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짓는 플레이어-139화 (139/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139화

    피스 오브 파이(2)

    “꼬맹이가 보기보다 수완이 좋네.”

    “주제 파악이 빠른 것뿐이죠.”

    처세술의 기본은 자기 분수를 재빠르게 파악하는 것이다. 일단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분석하는 게 불가능하다면, 처세도 뭣도 없단 소리다.

    말해두지만 나는 론트라 섬에서 최약체에 속하는 잔챙이에 불과하다.

    그런 잔챙이가 13차폐구의 트라이어드와 에르멜의 할칸 기갑 연대가 맞붙는 전장에서 뭘 할 수 있겠나?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뿐이다.

    분수 파악했으면 어디에 줄을 서서 떨어지는 꿀을 빨아 먹을지 결정하는 일이다.

    해야 할 일은?

    자존심 따윈 내던지고, 동포에 대한 신의를 등지는 것이다. 그래야 에르멜의 따뜻한 젖꼭지를 빠는 법이다.

    말해두지만 그냥 비유적인 은유다. 물리적인 신체 접촉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어쨌거나 어깨를 으슥이며 담배를 깊게 빨아 들였다. 작전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아 있던 에르멜은 팔짱을 낀 채로 내가 이야기를 계속하길 기다렸다.

    “지금 당장 군사를 돌려 수도로 돌아가 봤자, 흐르기 시작한 물살을 막기엔 역부족이라고 생각해요.”

    “솔직히 아직도 완전히 믿기지가 않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이리도 한정적일 줄이야.”

    에르멜은 혀를 차며 다리를 심하게 떨었다. 명백하게 조바심이 나고 있다는 증거다.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어하는 기색이었다.

    “용사 류시혁의 위치는 현재 이곳. 쿠아가 황야 쪽이네요.”

    “왕정파에서 괴물을 소환해 냈다더니, 그 소문이 진짜였네. 무슨 요술을 부리고 있는 건지…… 그나저나 너는 그걸 어떻게 알고 있어? 적어도 이쪽에선 용사의 정보는 극비 기밀이야. 마왕군 쪽은 그런 정보 교환에 융통성이 있는 편이야?”

    “그럴 리가요. 물론 정규군들 사이에선 진격 방향에 대한 정보가 아쉽지 않을 만큼 나돌고 있겠지만.”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이번 만큼은 거짓말이나 모르는 척이 아닌, 진담이었다. 마왕의 정규군들에게 하이브 마인드의 군세란 그저 ‘조악한 민병대 조직’에 불과하다.

    그런 민병대에게 고급 정보를 나서서 흘려줄 리 없지 않나? 자기들이 아쉬울 때나 부려 먹는 게 전부다.

    “나름대로 목숨줄 붙잡고 있으려고 시답잖은 잔재주를 부릴 줄 아는 것뿐이에요.”

    이 경우엔 재주를 부린 건 내가 아니라 스칼렛이지만 말이다.

    나는 아무런 저의도 없이 시릴스를 순순히 풀어줬지만, 스칼렛과 루칸다는 내 얼간이 같은 짓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생각이 없었던 모양이다.

    스칼렛은 시릴스에게 최면 암시를 걸어 놨고, 때때로 자기도 모르게 피를 흘리도록 만든 것이다. 체내로 배출된 혈액을 통해 스칼렛은 시릴스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바로 최근에 에르멜에게 도착한 밀리아의 편지 내용을 통해 유추해 보자면 시릴스가 무사히 류시혁의 하렘 파티에 가입한 모양이다.

    ‘그야말로 생체GPS 그 자체가 된 것이지.’

    만약 자기도 모르게 손을 베거나, 피를 내는 행위에 대해 류시혁이 미심쩍게 생각할 경우도 상정해 놨다.

    시릴스가 여자인 이상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위치를 노출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으니까. 나는 한 달에 최소한 1회에 한하여 류시혁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 얘기를 정리해 보자.”

    에르멜은 론트라 섬의 지리가 그려진 지도를 내려다 보며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첫 번째 전제부터.”

    “왕정파의 용사는 조만간 마왕 아일라드 토벌에 성공합니다.”

    “두 번째 전제.”

    “그 사실을 공화정파가 모를 리가 없으며, 왕정파의 용사를 방해하기에도 늦었고, 공화정파에서 용사를 소환한다 하더라도 왕정파의 용사보다 마왕 토벌이 빠를 수 없을 겁니다.”

    “마지막 전제.”

    “공화정파의 늙은이들이 무욕하거나, 혹은 멍청한 얼간이들이 아니라면.”

    “그래서 놈들이 내린 결단이란…….”

    “왕정파의 용사가 마왕을 처리하기 전에 차선적인 제2계획을 이행해야겠죠.”

    본래 내가 쓴 소설에선 말이다.

    류시혁과 백주월은 누가 더 빨리 마왕을 토벌할지 선의의 경쟁을 하는 관계였다.

    서로 다른 루트로 론트라 섬의 서쪽으로 이동하며, 하이브 마인드의 둥지를 쳐부수고 다니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선지 류시혁의 진격 속도가 본작의 내용보다 훨씬 빨라졌다.

    ‘하기야…… 지금의 진격 속도가 현실적이긴 하지.’

    마왕 토벌에 성공하면 소설 완결 아닌가?

    그러니까 류시혁을 여기저기 뺑뺑이를 돌리며, 최대한 원고 분량 뽑아 먹기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소설이 현실이 된 이 세계에선 그런 개수작이 통하지 않는단 의미다. 류시혁은 한없이 합리적인 루트만을 경유하며 아일라드의 마왕성을 향하고 있었다.

    소환된지 두세 달 정도 지난 지금, 이미 쿠아가 황야에 도착한 것이다. 피르에나 왕녀가 도달한 가장 깊은 적진이었다.

    “거래 명세서에 적힌 물품이 뭘 의미하는지는 알고 있겠죠?”

    “그래.”

    에르멜이 스텔라 교단의 성처녀이기에 알고 있는 내용이다. 일단 용사의 소환은 스텔라의 신전에서 행해지는 소환 의식이었으니까.

    “이계의 용사 소환에 필요한 아티팩트야.”

    “정확히 말하자면 이번에 왕정파에 의해 소환된 용사와 능력은 엇비슷하겠지만, 사용 용도가 다르지 않을까요?”

    이제와서 공화정파에서도 용사를 소환해 마왕 토벌 경쟁을 할 리가 없다. 9점 차로 9회말 2아웃 시점이란 말이다.

    그런 상황에서 타율 5할의 타자를 데려와 타석에 세운다고 뭐가 달라진단 말인가? 묘지에서 관짝 부수고 테드 윌리엄스를 데려와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공화정파의 늙은이라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이봐, 타자는 됐어. 저기 깡패 새끼한테 배트 쥐어줘. 상대팀 선수를 다 패 죽여버리자고. 이대로 게임 지는 것보단 낫겠지?’

    류시혁이 마왕을 토벌한 이후엔 늦는다.

    만에 하나 류시혁이 아일라드를 토벌하는데 성공하고, 이 바체트령에서 마족을 모조리 몰아낸다면?

    그때는 왕정파가 민중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게 될 것이다.

    공화정파의 입장에선 썩 달갑지 않은 상황이다. 그렇게 되기 전에 손을 써야만 했다.

    “한 마디로 이계의 용사를 한놈 더 불러와서 정권 전복을 시도하려고 하고 있다?”

    “그렇게 추정할 수밖에 없어요. 만약 그렇게 된다면 마왕을 토벌하고 수도로 복귀한 왕정파의 용사 일행이 무사할 수 있을까요?”

    “하핫.”

    에르멜은 실소를 흘리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 소환한 용사 따윈 어찌되어도 상관없어. 그 자식이 뒤지든 말든 나하고 무슨 상관이야?”

    하지만 밀리아는 용사 류시혁을 보좌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이미 줄을 잘못 서버린 것이다. 만약 밀리아만 아니라면, 에르멜도 적당히 간을 보다가 공화정파 쪽으로 붙었겠지.

    솔직히 스텔라 교단 놈들이야 누가 정권을 차지하든 큰 상관은 없으니까. 지금도 정확하게 중립 위치에 서서 박쥐 짓을 하고 있지 않나?

    “그런데 그 새끼들이 건드리면 안 되는 애까지 건드리려고 하는 거라면.”

    에르멜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담배를 깊게 빨아들였다. 그리고는 천천히 고개를 들며 입술 사이로 연기를 흘렸다.

    “나한테 뒤지는 거야.”

    눈빛은 이미 맹수와 닮아 있었다.

    예리하게 빛나는 저 눈빛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릴 정도다.

    “다행이네요.”

    “뭐가?”

    “저와 같은 믿음을 지닌 사람과 만나서.”

    거기까지 말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는 방벽이에요.”

    론트라 섬의 전역이 그려진 지도의 정중앙. 이곳 중부 솔리엔령을 내려다 보며 그렇게 말했다.

    “서쪽과 동쪽을 가로막는 방벽이죠.”

    서쪽의 아일라드의 마왕군도.

    동쪽의 글로레나 왕조의 군대도.

    놈들의 숨통을 조일 수 있는 최적의 위치였다.

    “13차폐구를 시작으로 솔리엔 령 전체를 점령해야 해요. 그리고 이 주변의 강호 세력들도 무릎 꿇려야 할 필요가 있죠.”

    솔리엔 령의 서쪽엔 ‘비아 엘티나’ 지역이 위치해 있다. 마제 투아하와 대수림의 전쟁 군주 유리아.

    그리고 다시 동쪽으론 불사의 왕 브람스.

    굵직한 놈들은 이 셋이다.

    이 셋만 처리하는데 성공한다면 론트라 섬의 중부. 전체의 1/3을 차지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저희가 중부를 온전히 점령하는데 성공한다면. 공화정파가 정권을 장악하게 되더라도 이곳 중부에서 막히게 되겠죠.”

    에르멜은 유쾌한 농담을 들은 사람처럼 킬킬 웃었다.

    “도저히 제정신으로 보이진 않는데. 이런 정신나간 계획은 평소에 생각해 두는 편이야?”

    “물론 일개 전쟁 군주가 품기엔 지나치게 허황된 꿈에 불과하지만요.”

    하지만 지금 눈앞에 이 말도 안 되는 허황된 계획을 실현시킬 능력을 지닌 인물이 앉아 있었다.

    스텔라 교단의 성처녀 에르멜이다.

    에르멜의 자체 능력만으로도 용사와 거의 비견될 정도 아닌가?

    게다가 에르멜은 스텔라 교단의 성처녀다. 현재 성녀가 선출되지 않은 상황에서, 스텔라 교단에서 가장 높은 지위를 지닌 건 에르멜일 것이다.

    출생 성분은?

    대귀족 쉬르센 가문의 차기 당주다.

    갑자기 에르멜이 교단의 지원을 등에 업고, 바체트령에 새로운 국가를 건국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 존재 자체 만으로도 정통성을 인정받을 수 있을테니까.

    현재의 지위와 개인의 능력. 그리고 출생 성분까지 모든 게 완벽했다.

    장기로 비유하자면 전후좌우 대각선으로 원하는 만큼 이동할 수 있는 장기말인 것이다!

    “꼬맹…… 아니, 엘베제 변경백. 일단은 13차폐구부터 정리하지. 당장 내가 군사를 돌린다고 하더라도 미칠 수 있는 영향은 그리 크지 않을테니까.”

    “이견은 없어요.”

    “그리고 정리가 끝나면 나는 수도로 돌아갈 생각이야.”

    이건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다.

    되도록이면 내가 중부를 완전히 장악할 때까지 장기말로 부려먹고 싶었는데.

    내가 조금 예상하지 못했다는 표정을 지었던 것인지, 에르멜은 바로 설명을 덧붙였다.

    “아니, 딱히 수도로 돌아가서 뭘 하겠다는 게 아니라. 전쟁을 하려면 내 연장을 챙겨와야 되잖아.”

    “연장이요?”

    내가 되묻자, 에르멜은 쿡쿡 웃었다.

    “그래, 연장. 전쟁에는 전쟁에 어울리는 연장이 있어야지. 이런 고철 깡통들 데리고 전쟁을 할 수는 없으니까.”

    고철 깡통들이라고 하기엔 할칸 기갑 연대의 전차는 상당한 성능과 위력을 지닌 기계화 부대다.

    “전차 부대 가지고는 이런 촌구석 건달들 패는 게 고작이잖아.”

    “그럼…… 수도에서 가져 온다는 연장은요?”

    에르멜은 당연한 걸 뭐하러 묻냐는 듯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타르틸리엇이다. 전쟁을 하려면 그 정도는 챙겨와야지.”

    ……지쟈스 크라이스트.

    아무래도 에르멜은 전쟁과 대규모 학살극의 차이점을 모르는 모양이다.

    타르틸리엇이라고 한다면, 고대 병기에 속하는 대륙간 강습기다. 수 킬로미터에 달하는 전폭을 지녔고, 움직이는 요새라고 불리는 병기 아닌가?

    괜히 이름이 ‘타르틸리엇(종말의 나팔 소리)’이 아니란 말이다.

    “타르틸리엇 탈취 작전에 관해선 이후에 다시 얘기를 나눠보고, 오늘은 13차폐구의 버러지들을 청소해야지.”

    “주, 준비는 해놨어요.”

    “오케이 움직여 보자고.”

    에르멜이 내 옆으로 다가와 어깨에 팔을 걸치며 유쾌한 어조로 말했다.

    “엘베제 변경백. 몸만 딱 대고 있어, 이 누나가 순식간에 다 찢어 발길 거니까.”

    이 여자가 그런 소리를 하면 도저히 농담으로 들리진 않는다. 지옥의 밑바닥에서 기어 올라온 악귀도 이렇게 소름 돋진 않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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