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짓는 플레이어-152화 (152/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152화

    코발트 블루(3)

    “친애하는…… 박태준 팀장님께. 지금 팀장님께서 이 편지를 읽으실 때쯤이면, 아마도 저와 연락이 두절된 채 업로드할 원고도 받지 못하고 계시겠죠. 댓글란을 안 봐도 눈에 훤합니다.”

    간만에 모국의 언어로 편지를 쓰려니 도저히 한국어가 잘 생각나지 않았다. 집무실의 중앙에 놓인 책상 앞에 앉아 펜을 천천히 움직였다.

    이렇게라도 중얼거리지 않으면 도저히 한국어가 떠오르지 않으니 어쩔 수 없었단 말이다.

    “아마도…… 저는, 팀장님한테…… 원고만 받고, 완결이 날 때까지 코코아페이퍼에 런칭은 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겠지만…… 음, 하긴. 이 자식은 내 말을 무슨 개 짖는 소리라고 생각하고 있었지.”

    이번에 작성하고 있는 편지는 상황 ‘B-0211’에 해당하는 대안책이었다. 이세계로 끌려온지 꽤 시간이 지났고, 앞으로 언제 본래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을지 짐작도 하지 못하는 상태다.

    만약 도중에 한 번 본래의 세계로 넘어갔다올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면, 지금까지 쓴 원고를 모두 박태준 팀장에게 보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편지는 박태준 팀장이 내 말을 무시하고 멋대로 런칭해 버렸을 때를 상정하고 있었다.

    “저는 지금도 원고를 쓰기 위해 이 빌어먹을 곳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습니다. 결코 고료를 받아 여친과 해외 여행을 다니고 있는 게 아닙니다……. 혹여나 독자님들이 오해할 수도 있으니 원고를 한두 편 정도 남겨놨다가 크리스마스날에 꼭 업로드해 주십셔…….”

    거기까지 쓴 후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들어보자. 반대편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있던 스칼렛이 잠에서 깨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피웅덩이처럼 넓게 퍼진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가다듬으며, 스칼렛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구한테 편지를 보내길래 혼자말까지 중얼거리는 겐가?”

    “전에 얘기했잖냐.”

    “주군이 원래 다른 세계선의 작가라는 얘기였지. 그 기괴한 망상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모양이군.”

    “망상이라니…… 너 스칼렛 진짜 나하고 원래 세계에 다녀오면 알게 되겠지만. 망상이 아니라고 말이야.”

    스칼렛은 시시한 농담을 들은 것처럼 어깨를 가볍게 으슥였다.

    저건 명백하게 ‘그래그래 그렇다고 치자’라는 제스처다. 주군을 향해 저런 건방진 태도를 취하는 챔피언이라니.

    아무래도 교육적 측면의 훈육과 체벌이 필요한 모양이다. 아니, 딱히 침대 위에서 뭘 하겠다는 소리가 아니다.

    “…….”

    그리고 이번에도 내 머릿속을 읽은 건지 스칼렛이 빙긋 웃으며 소파 위에서 스르륵 내려왔다.

    “오호라. 어떤 식으로 혼내줄지 사뭇 기대가 되네만. 침대로 자리를 옮기겠나?”

    “이, 이러지 마세요, 스칼렛 씨…… 이미 박태준 팀장이 코코아페이퍼에 런칭시켰을 테니까…… 이런 전개는 곤란해요.”

    스칼렛은 키득키득 웃으며 고양이처럼 폴짝 뛰어 내 무릎 위에 걸터 앉았다.

    “이 늙은이의 생각엔 주군은 작가 체질이 아닐세. 재능이 전혀 없으니까.”

    “그런 뼈 때리는 말을 막 내뱉지 마라 진짜. 내 소설을 재밌게 보고 있을 독자님들한테 실례잖냐.”

    “차라리 본래의 세계로 돌아가서도 이 일을 계속하는 게 어떤가?”

    “이 일이라면?”

    “전쟁 군주의 일 외에 뭐가 더 있겠나?”

    “허어…… 우리 스칼렛 씨가 큰일날 소리를 하시네.”

    그건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물론 병력을 조금, 분대 단위 정도로만 끌고 가서 박태준 팀장에게 오크 설사똥을 먹이겠다는 생각은 조금 했지만!

    솔직히 그 정도는 괜찮지 않나?

    내가 재활치료인지 뭔지 모를 이상한 리허빌리 프로그램에 휘말려서, 이런 영문도 모를 곳에서 고생한 것에 비하면 말이다!

    오크 설사똥 정도는 기쁜 마음으로 벌컥벌컥 들이켜야 되는 게 담당자로써의 도리라는 것이다.

    “바체트 열도를 통일시킨다면…….”

    거기까지 휘하의 병력 규모가 거대해진다면, 아마도 한국과 북한 정도는 정리가 가능할지도 모른다.

    진짜 문제는 지구의 평화유지군이신 미군 형님들과도 한판 벌여야 된다는 것이지만.

    “아니, 안 돼. 연재 분량이 너무 길어지니까! 각하의 꿈은 얼른 이 빌어먹을 짓거리 정리하고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거야.”

    욕심 좀 부리자면 돌아가기 전에 엘프 히로인 하나를 챙겨서 돌아가는 것이다!

    이세계에서 고생한 보상으로 엘프 마누라와 알콩달콩 신혼 생활 정도는 괜찮…….

    역시나 생각을 읽고 있었는지 스칼렛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명백하게 언짢은 기색이다.

    “그런 초식 동물들이 어디가 좋은 건가?”

    “거, 거짓말입니다. 사실 각하는 선지국 매니아라…… 스칼렛 씨하고 만난 순간부터 운명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채식주의자들은 얼간이 놈들이라고 생각합니다.”

    “흥.”

    스칼렛은 손톱의 끝으로 내 목덜미를 가볍게 긁으며 입술을 삐죽였다.

    “유대를 맺은 이상 주군이 어디에 살든 떨어질 생각은 없네. 서로가 서로를 독점하는 탐욕적인 관계가 아니던가?”

    “그럼요. 당연히 그렇죠.”

    스칼렛이 내 목덜미의 뒤쪽을 손끝으로 훑어 내리며, 요망한 미소를 베시시 흘렸다.

    서큐버스와 실제로 만난 적은 없지만, 어쩌면 사람을 홀리는 능력은 흡혈귀들이 더 뛰어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 만큼 고혹적인 눈빛이다.

    “주군이 엉뚱한 생각을 못하도록 훈육과 체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네만. 자리를 옮기겠나?”

    “아니, 아니아니…… 지금 편지도 써야 되고 이거 다 쓰면 바로 병력의 충원 현황을 확인하러……. 젠장, 루칸다하고 로아는 언제쯤 돌아오는 거야!?”

    뱀처럼 몸을 엉켜오는 스칼렛을 한쪽 팔로 끌어안으며, 반대편 손으로 편지의 마지막 문장을 적어 넣었다.

    에르멜에게 들은 정보를 하나씩 떠올리며 천천히 잉크를 종이 위에 흘렸다.

    박태준 팀장님.

    그거 아십니까?

    피르에나는 살랍의 고어로 ‘크리스탈’이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우리는 어쩌면 이 촌극의 실마리를 붙잡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 * *

    “뭐? 기가멜이 당했다고?”

    차투카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기가멜은 검은 돌도끼 형제단이 자랑하는 최강의 생물 병기였다!

    송곳 전쟁에서도 공포의 화신으로 전장을 휘몰아쳤던 자이언트 오크가 아니던가?

    고작해야 늙은 마족 두 놈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하지만 차투카는 이내 냉정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그래, 설령 기가멜을 처치했다고 해도…… 놈들도 사지 멀쩡한 상태는 아닐 터.’

    빈사에 가까운 부상을 입었을 게 틀림 없었다. 오히려 여기서 기가멜이 당했다는 사실에 겁을 먹고 물러나는 게 멍청한 짓이다.

    거의 다 잡은 물고기였으니까.

    지금 차투카가 직접 병력을 이끌고 루칸다와 우렌을 덮친다면 큰 힘을 들이지 않고 생포할 수 있을 것이다.

    “남은 형제들의 수는?”

    “아직 140여 명이 남았습니다!”

    “좋아, 기가멜이 당한 것은 큰 피해지만. 검은 돌도끼 형제단이 쓰러질 정도는 아니다.”

    이대로 루칸다만 생포한다면 칼베라가 그 공훈을 크게 치하해 줄 것이다. 오늘 밤의 희생 따윈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큰 포상을 기대할 수 있었다.

    아직 희망은 남아 있었다.

    차투카는 거대한 양손 도끼를 쥐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궁병! 폐장검을 지닌 피에르 쟝의 위치를 파악한 후 저지선을 펼칠 만한 지점을 찾아 보고한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부대의 집결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을 궁병 오크가 묵묵부답이었다.

    “내 말이 들리지 않았나! 그 난봉꾼 자식의 위치를…….”

    툭.

    데굴.

    어둠 속에서 농구공만한 구체가 차투카의 발밑까지 굴러 왔다.

    그의 주변에 모여 있던 오크 병사들도 차투카의 발치를 바라봤고. 한 박자 늦게 그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기, 기습……!”

    굴러온 것이 궁병 오크의 머리라는 사실을 깨달은 오크가 소리를 내지르려 했지만!

    서걱!

    예리한 절삭음과 함께 머리가 몸에서 분리되어 허공을 날았다. 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머리가 수풀 속으로 처박힌 순간.

    “동네 양아치들이라고 생각했는데. 군사 훈련을 받은 놈들이네?”

    심장이 얼어붙을 만큼 차가운 미성이었다. 차투카와 그의 부하들 모두가 그 목소리에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었다.

    “어줍잖게 배운 덕분에 집결지를 알아내기 편했는데. 하긴 오크들이 무슨 재주가 있어서 집결지 교란 같은 걸 할 수 있겠어?”

    어둠의 장막 속에서 나타난 건 로아였다.

    병력의 집결지로부터 거리를 두고 떨어진 초계병들의 위치를 파악하여 순식간에 차투카의 위치를 특정해낸 것이다.

    이 짙은 어둠 속에서 중대 규모의 병력을 추적하긴 힘들다. 특히나 차투카의 검은 돌도끼 형제단은 야간전 훈련을 받은 정규군 출신이 아니던가?

    고양이가 수염으로 장애물을 피해 다니듯, 초계병의 배치로 추적대가 병력을 쫓기 힘들게 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로아는 차투카보다 상위 개념의 야전 장교다. 장애물을 피하기 위해 달려있던 수염을 붙잡아 잡아당길 수 있을 만큼 말이다.

    아리카 섬에서 카타쿨라의 둥지에 편입되기 직전까지. 로아는 ‘툴 베르카니 제국’에서 악명이 자자한 장교였으니까.

    대륙에서도 강호 국가로 위세를 떨치고 있는 톨 베르카니 제국의 장교 출신. 전술의 패러다임이 1세기 이상 차이가 나는 바체트 열도의 군인들과는 격이 달랐다.

    “오, 드디어 한건 해냈군. 야간시에 소규모 병력을 운용하는 파르티잔 부대는 여간 찾아내기 힘든 것인데.”

    루칸다와 우렌이 바로 로아의 뒤를 쫓아왔다. 피투성이에 만신창이였지만, 루칸다와 우렌의 눈빛에는 투기와 전의가 번쩍이고 있었다.

    아직도 더 싸울 수 있다고 위협을 하듯 말이다.

    “사, 살려주세요 차투카 형님!”

    “입 다물어! 이 폐장검이 그리도 갖고 싶더냐!”

    “아이고, 아이고 선생님 살려주십셔!”

    빠악!

    그새 붙잡혀버린 피에르 쟝이 차투카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우렌에게 뒤통수를 얻어맞고는 바둥거릴 뿐이었다.

    “이보게, 유격대장! 이놈이 폐장검이 갖고 싶은 모양인데.”

    “그렇군. 여기서는 카쿠쟈 경이 넓은 아량을 베풀어 폐장검을 이 버러지에게 양보해주면 어떤가?”

    “크하핫! 좋군, 좋아!”

    우렌은 호쾌하게 웃으며 쓰러진 피에르 쟝의 앞으로 다가섰다.

    “오냐, 이 폐장검이 그리도 갖고 싶다면 주마! 유격대장, 잠깐 이 놈을 붙잡고 있게!”

    루칸다가 피에르 쟝의 턱주가리를 거칠게 걷어 차자. 피에르 쟝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풀썩 쓰러졌다.

    그대로 엎드린 자세가 된 피에르 쟝의 목덜미를 루칸다가 구두굽으로 짓밟았다.

    “으, 으으으…… 으으, 안…… 안 돼…… 안, 끄가아아악!”

    뿌드득!

    우렌이 피에르 쟝의 엉덩이에 폐장검을 검집 째로 절반 이상이나 쑤셔 박았다. 피에르 쟝이 단말마를 내지르며 축 늘어졌고.

    우렌은 속이 시원한 듯 호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원래 남을 쑤실 때는 자기도 쑤셔질 각오를 해야 되는 법이지.”

    “오늘밤은 왠지 옳은 말만 하는군, 카쿠쟈 경.”

    “나는 원래 옳은 말만 하는 사내야.”

    드디어 루칸다와 우렌, 그리고 로아.

    세 사내가 한 자리에 모이게 되었다.

    로아는 얼굴에 칠한 하얀 분을 짜증스럽게 문질러 닦아내며 말했다.

    “젠장, 당장 이 오크 새끼들을 죽여버리고 둥지로 돌아가고 싶어. 지금 이러고 있는 동안에도 그 늙어빠진 흡혈귀가 각하께 무슨 수작질을 하고 있을지 생각하면…….”

    “그러면 서둘러야겠군. 요즘들어 그 둘이 서로를 바라볼 때 눈빛이 예사롭지가 않던데.”

    루칸다가 킬킬거리며 말하자.

    로아가 루칸다를 표독스럽게 노려본 후 먼저 앞으로 나섰다.

    차투카도 남은 병력을 눈대중으로 확인한 후 각오를 다지듯 외쳤다.

    “형제들이여! 돌격이다!”

    죽어서 사그라지느냐.

    살아서 영광을 얻느냐.

    사내의 삶이란 언제나 이중일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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