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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짓는 플레이어-154화 (154/210)

던전 짓는 플레이어 154화

잔불 정리(1)

“각하, 간만에 보니 더욱 안색이 좋아지셨습니다.”

“우리 루칸다는 언제나 말에 가시가 있네. 누군가 뺑이치는 동안 누구는 둥지에서 망고 빨고 있었다고 말하고 싶은 거냐.”

“하핫,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말해두지만.

억울한 마음에 솔직하게 토로하자면 말이다. 루칸다와 로아가 유바흐에서 별도의 작전을 수행하는 동안 나도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병력의 규모가 커지며 혼자 전부 컨트롤하는 것만으로도 중노동 그 자체다.

게다가 해가 뜰 때쯤이면 스칼렛 씨의 사적인 요구에도 응해줘야 했고 말이다.

“일단 이즈미 령의 병력은 적당히 이 구역에서 묶어두고 있는데.”

발걸음을 옮기며 루칸다에게 지도를 펼쳐 보였다. 루칸다는 담배를 입술 사이에 끼운 후 방어선이 그려진 지도를 바라봤다.

“타우저 백작도 꽤나 속이 타겠군요. 곧 우기가 올 텐데 이대로 방어선을 뚫지 못한다면 건기가 올 때까지 시간이 지체될 겁니다.”

“그치? 완전 우주 방어 태세라니까. 지금 적당히 병합한 13차폐구의 컴플렉스 시설에서 뽑아내는 병력만으로도 교환비로 살짝 앞서고 있어.”

이대로 나와 내 둥지 ‘아릿카사’가 완전히 13차폐구를 흡수하는 건 이즈미 령의 지배자인 타우저 백작에게 그리 달갑지 않은 전개일 것이다.

우기가 곧 올 테고, 우기 동안 아리카 섬과 솔리엔 령을 잇는 보급선을 확보하고. 그대로 13차폐구의 둥지를 완전히 흡수한다면?

다음 건기 때부터 공방의 위치가 뒤바뀔 것이다. 사자성어로 ‘일전공세’라는 말이다.

지금이야 타우저 백작이 우세하겠지만, 그때가 된다면 녀석이 개 흉내를 내는 꼴이 되겠지.

“하지만 우리쪽 진영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건 아니라.”

반토막이 난 담배를 지면에 내뱉으며 말했다. 방어선의 후열과 동측 고지대를 맡고 있는 건 에르멜의 할칸 기갑 연대였다.

“이 중부를 좁게 보자면 문제가 없다. 하지만 바체트 열도 전체를 넓게 보자면 이쪽 역시 시간제한이 걸린 처지가 아니냐?”

“확실히.”

역시나 루칸다다.

그 동안 자리를 비우고 있었지만 이내 내 의도를 읽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르멜의 기갑 연대를 우기가 끝날 때까지 이곳에 묶어둘 수 없다는 말이군요.”

“그래, 우리가 중부만 쏙 빼먹고 시마이 칠 거면 상관없지만. 다음 페이즈를 위해 밑준비를 할 사람도 필요하잖아.”

“하지만 기갑 연대의 병력이 빠지는 순간 타우저 백작도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입니다.”

“어때? 에르멜의 기갑 연대를 빼고 우리가 버틸 수 있을까?”

만약 에르멜이 수도로 돌아가 있는 동안 13차폐구를 타우저 백작에게 빼앗긴다면 본말전도다.

본전도 못 찾는 일이 된단 말이다.

루칸다는 미간을 찌푸린 채 담배를 깊게 빨아들였다.

“시간이 필요합니다. 병력 규모와 생산 시설이 얼마나 되는지 파악하는 게 우선입니다.”

“그래! 각하도 그게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지금까지 그걸 알아올 놈이 없어서 얼마나 답답했는지…… 젠장, 보고 싶었잖아 루칸다.”

“그럼 오늘 밤부터 바로 비르겐슈타인 부대를 운용하여 정보를 모아 보겠습니다. 각하의 호기심 하나나 둘쯤 해결하는 건 일도 아닙니다.”

정말이지 마음이 놓이는, 편안한 목소리다. 이렇게나 나를 안심시켜주는 챔피언이 루칸다 외에 또 있을까?

“루칸다. 솔직히 내가 암컷 고블린이었으면 지금 팬티 벗었다.”

“영광이지만 사양하겠습니다, 각하.”

루칸다는 킬킬 웃으며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그보다 로아와는 만나 보셨습니까?”

“아니, 일단 새로운 챔피언부터 만나서 얘기 좀 나눠보자고. 로아는 느긋하게 칭찬해 줘야지.”

이번에 루칸다와 로아를 파견하여 얻어 온 새로운 챔피언이 막 둥지에 도착한 참이었다.

“그나저나 내 둥지의 뉴페이스가 누구일까? 각하는 너무 두근거리네. 혹시나 가슴이 멜론만한 서큐버스인가?”

“오, 가슴은 꽤 컸습니다.”

“그만해! 우렌인 거 아니까 그만하라고! 아저씨의 축 늘어진 가슴 상상했잖아 짜식아!”

그렇다.

이번에 내 둥지 아릿카사에 새롭게 전입 오게 된 챔피언은!

바체트 열도에서도 둘째가라면 서러운 하이브 마인드 사냥꾼 ‘카쿠쟈의 우렌’이었다.

곧 닥쳐올 전란의 시대에서 가장 필요한 인재 아닌가? 어차피 하이브 마인드 놈들끼리 투닥거리는 세기말이 펼쳐질 테니까.

전쟁 군주 찢어 죽이는 걸 전문으로 삼았던 장교를 손에 넣은 건 큰 수확이었다.

* * *

루칸다와 함께 발걸음을 옮긴 곳은.

우렌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는 중앙 화랑이었다. 이 둥지에서 유일하게 자연광이 들어오게 만들어 놓은 곳이다.

높게 깎아 올린 벽면은 화려한 석재 세공이 새겨져, 뚫려 있는 천장에서 흘러들어온 햇살이 반사되는 광경이 장관이다.

우렌은 화랑의 중간에 서서 쏟아져 흘러 들어오는 햇살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근처까지 다가가자, 우렌은 여전히 시선을 하늘로 향한 채 입을 열었다.

“이리도 작은 땅굴에서 올려다보자면 저 광활한 하늘도 이렇게나 좁게 보이는군요.”

“카쿠쟈 경. 나는 그리 학식이 깊지 않은 전쟁 군주라 선문답에 재주가 없습니다.”

“딱히 선문답을 하고 싶었던 건 아닙니다.”

“그럼 둥지의 토목 공사에 관한 견해를 말하고 싶었던 겁니까?”

“서는 곳이 달라지면, 보이는 풍경도 달라지는 것이란 사실을 새삼스레 다시 깨달은 것뿐이죠.”

우렌은 빙긋 웃으며 내쪽을 바라봤고, 한쪽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총본영 직계 중앙감찰대 소속의 은장 상무관 우렌입니다. 편히 우렌이라 불러주시길.”

“이렇게 다시 만나는 건 세 번째인데, 내 소개가 다시 필요한가?”

우렌의 어깨를 가볍게 붙잡아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포 힐케인 섬에서 훼방도 놔주고, 이곳 13차폐구에서도 멋드러지게 눈탱이 때린 놈을 이렇게 다시 보니 감회가 새롭네.”

“좋게 평가해주시니 영광입니다.”

“뭐…… 좋은 평가긴 한데. 솔직히 미심쩍지 않았냐? 영입하는 척 하면서 붙잡아 죽이려는 속셈이었으면 어쩌려고?”

우렌은 내 질문의 사뭇 의외인지 눈을 살짝 크게 떴지만, 이내 대답을 돌려줬다.

“각하의 왼편에 서있는 저 고블린이 그런 소인배를 섬길 만한 사내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지. 우리 루칸다가 주인 고르는 입맛이 꽤나 까다로워서, 자격 미달이면 내 머리통이 제대로 몸에 붙어 있지 않았을 걸.”

내가 앞서 화랑을 걷자, 우렌이 오른편에서 두어 발자국 떨어져 따라왔다.

“전쟁에선 모든 게 아쉬워. 식량도, 탄약도, 병기 물자도! 그리고 병력도 언제나 아쉽지. 아마도 전쟁과 만전은 물과 기름처럼 도저히 섞일 수 없는 개념일 거야. 그치?”

“그렇다면 그 중에서 가장 아쉬운 것이 무엇입니까, 각하?”

“믿고 병력을 맡길 수 있는 야전 지휘관. 그리고 곧 다가올 전란의 시대에서 빛을 발할 수 있는 전문가가 가장 아쉽지.”

우렌 쪽으로 시선을 보내며 그렇게 대답하자, 우렌은 내 대답에 납득한 것인지 고개를 끄덕였다.

“송곳 전쟁에서 세운 전공이 절반만 사실이라도, 감탄할 만하지만. 그보다 더 높게 사고 싶은 건 역시나 비아 엘티나에서의 활약상이거든.”

대수림의 여왕 유리아와 마제 투아하는 중부를 꽉 잡고 있는 강호 세력이다.

솔직히 그 두 녀석만 없으면 중부는 어중이떠중이 같은 잔챙이 놈들의 소굴 아닌가?

서쪽은 마왕군. 동쪽은 글로레나 왕조의 군대. 정예 병력의 액기스가 응축된 곳이라 아직 섣부르게 손을 댈 수는 없지만.

중부는 그 두 녀석만 해치우면 대단할 것도 없는 동네다.

“우리는 다음 건기가 오기 전까지 중부를 통일시킬 준비를 끝마친다. 그리고 대수림과 비아 엘티나 지역을 온전히 손에 넣기 위해 우렌 경의 경험과 지식이 필요할 것 같은데.”

“솔직히…….”

“응? 뭔데? 편하게 말해.”

“솔직히 제정신이 아닌 것 같군요.”

“괜찮아, 더 솔직하게 말해 봐.”

“대수림의 여왕과 한판 붙고 싶다니, 또라이 같습니다.”

“이 새끼가…… 편하게 말하라고 했더니 선 넘네. 루칸다 이거 형아가 참아야 되냐?”

“아니, 솔직하게 말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 그렇게 말은 했지만, 보통 상관이 편하게 말하라고 하는 건 ‘최소한의 가식’을 덧붙이라는 의미란 말이다!

우렌 이 새낀…… 정규군 소속이었으면서 이런 상식도 모르는 건가? 아니면 이제부터 정규군도 아닌 하꼬 민병대라고 너무 마음을 편히 먹은 거 아닌가?

“……그래. 우렌, 좋은 의견이다. 우리는 매우 진지한 또라이 새끼들이거든. 이 근방에서 꽤 유명한 정신병자들이지. 그래도 어쩌겠냐? 대수림의 여왕이 무섭다고 솔리엔 령에 찌그리고 앉아 오줌이나 지리고 있을 순 없잖아.”

“그다지 현명한 계획은 아닌 것 같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현명했던 적 없어. 그리고 지금 론트라 섬의 13차폐구를 짓밟고 있는 게 누군지. 이 결과만이 명확하게 남았네.”

“만용과 요행. 객기와 운기라. 그런 불분명한 확률에 명운을 걸고 싶으신 겁니까?”

우렌은 짐짓 책망하는 듯한 어조였다.

마치 내 명운만이 아니라, 다른 동포들의 삶까지 그런 불분명한 무언가에 걸고 싶냐고 되묻는 듯 말이다.

“현명한 자는 여기 준비했고.”

우렌의 어깨를 가볍게 다독이며 시선을 루칸다 쪽으로 돌렸다.

“용기 있는 자도 미리 준비해 놨고.”

루칸다는 나와 시선을 마주치고는 빙긋 웃어 보였다.

“그렇다면 남은 건 철학과 신학의 영역이군. 나는 뭘 준비해 올까?”

멈춰 선 우렌에게서 네다섯 발자국 떨어진 후 빙글 돌아 시선을 마주했다.

우렌의 시선을 한 치도 피하지 않고, 담배를 입에 물었다. 불을 붙여 깊게 빨아들인 후 천천히 연기를 토해내며 말했다.

“경세제민의 의지인가? 존재하는지 어떤지도 모를 극락정토의 약조인가? 태양이 지켜보고 있다며 겁박하거나, 입은 적도 없는 밤의 은혜를 들먹이며 보은을 재촉할까?”

모조리 농담으로써 성립할 수도 없는 동기에 불과하다.

“단순히 생각하자고, 우렌. 나는 자격 없는 놈들에게 세속되는 권리를 눈 뜨고 지켜볼 만큼 뻔뻔하지 않을 뿐이고. 누군가처럼 만민의 평등을 주창한다는 등 낯부끄러운 소리를 떠들고 다니기엔 조금 부끄럼쟁이일 뿐이니까.”

“그렇다면 무엇을 바라보고 계십니까, 아리카의 전쟁 군주여.”

“초극에 닿을 수도 없고, 감히 초극을 꿈꿀 수도 없는 백성들의 삶을 위해 비난의 상징 하나쯤은 마련해 줘야지.”

모두가 몰락할 때.

필요한 건 구원의 빛줄기 따위가 아니다.

스스로의 삶이 비루할 때, 돌팔매질을 할 수 있는 더 비루한 걸인 한 놈이 필요한 법이다. 백성들을 모두 정의로 무장시켜 놓으면, 걸인을 향한 돌팔매질에 그 누구도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겠지.

자신이 정의를 행사하고 있다는 같잖은 만족감에 취해, 스스로의 비루한 삶으로부터 잠시 눈을 돌릴 수 있다면.

인간은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는 생물이었다.

“우렌, 나의 이 또라이 같은 계획을 실현시키는 건 현명하고 용기 있는 자의 몫이라고 생각한다만.”

“하하…… 오자마자 책무가 무겁군요.”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데. 대수림을 정복하는 게 그렇게 어려울 거 같냐?”

내가 묻자, 우렌은 한시의 지체도 없이 하늘을 올려다 보며 대답했다.

“먼저 하늘을 손에 넣으셔야겠습니다.”

우렌이 대답과 함께 꺼낸 두루마리에는 마왕군 내부에서 검토된 후 기각된 사안이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제공권이라…….”

확실히 이건 현재의 패러다임을 앞서 가는 계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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