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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짓는 플레이어-153화 (153/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153화

    코발트 블루(4)

    부웅!

    뭉툭한 도끼날이 밤의 공기를 가르며 날아들었다. 예리함은 부족하지만, 그 속도와 파괴력은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훈련받은 오크가 휘두르는 전투 도끼는 어지간한 종족의 머리통을 일격에 으깨놓기 충분했으니까!

    물론 도끼에 맞았을 때의 이야기다.

    오크 병사가 휘두른 도끼는 로아의 머리카락 끝자락도 스치지 못했다.

    “크악!”

    푸욱!

    로아는 도끼가 뻗어져 나온 순간을 정확히 노려 거리를 좁혔고, 쏜살 같이 목덜미에 단검을 박아 넣었다.

    쑤시고, 단검을 빼서 다음 오크를 향해 달려들기까지 1초도 채 걸리지 않는다.

    이 일련의 살육 작업은 물 흐르듯 부드러웠다. 그 어떤 군더더기도 없었고, 오차도 없었다.

    아무리 오크 병사들이 군사 훈련을 받았다지만. 극한의 수준까지 백병전 능력을 끌어 올린 루스날의 후계에게 상대가 될 리 없었던 것이다.

    반 르낙시아에 속해 있는 고대의 마족들 사이에서도 통용되던 상식이다.

    검을 든 루스날에게 검으로 대응하는 건 얼간이라는 통설 말이다.

    그만큼 루스날은 단순한 헬베르카의 분가라고 치부하기엔 근접 전투 능력만큼은 월등히 뛰어났다.

    루스날의 후계와 검으로 싸워서 승리를 확신할 수 있는 존재는? 윤왕들 중에서도 검의 달인이었던 ‘제필프’ 외엔 없을 것이다.

    윤왕 유스티아의 근접전 능력은 다른 윤왕들과 비교하기 부끄러운 수준이었고. 또 다른 윤왕 루아 카날다는 ‘결투’가 아닌 ‘야습’에 특화된 능력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실제로 루스날의 초대 당주였던 테르미어를 검으로 꺾은 건 제필프 외엔 없었고 말이다.

    어쨌거나 검은 돌도끼 형제단의 오크들과 대장인 차투카의 눈에는 재앙처럼 보였을 것이다.

    지금 당장 둥지로 돌아가고 싶어서 안달이 난 로아의 모습은 악몽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이 자리에 모인 오크 놈들을 최대한 빨리 모조리 죽일 작정일 테니까.

    그리고 우렌도 그런 로아의 모습에 감탄하는 기색이었다. 야전 지휘관인 만큼 우수한 병사를 보는 안목을 지니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모든 장교들이 탐낼만한 장기말이 아니던가?

    “저 예쁘장한 아가씨도 유격대 출신인가? 칼질 한 번 살벌하구만!”

    “그럴 리가. 아무리 르 만타나라도 저런 괴물은 취급 안 해.”

    우득!

    죽은 오크의 목뼈에 걸린 검을 뽑아들며 루칸다가 킬킬 웃었다.

    “그리고 아가씨가 아니라 수컷 놈이다만.”

    “내가 너무 오래 살았나보군. 치마를 걸친 수컷을 보게 되다니.”

    뒤에서 달려든 오크 병사가 우렌을 향해 도끼를 휘둘렀지만!

    카앙!

    우렌은 재빠르게 도끼 자루를 검으로 막으며 오크 병사의 멱살을 붙잡았다.

    “그런 어설픈 뒤치기로 뒤질 만큼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빠악!

    그대로 오크의 얼굴에 호쾌한 박치기를 먹이며 앞으로 나섰다.

    “한 번에 덤벼라 이놈들아! 카쿠쟈의 우렌이 아직 늙어 뒤지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마!”

    호기롭게 소리치는 우렌을 뒤에서 지켜보며 루칸다는 진척도를 가늠했다.

    ‘싸움질은 담배 만큼 끊기 힘든 법이지.’

    처음부터 한 번도 안했다면 모를까.

    수십 년을 전장에 몸을 담고 있던 수컷이 싸움질을 끊을 수 있을 리 없었다.

    그저 죽을 때까지 참고 또 참는 인생을 인내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다시금 불을 붙이고, 그 짜릿함을 느끼게 해준다면.

    지금까지 참아왔던 세월이 얼마나 공허했던 것인지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이 맛을 모르는 수컷들이 불쌍하군. 전쟁이 없었다면, 이 세상에서 전쟁이 사라진다면 정말이지 끔찍하지 않겠나? 얼굴에 분 바르고 변기에 앉아서 오줌 싸는 수컷 놈들밖에 남지 않게 될테니까!”

    “형제단을 위하여!!”

    루칸다는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오크 병사를 똑바로 응시하며 웃음을 머금었다.

    저 명백하고 적나라한 살의.

    그 감정을 고스란히 받을 수 있는 건 전장에 선 사내의 특권이었다.

    우득!

    도끼날이 루칸다의 목에 닿기 전에 검이 오크의 흉부를 꿰뚫었다. 검붉은 선혈이 루칸다의 얼굴에 흩뿌려졌고, 그 뜨겁고 비릿한 실감이 투기를 돋구었다.

    “다행이군, 오크 형씨. 사내로 죽을 수 있어서.”

    단검을 뽑아들며 숨이 끊어진 오크를 발로 밀쳐냈다. 루칸다는 담배잎을 꺼내 우적우적 씹으며 차갑게 식은 밤공기를 한껏 들이마셨다.

    어느새 로아와 우렌이 차투카의 양측면을 포위하듯 섰고, 차투카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부들부들 떨었다.

    “고작, 고작 세 놈에게! 검은 돌도끼 형제단이……!!”

    상상도 못 했던 전개다.

    송곳 전쟁에서 아무리 이름을 떨쳤다고는 해도 이제는 다 늙은 노인네들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루칸다와 우렌은 차투카의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었을 만큼 예리했다.

    세월의 풍파따윈 겪은 적이 없었다는 듯 젊었을 적의 투기를 간직하고 있었다.

    “나, 나를 죽인다면…… 나흐 만테아를 적으로 돌리게 될 것이다…….”

    차투카는 짐짓 위협하듯 ‘나흐 만테아’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그 단어에 가장 먼저 반응한 건 우렌이었다.

    “역시나 이 근방 깡패 놈들의 연줄은 다 그쪽으로 수렴되는구만.”

    “나흐 만테아?”

    로아가 되묻자, 우렌이 대답했다.

    “남쪽의 험지를 무단으로 점거하고 있는 도적놈들이지. 아직 큰 위협은 아니니 대충 방치하는 중이지만.”

    “뭐야, 이 오크 새끼? 그깟 도적놈 무리의 이름을 대면 누가 쫄아서 꼬리 말고 굽실거릴 줄 알았냐?”

    “끄악!”

    로아가 차투카의 앞으로 다가가 단검의 손잡이 부분으로 이마를 내리찍자, 차투카가 비명을 내지르며 물러났다.

    “도적 무리가 아니다! 설마 나흐 만테아를 모르는 건가…… 이래서 외지 놈들이란…….”

    “그게 뭔데? 대장이 마왕 할애비라도 하나도 안 무서워.”

    빡, 빠악!

    로아가 이번엔 단검을 거꾸로 쥐고 차투카의 머리를 후려갈겼다. 차투카는 얻어맞은 이마를 부여잡은 채 울상이 되어 소리쳤다.

    “후, 후회하지 마라! 나흐 만테아의 두령은…… 송곳 전쟁에서 악명을 떨쳤던 칼베라 님이시다!”

    “칼베라?”

    “유격대의 선봉대장이로군.”

    우렌과 로아가 루칸다 쪽을 돌아봤고.

    루칸다는 ‘칼베라’라는 이름을 듣더니 흥미가 동한 것처럼 차투카 앞으로 터덜터덜 다가왔다.

    차투카도 루칸다를 발견하고는 기성을 내질렀다.

    “그, 그래! 네놈, 고블린놈! 루칸다라고 했지? 칼베라 님께서 네놈 만큼은 갈기갈기 찢어 죽이실…… 끄갸아아악!”

    푹푹!

    루칸다는 무기질적인 눈빛으로 차투카를 바라보며, 구두굽 손질용으로 지니고 있던 송곳을 어깨에 두 번 쑤셔넣었다.

    구멍이 뚫린 어깨에선 출혈이 심하지 않았지만, 연골이 찢어진 덕분에 극심한 고통이 번졌다.

    “오크. 지금부터 말을 아주 잘 해야될 거야. 내 질문에 똑바로 대답하지 못하면 죽을 때까지 전신의 연골을 모조리 찢어주마.”

    “크, 크하하핫! 마, 마음대로…… 해라! 이미 칼베라 님에게 보고가 전해졌을…… 것이다! 네놈이 어디로 도망치든, 나흐 만테아가 네놈의 목을 노리고 쫓을 것이다!!”

    대화를 듣던 로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칼베라가 누구인데? 이 동네 양아치야?”

    “르 만타나 유격대의 3인자쯤 되는 놈이었지. 아가씨는 혹시 송곳 전쟁 때 바체트 열도에 없었나?”

    로아는 우렌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이 촌동네로 온지는 얼마 안 되는데. 그리고 한 번만 더 아가씨라고 부르면 그 주둥이를 귀까지 찢어줄게.”

    “성질머리도 불 같군! 하핫! 성깔을 안 죽이면 다가오던 남정네들도 죄다 도망치겠어.”

    “그, 그래……?”

    로아는 누자베스가 겁을 먹을 만한 태도를 취했었는지 곰곰이 되짚어보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칼베라. 그리운 이름이군. 그 꼴통 자식이 여전히 살아 있었을 줄이야.”

    “대단한 놈이야?”

    “칼질은 끝내줬지. 그래서 혹시나 제필프의 그릇일지도 모르니 유격대로 영입해서 감시하고 있었는데.”

    “결과는 어땠는데.”

    “제필프의 그릇이었으면 이미 내 손에 죽었겠지. 멍청한 질문은 그만둬라, 로아.”

    3인의 윤왕은 결코 동맹 관계가 아니다.

    한 명의 윤왕이라도 윤회를 완성시킨다면, 이 세상의 절반을 집어삼킬 만큼 강대한 존재가 된다.

    그렇기에 윤왕들은 자신 외에 다른 윤왕이 윤회를 완성시키는 걸 극도로 두려워하고 있었다.

    루칸다도 예외는 아니었고 말이다.

    아마도 칼베라가 제필프의 그릇이라는 확신이 있었다면, 어떤 식으로든 살려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 녀석이 이딴 촌구석에 숨어서 뭘 하고 있을지 조금 궁금한데. 나한테 복수를 하기 위해 동네 깡패 놈들을 긁어모으고 있었던 건 아닐 테고.”

    루칸다는 송곳의 끄트머리를 차투카의 눈알 앞에 대고 흔들면서 추론을 정리해 나갔다.

    “대부업과 허가되지 않은 환각류 식물의 유통이라. 소인배 놈들이 딱 할 만한 짓인데. 칼베라가 과연 그 돈을 어디에 쓰고 있을까?”

    “저, 절대로 말하지 않겠다……!”

    “왕녀를 부활시켜서 한판 더 해볼 작정인 걸까?”

    루칸다는 그 짧은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생물의 눈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많은 정보를 말해준다.

    루칸다가 왕녀의 이야기를 입에 담은 순간, 차투카의 눈빛에서 많은 정보를 읽어낼 수 있었다.

    ‘빙고였군.’

    루칸다는 차투카의 뒤통수를 반대편 손으로 꽉 붙잡아 끌어 당겼다.

    “곧 칼베라 놈도 보내줄 테니까. 지옥의 밑바닥에서 칼베라와 함께 깡패 놀이라도 즐기길 기도해 주지.”

    “제, 제발…… 제발 캬아아아악!!”

    콰드득!

    송곳이 눈알을 뚫고 들어간 순간 차투카가 발작을 일으키듯 사지를 허공에 휘저었다. 루칸다가 송곳을 더 깊숙히 넣으며 안쪽에서 휘젓자, 이내 미약한 경련만을 일으키며 축 늘어졌다.

    “성질 많이 죽었군, 유격대장. 너무 자비롭게 죽이지 않았나?”

    우렌이 차투카의 시체를 발로 걷어차며 그렇게 말하자. 루칸다도 씨익 웃으며 손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늙어서 그렇지. 늙으면 성격이 유순해진다니까. 아니면, 모난 늙은이는 일찍 뒤져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고.”

    이걸로 폐장검도 되찾았고, 루칸다를 노리던 검은 돌도끼 형제단도 모조리 괴멸되었다. 그렇게 진짜 목적이었던 우렌의 영입만이 남게 되었다.

    “즐거웠나?”

    루칸다가 물었고.

    우렌은 한참 응어리져 있던 답답함을 토해내듯 깊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더 없이 즐거웠네.”

    사내가 사내로써 숨쉴 수 있었던 밤이었다. 남편으로써, 혹은 아버지로써 살아올 수밖에 없었던 우렌이 꿈을 꿀 수도 없었던 밤이었다.

    “사내의 삶이란. 결국은 얼마나 잘 쑤시는지가 문제지. 전장에서도, 침대 위에서도 말이야.”

    “아무것도 아닌 삶이로군.”

    “아무것도 아닌 삶이 우리의 전부일세.”

    “유격대장이 그런 말을 하니 묘하군. 칼질이야 말로 귀관의 전부가 아니었던가?”

    “그래, 전부지. 다른 사내들이 조금 알아보긴 하겠지. 호화로운 저택에서 머물고, 근사한 저녁을 먹고. 하지만 가족은? 없네. 아내? 없지. 아이? 있을 리가 없어. 뭔가를 남길 수 있는 삶을 꿈꿔 본 적은 없네.”

    두어 걸음 물러나 있던 로아가 팔짱을 낀 채로 이어 말했다.

    “정착할 만한 곳도 없을 테고, 자신을 소중히 여겨주는 사람과 함께 보낼 수 있는 밤도 없겠지. 믿을 만한 친구 따위를 기대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은 확실히 아니야. 하지만 동시에 모욕을 참을 필요도 없고, 적도 없지.”

    “적이 없어?”

    우렌이 피식 웃으며 한쪽 눈을 찌푸렸다.

    로아는 어깨를 으슥이며 대답했다.

    “살아 있는 놈은.”

    “오래 살 놈도 없지 않겠나?”

    루칸다가 이야기를 덧붙인 후 우렌을 향해 똑바로 시선을 던졌다.

    “산수의 문제일 뿐이네. 자네의 아들은 명예를 이해할 만큼 장성했고.”

    폐장검이 박힌 채 기절한 피에르 쟝을 슥 돌아보며 이어 말했다.

    “신뢰를 버린 상대에게 지켜야 할 의리와 의무는 없겠지. 무엇이 자네를 이 좁은 철창 안에 가두고 있는 건가?”

    그 말에 오랫동안 막혀 있던 숨통이 트였다. 지금 이 순간이 하룻밤의 꿈으로 끝나느냐, 죽음 직전까지 이어지는 환상으로 남느냐.

    그 선택의 기로에서 우렌의 대답은 하나뿐이었다.

    “시시한 싸움터라면 사양일세.”

    “늙어서 그런지 기우가 심하군.”

    “어디 농민들이라도 구하러 가는 건가?”

    “그건 기회가 되면.”

    루칸다는 우렌의 오른손을 잡아끌며 끌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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