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짓는 플레이어-140화 (140/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140화

    피스 오브 파이(3)

    에르바키나 연맹.

    일반적으로는 상회 연맹으로 알려져 있는 집단이다. 하지만 에르바키나 연맹이 현세대의 실질적인 지배자이자, 가장 큰 규모와 무력을 지니고 있는 집단이란 사실 역시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샤가르 재단이 모체가 되는 이 상회 연맹은 수 세기에 걸쳐 전세계의 상권을 장악했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탐욕스럽게 몸집을 불리고 있었다.

    신화와 왕들의 시대는 끝났다.

    신앙은 자본주의로 대체되었고, 왕의 절대권력은 몇 푼의 금화보다 가치가 없는 것이다.

    샤가르 재단은 이러한 모토로 수백여 년 동안 대륙 각지에 영향력을 넓혀 왔다.

    이미 대륙의 대부분 지역은 에르바키나 연맹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고, 바체트령 역시 크게 다르진 않았다.

    하지만 대륙에서 동떨어진 촌구석이었기 때문일까?

    바체트령은 대륙의 다른 지역보다 에르바키나 연맹에 대한 의존도가 낮은 곳이었다.

    그렇기에 바체트령은 에르바키나 연맹에게 남겨진 숙제였다. 패러다임을 바꾸고,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해 완성시켜야만 하는 마지막 퍼즐 조각이란 말이다.

    그리고 그 숙제를 맡게 된 인물은.

    샤가르 가문의 38대손이자, 현당주의 다섯째 아들인 ‘헤미테르’였다.

    헤미테르는 20대 초반의 청년으로 보이는 외견이었지만, 이미 바체트령의 총정관으로 취임한 지 130년이 지난 것이다.

    헤미테르에겐 바체트령을 완전히 장악해야 된다는 사명이 있었다.

    물론 글로레나 왕조와 마왕 아일라드가 서로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대치하고 있었기에, 나쁘지 않은 벌이가 되고 있었지만.

    역시나 한 세기가 지나도록 상황이 고착되고 있으면, 헤미테르의 본가인 샤가르 가문에서도 닥달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헤미테르 그의 형제들이 대륙의 각지에서 나쁘지 않은 성과를 속속들이 올리고 있는 와중에, 그가 이 먼 극동의 섬에서 묶여 있는 상황은 언제나 불쾌했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시트란테 서도의 지부장 코쿠라가 대형 사고를 쳤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코쿠라는 원래 여러모로 말이 많았기에 벽지로 쫓겨나 있었던 인물이다.

    헤미테르는 코쿠라를 직접 만난 적이 없었지만, 그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은 심심치 않게 들어 왔다.

    총정관의 집무실에 모습을 드러낸 코쿠라는 헤미테르의 앞에서도 한 치도 주눅이 들거나, 비굴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고작해야 벽지의 지부장에 불과한 사내가 말이다. 바체트령 내에서도 굵직한 지역을 맡고 있는 지부장들도 저런 태도는 아니었다.

    헤미테르는 시트란테 서도의 지부장 코쿠라를 훑어본 후 한숨과 함께 말을 꺼냈다.

    “코쿠라 지부장. 이번에 꽤나 대단한 짓을 해줬다는 얘길 들었습니다.”

    사뭇 책망의 기색이 담긴 첫마디였다.

    아무리 에르바키나 연맹이 돈이 되는 짓이라면 뭐든지 하는 양아치 집단이라도 말이다.

    가짜 명세서를 공식 인장까지 찍어서 발급해버리는 건 대형 사고에 속했다.

    그 가짜 명세서가 어디에 어떤 식으로 사용될지 모르는 지금, 이 일로 어떤 사고가 터질지 노심초사할 수밖에 없는 상황 아닌가?

    바체트령의 총정관인 헤미테르에게 보고될 정도로 심각한 사안이었다.

    하지만 코쿠라는 대수롭지도 않은 일이라는 듯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총정관님. 장사치에게 대단한 짓이 뭐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그저 캐피탈리즘의 논리에 입각하여 행동할 뿐입니다. 좋은 물건을 받아서, 좋은 가격에 판매한다. 이 단순하기 그지없는 작업에서 그 무슨 대단한 일이 일어난단 말입니까?”

    “그럼 거짓된 거래의 명세서를 발급한 게 대수롭지 않은 일이란 말입니까! 장사치에게 신의와 신뢰보다 더 중요한 건 없습니다. 신뢰를 얻으면 돈이 따라오는 것이고, 신의가 바닥을 드러내면 곳간도 비는 법입니다.”

    “신의와 신뢰라.”

    코쿠라는 깔끔하게 정돈된 콧수염을 매만지며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설마하니 샤가르 가문의 분께서 그런 단어를 입에 담으실 줄은 몰랐습니다.”

    “코쿠라 지부장. 지금부터 말을 신중하게 하시오. 그대의 처분이 어떤 식으로 결정될지 좌우할 터이니.”

    단순히 해직 같은 징계 처분으로 끝나지 않을 수 있다. 연맹이 신의를 되찾기 위해 꼬리를 자를 수 있다는 의미다.

    이 사건의 주모자인 코쿠라를 공개 처형하는 등의 퍼포먼스로 말이다.

    코쿠라는 헤미테르의 허가도 없이 소파에 털썩 앉으며 입을 열었다.

    “총정관님. 이 세상의 잡것들은 도의를 떠들길 좋아합니다.”

    품속에서 긴 담배 파이프와 담배잎이 담긴 상자를 꺼냈다.

    “총정관님. 이 세상의 천한 것들만이 도리에 대해 논하려 합니다.”

    “장사치의 도리를 그런 식으로 깎아내려 자신을 합리화하려는 것입니까?”

    “허허, 당치도 않습니다. 이 늙은이는 그저 당연한 섭리에 대해 말하려는 것뿐입니다.”

    코쿠라는 파이프에 담배잎을 담아 꾹꾹 누른 후 불을 붙였다. 헤미테르는 그런 코쿠라의 몸동작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도록, 날카로운 시선으로 바라봤다.

    “도리와 도의라. 참으로 듣기 좋은 말입니다만. 신앙과 믿음을 담보로 사후의 낙원을 약속하는 종교처럼, 도리와 도의란 이미 권력을 지닌 자들이 밑바닥의 천한 것들에게 달아 놓은 족쇄에 불과합니다.”

    코쿠라는 담배 연기를 깊게 뿜어내며 헤미테르를 똑바로 쳐다봤다. 시선을 피하는 법은 없었다. 이리도 당당한 태도를 보자면 오히려 누가 잘못을 저지른 것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양치기의 입장에선 양들이 얌전한 게 몸이 편하지 않겠습니까? 저들끼리 도덕성과 윤리로 무장하여, 도리와 도의를 떠들며, 족쇄를 벗으려는 양을 향해 돌팔매질을 하며, 때때로 양치기가 들려주는 무시무시한 늑대의 이야기에 벌벌 떨며, 그럴 수록 더더욱 인간과 인간의 도리를 맹신하며! 편협한 도덕성은 고작해야 양떼의 무리를 나누는 기준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도덕성의 상하와 윤리 기준의 다름이 증오의 이유로 전락했음에도 불구하고! 양들이 중독적으로 증오를 소비하면서도, 스스로가 정의를 행하고 있다는 착각 속에서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코쿠라의 올곧은 시선은 일말의 자기합리화의 기색이 없었다.

    “그런 도의와 도리를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참으로 천한 허상을 지키느라 수고가 많다고 말씀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헤미테르는 무거운 입을 열었다.

    “코쿠라 지부장의 말대로 장사치로써 지켜야 할 도리 따위가 없다고 해도, 이번 사건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릅니다. 어디까지 내다보고 이런 짓을 저질렀는지 묻겠습니다. 설마하니 진짜 페쉬나이트 주괴 때문이라고 말하진 않겠지요?”

    헤미테르의 말에 코쿠라가 호쾌하게 큰웃음을 터뜨렸다.

    “그렇습죠. 저는 그저 한 꺼풀 벗는 걸 보여드린 것뿐입니다. 벗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드린 것뿐이죠.”

    더한 짓도 할 수 있다.

    시트란테 서도의 지부장 코쿠라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장사치로써의 도리 따윈 모두 거짓이며, 자신은 더 많은 금화를 긁어모으기 위해 더 심한 짓도 할 수 있다는 것처럼 보였다.

    “족쇄를 풉시다.”

    코쿠라의 목소리에는 강단이 깃들어 있었다. 이 열도에서 한 푼의 돈이라도 더 긁어 모으겠다는 의지가 엿보일 만큼 말이다.

    “그딴 족쇄 풀어버립시다.”

    헤미테르의 시선은 이미 코쿠라의 입을 향하고 있었다. 그가 다음에 어떤 말을 내뱉을지 온 신경이 집중되었다.

    어째서 이런 사내가 벽지로 좌천되어 있었을까? 어째서 자신은 지금까지 이 사내를 찾으려 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 만큼, 코쿠라가 내뱉는 말들은 헤미테르의 가려운 곳을 시원하게 긁어주고 있었다.

    “지금 그 태도는 마치 이번에 저지른 일로 인해 무엇이 바뀔지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헤미테르가 묻자, 코쿠라는 주저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키우고 있는 주력 고객이 하나 있습니다. 더 많은 돈을 쓰도록 만들겠습니다.”

    “어찌 그리 되겠습니까?”

    “총정관님. 너무나 당연한 세상의 이치입니다. 돼지 같은 놈일 수록 더 많이 쳐먹는 법입니다. 먹이고, 또 먹여서 살을 잔뜩 불려 놓으면 먹어야 될 것이 많아지지 않겠습니까?”

    코쿠라의 계획은 너무나 간단하고 무모했다. 마치 이 바체트 열도에 새로운 세력을 하나 더 만들어 내겠다고 선언하는 것처럼 들리지 않나?

    그렇게 된다면 이 좁쌀만한 열도에 새로운 우량 고객이 등장하는 것이다.

    게다가 전혀 상정하지 못했던 제3의 세력이 등장한다면? 지금까지 상황에 안일하게 대처하고 있던 글로레나 왕조와 마왕 아일라드 역시 조바심을 느낄 것이다.

    “쳐먹을 만큼의 음식을 곳간에 쟁여두고 있던 두 돼지 놈도 필시 위기감을 느끼겠지요.”

    그렇다면 마지막 의문이다.

    코쿠라가 내세우려고 하는 제3세력의 지도자는 누구인가? 과연 에르바키나 연맹의 바체트령 지부의 지원을 받을 만큼의 자격을 지닌 인물일가?

    헤미테르가 그런 눈빛을 보내자, 코쿠라가 단번에 알아채고 시원한 해답을 내놓았다.

    “고착 상태의 아리카 섬을 통일시킨 전쟁 군주입니다. 이런 꽉 막힌 상황을 타개하는데 기가 막힌 재주를 지닌 고객이죠.”

    “그러고 보니 얼마 전 아리카 섬이 완전히 점령되었다는 보고를 듣긴 했죠. 과연, 그 정도의 수완이라…….”

    하지만 벽지의 섬 하나를 점령한 것만으로 평가를 완료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코쿠라도 그런 사실만으론 헤미테르를 납득시킬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는지, 지체없이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게다가 꽤나 재미난 혈통을 타고났습니다.”

    “그 혈통이라면?”

    코쿠라가 자신만만한 걸 보니 꽤나 명문가에 속하는 혈계를 상속받은 마족일 것이다.

    하이브 마인드의 구성 성분에 따라 그 혈계의 특징이 고스란히 드러나니 말이다.

    ‘저렇게나 자신이 있는 걸 보니 어쩌면 나르시안의 직계손 혈액 쪽이거나.’

    만약 더 기대를 해본다면 헬베르카의 분가인 캘러제드 가문일 수도 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국화 전쟁에서 가장 큰 견제를 받은 무가 아닌가? 만약 아리카 섬을 점령한 전쟁 군주가 ‘캘러제드’ 정도의 피를 이어받았다면. 헤미테르는 주저없이 이번 계획을 코쿠라에게 전임하여 맡길 생각이었다.

    코쿠라는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국화의 아이입니다.”

    “역시나 캘러제드! 아리카 섬의 유력한 전쟁 군주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코쿠라 지부장 지금 당장…… 아니?”

    헤미테르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지만, 이내 고개를 가로젓고 있는 코쿠라를 보고는 실망한 기색을 보였다.

    “캘러제드가 아니라면…… 하긴 분가 출신의 성분도 흔치는 않죠. 그러니 국화의 아이라고 하였으니 분파 정도인 겁니까?”

    엄연히 족보를 따지자면 샤가르 가문 역시 헬베르카의 분파에 속했다. 정확히 말해서 분가 ‘올리제’에서 분리된 가문이다.

    분파쯤 되면 헬베르카 가문 본연의 특성이 많이 옅어지게 되지만, 어디에서 무시당할 만큼의 위계는 아니었다.

    만약 분파라고 해도 어느 정도의 재능과 자질을 보인다면 충분히 지원을 고려해볼 법 했다.

    “분가나 분파 따위가 아닙니다.”

    “코쿠라 지금 뭐라고……?”

    헤미테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코쿠라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코쿠라는 담배 연기를 뿜어내며 킬킬 웃었다.

    “국화의 아이 그 자체입니다. 3대 맹주의 적통 후계라고 추정됩니다.”

    “헬베르카 본가?”

    그리고 3대 맹주라면 그 유명한 성도의 은사자 ‘오르키아나’가 아니던가?

    “총정관 나으리. 바체트 열도에서 만족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국화의 깃발 아래에서 떡고물을 주워 먹으려면, 지금이 자리를 잡을 절호의 기회입니다.”

    헬베르카.

    누구나 말도 안 되는 꿈을 꾸게 만드는 마력을 지닌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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