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짓는 플레이어-138화 (138/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138화

    피스 오브 파이(1)

    “가시를 다듬는 솜씨가 점점 좋아지는군.”

    스칼렛은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한 송이의 장미꽃을 들었다. 줄기에 돋아 있던 가시는 깔끔하게 손질되어 매끈한 상태였다.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대모님의 기쁨을 위해서라면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그리고 스칼렛의 침실 구석에서 장미꽃을 손질하던 뤼클라가 화색을 머금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대답을 하는 사이 스칼렛의 모습을 잠시 눈에 담을 수 있었다.

    붉은 물감이 허공에 풀어진 것처럼 보일 만큼 길고 풍성한 머리카락. 겨울날의 달처럼 청량감을 머금은 피부, 그 위를 얇게 덮고 있는 선홍빛 실크 란제리.

    란제리의 끝단 아래로 길고 가느다란 다리가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뻗어져 나와 있었다.

    그 다리를 타이트하게 감싸고 있는 새하얀 스타킹까지.

    뤼클라는 그 모습을 천천히 음미하며 황홀함에 몸을 떨었다.

    ‘지금 이 순간 상속 신분의 곁에 가장 가까운 흡혈귀는 바로 이 뤼클라 남작이다.’

    이런 아름답고도 고귀한 존재의 곁에 가장 가까이 있을 수 있다는 게 이리도 멋진 일이었다니.

    지금까지 뤼클라는 상속 신분의 흡혈귀라면 쩔쩔매는 다른 흡혈귀들을 얼간이 취급해 왔지만, 이렇게 직접 상속 신분을 목격하게 되니 다른 흡혈귀들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어째서 바체트령을 군림하고 있는 흡혈귀의 왕 ‘브람스’조차 상속 신분의 흡혈귀 앞에서 고개를 조아리는지도 말이다.

    본능에 가까운 욕망이다. 누군가 강요하지 않아도, 흡혈귀의 피를 타고난 이상 어쩔 수 없이 품을 수밖에 없는 욕구였다.

    상속 신분에게 헌신하며, 봉사하는 행위로부터 얻을 수 있는 기쁨이 흡혈귀에겐 가장 큰 쾌락이었다.

    스칼렛은 뤼클라가 정성껏 다듬은 장미를 뚱한 표정으로 살펴보고는 휙 내던지는 게 전부였지만.

    장미 가시를 다듬어 준다는 건 일종의 복종 행위다. 늑대나 갯과의 동물이 우두머리에게 배를 내보이거나, 입을 핥는 행위와 엇비슷했다.

    복종 행위를 허락받은 것만으로도 뤼클라는 자신이 특별한 존재가 된 기분에 흠뻑 젖어버렸다.

    “누가 만족했다고 그랬나? 그리고 귀공에게 손을 쉬라고 말하지도 않았네.”

    “죄, 죄송합니다. 대모님!”

    뤼클라는 자존심도 없는 놈처럼 이마가 바닥에 닿을 만큼 고개를 조아렸다. 그러고는 혹여나 스칼렛의 기분이 상할까 봐 다음 장미꽃을 냉큼 집어 손질을 시작했다.

    누군가 뤼클라의 이런 모습을 본다면, 그가 13차폐구의 트라이어드라고 상상할 수 있을까?

    13차폐구의 트라이어드는 이러니저러니 해도 중부를 꽉 쥐고 있는 대규모 둥지의 관리자 아닌가?

    콤플렉스 형태의 둥지이긴 하지만, 트라이어드를 단신으로 당해낼 수 있는 전쟁 군주는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다.

    대수림의 전쟁 군주 ‘유리아’조차 13차폐구를 한 번 건드려 봤다가, 도저히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 군사를 물린 적이 있을 정도니까.

    트라이어드는 대수림의 유리아를 상대로도 고개를 숙이긴커녕 눈도 안 깔아본 놈들이다.

    그런 트라이어드의 일원인 뤼클라가 지금 헤실헤실 웃으며 무릎까지 꿇고 장미 가시 다듬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누자베스 : 와…… 저 뤼클라 새끼 태도 달라지는 거 봐라? 내 앞에선 눈깔을 땡그랗게 뜨고 부라리더니. 아주 그냥 부리부리 부라리큰인 줄 알았잖아.]

    [루칸다 : 흡혈귀들이란 참으로 가엾은 족속입니다. 제가 흡혈귀였으면 태어난 순간 자살했습니다. 저렇게 아양을 떨며 기쁨을 얻는 건 개나 암컷뿐입니다.]

    [누자베스 : 우리 루칸다가 각하 일거리 늘려주려고 일부러 그런 문제 발언만 쏙쏙 골라서 말하는 건가…….]

    [로아 : 가, 각하! 저는 코볼트들에게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착하고 바른말이 아니면 각하께서 나중에 수정 작업? 으로 고생을 하신다고…….]

    [누자베스 : 그래! 루칸다 잘 들었냐. 우리 착한 로아처럼 예쁘고 고운 말만 해라.]

    [루칸다 : 저는 사실을 말한 것뿐입니다만.]

    [로아 : 이래서 멍청한 고블린은 안 된다는 겁니다, 각하. 순화가 뭔지도 모르는 모양입니다.]

    [누자베스 : 들었냐, 루칸다? 내 동생은 말이다. 얼굴만큼이나 말도 예쁘게 하지 않냐? 로아, 루칸다한테 예쁘고 고운 말을 어떻게 하는지 알려줘라.]

    [로아 : 쥬지……?]

    [누자베스 : 쥬, 쥬쟈스 크라이스트! 어허, 그런 못된 말 안 돼요! 어, 어떤 자식이…… 내 남동생한테 그런 상스러운 말을 가르친 거야…….]

    [로아 : 뷰…….]

    [누자베스 : 어허! 떽! 앙 대요, 앙 대!]

    어쨌거나 지금 중요한 건 13차폐구의 균열을 확인하는 작업이었다.

    누자베스가 스칼렛에게 슬슬 떠보라는 신호를 보내자, 스칼렛은 고개를 살짝 끄덕인 후 침대에서 일어났다.

    “벌써 가시려는 겁니까? 준비해 놓은 장미가 아직 남았습니다…….”

    뤼클라가 한껏 아쉬운 눈빛으로 스칼렛을 향해 말을 걸었지만, 스칼렛은 뤼클라를 향해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대답했다.

    “이 둥지에 재미난 아이가 하나 더 있더군. 리케릴 성찬회의 연구에 참여하고 있다고 들었네만.”

    “아일크라나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아, 그런 이름이었군.”

    스칼렛은 짐짓 나이브한 대답을 돌려준 후, 흐트러져 있던 옆머리를 가지런히 땋기 시작했다.

    “리케릴의 연구가 얼마나 진행되었는지 궁금하던 참이었네. 내가 마지막으로 그들의 연구를 목격한 것도 수십 세기 이전의 일이니까.”

    “이미 외신의 간섭이 미치는 영향은 대부분 규명되었습니다. 이제 와서 대모님께서 흥미를 지니실 만큼 대수로운 것이 아닙니다.”

    스칼렛은 태연스럽게 치장을 하기 시작했지만, 등 뒤에서 느껴지는 뤼클라의 시선이 변했다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목소리 마저 분노에 젖어 미세하게 떨리고 있지 않나?

    아무리 하이브 마인드가 합리성을 기반으로 생성되는 생물체라도 흡혈귀가 지닌 본능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 건 아니다.

    가장 저열한 감정인 ‘질투’가 뤼클라의 가슴 속에서 끓어 올랐다.

    물론 뤼클라와 스칼렛은 태생의 위계 자체가 다른 흡혈귀다.

    아무리 뤼클라가 헌신하고 봉사한다고 한들, 이 세계가 끝날 때까지 스칼렛의 손끝 한번 건드려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런 현실적인 한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칼렛의 관심과 흥미까지 빼앗기고 싶진 않았다.

    “뤼클라 남작. 너무 들떠서 주제 파악이 안 되는 모양이군.”

    “예?”

    “귀공은 내게 아무것도 아닐세. 구태여 따지자면, 그저 내가 잠깐 밟고 지나갈 발판의 주인에 불과하지 않겠나?”

    스칼렛은 창문 밖으로 보이는 13차폐구의 풍경에 시선을 잠깐 흘리며 말했다.

    “그것도 발판의 공동 주인에 불과하지.”

    뤼클라의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고, 손아귀가 장미 가시에 찢겨 붉은 피가 주르륵 흘렀다.

    아주 잠깐 꿈을 꿨다. 정말이지 꿈 같은 꿈을 꿨던 것이다.

    만에 하나 자신이 스칼렛의 눈에 들어, 주종의 관계를 맺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허황된 꿈을 꿨다.

    평생을 상속 신분에게 헌신할 기회를 허락받을지도 모른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상상만으로도 뤼클라의 삶은 분명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스칼렛의 매정한 한마디에 꿈에서 깨게 된 것이다. 너무나도 당연한 현실이 들이밀어 졌고, 뤼클라는 어금니가 부서질 만큼 꽉 물며 이성을 유지하는 게 전부였다.

    당장 미쳐서 날뛰고 싶은 감정을 억누르며, 뤼클라는 스칼렛을 향해 되물었다.

    “만약.”

    그렇게 입을 뗀 후 뤼클라가 스칼렛을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공동 주인이 아니라면 어쩌시겠습니까?”

    스칼렛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무슨 의미인가?”

    “13차폐구의 실질적인 주인은 그 누구도 아닌 이 뤼클라 남작입니다. 나머지 두 놈은 명목상의 공동 관리자일 뿐입니다.”

    “그런 속사정이……. 미처 몰랐군.”

    모르는 게 당연했다.

    지금 뤼클라가 내뱉은 소리를 아일크라나나 세도루프가 들었다면 무슨 개소리냐고 펄쩍 뛰었을 테니까!

    “만약 제가 이 13차폐구의 온전한 주인이라면 당신에게 어떤 존재가 될 수 있을지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스칼렛은 눈을 가늘게 뜨며 요염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바닥에 바짝 엎드린 채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뤼클라를 향해 다가갔다.

    그러고는 뤼클라의 머리를 가볍게 짓밟듯 발을 올려놓았다. 얇은 스타킹 천을 사이에 두고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평생 장미 가시를 다듬을 수 있는 권리 정도는 줄 수 있네만.”

    “저, 정말이십니까!”

    “아버지의 이름을 걸고 그리 약조하도록 하지.”

    스칼렛이 확답을 돌려주자, 뤼클라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나저나 증명할 수 있겠나? 귀공이 이 13차폐구의 진정한 주인이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거기까지 뤼클라가 내뱉은 걸 본 누자베스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누자베스 : 아이고야, 미끼를 물어버려쓰. 이래서 남자는 미인계를 조심해야 돼.]

    [루칸다 : 애초에 이해가 안 됩니다. 고작 장미 가시 깎는 일이나 맡으려고 리스크를 자초하다니.]

    [누자베스 : 루칸다, 흡혈귀들의 사고 원리를 이해하려고 하면 안 된다. 쟤네들은 진짜 상속 신분이라면 눈 뒤집어지는 애들이니까.]

    [스칼렛 : 주군의 명령이라 어쩔 수 없이 하고 있지만…… 순수한 아이를 홀리는 기분이 들어서 입안이 쓰군.]

    [누자베스 : 괜찮아, 괜찮아. 내가 13차폐구만 집어삼키면 장미 가시 다듬는 일 진짜로 시켜주면 되지.]

    [스칼렛 : 지금 샤르도네가 곁에 있었다면 어찌 이런 저열한 짓을 하고 있냐고 한 소리를 들었을 것 같네.]

    어찌 되었든 뤼클라를 흔들어 놓는 데 성공했다. 이곳 13차폐구를 지탱하고 있던 기둥 하나가 무너진 것이다.

    오랜 기간 같은 배에 몸을 실었던 놈들이 다른 꿈을 품기 시작한 순간, 배가 침몰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누자베스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개인실을 빠져나왔고, 그 뒤로 루칸다와 로아가 따라나섰다.

    “나는 이런 순간이 좋더라고. 모든 순간과 순간이 톱니바퀴처럼 유기적으로 맞물리는 순간 말이야.“

    루칸다가 가지고 나온 제복 코트를 누자베스의 어깨에 둘렀고, 누자베스가 입술을 손끝으로 톡톡 두들기자 로아가 재빠르게 담뱃갑을 꺼냈다.

    “사실 인과관계 따위 없어도, 이 쓰레기 같은 세상은 여전히 평화로울 테고. 엿 같이 말도 안 되는 사건과 사건들은 현실성이라는 이름으로 분류되어 싸구려 납득을 사겠지만 말이다.“

    로아가 담배에 불을 붙였고, 누자베스는 담배 연기를 길게 뿜어내며 복도를 천천히 걸었다.

    “나는 이 쓰레기 더미 위에서. 그저…… 그냥, 그렇고 그런 그림을 그리는 것뿐이야. 쓰레기 더미에 머리를 처박고 자세히 보지 않으면 도저히 그림처럼 보이지 않을 만큼 난잡하겠지만.“

    누자베스는 이미 깨달았다는 듯 떠들었다. 오히려 지금의 표정이 후련하고 산뜻해 보였다.

    “아주 조금 만족하고, 그걸로 납득하고. 경솔하게 만들어 버린 쓰레기를 스스로 쓰레기라고 자각하길 바랐던 것뿐이겠지.“

    그러니까 이건 퇴고 작업일 리가 없었다.

    만약 누자베스를 이쪽 세계로 보낸 초월적 존재의 진의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지금 이 순간 누자베스는 주저 없이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하여간 어느 쪽이든 염병할 짓이야, 그치?“

    누자베스는 쿡쿡 웃으며 콧노래를 담배 연기에 섞었다.

    이미 세상은 유쾌한 콧노래 소리도 잿빛으로 물들 만큼 변해 있었다.

    적어도 누자베스의 시야는 그리 바뀌어 있었다.

    “모조리 찢어 죽인다. 13차폐구의 새로운 주인이 누군지 론트라 섬에 군림하고 있던 놈들에게 똑똑히 알려줘라.“

    지금부터 제동 장치 없이 내리막길을 내달릴 때였다.

    그의 선택에 의하여 이 론트라 섬에서 얼마나 많은 피와 눈물이 흐르게 될지 알 수 없었다.

    누자베스는 떨리는 두 손을 감추듯 코트 주머니에 푹 찔러넣은 후 당당하게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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