇게 떠난 뒤.

    우렌은 다음엔 어디를 촬영할지 고심하다, 젖소 축사 쪽을 뒤늦게 떠올렸다.

    오늘은 고블린 서비스 부대의 고블린들이 사용하는 날이라는 얘길 미리 들었던 것이다.

    좋은 작품을 찍을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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