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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짓는 플레이어-149화 (149/210)

던전 짓는 플레이어 149화

카쿠쟈(7)

여자를 앞에 두고 떨어본 적이 있는가?

이 질문은 피에르 쟝에게 있어서 매우 모욕적이며, 도발적이었다.

그리고 구태여 그 쓰잘데기없는 농담에 가까운 질문에 답해 주자면, 생애를 통틀어 단 한 번도 없었다.

로아나와 만나기 전까진 말이다.

피에르 쟝이 편지를 보낸 것이 계기가 되어 로아나와 점심 식사를 함께하게 된 지 이틀째가 됐지만.

피에르 쟝은 여전히 로아나의 앞에서 숫기 없는 소년처럼 굴 수밖에 없었다.

로아나는 지금까지 피에르 쟝이 지니고 있던 미적 관념을 산산이 부술 만큼 파괴적인 미형이었다.

게다가 사소한 몸짓이나 눈빛, 표정까지.

일대의 어쭙잖은 귀족 영애와 비견될 수 없을 만큼의 교양과 고귀함이 몸에 베어 있었다.

지금껏 적지 않은 귀족 여성을 만나 봤다고 자부하던 피에르 쟝이지만, 순혈 헬베르카는 그 규격이 다른 존재였다.

“마왕군의 장교라…….”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있던 손을 멈추며 로아나가 아주 약간 흥미를 보였다.

로아나는 기본적으로 안하무인의 아가씨다.

흥미가 없다면 이야기를 듣는 시늉도 하지 않을 만큼 말이다.

그리고 드디어 로아나가 흥미를 지닐 법한 화제에 도달한 것이다. 피에르 쟝은 기회를 놓칠세라 급하게 떠벌리기 시작했다.

“예! 중앙 광장에서 북쪽으로 이어진 길로 가다 보면 보이는 거대한 저택이죠. 전에는 꽤 이름을 날렸던 장교라는데, 요즘 같은 시대에 군인 만큼 애물단지도 없지 않습니까?”

피에르 쟝의 말투에는 명백한 비하의 의도가 깃들어 있었다. 물론 오랜 고착 상황이 지속되며 군비 축소를 외치는 목소리도 커졌고, 군대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취하는 마족도 많아졌다.

비단 피에르 쟝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로아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피식 웃었다.

“루스날 역시 전통적인 무가였어요.”

“아…… 그런, 제가 그만 실언을…… 죄송합니다, 로아나 씨.”

“사과할 필요까지는 없답니다. 시대 정신이 바뀌면 입장도 바뀌어야죠.”

로아나는 포크를 고깃덩어리에 찔러 넣고, 나이프를 안쪽으로 당겼다.

고기의 단면이 매끈하게 보일 만큼 섬세한 칼질이었다.

“그래서 꽤나 이름을 날렸다며?”

“군인에 대해선 잘 모릅니다만, 카쿠쟈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모양입니다.”

“비아 엘티나의?”

“아, 예! 로아나 씨도 알고 계셨군요. 그래 봤자 야만적인 폭력 집단의 우두머리 같은 것에 불과하지만요.”

피에르 쟝은 혐오감을 슬쩍 드러내듯 눈살을 찌푸렸다.

“이제는 문화와 문명의 시대입니다. 칼과 총포 따위로 상대를 굴복시키는 짓은 시대에 뒤처진 야만 행위일 뿐이죠!”

로아나는 그 말을 듣더니 싱긋 웃어 보였다. 심장이 양단될 만큼 치명적이고, 매혹적인 미소였다.

“문화와 문명이 무엇의 위에 세워지는지는 아시나요?”

“그, 그건…… 마왕 폐하의 자애로운 계몽 교육하에서 성숙된 백성들의 의식이…….”

피에르 쟝은 말끝을 흐리며 얼버무렸고, 로아나는 고깃덩어리를 얇게 해체한 후 한 입도 먹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가시려는 겁니까? 아직 차도 대접해 드리지 못했는데.”

피에르 쟝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듯 로아나는 모피 외투를 어깨에 걸쳤다.

그러고는 뒤늦게 무언가 떠오른 것처럼 입을 열었다.

“내일은 피에르 쟝의 안목을 보고 싶네요.”

안목을 보고 싶다?

쉽게 말해서 선물을 기대 하겠다는 의미다. 그리고 그 선물이 무엇인지에 따라 로아나의 평가가 내려질 것이다.

피에르 쟝의 머릿속에서 귀족 아가씨가 좋아할 만한 선물 리스트가 우후죽순 떠올랐지만.

“부끄럽게도 저는 군의 물건을 수집하는 야만적인 취미가 있어서요.”

“로아나 씨가 원하는 것이라면 밤하늘의 별도 따올 수 있습니다!”

로아나는 피에르 쟝의 옆으로 다가와 살짝 고개를 숙였고. 귓가에 요염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혹여라도 제가 마왕 폐하께서 직접 하사하시는 폐장검을 선물 받는다면, 우리가 조금 더 긴 시간을 함께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대로 굳어버린 피에르 쟝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로아나를 바라봤다.

로아나는 흘러내린 옆머리를 귀 뒤로 쓸어넘기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폐장검이 어디 있는지는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몇 번이고 우렌의 저택에 출입해 왔으니까.

그리고 작업 중인 귀족 부인의 집에서 물건을 훔치거나, 없어진 티가 나는 물건을 받지 않는 것이 피에르 쟝의 철칙이었다.

하지만.

그딴 철칙 따윈 떠오르지 않을 만큼. 피에르 쟝은 맹목이 되어 있었다.

이건 밤의 어머니께서 하사하신 천재일우의 기회였으니까.

* * *

피에르 쟝은 오후의 교습 시간이 되어 우렌의 저택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중앙 광장을 지나 북쪽 가도를 지나던 찰나.

“오랜만이군, 쟝.”

“으엑…….”

거칠고 뭉툭한 목소리.

오크 특유의 공용어 억양.

그의 앞에 나타난 놈이 누군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피에르 쟝은 재빠르게 뒤를 돌아봤다.

‘젠장…….’

아니나 다를까 경무장을 한 오크 다섯 놈이 퇴로를 막고 있었다.

“도망칠 생각은 않는 게 좋을 거다. 한 발자국이라도 내딛는 순간 이 녀석의 화살이 네놈 머리통을 꿰뚫을 테니까.”

“누, 누가 도망친다는 거야…….”

“그렇지, 쟝 너는 그렇게 멍청한 놈은 아니었지. 그러니까 세 달이나 밀린 이자도 꼬박꼬박 모아 놨겠지?”

피에르 쟝을 포위한 오크의 무리.

이 근방에선 그럭저럭 유명한 폭력 집단인 ‘검은 돌도끼 형제단’이었다. 본래 마왕군에 소속되어 있었던 오크 병사들이었지만.

십여 년 전 송곳 전쟁이 종식된 후 부대 개편이 시행되며 해체된 부대다.

직장을 잃은 병사들은 이런 식으로 조직적인 폭력 집단이 되기 쉬웠다.

그리고 검은 돌도끼 형제단은 마약성 물질의 유통이나 불법적인 대부업을 통해 활동 자금을 벌고 있었고. 피에르 쟝 역시 이들의 주요 고객 중 한 사람이었다.

“하하…….”

“그럴 리가 없지! 이 쥐새끼 같은 인큐버스 새끼! 도끼로 꼴통을 으깨놔 주마!!”

“으아악! 잠깐, 잠깐만! 갚을게! 갚을 테니까 도끼 좀 내려놔, 차투카!”

검은 돌도끼 형제단의 두목 ‘차투카’는 피에르 쟝의 목덜미를 움켜쥔 채 다시 지면에 내려놓았다.

피에르 쟝은 한숨을 푹 내쉰 뒤 입을 열었다.

“그깟 9만 벨. 단번에 갚을 수 있는 계획이 있다니까.”

“헛소리면 죽인다.”

검은 돌도끼 형제단의 조직원은 200여 마리. 산악 및 험지에서도 기동성이 보장된 정예 병사들이다.

피에르 쟝이 도망치려고 한들 다른 마을에 도착하기 전에 붙잡힐 게 뻔했다.

“그러니까…….”

피에르 쟝은 설명하기 시작했다.

지금 우렌의 아내를 꼬셔서 푼돈을 벌고 있는 처지라는 사실부터. 이 유바흐 마을에서 우연히 만난 헬베르카 출신의 부호 아가씨의 이야기까지.

“폐장검만 슬쩍해서 그 여자의 마음만 사로잡으면 9만 벨이 대수겠어? 안 그래, 차투카?”

“헬베르카 출신이라니 확실한가?”

“그래! 내가 여자 보는 안목은 확실하잖아. 그 아가씨는 명실상부 헬베르카의 분가야.”

차투카는 피에르 쟝을 붙잡고 있던 손을 놔줬다. 확실히 그 정도의 부호를 피에르 쟝이 꼬시는 데 성공한다면, 앞으로 더 많은 돈을 뜯어먹을 수 있었다.

간만에 대어가 걸린 것이다.

“오늘 바로 폐장검을 들고나와라, 쟝. 내 부하들이 이 이상 굶주린다면 네놈이라도 삶아서 뜯어 먹을지도 모르니까.”

“그, 그래! 알았어!”

“부하를 좀 붙여주지.”

“하하…… 마음이 든든하네.”

혹여나 모를 자경대의 추격에 대응하기 위해서였다.

아무리 유바흐가 촌구석인 마을이라도 마왕성과 크게 떨어져 있지 않았기에 체계잡힌 자경대 정도는 있었다. 그것도 군소속의 방위 병대다.

마왕군 장교의 저택에서 물건을 훔친다면, 자경대가 재빠르게 움직일 확률이 높았다.

* * *

“마족과 인간이 평등하게 살아갈 수 있는 낙원이라…… 어찌 보면 어린아이의 허황된 망상이군.”

“그런가? 수컷이란 원래 언제까지나 그런 유치한 꿈을 좇는 어린 짐승이 아니던가.”

“유치하고, 동시에 위험한 꿈이었네. 왕위 계승권에서 동떨어진 왕녀가 품기엔 말일세. 무정부를 주장하고, 계급 격차의 소멸을 원했네. 거기에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는 국가라니. 왕족과 귀족, 그리고 재계의 거물들을 모조리 적으로 돌리겠단 소리 아닌가?”

우렌은 송곳 전쟁이 끝나고 한참 뒤에야 피르에나 왕녀가 무엇을 꿈꾸며 싸워왔는지 알게 되었다.

단지 전장에서 공적을 쌓아 왕위를 계승해 보겠다는 알량한 속셈이 아니었던 것이다.

피르에나 왕녀가 이 바체트 열도에 세우려고 했던 국가는 들어본 적도 없을 만큼 충격적인 형태였다.

“어차피 싸워야될 적은 많았지. 거기에 왕족과 장사치 몇 놈이 추가되어도 별다를 건 없었어.”

“인간과 마족. 모든 민중들도 바라지 않았을 걸세. 자고로 백성은 목줄을 쥐고 앞장서줄 지도자를 갈구하는 법이니까. 백성에게 주권이란 버틸 수 없을 만큼 무거운 짐짝에 불과하네.”

애초에 백성에게 주권을 준다는 것 자체가 해괴하고 망측한 일이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그런 국가는 없었고, 이후 수천 년이 지나도 그러한 국가는 등장하지 않을 것이다.

태양의 여신 스텔라께서 모든 생물들에게 용서받을 권리를 부여하였고.

밤의 어머니 테네브레께서 만유의 존재들에게 살아갈 권리를 허락하였다.

그것이 천부의 권리이고, 왕권 역시 위의 권리들과 마찬가지로 하늘이 허락하는 권리의 일종이었다.

무지몽매한 백성들의 동의 따위로 선출되는 지도자는 존재해서도 안 되고, 존재할 수도 없었다.

그것이 우렌의 생각이었다.

‘전통적인 군인 그 자체군. 뼛속까지 근왕파였어.’

루칸다는 우렌의 성향을 가볍게 파악해냈다. 어떻게 구워삶을지 그 조리법을 구상하기 위해서는 재료의 특징을 미리 파악할 필요가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현세대의 마왕이 스스로를 왕이라 칭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나?”

우렌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술에 취해 해롱거리던 모습이었지만 말이다.

“질문이 너무 무례했군. 그렇다면 다시 묻도록 하지. 마왕 아일라드의 자식들이 천부의 왕권을 얻기에 적합한 존재들이라고 생각하는지 묻고 싶었을 뿐이네.”

“루칸다, 이 술집엔 듣는 귀가 많군.”

우렌은 그런 식으로 자신의 대답을 대신했다. 우렌은 평생을 마왕 아일라드를 위해 헌신해 온 충신이다.

하지만 그런 우렌 역시 마왕의 자식들이 차기 마왕의 자리에 앉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동포를 이끌어야 할 지도자가 천부의 허락으로 결정되는 것이라면.”

루칸다는 짐짓 숨을 길게 늘어뜨리며, 한 박자 늦춰 말했다.

“바체트 열도에도 국화의 깃발이 세워지는 것이 옳은 일이 아니겠나?”

그 말은 한없이 타당했다.

모든 마족을 통틀어 밤의 어머니께 가장 사랑받은 일족은 헬베르카 가문이었으니까.

루칸다는 접시 위에 담긴 올리브 열매를 하나 집으며 이어 말했다.

“주군을 배신하란 말은 하지 않겠네. 그런 경우와 도리에 맞지 않는 요구를 강요하진 않을 생각이네. 하지만 근래 들려오기 시작한 용사의 소문은 도저히 가볍게 흘려들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고.”

만에 하나.

용사가 마왕 아일라드 토벌에 성공한다면? 그 뒤에 남은 마족들이 마법처럼 이 바체트 열도에서 자연스럽게 소멸할 리 없었다.

거대한 주축이 사라진다면, 남은 동포들은 생존을 위해 각지에서 새로운 구심점을 찾아내 결집할 것이다.

“시대의 물결을 막을 방도는 없네. 다만 흐름을 놓치고, 시시한 사내로 죽을지. 흐름에 편승하여 다시 한번 삶의 본분을 찾을지. 그것만이 우리의 문제로군.”

루칸다의 눈빛이 말하고 있었다.

우렌은 그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시대의 풍경을 상상할 수 있었다.

마왕이 사라진다면?

이 바체트 열도에 남게 되는 건 각지에 흩뿌려진 수많은 전쟁 군주들뿐이다.

수백, 수천의 전쟁 군주들이 자신의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킬 것이 뻔했다.

‘전국의 시대가…….’

바체트 열도 전체를 뒤덮을 전란의 시대가 멀지 않았다.

그 끔찍하고도 달콤한 울림에, 멈춰 있던 우렌의 시간이 조금씩 천천히 흐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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