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짓는 플레이어-150화 (150/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150화

    코발트블루(1)

    스산한 밤바람에 머리카락이 나부꼈다.

    청량한 밤의 향기와 은은하게 번지는 달빛이 가로를 비췄다.

    우렌과 루칸다는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북쪽의 가로를 나란히 걸었다.

    “이런 늦은 시간에 불쑥 방문해도 될지 모르겠군.”

    “괜찮다니까! 나도 그렇게 염치 없는 인간은 아닐세. 매일같이 얻어먹기만 해서는 미안하니, 오늘은 내 집에서 대접하도록 하지.”

    우렌은 들뜬 목소리로 루칸다의 등을 떠밀었다. 이미 술집에서 위스키를 한 병이나 비운 뒤였다.

    평소 같았으면 술집에서 일어나 헤어졌을 테지만, 오늘밤 만큼은 조금 더 시간을 함께하고 싶었다.

    내일 동이 트면 루칸다는 다음 거래를 위해 이 유바흐 마을을 떠날 예정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이렇게 술잔을 나눌 수 있는 것도 오늘이 어쩌면 마지막일 수도 있었다.

    물론 루칸다와 우렌은 대립하는 진영에서 검을 마주했던 관계였다. 전우 같은 것이 아니란 말이다. 하지만 과거의 기억을 공유할 수 있는 누군가와 만날 수 있었던 게 우렌에겐 큰 위안이었다.

    “덕분에 꿈을 꿨네. 주책맞게도 가슴이 두근거릴 만큼 멋진 꿈이었지.”

    다시 한 번 도래할 전란의 시대.

    검과 화약. 수컷과 원초적 논리가 존중받을 수 있는 시대였다.

    우렌은 선혈로 붉게 물든 평원을 달리는 꿈을 꿨다. 다시 한 번 수컷 짐승처럼 살 수 있는 날을 얼마나 갈망했던가?

    하지만 우렌은 그 꿈을 가슴에 묻었다.

    이제는 마냥 수컷 짐승처럼 살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우렌은 이제 누군가의 남편이자, 한 아이의 아버지였다.

    잃을 것이라곤 목숨 뿐인 짐승처럼, 앞만 보고 내달릴 시기는 지나버렸다.

    “비록 부모님께서 정해준 상대라지만 말일세.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고, 사랑받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게 사내의 본분이 아니던가? 좋은 남편이 되기 위해 노력할 시기는 지나버렸지만, 이제라도 과부를 만들 수 없지 않나.”

    “얘기를 들어보니 아들도 하나 있던데.”

    “꼴통 같은 놈이지.”

    우렌은 킬킬 웃으며 말했다.

    “그림쟁이가 된다고 유학을 보내달라는데. 아무리 시대가 변했어도 사내 자식이 그딴 계집의 일을 해서는 안 되는 법이야. 안 그런가, 유격대장?”

    “말세로군, 말세야.”

    “그래! 세상이 미쳐버렸지! 이러다가 사내 놈들이 요리사도 되는 시대가 올지도 모르겠어.”

    “서둘러 죽어야 그런 흉측한 꼴을 안 보고 죽겠군.”

    루칸다는 담배를 입에 물은 후 걸었다.

    사내가 사내답게 살 수 없는 시대의 밤이었다. 주변을 둘러봐도 천지에 계집 같은 놈들 뿐이다. 사나이가 계집처럼 사는 게 당연한 시대에 당도한 것일지도 모른다.

    거친 삶이 수치가 되었고, 남자다운 방식은 야만의 표상이 되어버렸다.

    “그래도, 그런 못난 놈이라도 내 자식 아닌가? 비록 큰 힘이 못 되더라도, 곁에서 지켜봐주고 싶네.”

    “아이는 암컷이 기르게 냅두는 법이네.”

    “요즘은 그렇지도 않아.”

    우렌은 내심 아들의 꿈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우렌 자신이 전장에서만 살아 숨쉴 수 있었던 것처럼. 그의 아들 역시 그림을 그릴 때만 눈빛에 생기가 돌았다.

    그 꿈이 설령 사내답지 못한 것이라도, 아버지는 응원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아이가 나아가려는 길을 뒤편에 서서 지켜보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어린애야. 그 녀석이 조금 더 클 때까지는…….”

    저택의 입구 쪽에 가까워지자.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먼저 반응한 건 루칸다 쪽이었다. 오랜 기간 단련되어 온 후각와 청각은 사냥개의 인지 능력이 비견될 정도였다.

    ‘오크의 냄새. 매중초의 냄새가 짙지만, 플럼비의 향이 미약하게 섞였군. 이 마을에 발을 들인지 하루에서 한나절 정도 된 건가? 플럼비의 향이 묻은 걸 보니 서쪽 구릉선을 따라 이동했을 테고. 피 냄새가 섞인 걸 보니 방문 판매원들은 아닌 모양이군.’

    냄새로 이동 경로와 체류 기간, 그리고 대략적인 신상을 유추해냈고.

    ‘경장갑의 오크 다섯 마리. 무장하지 않은 놈이 셋.’

    발소리와 그 무게감을 모두 구분하여 규모까지 정확하게 추정한 것이다.

    이 모든 사고 과정이 끝나기까지 0.4초 정도가 걸렸다. 루칸다는 추적과 도주의 베테랑이다. 실제로 송곳 전쟁 당시에도 루칸다의 표적이 된 야전 지휘관은 이틀밤을 넘기지 못한다는 소문까지 있었다.

    ‘어째서 오크 놈들이? 피에르 쟝을 시켜 폐장검만 슬쩍 해오라고 지시했을텐데?’

    루칸다의 작전에 불순물이 섞인 것이다.

    썩 달갑지도 않고, 유쾌하지도 않은 상황.

    루칸다는 팔뚝만한 나뭇가지를 꺾어 한 자루를 우렌에게 내던졌다.

    “아무래도 오늘밤은 손님이 더 있었던 모양이야.”

    “야간 경비대가 곧 있으면 도착할 걸세!”

    저택의 정원을 곧장 내달렸다.

    소리가 들려오는 곳이 가까워졌고, 이내 저택 건물의 현관 입구가 보였다.

    그리고 루칸다의 예상대로 거대한 오크 놈들의 뒷모습이 드러났다.

    “애새끼를 죽여! 죽이고 그냥 빼앗으라고!”

    “이 거머리 같은 애새끼가! 손을 안 놓으면 죽이겠다!”

    오크들의 성난 목소리가 울렸고.

    “쟝! 안 돼요! 이 아이를 죽이면 안 돼요! 검은 그냥 줄테니까! 도노번! 폐장검을 그냥 줘버려!”

    “놔, 놓으라고! 너 진짜 죽고 싶어서 이래!? 너희들은 가만히 있어! 장교의 자식을 죽이면 우리 모두 1급 수배자가 된다고!”

    우렌의 아내와 피에르 쟝의 다급한 목소리가 섞였다.

    그리고 드디어 어둠의 장막이 걷혔고, 우렌의 눈앞에 피투성이가 된 아들 ‘도노번’의 모습이 보였다.

    얼마나 맞았는지 눈두덩과 뺨이 퉁퉁 부어 있었다. 덕분에 눈을 뜨고 있는지 감고 있는지도 분간이 안 될 정도였다.

    터진 입술과 코에서 피가 흘러 나와 그야말로 만신창이 그 자체였다. 도노번은 바닥에 웅크린 채 폐장검을 꽉 끌어 안고 있었다.

    “절대로 못 줘! 죽어도 안 줘……!! 이건 아버지가 마왕 폐하께 하사받은 검이야!”

    “그딴 게 뭐가 중요해! 그딴 돈도 안 되는 검은 그냥 줘버려!”

    “안 돼!! 이건, 이 검은…… 아버지가 트레샤하고 맞바꾼 검이라고 했으니까! 그러니까, 그러니까…… 이 검이 아버지의 전부라고!!”

    오크들의 무자비한 발길질을 받으면서도 도노번은 이를 악 물며 버텼다.

    폐장검은 우렌이 비아 엘티나 지역을 안정시킨 공로를 인정받아 하사받은 물건이었다. 비록 수만 동포의 삶을 지켜냈다고 하지만, 결국 우렌은 하나뿐인 딸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 있어줄 수 없었다.

    아버지로써, 혹은 군인으로써 어떤 쪽의 삶을 택해야 했는가? 그 선택을 증명하고 치하하는 물건이었다.

    루칸다는 무자비하게 밟히고 있는 도노번을 슥 바라본 후 유쾌한 어조로 내뱉었다.

    “친자식이 확실하군.”

    “이 아비를 닮아서 꼴통 같은 놈이라고 했잖나.”

    한 마디씩 주고받는 사이.

    드디어 참다 못 한 오크 한 놈이 도끼를 치켜들었다.

    “이러다 야간 경비대가 오겠어. 이 꼬맹이의 팔뚝을 잘라버리고 검을 가져가지.”

    도끼날이 내리쳐지는 순간까지 도노번은 눈을 꽉 감은 채 폐장검을 끌어 안았다.

    목숨 구걸은 커녕 타협 조차 없는 자세다.

    ‘화가가 되기엔 아깝군.’

    루칸다는 앞으로 발을 내딛으며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손에 들었다.

    “어이.”

    그 목소리에 반응한 오크가 돌아본 순간.

    탁.

    손끝으로 튕긴 담배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았다!

    치익!

    담배의 끄트머리가 정확하게 오크의 왼쪽 눈알을 지졌다.

    “끄각!”

    오크의 비명 소리와 함께 루칸다의 모습이 사라졌다.

    빠악!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오크의 머리가 90도 정도 돌아갔다.

    루칸다가 이 거리를 도약해 오기까지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한 것이다.

    머리를 얻어 맞은 오크는 쓰러질 듯 비틀거렸지만, 이내 중심을 잡았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바짝 붙어 있던 루칸다가 손을 뻗었다.

    “고, 고블린!”

    “정답이다. 그것도 노상 강도질이 전문인 고블린이지.”

    오크의 허리춤에 채워져 있던 단검을 빼들은 루칸다는 그대로 어깨를 흉부에 부딪쳐 거리를 좁혔다. 그렇게 움직임을 제한한 후.

    푹푹푹!

    “캬아아아악!”

    재봉틀이 박음질을 하는 것보다 빠른 난도질이었다. 순식간에 구멍이 뚫린 복부에서 내장이 쏟아져 나왔다.

    “저, 저 자식을 죽여어어!”

    남은 오크는 4마리.

    오크 놈들이 무기를 꼬나쥐며 루칸다와 우렌을 향해 달려들었다.

    “싸움질은 아무리 해도 질리지 않는군. 이 나이를 먹어도 매일 새롭게 재밌다니까.”

    루칸다는 새로운 담배를 입에 물어 불을 붙이며 달려드는 오크들을 바라봤다.

    휘릭.

    오크에게서 빼앗은 단검을 역수로 돌려쥔 후.

    “조금 취해서 상냥하게는 못하겠어. 원래 술 좀 마시면, 계집질이든 칼질이든 난폭해지는 법 아닌가?”

    부웅!

    예리한 도끼날이 루칸다의 귀를 스치며 지나갔다. 그 순간을 기점으로 루칸다의 눈에 예기가 깃들었다.

    “으라앗!!”

    “칵!”

    빠악!

    그러는 사이에 우렌을 향해 달려들었던 오크 한 마리가 쓰러졌다. 정확하게 정수리를 얻어 맞은 것이다!

    아무리 늙고, 녹이 슬었다고 해도 우렌은 마왕의 정규군에 속했던 상급 장교다. 일반 사병에 비해 훨씬 강도 높은 군사 교육을 받아왔고, 이제까지 경험한 백병전의 횟수도 결코 적지 않았다.

    우렌은 재빠르게 쓰러진 오크에게서 양손 도끼를 빼앗아 손에 쥐었다.

    “마, 말도 안 돼…… 저런 늙은이들을 상대로…….”

    우렌이 한 마리를 처리하는 동안, 루칸다가 두 마리를 더 처치했다. 복부부터 흉부까지 갈기갈기 찢어 완전히 넝마 조각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마지막 남은 오크가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며 루칸다와 우렌을 번갈아 바라봤다.

    “왜 말이 안 되나? 전란에서 살아남은 늙은이는 처음 본 건가?”

    루칸다가 피범벅이 된 얼굴을 손으로 슥 훔쳐내며 한 걸음 내딛었다.

    그 형상은 악령 그 자체였다.

    본능적인 공포가 들끓을 만큼 말이다.

    오크는 루칸다를 뚫어져라 쳐다보다, 뒤늦게 문득 생각난 것처럼 비명을 내질렀다.

    “루, 루칸다! 르 만타나 유격대의……!!”

    유격대장 루칸다는 마왕군의 병사들에게도 공포의 화신이었다. 하룻밤 사이에 일개 중대를 단신으로 괴멸시켰다는 소문이 결코 과장이 아닐 만큼 말이다.

    피르에나 왕녀가 가장 신뢰하는 부하 중 하나. 그녀의 왼팔이었던 ‘칼베라’와 호각이라고 평가받을 만큼 잔혹한 사내였다.

    루칸다와 칼베라는 전장의 악몽이었다.

    그리고 오늘밤은 악몽의 복각이었다.

    송곳 전쟁에서 악몽 그 자체라고 칭해지던 고블린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니까.

    “빌어먹을……!”

    오크가 재빠르게 오른손을 허리뒤로 옮겼다. 무기를 뽑아들 것처럼 말이다.

    쉭!

    죽이는 건 쉽다.

    하지만 마지막 남은 한 마리에겐 정보를 캐낼 필요가 있었다.

    푸욱!

    루칸다가 던진 단검은 정확하게 오크의 오른쪽 손목을 꿰뚫었다.

    “이런.”

    하지만 오크의 노림수는 왼쪽 손에 있었다. 어느새 꺼내든 신호탄 발사기를 위로 번쩍 들어 올렸다.

    “이래서 술을 마시면 안 됐는데.”

    퍼엉!

    하늘에 거대한 붉은 섬광이 번졌다. 아마도 이 마을에 숨어든 동료들에게 신호를 보낸 것이다.

    “아, 안 돼!!”

    그러는 와중에 도노번의 외마디 비명이 소리가 울렸다. 어느새 도노번이 필사적으로 끌어안고 있던 폐장검이 사라져 있었다.

    도노번이 손끝으로 가리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폐장검을 기어코 손에 넣은 피에르 쟝이 수풀 쪽으로 호다닥 달리고 있었다.

    “바로 쫓지.”

    “말을 준비해 오겠네!”

    마왕에게 하사받은 폐장검을 잃을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하지만 우렌은 묘하게 상기된 표정이었다.

    드디어 눈에 생기가 돌아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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