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짓는 플레이어 145화
카쿠쟈(3)
채찍.
우렌의 일평생을 한 단어로 일축하자면, 그러한 형태였다.
그리고 한 단어로 축약될 수 있는 삶이란 어떤 의미로 대단하다고 생각되겠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꽤나 융통성 없는 삶이기도 할 것이다.
하물며 여러 장소에 어울릴 수도 없을 것이고, 많은 이들의 필요를 받아본 적도.
그러니까.
그냥 당연한 형태의 사족 같은 각주다.
채찍을 필요로 하는 존재는 한정적이고, 채찍이 필요한 장소 역시 협소하지 않겠나?
날아드는 채찍을 반길 정신병자도 당연히 없을 테고 말이다.
그리하여.
이제 우렌은 낡고 헤진 채찍일 뿐이다.
너무 위험하다는 이유로 가시를 모조리 제거당한 채찍이다.
그의 주인은 채찍을 휘두르기엔 너무 늙었고, 잃을 것이 많아져버렸다. 주인의 자식들은 어떤가? 탐욕과 용기가 정확히 반비례하는 견자의 무리였다.
“타우저 백작. 이게 어찌된 일인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우렌은 타우저 백작의 오른편에 나타난 두 장교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면식은 있었다.
총둔영 내에서도 몇 번인가 마주친 적이 있었고, 따지자면 선후배 관계이기도 하니 말이다. 물론 우렌의 시점에서 보자면 까마득히 어린 후배들이다.
팬토르칸 소령과 쉴리너 소령.
총둔영의 집행 기관 중 하나인 ‘노르카리움’ 소속이었다.
이즈미 령의 전쟁 군주 타우저 백작은 넉살 좋은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너무 그렇게 도끼눈 뜨고 노려보지 마시오. 우렌 상무관의 진입이 늦어진 덕분에 이 사단이 벌어진 것이니.”
“전투 개시의 결정권은 전적으로 맡기겠다고……!”
“어허! 이미 끝난 일에 시비를 따져서 뭐하겠나? 게다가 우리의 소중한 동포이자, 이 타우저 백작의 이웃이 둥지를 잃었소. 누자베스 그 비열한 놈의 치졸한 배신행위를 눈 뜨고 가만히 지켜보던 건 우렌 상무관이 아니오?”
“군사를 물리지만 않았어도 누자베스의 군세 아릿카사를 제압할 수 있었습니다.”
우렌의 주장은 사실이었다.
우렌의 카쿠쟈 부대는 누자베스가 13차폐구의 둥지로 진입하여 점령하려던 찰나를 노렸다.
그리고 뒤쫓아 오는 에르멜의 할칸 기갑 연대를 타우저 백작의 군대가 제대로 막고만 있었어도.
우렌은 누자베스의 신병을 구속하여 군부 재판소로 보낼 수 있었다.
타우저 백작이 갑자기 군대를 퇴각시킨 덕분에, 카쿠쟈는 괴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무려 22년을 함께 해온 부관도 잃었다. 에르멜 그 괴물 같은 여자에게 붙잡혀 비명을 내지르며 산 채로 찢긴 것이다.
“결과로 말하시오, 결과로! 나이를 먹더니 겁만 많아지고 변명하는 입담만 늘은 모양이군. 철혈의 중재자 우렌도 옛말인 모양이야.”
그 결과의 결정적 원인 제공을 누가 했는지 따지고 싶은 마음만 굴뚝같았다. 하지만 타우저 백작의 곁에 나타난 두 장교를 목격한 순간 납득이 되었다.
이미 타우저 백작은 13차폐구를 손에 넣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공훈의 떡고물을 받아먹기 위해 귀하신 귀족집 자재 분들이 행차하신 것이다.
13차폐구 탈환전에 참가했다는 사실만으로 나쁘지 않은 경력이 한 줄 추가되는 것일 테니까. 멋드러진 훈장도 하나씩 가슴에 달고 말이다.
‘평생 전장을 쫓았다고 생각했다만.’
우렌은 눈을 천천히 감았다 뜨며 숨을 토해냈다.
‘이제 전장을 쫓기엔 너무 늙었군.’
거칠어진 숨을 가다듬지 못한 채, 전장이 아닌 곳에서 객사하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채찍은, 채찍으로써 스스로의 삶을 끝맺고 싶었지만. 그런 사소한 희망을 품을 수조차 없을 만큼 우렌은 지쳐 있었다.
* * *
“와…… 진짜, 우렌 그 음흉한 새끼 둥지 입구에서 대기 타다가 뒤통수 후린 거 실화냐? 내가 그 새끼 아주 음흉한 자식이라고 했지?”
“가, 각하! 자꾸 날뛰시면 상처가…….”
“아파, 아파아파! 아프다고! 젠장, 스칼렛 각하 죽일 작정이 아니면 살살 좀 해라.”
“주군, 몸을 이렇게 쓸 생각이면 다시 돌려주게. 하이브 마인드도 때려치고 어디 지방 호족의 백인장이라도 하는 게 어떤가?”
“하핫! 절대로 안 돌려준다, 스칼렛! 이런 기회가 아니면 언제 상속 신분의 혈술을 써보겠냐.”
“이렇게 험하게 굴리라고 빌려준 게 아니란 말일세.”
스칼렛은 마냥 못마땅한지 혀를 차며 내 등을 찰싹 때렸다.
물론 손목의 스냅이 전혀 들어가지 않은, 애정이 담긴 스킨십이라고 생각하지만. 아직 복부의 상처가 덜 아물었으니 때리는 건 삼가해줬으면 좋겠다.
조금만 더 충격을 줬다간 상처가 다시 벌어져서 또 순대 분출할 것만 같으니까.
‘어쨌든 이번 전투에서 그 위력의 진가가 드러났지.’
메모리얼 전투 후 스칼렛과 정식적으로 유대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리고 틈이 날 때마다 혈술을 제어하기 위한 특훈을 받아 왔다!
그 성과가 드디어 오늘 빛을 발한 것이다.
‘상속 신분과 일치의 오차도 없는 동위 위계의 혈술이라.’
얘기를 들어보자면 조건이 갖춰진다는 전제 하에서, 공간을 박리하여 시간을 되감을 수도 있다고 한다.
그런 말도 안 되는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상속 신분이다.
내가 스칼렛의 능력 중 1할 정도만 구사할 수 있게 되어도, 지금보다 수십 배는 강해질 수 있겠지.
나도 안다.
적성도 없는 놈이 유대 관계를 맺어 봤자 본래의 힘 중에서 1할도 채 구현할 수 없다는 건 말이다.
그냥 내 희망 사항이다.
“역시 오늘 전투에서 오거에게 사용한 그건 흡혈귀의 혈술이었군요.”
고개를 돌리자, 로아가 싸늘하게 식은 시선으로 내 쪽을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그렇다는 건 역시 피를 섞었다고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
“각하?”
“……아니, 그게. 섞었을 수도 있고, 안 섞었을 수도 있는데…… 자세한 내용은 내 소설에 써 있을 수도 있고…….”
로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젠장, 이럴 줄 알았다. 이래서 로아의 추궁에도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로아는 헬베르카의 혈계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고, 자부심만큼 집착이 심하지 않나?
헬베르카의 적계손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던 놈이 어느 날 갑자기 나르시안의 자식하고 피를 섞었다니. 저런 반응이 나올 만하다.
혈통서가 있는 개를 한 마리 분양받았더니, 어느 날 갑자기 믹스견이 된 주인의 심정이 아닐까 싶다.
로아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걱정스러운 눈초리로 이쪽을 바라보며 안절부절 못했지만. 갑자기 태도가 180도 돌변해서는 곧 죽일 듯 노려보기 시작했다.
‘여수 가는 소라가 아니라…… 스쿨데이즈였군…….’
로아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뒤도 안 돌아보고 내 방에서 나가버렸다.
그리고는 마치 바톤 터치를 하듯 루칸다가 모습을 드러냈다. 루칸다는 잔뜩 심통이 난 로아를 돌아보며 어깨를 으슥이더니 바로 내 앞으로 다가왔다.
“왜 저럽니까?”
“루칸다 오늘은 나랑 같이 자자. 혹시나 누가 칼 들고 배 가르려고 하면 바로 저지하는 거다. 알았지?”
“여우가 무섭다고 호랑이를 들이는 꼴이 될 겁니다.”
루칸다는 끌끌 웃으며 담뱃잎을 꺼내 우적우적 씹었다. 그러고는 탁상에 대충 걸터앉으며 입을 열었다.
“부상은 좀 어떻습니까?”
“저번처럼 하반신 불구가 되는 건 어찌어찌 면했지. 병력 손실 상황은?”
“저녁쯤에 바로 확인하실 수 있도록 준비해 놓겠습니다.”
“염병할 우렌 그 새끼가 설치해 놓은 부비 트랩에 걸릴 줄은 몰랐네. 헬베르카 척탄병 셋이 나를 감싸다가 눈앞에서 고기 파편이 되더라.”
덕분에 부비 트랩의 폭탄 파편에 절명하는 건 면했지만, 보충할 수 없는 유니크 병력을 잃는 건 상당히 속이 쓰리다.
“우렌 그 새끼는 곱게 못 죽는다. 죽인 만큼 낳게 한다. 그게 내 둥지의 철칙이다.”
“하핫, 멋지군요.”
“그치? 고블린들이 좋아할 것 같았어.”
“……각하.”
“아, 알았어. 이거 고혐이라고?”
참고로 고혐은 고블린 혐오의 준말이다.
그리고 한 마디 더 덧붙이자면 루칸다 앞에서 고블린 비하 개그는 나만 할 수 있다.
다른 놈이 루칸다 앞에서 같은 소리를 지껄였다간, 눈을 깜빡이기도 전에 몸통과 머리가 분리될 테니까!
“그 늙은 마물놈을 산란장으로 만들기엔 효율이 떨어집니다만. 다른 식으로 피해를 보상하게 만들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크, 각하는 이미 안 들어도 된다. 우리 둥지의 하드 캐리 머신인 루칸다 님께서 또 엄청난 정보를 얻어 왔겠지. 그냥 제반니로 개명해 자식아.”
내 둥지 아릿카사가 언제 폐업을 하는가? 이 질의에 대해 일말의 주저도 없이 대답하자면!
루칸다가 내 둥지의 멤버에서 빠지는 날이다.
이건 진심이다.
“오호라, 이 늙은이는 없어도 괜찮다는 의미인가? 유대도 맺었으니 쓸모가 없다는 소리로 들리네만.”
“어르신…… 자꾸 머릿속 읽지 마요. 당연히 스칼렛 너도 빠지면 안 되는 핵심 멤버지.”
그리고 로아 역시 내 둥지에서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챔피언이다. 솔직히 이 셋이 없다면 나 혼자 이 빌어먹을 전쟁 군주 짓을 얼마나 계속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어쨌든 얘기나 들어보자, 루칸다. 우렌 그 망할 자식에게 어떤 식으로 피해를 보상하게 할지.”
루칸다는 음흉한 미소를 머금으며 대답했다.
“네 번째 챔피언 자리를 마련해 두셔야겠습니다.”
“오우야…… 내 둥지의 네 번째 챔피언은 당연히 거유 서큐버스겠지?”
남자는 안 된다.
여기가 무슨 남탕도 아니고 말이다.
게다가 지금 로아와 루칸다가 있으니 4번째 챔피언이 여자가 아니면 공평하지 않다! 나는 여성고용할당제를 지지하는 페미니스트 고용주니까.
그러니까 되도록이면 경력 단절된 유부녀 서큐버스로 부탁한다.
그런 내 바람과 달리 루칸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유감스럽게도.”
“지자스! 할렐루야다 진짜! 또 남자냐! 이제는 그냥 각하가 여자가 되는 편이 낫다고 생각되는데. 역하렘도 일단은 하렘이니까.”
“우렌입니다.”
“취소다. 각하가 여자 된다고 한 건 취소다. 그 아저씨가 합류하는 순간 역하렘도 뭣도 아니잖냐.”
장르가 다르다, 장르가!
순식간에 여성향에서 남성향으로 전환이다!
“쮸, 쮸쮸- 쮸우-? 쮸쮸!”
“어허! 햄토리 이노무 못된 쥐가 또또! 어디서 천박하게 최면어플 같은 소리를 하고 있어?”
“쮸…….”
어쨌거나 루칸다가 갑자기 우렌을 챔피언으로 영입하자고 얘기를 꺼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오늘 당장 나를 족치기 위해 나섰던 놈을 무슨 수로 영입한단 말인가?
무슨 묘수가 있는지 들어봐서 나쁠 건 없었다.
“이즈미 령의 전쟁 군주는 타우저 백작입니다.”
“오늘 세도루프 그 새끼가 망명한 쪽 말이지?”
루칸다는 고개를 끄덕이며 품속에서 종이를 한 장 꺼냈다. 도대체 무슨 문양인지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복잡기괴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총둔영의 4부 집행 기관 ‘노르카리움’의 문양입니다. 물론 진짜 집행 기관들과 성격이 조금 다릅니다.”
“진짜 집행 기관이면 어떤데?”
“저희는 이미 다 죽었거나, 죽음이 확정되었을 겁니다.”
마왕군 정예 중의 정예.
그것이 바로 총둔영 직속의 집행 기관이다. 하지만 노르카리움은 성격이 다르다는 말이었다.
“쉽게 말해서 도련님들 놀이터입니다. 멋드러진 소속도 하나 만들어주고, 멋진 문양도 하나 달아주고. 꼴값을 떠는 곳이죠.”
“흠…….”
루칸다가 뭘 말하고 싶은지 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루칸다도 내 눈빛을 읽더니 빙긋 웃어 보였다.
“우렌은 평생을 무관으로 살아온 사내입니다. 게다가 마왕군의 내부 사정에도 밝겠죠. 이대로 버려두기엔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한 마디로. 철없는 애새끼들이 군인 놀이를 하려는 걸 적당히 받아줘야 된다는 말이잖아.”
“역시 총명하십니다, 각하.”
진짜 우렌을 영입할 수 있다면 군인 놀이에 어울려주지 못할 것도 없었다.
그리고 애들의 보호자인 타우저 백작은?
애새끼들만 조져 놓으면 나머진 학부모들이 알아서 해주지 않겠나? 요즘 그런 극성 부모가 많다니 다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