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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짓는 플레이어-141화 (141/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141화

    피스 오브 파이(4)

    [누자베스 : 오랜만이야, 제군들. 그동안 달달한 망고 많이 빨고 있었냐?]

    [루칸다 : 각하, 외람되지만 그런 말은 휴가를 주면서 하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스칼렛 : 이번 작전 개시까지 시일이 오래 걸렸네. 너무 한곳에 묶여 있는 건 지양해야 하지 않겠나?]

    [로아 : 저기…… 헬베르카 정예 척탄병들의 건의사항입니다. 둥지 내에서 매중초의 재배를 허락해 달라는…….]

    [누자베스 : 매중초가 뭔데?]

    [루칸다 : 강력한 환각 물질을 지닌 식물입니다. 흔히 줄기에서 채취할 수 있는 수액을 가공하여 각성제로 사용하죠.]

    [누자베스 : 이 새끼들이 아주…… 내 둥지가 아주 그냥 악의 소굴이야, 악의 소굴! 이 도박쟁이 고블린하고 어? 약쟁이 병사들하고! 허구한 날 암소만 찾는 놈들하고, 인육 먹는 놈들하고! 더 없냐? 더 없어? 각하는 지금 인간 처녀애들 데려와서 마물 낳게 하는 것만으로도 죄악감 만땅인데!]

    [루칸다 : 비비큐 클럽의 부대장 두르난의 건의사항도 있었습니다. 효용성이 떨어진 산란장을 포탄 성능 실험대로 사용하고 싶다고 합니다.]

    [누자베스 : 너희들은 진짜 악마 새끼들이야…….]

    생각해 보자면 어디까지나 문화의 상대성에서 비롯되는 인식의 차이일 뿐이지만 말이다.

    인간의 기준에서 형성된 현대의 도덕성을 마물들에게 토로해 봤자, 정신병자 취급밖에 더 받겠나?

    [누자베스 : 우리 스칼렛을 좀 보고 본받아라. 얼마나 스토익하냐?]

    [스칼렛 : 나는…… 그냥, 신선한 숫처녀의 피를 빨고 싶네.]

    [누자베스 : 좋아! 그 정도면 매우 양심적이다!]

    사악한 마법으로 인간 여자를 마물의 알이나 낳게 하는 시설로 만들었다가, 마지막엔 박격포로 폭사시키는 것보단 말이다!

    [스칼렛 : 특히 그 에르멜이라고 했나? 그 아이한테는 맛있을 것 같은 냄새가 풍기던데.]

    [누자베스 : 역시 휴먼 구르메 스칼렛 님이십니다. 안목이 매우 높으시군요.]

    에르멜 정도라면 스칼렛의 구미를 당기기에 충분하지 않겠나?

    물론 에르멜 만큼 먹기 힘든 별미도 없겠지만 말이다.

    무슨 야생의 사바나도 아니고, 한 끼의 식사를 위해 사활을 걸고 덤벼야 된다는 의미다.

    [누자베스 : 어쨌든…… 얘들아, 각하가 작전 브리핑할 거니까 집중 좀 해줘라.]

    [루칸다 :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로아 : 준비됐습니다.]

    [스칼렛 : 말만 하게. 바로 움직이지.]

    이번 작전은 드디어 에르멜과 그녀의 휘하 부대인 할칸 기갑 연대를 끌어들인 첫 합동전이다.

    [누자베스 : 어디까지나 이번 작전의 주력은 에르멜의 기갑 연대다. 이번엔 주연 자리를 양보한다고 생각하면 간단하지?]

    [루칸다 : 그러면 저희는 뭘 할 수 있습니까?]

    [누자베스 : 루칸다, 우리는 할 게 없다. 팝콘이나 가져와라.]

    그냥 농담이다.

    당연히 나도 할 일이 있었다.

    에르멜의 기갑 연대가 빠르게 방어선을 뚫고, 13차폐구의 둥지 위에 대지형 폭뢰를 설치하는 걸 도와야 한다.

    [누자베스 : 우리는 적당히 비실거리다 툭 쓰러지자고.]

    원래 언덕 막기란 그런 재미로 하는 법이다.

    별 도움도 되지 않다가, 얼토당토않은 트롤링으로 팀원들의 분노를 유발하는 재미로 하는 게임이다!

    그럼 작전명은 뭐로 하는 게 좋을까?

    당연히 답은 정해져 있었다.

    [누자베스 : 작전명 이랏샤이마세 오퍼레이션을 개시한다.]

    나머지는 우리의 반동분자 뤼클라 남작이 제대로 움직여 주길 기도하는 것뿐이었다.

    * * *

    “역시 이렇게 움직이는군.”

    모노스코프로 솔리엔 령의 상황을 지켜보던 우렌은 감탄이 묻어나는 어조로 중얼거렸다.

    “누자베스, 이 귀여운 쥐새끼가 드디어 꼬리를 내밀었어.”

    카쿠쟈 부대의 지휘관이자, 상급 감찰관 우렌에게 13차폐구는 처음부터 목표가 아니었다.

    아쉬운 대로 병력의 몸집을 불리고자, 이즈미 령의 타우저 백작과 협공하는 형세를 취하게 되었지만.

    솔리엔 령에 눈독을 들이고 있는 타우저 백작과 달리. 우렌의 목적은 오로지 누자베스였다.

    일전에 포 힐케인 섬에서 만났을 땐 우렌에게 구실이 없었을 뿐이다.

    아무리 하이브 마인드 처리반이라고 해도, 그 어떤 명목도 없이 전쟁 군주를 사냥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우렌이 바라던 재회에는 적당한 구실이 필요했다. 누자베스와 다시 만났을 때 아무런 허물 없이 검을 맞댈 수 있는 구실 말이다.

    “동포에 대한 도리와 도의가 없단 말인가.”

    아무리 둥지 확장을 하며, 경쟁을 거듭하는 관계라고 해도 전쟁 군주들은 일단 마왕 아일라드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창조된 지적 합성체다.

    전쟁 군주들은 인간을 죽이기 위해 협력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누자베스는 인간의 힘을 빌리거나, 그들과 협력하여 다른 전쟁 군주를 사냥하는데 아무런 거리낌도 없고, 저항감도 없는 개체였다.

    “병력의 배치가 너무나 부자연스러워. 본관의 눈에는 그렇게 보인단 말이지. 포 힐케인 섬에서 보여줬던 그 치밀하고 겁 많은 전쟁 군주라고 생각되지 않을 만큼.”

    마치 다른 꿍꿍이를 품고 있는 것 같았다.

    이대로 접전이 시작된다면, 누자베스의 군세는 순식간에 할칸 기갑 연대에 의해 갈려 나갈 것이다.

    물론 13차폐구의 전쟁 군주들에게 강요당해 가장 피해가 큰 위치를 맡게 되었을 수도 있지만.

    우렌이 알고 있는 누자베스라면, 어떤 식으로든 유리한 지형을 차지하고 전선에 나섰을 것이다.

    하지만 대놓고 피해가 클 수밖에 없는 지역에 병력을 배치하고 있는 걸 보자면, 어떤 식으로든 의심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인간의 지휘관과 내통하여 모종의 합의를 도출했군.’

    정말이지 경우가 없는 놈이다.

    저런 극악무도한 배신행위를 눈썹 하나 까딱이지 않고 해내다니 말이다.

    그리고 그런 상투적인 도리를 벗어 던진다면, 누자베스가 도출해 낼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결론이었을 것이다.

    우렌은 누자베스의 그런 점을 높게 샀다.

    도리와 도의가 뭔지 모르는 저 극악무도한 탐욕에 동경을 품고 마는 것이다.

    마치 자신 만큼은 무슨 짓을 해도 용서받을 수 있다는 확신을 지닌 것처럼 느껴질 만큼.

    누자베스는 그 자체로 순수한 악이었다.

    “안타깝게도 악동은 벌을 받는 게 세상의 이치라는 것이지.”

    우렌은 모노스코프를 접어 야전 코트의 품속에 넣었다. 그리고는 뒤로 돌아 사열되어 있는 자신의 병대를 향해 섰다.

    드디어 누자베스가 여지를 제공한 것이다. 감찰관 우렌이 무력을 행사할 수 있는 조건을 충족시켜 주었다.

    동포를 배신하고, 인간과 협력하려 하는 전쟁 군주는 우렌의 사냥감에 속했으니까!

    사열된 병력의 가장 앞자리에 나와 있던 하급 장교가 준비된 서류를 꺼내며 다가왔다.

    상무관 우렌의 감정적 판단과 독단을 제어하기 위해 파견된 총둔영의 종무 장교 ‘뮤테르’였다.

    우렌은 뮤테르를 향해 담담한 어조로 선언했다.

    “현시를 기점으로 아리카의 엘베제 누자베스에게 반역모의죄의 혐의를 적용하겠다. 감찰 칙령 8조 3항에 의거하여 무력 개입 및 즉결 처형권의 유효를 결한다.”

    “총둔영의 2차 임시 강령에 위배되지 않습니다. 조건부 허가하겠습니다.”

    “이봐, 뮤테르. 융통성 좀 발휘하지?”

    “우렌 상무관. 종무 장교의 판단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기본 수칙에 위배되는 행위입니다.”

    “조건이나 들어보자고.”

    “반역모의죄의 용의를 인정하나, 즉결 처형권의 유효성 요청을 기각합니다. 무력 개입은 7종 개입까지 허가합니다. 제압을 우선하십시오.”

    “하이고, 염병을 떠는구만.”

    “우렌 상무관. 종무 장교에 대한 모욕적 발언은 강령에 의하여 처벌받을 수 있습니다.”

    “본관의 혼잣말에 발끈하지 마시오, 종무 장교 양반.”

    차라리 기계나 돌덩이를 상대하는 게 낫다고 생각될 만큼 뮤테르는 딱딱한 사내였다.

    ‘7종 개입까지 허가하겠다고? 아주 지랄을 하려고 납셨구만.’

    홀딱 벗은 채 솜방망이를 들고 제압하라는 소리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풀플레이트로 무장하고 철퇴까지 든 상대를 말이다!

    “이의가 없다면 준비된 후 출전하십시오.”

    “이의가 있어도 말하면 모욕이라면서?”

    “…….”

    “이놈의 개 같은 관료제는 뭐 하나 바뀌는 게 없구만. 총둔영의 어르신들께 전하시오. 전쟁은 책상 위가 아니라 전장에서 일어나는 법이라고!”

    “우렌 상무관. 출전 준비 완료되는 대로 보고하십시오.”

    “……니기미.”

    우렌은 욕지거리를 중얼거리며 삐딱하게 서서 경례를 올렸다.

    “혼돈의 의지가 함께하길.”

    척!

    뮤테르 역시 칼 같은 자세로 답례를 올렸다.

    “혼돈의 의지가 함께하길.”

    마왕군의 전력을 깎아 먹는 건 글로레나 왕조의 군대뿐만이 아니다. 탁상 앞에 모여 앉아 허황된 몽상이나 주절거리는 늙은이들도 단단히 한 몫을 거들고 있는 것이다.

    진짜 전쟁을 모르는 문관 놈들이 야전의 지휘관들에게 족쇄를 채우고 있는 꼴이 아니던가?

    ‘마음대로 활개를 치고 다닐 수 있는 네가 부럽군, 누자베스.’

    이럴 때만큼은 마왕군 소속이 아닌, 전쟁 군주의 지휘자들이 부러워지는 법이었다.

    어쩌면 무관으로서 마지막 경력을 장식하기엔 마왕군이 아닌, 전쟁 군주의 군세에 합류하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 * *

    수백여 발의 포탄이 순식간에 주홍빛 직선을 그리며 날아들었다.

    콰과광!!

    순식간이었다.

    전열에 나서 있던 아일크라나의 바위 골렘 부대가 파편이 되어 허공에 흩날렸다. 병력을 접근시킬 때까지 최대한 버텨 볼 요량으로 투입한 병종이 말이다!

    [누자베스 : 아, 아이고…… 우린 다 죽었어……. 루, 루칸다 봤냐? 바위 골렘이 원턴킬인데?]

    [루칸다 : 생각보다 화력이 나쁘지 않군요.]

    [누자베스 : 뭘 냉정한 척하냐! 우리 작전은 적당히 맞는 척하다가 호다닥 도망가는 거였잖아!]

    생각해 봐라.

    저건 맞는 척만 해도 뒈짐 확정이다.

    또 내가 전열에 나서서 포탄을 하나하나 다 튕겨내지 않는 한 말이다.

    그리고 저번에 봤을 때는 40대 정도였다!

    지금은 대충 눈짐작으로 세어봐도 200대 정도는 되어 보였다. 무려 2배다!

    아니, 5배다.

    솔직히 2배나 5배나 스치면 뒈진다는 건 같은데 대충 넘어가자.

    가챠 확률업 5배 이벤트 해도 5성 뜰 확률이 0.005%라는데, 0.002%와 크게 다르지 않으니까!

    그게 그거란 말이다.

    [누자베스 : 13차폐구 형님들 눈치 보이니까 우리도 슬슬 진격시켜 보자고. 혹시 모르잖아? 에르멜이 우리 애들을 알아보고 살살 쏴줄지.]

    총도 살살 쏘면 안 아프다는 게 학계의 정설이다. 그렇다면 주포도 살살 쏘면 안 아프지 않겠나?

    [누자베스 : 그레이브 야드 부대 일제 돌격이다. 우리가 아주 물불 안 가리고 덤비는 의욕 넘치는 애들이지만, 전혀 X도 도움도 안 되는 놈들이라는 걸 온몸으로 어필해 보자고.]

    본성을 드러낼 때?

    13차폐구의 전쟁 군주 놈들의 머릿속에서 내 주전력을 지운 뒤다.

    미안하지만 이런 속임수를 쓰는데 특화된 능력이 좀 많았다.

    추리 소설에서 첫 번째로 살해된 피해자가 사실은 진범이었다! 라는 트릭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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