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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짓는 플레이어-142화 (142/210)

던전 짓는 플레이어 142화

피스 오브 파이(5)

[세도루프 : 저, 저…… 저런 미친놈이……!]

[아일크라나 : 어째서 병력을 산개시키지 않았나, 누자베스 변경백! 당장 돌격 명령을 철회하게!]

[누자베스 : 예……? 예!?]

[세도루프 : 머스킷티어 부대를 퇴각시키라고 또라이 자식아! 병력을 모조리 버릴 셈이냐!]

[누자베스 : 후, 후퇴요? 자, 잠깐만요…… 그런 건 루칸다한테 물어보고 결정해야…….]

[세도루프 : 닥치고 당장 유효 사거리 바깥으로 이동시켜!]

[누자베스 : 아, 그게…… 어, 어라? 구역 분류 E-07지역이 여기가 아니었다고? 루칸다가 분명 여기라고 그래서…… 퇴각은 그럼 어디로 해야 돼?]

첫 방어전 개시 직후였다.

누자베스는 방어력이 취약한 머스킷티어 부대를 사열시켜 그대로 진격시켰다.

오와 열을 맞춘 채 느릿느릿하게 걷는 구울 머스킷티어 부대다. 에르멜과 그녀의 기갑 연대에게 어떻게 보였을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그냥 느릿하게 움직이는 표적판이었다.

가장 먼저 몇 기의 골렘을 희생시켜 전차의 유효 사거리를 확인한 작업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만큼. 누자베스의 판단은 멍청하기 그지 없었다.

차라리 산개하여 유격전의 형세를 취했다면 그나마 봐줄만 했을지도 모른다.

일단은 규모적으로 우세한 이 상황에서 충분히 가용할 만한 작전이었다. 아니, 설령 유격전이 별다른 효용성을 지니지 못한다 하더라도 말이다.

수천 마리의 구울 머스킷티어를 나란히 세워 그대로 돌격시키는 것보단 나았을 것이다.

쾅!

누자베스가 우물쭈물 하는 사이에 포탄의 종류가 바뀌었다.

“끄, 끄어어어!”

“으어어어…….”

한 발의 포탄에 수십 마리의 구울이 파편이 되었고, 탄착점에서 떨어져 있던 구울도 화염에 휩싸여 비명을 내질렀다.

단단한 놈들이 전열에 설 것을 예상하고 철갑탄을 장전해 놨던 것이다. 하지만 누자베스의 구울 부대가 앞으로 먼저 나서자, 재빠르게 작열탄으로 재장전하여 섬멸을 개시했다.

200여 대의 전차가 뿜어내는 작열탄은 그야말로 발군의 효과를 발휘했다.

그레이브 야드 부대가 서 있던 곳이 순식간에 불지옥으로 변모했을 정도니까.

[아일크라나 : 66식 작열탄이다! 방패부대!]

그리고 아일크라나는 우방의 실책으로 생겨난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바로 명령을 하달했다.

차라리 잘 된 일일지도 모른다.

저 멍청하고 무능한 누자베스가 헛짓거리를 해준 덕분에 이런 틈이 생겨나지 않았나?

그레이브 야드 부대가 가장 먼저 앞에 나서 주의를 끌어준 덕분에 할칸 기갑 연대에게도 빈틈이 생겨났다.

녀석들이 구울 사냥에 신나서 정신이 팔려 있는 사이에 빠르게 거리를 좁힐 작정이었다.

[세도루프 : 뤼클라, 아무래도 안 되겠다. 저 촌놈은 전혀 도움이 안 돼. 진형의 우익 쪽 병력 좀 증강시켜.]

세도루프가 짜증스러운 어조로 그렇게 말했지만. 뤼클라에게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세도루프 : 뤼클라?]

[뤼클라 : 알았다.]

[세도루프 : 젠장, 너까지 멍때리지 말라고. 저놈들 오늘 쌓아놓은 탄약 다 때려붓고 갈 생각인 거 같은데, 이대로 얻어맞기만 하다간 얼마 못 버티니까.]

조금이라도 밀리는 순간이 끝이다.

만약 에르멜의 전차 부대가 방어선을 뚫는다면?

그대로 대지형 폭뢰로 둥지에 데미지를 줄 것이다. 13차폐구의 컴플렉스 둥지는 나름대로 방어 설비가 갖춰져 있었지만 말이다.

글로레나 왕조의 군대가 사용하는 대지형 폭뢰를 두세 번 정도 버티는 게 고작이었다.

드릴로 구멍을 뚫고, 그 안에 폭뢰를 묻어 지각층을 통째로 뒤흔드는 작전은 여전히 하이브 마인드의 둥지에 유효한 타격 수단이다.

만약 둥지의 위쪽 지상을 완전히 점령당한다면 끝이다. 대지형 폭뢰가 둥지를 완전히 무너뜨릴 때까지 둥지에 틀어박혀 있을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니까.

대지형 폭뢰 한 발의 가격은 한 사람이 죽을 때까지 놀고먹을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났지만. 에르멜은 왕조의 직속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나선 지휘관이다.

마음만 먹으면 대지형 폭뢰 수천 발을 공수해서 몽땅 13차폐구에 털어 넣을 수도 있을 것이다.

13차폐구의 전쟁 군주들도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에르멜 역시 그럴 작정이었고 말이다. 에르멜은 전차의 지휘기에 탑승하여 전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전차의 장전수가 포트에 조심조심 홍차잎을 넣고, 전차 내부에 달린 온수기를 통해 뜨거운 물을 받았다.

“오, 이 전차는 홍차 기계가 달렸네?”

“예! 그리모르 화약 공방의 신제품입니다.”

“캬…… 그리모르 놈들이 전차 하나는 잘 만들어. 그치? 내 생각엔 홍차 기계가 안 달린 전차는 전차가 아니야.”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에르멜 님!”

“하여간 어떻게든 단가 후려쳐서 입찰해 보려는 놈들 뿐이라, 그런 호로 새끼들이 만든 쓰레기를 써야되는 우리가 고생이지.”

“옳은 말씀입니다, 에르멜 님!”

“대머리 새끼들이 싸구려만 좋다고 찾으니까 제작하는 놈들도 어떻게든 싸구려 만들 궁리만 하고.”

“역시 구구절절 타당한 정론이십니다!”

“윗대가리 새끼들이 문제야. 아주 그냥 윗대가리는 전부 다 모가지를 따버려야 되는데. 그치?”

“맞습니다!”

“맞긴 뭘 맞아! 나도 윗대가리인데 지금 내 목을 따라는 거야 뭐야? 이 반동 분자 자식아! 성처녀 목을 따라고? 이거 완전 이교도 새끼 아냐!?”

“아, 아닙니다!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장전수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에르멜이 현재 할칸 기갑 연대의 지휘관이기도 했지만. 본래 소속으로 따지자면 스텔라 교단의 성처녀다.

왕정으로 비유하자면 왕세자나 다름 없는 인물이란 말이다. 게다가 쉬르센 가문의 차기 당주였으니 그녀의 말 한 마디로 단두대형에 처해질 수도 있었다.

“쫄지 마. 그냥 스텔라 교단식 농담이야, 홍차나 내놔. 사내 자식이 거시기 달고 태어나서 그렇게 겁이 많으면 쓰나.”

에르멜은 클클 웃으며 홍차잔을 받아 들었다.

“통신망 열어. 교단의 성처녀로써 병사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덕담 한 마디 해줘야지.”

전차의 가장 앞좌석에 앉아 있던 조종수가 지휘기의 공명석을 활성화시켰다.

에르멜은 홍차를 홀짝이며 잠시 말을 고른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군들, 오늘은 마침 둥지 까부수기에 딱 좋은 날씨다. 스텔라 님께서도 바체트령에 서식하는 기생충 놈들을 박멸하는 걸 보고 싶으셨던 모양이야.”

병사들은 모두가 하나 같이 에르멜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에르멜은 살아 있는 스텔라의 전령이다. 에르멜의 말이 곧 스텔라의 말이며, 에르멜의 의지가 곧 스텔라의 뜻이었다.

동시에 지금까지 출전했던 전투에서 언제나 경악스러운 결과를 도출해냈던 지휘관이다.

에르멜에게 향하고 있는 병사들의 눈빛에는 신뢰가 깃들어 있었다.

“스텔라 님께 보고드리기 부끄럽지 않을 정도의 용맹한 공훈을 기대하겠다.”

그리고는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홍차를 단번에 벌컥벌컥 들이켰다. 물론 제대로 된 홍차는 펄펄 끓는 물로 만드는 게 아니지만. 입천장과 목구멍에 화상을 입을 만큼 뜨거운 홍차가 에르멜의 취향이었다.

에르멜은 입가에 묻은 물기를 손등으로 거칠게 훔쳐내며 입을 열었다.

“사나이와 계집년이란. 가랑이 사이에 고기 한 점 더 달려 있느냐 아니냐로 결정되는 게 아니란 말이다.”

전장에 서는 자라면 그녀의 말에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생물학적 성별이 남자와 여자를 나눈다지만. 사나이로 죽을지, 계집으로 살아남을지를 결정하는 건 오롯이 스스로의 결의뿐이다.

“부디 내 부대엔 꼴사나운 계집이 없길 바라지.”

에르멜의 의식이 전환되었다.

통상 모드에서 전시 모드로 말이다.

눈동자의 온도가 가라앉았고, 평소에 때때로 풍기던 가벼운 냄새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천국의 입구까지 내가 너희들과 함께하겠다. 최초의 구도자와 최후의 순례자가 새벽부터 황혼까지 함께하듯. 스텔라 교단의 성처녀 에르멜이 그대들과 함께하겠다.”

그녀가 토해내는 말들은 모든 것이 보증수표와 같았다. 절대적인 신뢰와 맹신이 병사들의 가슴 깊은 곳에서 끓어 올랐다.

설령 이곳에서 목숨을 잃게 되더라도, 태양의 천당에서 영원한 안식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병사들에게 죽음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 되어버린다.

“작전을 개시한다. 기생충 놈들에게 일광 건조를 좀 시켜주지.”

에르멜이 거기까지 말한 후, 공명석이 비활성화되었다. 에르멜은 빈 찻잔을 장전수에게 돌려준 후 크게 한숨을 토해냈다.

‘이번에 내 병사들의 명줄을 붙잡고 있는 건 스텔라 님이 아닌, 엘베제 변경백이로군.’

이대로 정정당당하게 정면에서 충돌하게 된다면 할칸 기갑 연대도 적지 않은 피해를 입게 될 것이다.

그러니 이번 작전만큼은 누자베스가 제대로 움직여주길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에르멜은 누자베스만 믿고 기도만 하고 있을 만큼 신앙심이 깊은 것도 아니었고, 나이브하지 않았고, 아무런 대책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엘베제 변경백도 이번 기회를 놓칠 만큼 얼간이는 아닐 테고.’

어느 정도의 심산도 있었다.

누자베스가 에르멜이라는 최강의 장기말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칠 만큼 어수룩한 놈이 아니라는 심산 말이다.

* * *

뤼클라는 고뇌하고 있었다.

드디어 할칸 기갑 연대와의 전투가 시작된 지금. 뤼클라는 한없이 깊은 고뇌에 빠져 있었다.

수백 년을 함께 한 동지를 배신할 수 있는가? 그런 싸구려 신파극 같은 고뇌였다.

뤼클라는 사념을 털어내듯 고개를 강하게 가로저었다.

‘이건 기회다. 천재일우의 기회가 온 것이다.’

스스로를 설득하듯 뤼클라는 그런 식으로 되뇌었다.

지금이 바로 이 13차폐구를 온전히 장악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기회였다. 세도루프와 아일크라나가 전선에 나선 지금, 가장 둥지에 가깝게 병력을 배치한 하이브 마인드는 뤼클라였다.

‘내가 이 13차폐구의 온전한 주인이 될 수만 있다면…….’

상속 신분의 곁에서 봉사할 수 있는 권리를 얻을 수 있었다.

“대모 님께 헌신할 수 있는 기회를 어물쩡거리다 놓칠 수는 없다.”

스칼렛의 모습이 뇌리에 각인된 듯 잊히지 않았다. 아주 잠깐, 머리에 닿았던 발의 감촉까지 말이다.

닿아서도 안 되고, 닿을 수도 없었던 고결함이 남긴 향기는 뤼클라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있었다.

가능한가?

불가능한가?

그런 이분법적인 선택지 따윈 처음부터 없었다. 뤼클라는 할 수밖에 없었다. 상속 신분의 고결함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면.

언어로 형언될 수 없을 만큼 말도 안 되는 요구도 삼킬 수밖에 없는 것이다.

뤼클라는 스칼렛이 누워 있던 침대의 곁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는 성물을 마주한 신도처럼 조심스럽게 침대의 시트를 들어, 천천히 얼굴을 묻었다.

깊고 길게 숨을 들이마신 후 뤼클라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흐읍, 흡……! 하아…….”

몇 번이고 그런 짓을 반복한 후 뤼클라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미 이성이 날아간 듯 초점이 풀려 있었다. 그리고 입구에서 기다리던 챔피언 ‘발르락’의 앞에 서서 입을 열었다.

“발르락 장군. 제7폐쇄 구역 점령을 명한다.”

“제7폐쇄 구역이라면…….”

아일크라나의 마력 제어 장치가 설치된 장소였다. 발르락은 뭔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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