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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짓는 플레이어-151화 (151/210)

던전 짓는 플레이어 151화

코발트 블루(2)

어울리지 않는 삶만큼 숨통을 옥죄는 것도 없다지만. 현실만큼 어울리지 않는 삶의 방식을 강요하는 무대도 없을 것이다.

수컷에게 암컷의 일을 종용하는 것이 당연한 시대가 되었고, 어린아이에게 어른의 모습을 강요하는 게 미덕인 세상이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틀에 맞춰진 삶 속에서 본래의 빛을 잃는 것이다.

수컷인지 암컷인지.

아이인지 어른인지.

현자인지 우자인지.

신자인지 학자인지.

구도자인지 순례자인지.

그 모든 구분과 경계가 모호해진 끝에 아무것도 아닌 무언가로 사그라드는 게 전부인 삶이 되는 것뿐이다.

“어렸을 적엔 무엇으로 살아갈지 고민했고, 젊었던 시절엔 스스로의 죽음에 어떤 의미를 부여해야 할지 고뇌했지만.”

루칸다는 호쾌한 웃음과 함께 말했다.

“지금의 우리는 그러한 종류의 고민과 고뇌에 언제까지 얼마나 진지했던 것인지 가까스로 떠올리는 게 고작이군.”

밤의 차가운 공기는 기묘한 열기를 머금었다. 우렌은 말의 고삐를 쥔 채 루칸다의 뒤를 바짝 쫓으며 대답했다.

“이 감각을 너무나 오랫동안 잊고 있었지.”

가슴 깊은 곳에 묻혀 있던 본능이다.

수컷으로 태어난 이상 사냥감을 쫓는 본성을 품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타고난 본능에 충실할 수 있는 이 순간. 우렌은 이 순간이 주는 충족감에 휩싸여 본래의 모습을 조금씩 되찾아가고 있었다.

마왕으로부터 하사받은 폐장검을 되찾겠다는 목적은 분명히 있었지만.

이미 그딴 명예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우렌은 사냥감을 쫓는 감각을 탐미하는데 충실하고 있었으니까.

“오크 병단의 퇴역 놈들이다. 신호탄의 종류를 보니 남진의 제2사단 출신이군.”

“바로 앞을 가로막지 않고 좌우의 측면에서 압박해 오는 전술. 제미니안 준장 휘하의 병사들이라면 습관처럼 몸으로 기억하고 있는 추격법이지.”

루칸다와 우렌은 달리는 말 위에서 순식간에 적의 정체를 유추하여 간파해 냈다.

비록 송곳 전쟁이 이렇다 할 성과조차 낳지 못한 채 종식된 소동이었다고 해도. 루칸다와 우렌은 그 전쟁 속에서 삶의 태반을 보낸 베테랑 싸움꾼이다.

젊은 혈기는 없다.

물불을 가리지 않는 패기 역시 잃은지 오래다.

하지만 피웅덩이 속에서 나뒹굴며 닳고 닳은 노장들이다. 어줍잖은 각오로 덤벼들었다간, 눈 깜짝할 사이에 머리와 몸이 분리될 것이다.

모든 옛 군인들이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지금껏 살아남은 늙은이들에겐 그 만한 이유가 있을테니까. 그 이유를 몸으로 알게 되는 것뿐이다.

“말의 머리를 쏴서 떨어뜨려!”

“죽여! 죽은 전우의 원한을 갚는 것이다!”

때마침 가로변에 숨어 대기하고 있던 오크 놈들이 좌우에서 튀어나왔다. 루칸다의 예상대로 명확한 지휘 체계가 있고, 지휘에 맞춰 움직일 수 있도록 훈련받은 병단이었던 것이다.

검은 돌도끼 형제단이 마왕군의 퇴역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상.

“적당히 놀아줄 수는 없을 것 같군.”

“그럴 생각도 없었네!”

스릉!

루칸다와 우렌이 동시에 검을 뽑아 들었다.

“부숴질 각오는 되었나, 우렌?”

루칸다는 우렌의 긴장을 풀어줄 생각이었는지, 재미 없는 농담을 건냈고. 우렌은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마족의 사내로 태어난 이상. 산산히 부숴져 밤바람이 되는 것이 숙명 아닌가!”

“끝내주게 시시한 삶이로군.”

“그래, 끝내주게 사내다운 죽음이지!”

동이 틀 때쯤이면 사그라들 밤바람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마족의 사내는 매일 밤을 가슴 두근거리며 기다린다.

멸신의 각오를 끝마친 육탄 돌격만이 수컷의 증명일테니까.

코발트 블루빛의 새벽이 머지 않았다.

“그렇다면 바람이 되어 보지. 어쩌면 오늘 밤이 그 황홀한 최후일지도 모르지 않나?”

“하핫! 르 만타나의 유격대장과 함께 밤바람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군.”

우렌은 드디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실감을 느끼며 말머리를 돌렸다. 거리를 좁혀오는 오크 무리를 향해 말이다.

* * *

“루칸다라고? 그 괴물놈이 어째서 이곳에?”

검은 돌도끼 형제단의 우두머리 차투카.

그의 목소리에 당혹감이 깃들었다.

부하 오크의 보고를 들은 후 잠시 생각에 잠겼지만, 이내 판단이 섰다.

‘폐장검만 손에 넣어 푼돈이나 뜯어 볼 요량이었는데.’

상상 이상의 거물이 얽혀 있었던 것이다.

르 만타의 유격대의 유격대장 루칸다는 차투카도 익히 알고 있는 고블린이었다.

피르에나 왕녀가 쥐고 있던 두 자루의 검.

루칸다와 칼베라.

사실 상 억지에 가까운 왕녀의 전투 작전을 실현시키는 가장 유능한 검들이었다.

칼베라는 전투 능력 자체는 비견될 자가 없을 만큼 뛰어난 전사였지만. 곧잘 흥분하고, 감정에 휩쓸려 즉흥적으로 움직이는 결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기에 피르에나 왕녀는 칼베라를 주력으로 삼지 않고, 보조 무장으로써 다뤘다.

그에 비해 루칸다는 모든 면에서 완벽한 군인이었다. 전투 능력 자체도 우수했고, 냉철한 판단력도 지니고 있었다.

첩보와 정보전에도 상당한 소양을 지니고 있어서 활용할 수 있는 분야가 무궁무진하기도 했고 말이다.

어쨌거나 차투카 역시 송곳 전쟁에 참전했던 오크다. 루칸다의 악명은 수도 없이 들어봤다.

‘이런 촌구석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는 건…….’

혹시나 칼베라의 계획을 눈치 챈 것일지도 모른다. 이 유바흐 마을에서 남쪽으로 25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산맥을 무단으로 점거하고 있는 세력인 칼베라의 무력 집단인 ‘나흐 만테아’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거나.

어느 쪽이든 간에 차투카의 검은 돌도끼 형제단 역시 나흐 만테아에 종속된 하위 집단이다.

“지금 바로 칼베라 님께 루칸다의 꼬리를 붙잡았다고 전해라.”

차투카의 판단은 정석 그 자체였다.

피르에나 왕녀가 살해당하며, 르 만타나 유격대가 해체된 이후. 칼베라는 혈안이 되어 루칸다를 쫓고 있었다.

루칸다만 찾아낸다면 피르에나 왕녀의 복수를 해야만 했으니까. 칼베라 역시 왕녀가 속삭이던 낙원에 매료된 사내였다.

그런 낙원의 약속을 물거품으로 만든 루칸다를 용서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루칸다의 정보를 넘기는 것만으로도 칼베라 님께 크게 인정받을 수 있다.’

그리고 만약.

만에 하나 차투카가 루칸다를 생포하는데 성공한다면? 칼베라는 차투카를 바로 나흐 만테아의 간부로 임명해줄 수도 있었다.

그리고 나흐 만테아는 이런 촌구석에서 만족하여 안주할 무력 집단이 아니다.

칼베라는 다시 한 번 바체트 열도 전체를 상대로 전쟁을 벌일 작정이었다. 그 목적을 위해 임시로 만든 무력 집단이 바로 나흐 만테아였다.

그리고 나흐 만테아의 선결 목표는 둘.

첫 번째는 병력을 집결시켜 다시 한 번 ‘르 만타나 유격대’를 결성하는 것.

두 번째는 피르에나 왕녀를 부활시키는 것이다. 현재의 시점에 이르러 나흐 만테아는 두 목표를 8할 이상 달성한 상태다.

누군가 훼방을 놓거나, 방해만 하지 않는다면 칼베라는 다시 한 번 유격대를 일으켜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시점에서 간부가 될 수 있다는 건 차투카에게 매우 큰 기회였다. 실제로 르 만타나 유격대는 송곳 전쟁에서 거의 승리할뻔한 군대가 아닌가?

르 만타나 유격대는 진격을 거듭할 수록 몸집이 불어나는 기묘한 군단이었다.

병력의 손실을 현지에서 보충할 수 있다는 큰 이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피르에나 왕녀가 민족주의자나 근왕파가 아닌, 최대다수의공리를 정의로 삼고 있는 사회주의적 박애의 표상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왕녀가 속삭이던 평등한 낙원의 이야기.

피지배 계급의 완전한 해방은 인간과 마족을 불문하고 다수의 지지를 받기에 충분했다.

평생을 천대받으며 살아온 하층민들과 박해가 당연한 삶을 영위해 온 소수민족들에겐 꿈같은 이야기였을 것이다.

붉은 종달새의 군대.

그 붉은 물결이 바체트 열도를 뒤덮었던 사건이 송곳 전쟁이다. 다시 한 번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피르에나 왕녀가 구심점이 되어야만 했다.

어쨌거나 차투카는 비록 송곳 전쟁 때는 마왕군에 소속되어 있었다지만, 출세만 할 수 있다면 어느 쪽에 붙든 상관없었다.

오히려 마왕군도 인간의 왕국도 모조리 멸망시키고, 새로운 세력이 바체트 열도를 차지하는 게 차투카에겐 형편이 좋았다.

“솔직히 인간 계집 따위의 부활에는 관심도 없고, 어째서 그 인간 계집이 필요한지도 이해가 안 되며, 복수를 하든 말든 상관도 없지만.”

눈앞에 마련된 출세길을 마다할 만큼 차투카는 무욕한 오크가 아니었다.

폐장검을 든 채로 도망치고 있는 피에르 쟝을 미끼로 삼아 늙은 늑대를 사냥할 때였다.

송곳 전쟁에서 전설로 추앙받던 고블린은 이제 다 늙어 말라비틀어진 시체에 불과할 테니까.

* * *

서걱!

오크 병사의 목이 반쯤 절개되며 핏줄기가 솟구쳤다.

군청색의 밤하늘과 콘트라스트를 이루듯 선홍색 피안개가 번졌고, 그 사이를 루칸다가 내달렸다.

“저, 저런 괴물 놈!”

“무슨 고블린이냐 저게!”

루칸다와 우렌을 쫓던 오크 병사들은 저마다 비명 같은 감탄을 내질렀다. 송곳 전쟁에서 잔뼈가 굵은 병사들이라고 해도, 루칸다를 직접 목격하는 건 오늘 밤이 처음이었다.

송곳 전쟁 때였으면 직접 마주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오크 병사들에겐 루칸다가 직접 나설 정도의 가치가 없었으니까.

조우할 리도 없고, 조우할 수도 없었던 악몽이 오늘밤 재림한 것이다.

루칸다는 마치 어둠의 일부처럼 보였다.

밤의 일부가 일순 형체를 갖췄다가, 그대로 목숨을 거둬가는 게 아닐까? 그런 착각이 들 만큼 끔찍했다.

거리를 좁혔던 오크 병사 셋이 순식간에 당했다. 묵으로 도금하여 빛을 반사하지 않는 야전용 제식단검이 이렇게나 위협적인 물건인지 처음 깨닫게 되었다.

“으라앗! 한 번에 모조리 덤벼라! 이 더러운 오크 새끼들아!”

“커억!”

루칸다의 반대편에 있던 우렌도 달려든 오크를 붙잡아 뒹군 끝에 목에 칼날을 박아 넣었다.

도저히 나이 먹은 중년의 사내라고 생각되지 않을 만큼 기민한 몸놀림이었다.

루칸다의 신기에 가까운 살육 능력에 가려져 눈에 띄진 않았지만, 우렌도 착실하게 오크 병사들을 처리해 나가고 있었다.

“십인장! 증원, 증원을 불러야 한다!”

“도저히 막을 수가 없습니다!”

가로에 모습을 드러낸 오크 병사 20마리.

그중에서 13마리가 순식간에 당해버렸다. 늙은이 둘을 상대한다고 방심한 게 화근이었다.

피에르 쟝이 도망칠 때까지 아주 잠깐 시간을 벌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대로 가다간 분대 단위의 오크가 전멸을 피할 수 없었다.

“아직 안 죽었나, 카쿠쟈!”

“이런 애송이 놈들에게 부숴져 바람이 될 만큼 늙지는 않았네!”

루칸다는 단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킬킬 웃었다. 우렌도 가쁜 숨을 몰아쉬며 유쾌한 웃음을 토해냈다.

남은 오크 7마리는 도망치지도 못하고, 덤벼들지도 못한 채 거리를 유지하며 주춤거렸다.

그 순간 십인장 오크 ‘쿠챠’에게 차투카의 전언이 도착했다.

“저걸 사냥하라고?”

상대는 붉은 종달새의 유격대장 루칸다다. 게다가 중진 제3둔영 지휘부 직속 보병연대의 지휘관이었던 우렌도 있었다.

아무리 늙은 마족 둘이라고 해도, 남은 오크 병사들만으로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마, 말도 안 됩니다! 모두 전멸…… 예? 기가멜을 보내신다고……?”

쿠웅!

가로에 평탄하게 깔려 있던 석재가 난폭하게 부숴지는 굉음이 울렸다!

십인장 쿠챠가 서 있는 곳에 짙은 그림자가 깔렸고, 쿠챠가 고개를 들자.

“우오오오오-!! 고블린! 죽인다아!”

그 크기가 5미터는 훌쩍 넘는 거대한 오크가 침을 질질 흘리며 기성을 내질렀다.

검은 돌도끼 형제단이 지닌 비장의 카드.

자이언트 오크 ‘기가멜’의 등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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