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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짓는 플레이어-148화 (148/210)

던전 짓는 플레이어 148화

카쿠쟈(6)

“오, 그런…… 쉴리너 준장이 자결했을 줄이야. 마왕군 입장에선 아까운 호걸을 하나 잃었군.”

“결국은 가문의 체면 때문이었지. 살았다면 마왕군의 위신을 더럽힌 죄인이고, 자결하면 군신이라. 구역질이 나올 만큼 더러운 논리야. 빌어먹을! 솔직히 말해 보게, 유격대장. 피르에나 왕녀의 유격대에 가장 큰 걸림돌이 누구였나?”

“그런 걸 구태여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지 않나. 쉴리너 준장이 이끄는 추격대만이 유격대의 유일한 걸림돌이었지.”

“적군도 인정할 만큼 유능한 장군이었어. 총둔영의 늙은이들이 쉴리너 준장을 죽음으로 몰지만 않았어도……!”

우렌은 끓어 오르는 속을 달래듯 위스키를 연거푸 들이켰다.

루칸다는 우렌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위스키를 계속 따라줬다.

피르에나 왕녀가 군사를 일으켜 서쪽의 마왕성으로 진격한 사건.

글로레나 왕조에선 별도의 명칭을 붙이거나 분류하진 않았지만.

마왕군 내에선 ‘송곳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명명되어 있었다.

그리고 우렌과 루칸다는 비록 서로 대립하는 세력에 속하여 싸운 관계였지만.

같은 과거의 기억을 공유하고 있었고, 같은 전쟁을 경험했다는 동질감이 싹트고 있었다.

이제는 송곳 전쟁에 대해 터놓고 이야기를 나눌 상대도 흔치 않았으니까.

루칸다는 우렌이 아직 ‘카쿠쟈’라고 불리던 시절을 기억하고 있는 사내였다.

대낮부터 술에 취해 있는 비루한 중년 가장이 아니라.

전장을 조율하며, 아군의 신뢰와 적군의 경외를 샀던 야전 지휘관으로서 그를 기억해 주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 전쟁은 끝맺어졌다.

우렌과 루칸다가 진흙을 뒤집어쓰고, 피 웅덩이를 뒹굴며 이뤄내려 했던 이상향은 세월에 사그라들어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흐릿해졌다.

“이제는 그 괴물 같은 왕녀가 그립군. 적어도 사내가 사내다운 삶을 살 수 있었던 시대였어.”

우렌은 쓴웃음을 머금으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평생 동안 전장을 쫓던 사내다.

역설적이게도 적군의 수장이었던 피르에나 왕녀 덕분에 우렌은 군인으로서 삶의 한 면을 장식할 수 있었다.

그리고 쫓을만한 전장이 없어진 지금.

그의 정신과 영혼은 여전히 과거의 전쟁에 얽매여 있었다.

“루칸다, 자네라면 알고 있나? 쓸모가 없어진 도구가 어떤 최후를 맞이하게 되는지.”

루칸다는 술잔을 비스듬히 기울이며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루칸다의 의식 역시 과거의 기억에 닿아 있었다.

“답을 알고 있음에도 구태여 묻는 건가? 장렬한 최후 따윈 없네. 그저 사그라들어, 잊혀질 뿐이지.”

우렌은 어깨가 들썩일 만큼 서글픈 웃음을 토해냈다.

오열 섞인 웃음소리와 함께 우렌이 가슴을 쥐어짜 내듯 토해냈다.

“크란벨 군병장, 하록 상위…… 어째서 본관을 데려가지 않았나…… 어찌하여 이렇게 살아서 더러운 치욕을 홀로 뒤집어쓰게 하는 겐가…… 아무것도 아닌 채로 죽기 싫네, 이대로, 이렇게…… 그 무엇도 아닌 사내로 죽을 바에는 비아 엘티나에서 전우들과 함께 산화하는 편이 나았네!”

루칸다는 술잔을 들어 단번에 위스키를 들이켠 후 다시 말했다.

“우렌. 살아남았다는 건 이유가 있는 법일세. 군인으로서의 삶만을 고집할 필요는 없지 않나? 누군가의 반려로써, 혹은 아버지로서 남은 사명이 있는 것뿐이라고 생각하게.”

짐짓 위로하는 듯한 어조였지만.

루칸다의 말은 질 나쁜 농담처럼 들릴 뿐이다.

우렌은 훌륭한 군인이었던 적은 있었지만, 좋은 아버지나 남편이었던 적은 없었다.

전쟁 외엔 서툴기 그지없는 사내였으니까.

루칸다는 금화 주머니를 테이블에 올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시간이 늦었으니 먼저 일어나도록 하겠네. 앞으로 한동안은 이 마을에 머물 생각이니 종종 얼굴이나 봅세.”

우렌은 인사불성이 되어서는 엉엉 울기 시작했고, 술집의 취객들은 ‘또 지랄이다’라는 식으로 우렌을 째려볼 뿐이었다.

루칸다가 술집을 나서자 건너편 골목에서 로브의 후드까지 푹 눌러쓴 로아가 다가왔다.

“팔자 좋네, 루칸다. 누구한테는 일을 시키고 자기는 술이나 마시면서 농땡이 친다 이거지?”

“누군가 했더니, 로아나 아가씨 아닙니까? 이런 야심한 시간에 홀로 돌아다니시면 위험합니다. 숙소까지 배웅해 드리겠습니다.”

“지랄하지 마. 패 죽여버리기 전에.”

킬킬 웃는 루칸다의 가슴을 주먹으로 툭 쳐서 밀쳐낸 후.

로아는 품속에서 편지 봉투를 꺼내 들었다.

“괜찮은 미끼가 한 놈 걸렸어.”

“수완이 괜찮군. 의외로 남자를 후리는데 재능이 있는 거 아닌가?”

“각하의 명령만 아니었으면 이딴 짓을 할 리가 없잖아.”

솔직히 여자 옷을 입고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역겨워서 온몸의 털이 곤두설 지경이었다.

하지만 로아는 둥지를 떠나기 전 누자베스와 나눈 약속을 떠올리며 꾹 참았다.

‘엉? 각하랑 같이 자고 싶다고? 이 자식들은 각하의 침실이 무슨 챔피언 휴게실인 줄 아나……. 뭐? 스칼렛이랑은 잠도 같이 자고, 루칸다하고는 목욕도 같이하는데 로아 너 하고는 왜 안 되냐고? 그거야…… 각하가 수도승이 아니기 때문이지. 혹여나 내가 이성을 끈을 놓는 순간 업종 변경 신고해야 되니까! 피자집에서 짜장면집으로 말이다! 아니, 아니 아니 그러니까 안 된다는 게 아니라. 이번 일만 후딱 끝내고 오면 당연히 되지!’

같이 잠을 자고 싶다는 건 로아의 개인적인 희망 사항이었지만.

목욕은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완전히 무장을 해제한 채로 함께 욕탕에 들어간다는 행위 자체가 ‘당신을 완전히 신뢰합니다’라는 의미였으니까.

누자베스에게 완전히 신뢰받는 형제로서 총애를 받고 싶다는 욕망이었다.

“뭔가? 갑자기 표정이 기분 나쁜데.”

“아무것도 아냐. 그나저나 루칸다 너는 수확이 있어?”

“아무 생각 없이 술이나 퍼마시는 놈이라고 생각했나?”

끄덕.

로아는 사뭇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루칸다는 그런 로아를 바라보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뭐, 자리부터 옮기지.”

슬슬 배우들이 오를 무대를 완성시킬 차례였다.

* * *

“피에르 쟝. 표면적으로는 방랑 음유시인이지만, 암컷의 고혈을 빨아먹는 기생충 같은 놈이지.”

다시 숙소의 방으로 돌아온 루칸다와 로아는 지금까지 모은 정보를 병렬화하기로 했다.

로아는 정보가 정리된 노트를 루칸다 쪽으로 툭 던지며 입을 열었다.

“이 마을에선 마왕군 장교의 처에게 들러붙어 아쉽지 않게 돈을 빨아대고 있는 것 같아. 최근엔 그 저택을 드나들며 악기 교습을 하고 있다는 모양이야.”

“마왕군의 상위 장교라면 기본 보수도 나쁘지 않을 테고, 수훈 내역에 따라 추가 수당도 나올 테니까. 폐장검까지 수여 받았다는데 꽤 짭짤하지 않겠나.”

루칸다는 안주 하나 없이 싸구려 버번을 홀짝이던 우렌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로아는 음식물 쓰레기를 집어들 듯 손끝으로 편지 봉투를 집어 루칸다에게 건넸다.

루칸다는 로아에게 건내 받은 편지 봉투를 펼쳐 안에 들어 있던 서신을 읽었다.

반쯤 읽던 중 루칸다가 눈살을 찌푸리며 쓴웃음을 머금었다.

“이봐, 로아. 이런 러브레터는 안 보여줘도 되는데. 혹시 내 질투심이라도 유발하고 싶었나?”

로아는 턱을 괴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우렌의 처에게 들러붙은 거머리는 써먹을 수 있을 텐데.”

“이 자식 제대로 정신 나간 또라이군……. 오오, 몬 아무르 나의 별빛, 내 삶의 불꽃? 그대를 향한 나의 순정을 달까지 날려주오? 이딴 편지를 받고 기뻐하는 암컷이 있단 말인가? 달까지 날려달라는 건 뭘 의미하는 건지. 포신에 쑤셔 넣고 작약에 점화를 해달란 의미인가?”

“루칸다, 그 역겨운 편지를 굳이 소리 내서 읽을 필요는 없어.”

로아는 쿡쿡 웃으며 탁상에 두 다리를 교차시켜 올려놓았다.

“우렌 쪽은 어때?”

“말기였지. 전장을 쫓던 수컷은 그런 식으로 죽는 법이니까.”

우렌은 당장에라도 전장에 뛰어들고 싶어 안달이 난 사내였다.

마치 물 밖으로 건져 올려진 물고기처럼 말이다.

하지만 강이나 바다는커녕, 흙탕물 웅덩이조차 보이지 않을 만큼 건기가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다.

“한 가지 걸림돌이 있다면. 우렌에겐 한 가정의 가장으로써 지켜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바람 난 마누라와 군인은 커녕 화가가 되겠다고 야단법석을 부리는 아들이 한 놈 있었지. 딸도 하나 있었다는데.”

“수컷이 화가가 된다고? 빌어먹을, 진짜 우렌의 친자식인지 의심스럽군. 친자식이 맞다면 수컷이 맞는지 바지를 까봐야겠어.”

“그건 네가 알아서 하고. 우렌을 저수지까지 끌고 오는 데 방해가 되는 걸림돌이 뭔지 알았으니, 해야 될 일도 하나뿐이겠지.”

그리고 루칸다와 로아는 가정의 불화를 해결하는 재주가 전무했다.

군인이 되길 강요하는 아버지와 화가가 되고 싶은 아들.

그리고 젊은 놈팽이와 정분이 난 마누라.

이런 가정을 다시 화목하게 만들어주는 방법을 알고 있을 리 없지 않나?

루칸다는 물론이고, 로아 역시 평생을 전장에서 살아온 수컷들이다.

자식을 키워본 적도 없고, 애초에 결혼 같은 걸 꿈꿔 본 적도 없었다.

그러니까.

둘의 공통적인 전문 분야는 하나뿐이다.

오로지 다 때려 부수고 갈기갈기 찢어서 해체한 후 침이나 한 번 찍 뱉어주는 것뿐이다.

“멍청했던 과오를 청산시켜 줘야지.”

“다 때려 부수자는 말이지? 이번엔 간결해서 알기 쉽네.”

로아가 폭약을 묻으면, 루칸다가 뇌관을 연결하고. 폭파 버튼을 우렌에게 넘기면 그만이다.

우렌이 스스로 그 버튼을 누른 순간, 더 이상 거리낄 게 없어질 것이다.

그다음엔 누자베스가 일으킬 홍수에 대해 속삭여 주면 끝이다.

바체트 령이 전부 잠길 만큼의 거대한 홍수 말이다.

이 바짝 마른 대지에서 가까스로 명줄만 붙들고 있던 물고기에겐 더없이 반가운 얘기일 테니까.

로아는 눈을 감으며 담배를 빨아들였다.

"지금 당장 각하가 보고 싶어."

"하핫, 나도 요즘 각하의 얼빠지는 농담을 안 들으니 심심하긴 했지."

타우저 백작을 상대로 얼마나 분투하고 있을지 신경도 쓰이고 말이다.

물론 스칼렛도 함께 있고, 후방엔 에르멜의 기갑 연대가 붙어 있으니 버티는 것 정도는 가능할 것이라 생각된다.

로아는 누자베스의 머리카락이 들어 있는 주머니를 얼굴에 가까이 대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일을 서두르자. 더 이상 떨어져 있다간 정신이 이상해질 것 같아."

"해야 할 일을 정리해야겠군."

누자베스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뭐라고 말했을까?

아마도 호기롭게 일어나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작전명 '사랑과 전쟁’을 개시한다라고 말이다.

그와 동시에 루칸다와 로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이 틀 때까지 기다릴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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