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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짓는 플레이어-144화 (144/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144화

    카쿠쟈(2)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아일크라나가 이리도 허무하게 당하다니!

    비록 벽지의 전쟁 군주로서 리케릴 성찬회의 말단에 속한 것이 고작이었지만. 아무리 말단이라도 리케릴 성찬회의 일원이란 말이다.

    성찬회가 밝혀낸 외신의 간섭 흔적.

    그 흔적을 조율하는 것으로 발현되는 마법은 실로 강력한 것이었다.

    아리카 섬 따위의 촌구석에서 막 상경한 전쟁 군주 따위와 비견될 리 없었다. 하물며 그런 놈에게 당할 리도 없을 것이다.

    운이 좋지 않았다?

    타이밍이 나빴다?

    그런 식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누자베스가 아일크라나를 습격한 타이밍은 마치 밤의 어머니께서 계시한 것만큼 완벽했다. 목을 물어뜯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아니, 그런 요행이 흔할 리가 없잖아.’

    세도루프는 뒤늦게 이 전장을 뒤덮고 있는 이질감을 감지했다.

    단순히 누자베스가 운이 좋은 하이브 마인드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딱 맞아떨어지는 타이밍과 상황 전부를 ‘운’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단 말이다.

    ‘설마 처음부터 계획하고 있었던 것이냐……!’

    그제야 세도루프는 누자베스에 대한 평가를 갱신시켰다.

    그저 겁이 많고 미숙한 전쟁 군주가 아니다. 둥지의 챔피언들 역시 누자베스의 혈통을 앞세워 실권을 쥐고 있었던 것도 아니다.

    현재 세도루프 자신이 처한 상황을 돌이켜 보자.

    물론 이러한 배신이 아주 기발하거나, 신묘한 계책인 것은 아니다.

    그저 행할 수 있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였다. 처음부터 동포를 배신한다는 가정을 전제하에 얼마나 망설임 없이 계획을 진행시킬 수 있는가의 문제일 뿐이다.

    누자베스의 행동 원리가 소름 돋을 정도의 탐욕에 기반하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누자베스의 머릿속은 전기 신호처럼 0과 1로 이뤄졌을 것이다. 먹고 싶은가, 먹고 싶지 않은가의 문제뿐이다.

    그 외의 문제는 전부 부수적이며, 중요하지 않은 것들이었다.

    ‘개자식이! 뤼클라를 포섭해 놨었군!’

    아일크라나의 병력은 이미 통제를 잃은 채 날뛰고 있었다. 아직 세도루프와 뤼클라의 병력이 남아 있었지만. 뤼클라가 배신했다고 상정하자면 순식간에 병력이 1/3로 줄어든 것이다.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천칭 저울이 기울어버렸다.

    세도루프 혼자만의 힘으로는 에르멜의 기갑 연대를 막아낼 재간이 없었다.

    세도루프는 거침없이 진격해 오고 있는 수백여 대의 전차를 내려다보며 탄식처럼 한숨을 토해냈다.

    “누자베스…… 어머니께서 네놈의 용서받을 권리를 박탈하셨기를 기도하겠다.”

    이런 잔악무도한 배신 행위가 용서받을 수 있을 리 없었다. 동포와 동족으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도덕을 등진 전쟁 군주가 사후 향해야 할 곳은 지옥뿐이다.

    그것이 세상의 마땅한 섭리다.

    세도루프가 최후의 발버둥을 치기 위해 목에 걸려 있던 구속구를 잡아 뜯으려던 찰나.

    [타우저 : 세도루프 경, 곤란해 보이는군. 어떤가? 이쪽은 곤경에 처한 이웃사촌을 도울 준비가 되었는데.]

    세도루프의 귓가에 구원의 빛줄기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즈미 령의 지배자 타우저 백작이었다.

    * * *

    “맙소사…….”

    “저게 어디의 하이브 마인드야? 소름 돋는구만.”

    “저 깃발은 갈라우드 가문의 것과 비슷해 보이는데. 시트란테 서도에서 온 전쟁 군주인가?”

    할칸 기갑 연대의 병사들은 시선을 빼앗긴 채 저마다 감탄사를 내뱉었다.

    전투가 한창 진행 중인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누자베스의 활약은 단연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마물들의 사이를 가로지르듯 달리며 휘두르는 칼날에 피 안개가 피어올랐고, 적진 깊숙이 파고들어 포위 병력의 밀도가 높아지는 순간.

    콰과광!

    칼처럼 정확한 곡사포 화력 지원이 이어졌다. 게다가 친위대처럼 끌고 다니는 헬베르카 정예 척탄병들을 향하는 중화기 사격을 모조리 방어하고 있었다.

    누자베스를 포함한 100여 마리의 마물 부대가 20배가 넘는 병단을 일방적으로 난도질해 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광경을 목격한다면 누구라도 얼이 빠진 얼굴로 시선이 고정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에르멜도 잠시 숨을 돌리며 누자베스의 활약을 지켜보고 있었다.

    “전쟁 군주들은 자신이 집어삼킨 귀족 가문의 문양을 상징기에 새긴다는데.”

    이 근방에서 삵의 문양으로 유명한 가문은 시트란테 서도의 아리카 섬. 그곳에 터를 잡은 ‘갈라우드’였다.

    그리고 누자베스의 군단 아릿카사의 상징기는 국화꽃을 입에 물고 있는 삵의 문양이다.

    “과연, 그래서 엘베제의 칭호를 수여받았던 거였어. 헬베르카 출신이군.”

    이걸로 누자베스의 출생 성분을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었다.

    아리카 섬을 집어삼킨 헬베르카 계열의 전쟁 군주. 누자베스 그가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재능과, 태어난 후 이뤄낸 업적이 고스란히 담긴 상징기였다.

    “우워어어어어어!!”

    아리카.

    헬베르카.

    두 키워드가 에르멜의 머릿속에서 뒤섞여 한 가지의 의문을 품기 직전.

    어마어마한 기성이 전장 한가운데서 울려 퍼졌다. 누자베스를 지켜보던 병사들이 그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자.

    “오거다! 풀메탈 오거!”

    “역시 13차폐구 정도쯤 되면 저런 괴물을 한두 마리 키우는구만!”

    “에르멜 님! 오거가 엘베제 변경백 쪽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엄호해야 되지 않습니까?”

    에르멜의 부관 펜리르가 다급하게 소리쳤지만, 에르멜은 포신에 폴짝 뛰어올라 걸터앉으며 모노스코프를 꺼내 들었다.

    “풀메탈 오거라. 우리가 가져온 철갑탄으로는 못 뚫을 텐데?”

    “80식 특수작약탄 장전하겠습니다!”

    “아…… 안 돼, 인마. 그거 한 발에 얼만지 알고 그러냐……. 그건 그냥 구색 맞추기로 가져온 거라 사용하는 순간 사유서와 시말서 다발로 써서 제출해야 돼.”

    “빌어먹을! 개 같은 임전위원회 놈들!”

    펜리르가 어울리지 않게 거친 욕설을 토해냈다. 임전위원회는 가장 안전한 수도에 틀어박힌 채 전쟁이 뭔지도 모르는 노인네들로 구성된 조율기관이다.

    그들이 하는 일이라곤 군인들에게 족쇄를 채우고, 편성된 세금으로 반전주의자들에게 자금을 지원하며 내부의 혼란을 가중시키는 일뿐이다.

    그러면서도 군인들에겐 마왕군과 하이브 마인드의 토벌을 재촉하고 종용하는 모순적 집단이란 말이다.

    에르멜은 머리를 긁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의 일이 원래 그렇지 않냐.”

    에르멜이 아무리 대공국의 왕족 출신이며, 교단의 차기 성녀 자리가 확정된 인물이라고 해도. 군부의 인간으로서 활동할 때는 군부의 규율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엘베제 변경백도 병신은 아니겠지. 적당히 물러나며 병력으로 포위하고 집중포화를 퍼부으면 충분히 잡을 수 있어.”

    풀메탈 오거는 전신에 두꺼운 무쇠판을 덧댄 오거다. 마왕군의 정식 명칭은 ‘중장갑 대군멸기형 오거’였지만 말이다.

    글로레나 왕조의 군인들 사이에선 그런 복잡기괴한 명칭보다 ‘풀메탈 오거’라거나 ‘무쇠 오거’ 같은 속칭으로 불렸다.

    오거는 본래의 전투 능력만으로도 위협적이다. 정령과에 속하는 오거는 근력만으론 대륙 전체를 통틀어도 손에 꼽힐 만큼 강력한 마물이니까 말이다.

    게다가 전투 시간이 길어질 수록 더욱 강해지며, 동시에 민첩해진다. 단시간에 빠르게 재압하지 않으면 위험하다는 의미다.

    실제로 풀메탈 오거가 중대 하나를 통째로 갈아버렸다는 전투 보고도 적지 않았다.

    “진짜냐, 진짜냐!? 진짜 그대로 돌격하는 거냐!”

    “곱상하게 생겨서는 성깔은 불 같구만, 그래!”

    “에르멜 님! 그대로 풀메탈 오거에게 달려들고 있습니다!”

    “어? 진짜? 엘베제 변경백이!? 뭐야, 완전 또라이 아냐?”

    경악하는 병사도, 알 수 없는 흥분감에 환호하는 병사들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지상 최강의 생물계에 속하는 오거에게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달려드는 광경은 흔한 구경거리가 아니었다.

    물론 누자베스의 뒤를 바짝 쫓으며 엄호하고 있던 로아는 새파랗게 질려 소리쳤다.

    “각하! 오거입니다, 오거!”

    “알아, 인마! 형아도 눈까루 달렸다! 저 새끼가 날뛰기 시작하면 병력 손실 오잖아! 병력 손실 오면 조상님이 보충해 주는 것도 아닐 텐데. 후딱 목만 따버리고 빠질 테니까 뒤쪽 커버해!”

    “아니, 아니아니아니아니…… 각하, 혹시 저게 뭔지 모르신다면…….”

    “안다니까! 아주 엿 되는 새끼잖냐.”

    누자베스는 이미 아리카 섬에서 오거와 맞붙어 본 적이 있었다. 바로 아비엥의 챔피언이었던 오거와 말이다.

    물론 당시에 상대했던 오거는 성체가 되기 전이었고, 무쇠판으로 전신을 무장한 것도 아니었지만!

    “로아! 혹시나 각하 뚝배기 깨지면 바로 스칼렛 데려와라!”

    누자베스는 그렇게 외치며 곧장 풀메탈 오거를 향해 내달렸다.

    “우워어어어! 쭈긴다아아-!!”

    “저능아처럼 지껄이는 건 오거 종특인가…… 일부러 웃겨서 힘빠지게 만드려는 고도의 노림수인가.”

    “쭈긴다아아아-!”

    말투는 웃기겠지만.

    풀메탈 오거의 불빠따질 맛은 결코 웃기지 않을 것이다. 저 멍청한 말투를 듣고 웃다가, 빠따질 한 방에 웃음이 쏙 들어갈 테니까.

    웃음 대신 입 밖으로 창자 같은 게 나올 것이다. 틀림없다.

    쿵, 쿵쿵쿵!

    풀메탈 오거는 강철로 만들어진 곤봉을 지면에 두들긴 후 번쩍 들어 올렸다!

    “도대체 이 염병할 짓은 언제까지 계속되는 것인가. 앞으로 50편 정도만 더 쓰면 완결일 거 같은데, 아직도 전열에서 이런 개고생이라…….”

    “쭈긴!!”

    쾅!

    곤봉이 누자베스의 정수리를 향해 내려쳐졌고, 누자베스는 붉은 궤적을 남기며 자리에서 사라졌다.

    “따아!!”

    “새끼야, 그건 끝까지 말하고 휘두르는 게 매너지! 수박통 으깨질 뻔했잖아!”

    쩌저적!

    누자베스가 뒤로 덤블링을 하듯 물러나며 거리를 벌리자 그 사이로 균열이 일어났고, 수십 자루의 롱소드가 솟아 나왔다.

    “그건 그렇고 찔리는 건 좋아하냐? 어디를 찔러줘야 될지 몰라서 좀 많이 준비해 봤는데.”

    “쭈긴다아아아-!! 우오오오오!”

    40여 자루의 롱소드가 탄환처럼 발사되었다! 백주월의 고유 능력인 ‘에임페리얼 콜’의 스킬 레벨이 상승해 소환 직후 운동 방향을 지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백주월도 이런 원리로 소환한 미사일이나 탄두를 발사하고 있었다.

    부웅!

    카가가강!

    풀메탈 오거가 곤봉을 휘둘러 수십 자루의 롱소드를 일제히 쳐냈고, 나머지 롱소드가 몸에 닿긴 했지만 무쇠판에 가로막혀 모조리 튕겨 나갔다.

    ‘이음새나 관절 부분이 전혀 안 보이네. 자세를 좀 바꿔 볼까?’

    누자베스가 자신의 손등을 물어뜯었고, 뜯겨진 손등에서 검붉은 선혈이 후두둑 떨어졌다.

    “속박 플레이는 어때, 덩치 형씨?”

    “쏙빠아아아악-!?”

    카각!

    금속이 틀어지는 균열음.

    우드득!

    그리고 척추뼈가 통째로 으스러지는 소리가 화음을 이루며 울렸다.

    “끄, 가아아아아악!!”

    풀메탈 오거의 목이 뒤로 꺾인 순간.

    다시 한번 수십 자루의 롱소드가 소환되었다.

    파바바밧!

    소나기처럼 쏟아진 롱소드가 정확하게 풀메탈 오거의 젖혀진 목에 내리꽂혔다.

    “캬아아악-!”

    쿠웅!

    단말마와 함께 오거가 뒤로 넘어졌고, 그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던 할칸 기갑 연대의 병사들은 입을 쩍 벌렸다.

    “오거를…… 풀메탈 오거를 순식간에 해치웠어.”

    “혼자서? 도대체 무슨 요술을 부린 거야?”

    “저런 괴물이 적이 아니라서 다행이네.”

    “용사보다 더 강한 거 아니야?”

    병사들이 술렁거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는지, 누자베스는 고개를 들어 전장을 살폈다. 이미 발광하기 시작한 아일크라나의 병력은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고, 뤼클라는 이미 투항한 상태다.

    나머지는 세도루프와 그의 병력뿐이었지만, 세도루프는 둥지를 포기할 작정인지 빠르게 방어선을 버리고 서쪽으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남은 건 카쿠쟈뿐인가.”

    누자베스는 흐트러진 앞머리를 뒤로 쓸어넘기며 중얼거렸다. 13차폐구의 둥지를 노리는 놈은 아직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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