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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짓는 플레이어-137화 (137/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137화

    할칸 기갑 연대(4)

    “진짜? 맞다이 뜨면 이길 수 있어?”

    에르멜은 어깨를 풀며 누자베스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아무리 누자베스의 체구가 작다고 하더라도, 신장이 145㎝에 살짝 못 미치는 에르멜과 비할 정도는 아니었다.

    물론, 당연한 얘기지만 체격의 차이가 전부는 아니다.

    수도원에서 대부분의 커리큘럼에 낙제한 에르멜이지만, 근접 전투 과목에서 높은 평가 점수를 받아 가까스로 수료했을 만큼 육탄전에 특화된 재능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아니,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렇다고 진짜 나오냐…….”

    “너 이 근처 하이브 마인드야? 아니면 마왕군 소속?”

    “그게, 저기 일단은 하이브 마인드인데요. 아리카의 엘베제 누자베스라고 요즘 조금 유명해졌는데.”

    “아리카 섬? 그런 촌구석에서 뭐하러 여기까지 나온 거야. 얌전히 쳐박혀 있지.”

    에르멜은 ‘누자베스’라는 이름을 알고 있었다.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밀리아가 보낸 편지에 또렷하게 적혀 있었으니까.

    포 힐케인 섬에서 있었던 일을 상세하게 적어 놨기에 누자베스가 어떤 종류의 하이브 마인드인지도 대략적으로 파악은 되었다.

    그렇기에 에르멜은 짐짓 누자베스를 떠보듯 모르는 척을 해본 것이다.

    ‘죽이는 건 쉽지만. 시체로부터 캐낼 수 있는 정보는 없지.’

    에르멜은 이 상황에서도 신중했다.

    자신의 주둔지를 야간에 급습한 하이브 마인드를 눈앞에 두고, 챙길 수 있는 이득을 모두 계산하고 있었다.

    어차피 누자베스가 준비한 회심의 습격 작전도 실패로 끝났다.

    어처구니없게도 기호품 창고 하나를 폭파한 게 이번 야습의 성과였다.

    “나라고 뭐 좋아서 여기까지 나온 줄 알아? 우리 같은 하꼬 둥지는 얌전히 구석에 처박혀 있는 게 상책인데.”

    “그러니까 뭐하러 나왔냐니까.”

    “여러모로…… 이것저것 그냥, 좀 그런 사정이…….”

    에르멜이 그렇게 물었지만, 누자베스는 좀처럼 대답하지 못하고 시선을 피했다.

    ‘숨기는 게 있네. 살짝 쥐어짜 볼까.’

    순식간이었다.

    에르멜의 모습이 사라졌다가, 누자베스의 코앞에서 다시 나타났다.

    어찌 보면 루칸다의 특기인 ‘그림자 도약’과 엇비슷해 보였지만. 어둠의 통로를 경유하여 고속으로 이동하는 것에 불과한 그림자 도약과 달리.

    에르멜이 지금 구현한 능력은 진짜 ‘텔레포트’였다. 거대한 유도 촉매 조차 없이 정확한 위치로 점이동을 한 것이다.

    에르멜은 바로 왼손을 뻗어 누자베스의 멱살을 붙잡아 끌어당겼다.

    뻐억!

    그와 동시에 반대편 주먹이 누자베스의 복부에 깊숙히 꽂혔다.

    창자가 통째로 철렁일 정도의 위력!

    누자베스가 비명을 내지를 새도 없이 내던져졌다.

    “칵, 커헉…… 쿨럭!”

    “미안해. 이 누나가 원래 성격이 지랄 맞아서 뜸 들이고 그런 거 별로 안 좋아해.”

    빠악! 퍽!

    에르멜에게 일방적으로 얻어맞으며 누자베스도 반격을 시도해 봤지만.

    누자베스의 주먹은 에르멜의 몸에 닿을 만큼 빠르지 않았다.

    설령 닿는다고 하더라도 강력한 축복 상태가 24시간 지속되는 에르멜의 몸에 흠집도 내지 못할 것이다.

    누자베스의 입에서 선혈이 왈칵 쏟아져 흘렀고, 에르멜은 그제야 잠시 주먹을 멈추며 누자베스를 향해 물었다.

    “바체트령 샅샅이 뒤져봐도 나보다 주먹질 잘하는 놈은 없을 텐데, 그치? 너 지금 판단 잘해야 해. 지금 바체트령에서 가장 지랄 맞은 년 성깔을 건드리고 있는 거야.”

    어설픈 허세가 아니라 사실이다.

    순수하게 신체의 능력만을 사용한 육탄전이라면 에르멜은 용사 류시혁보다 강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에르멜에게 신성력을 모조리 빼앗아도, 충분히 위협적이라는 얘기다.

    단순히 근력만으로 베놈을 붙잡아 찢어버릴 수 있을 정도는 될 테니까.

    쉬르센 가문은 순혈 공정을 통해 신의 영역에 맞닿아 있던 고대 인류의 힘을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가문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혈액의 농도가 낮아진 것과 대조적으로 말이다.

    ‘아리카 섬은 본도에서 상당히 떨어져 있는 곳일 텐데.’

    글로레나 왕조가 대륙에서 이곳 바체트령을 침략하기 위해 처음으로 점령했던 섬이다.

    역사적인 가치는 있으나, 지금에 이르러선 전략적인 가치가 그리 높지는 않았다.

    구태여 가치를 매기자면 첫 점령지라는 상징적인 지역에 가까웠다.

    ‘그곳의 하이브 마인드가 어울리지 않게 본도에 진출한 이유라면.’

    도출해낼 수 있는 가능성은 몇 가진가 있었다. 이곳 솔리엔령의 트라이어드에게 군사 지원을 강요받은 것.

    하지만 이 가능성은 한없이 낮았다.

    본도에서 한참 떨어진 아리카 섬의 전쟁 군주에게 그런 강요와 협박이 통할 리가 없었으니까.

    게다가 당장 에르멜을 상대해야 하는 13차폐구의 전쟁 군주들이 저열한 보복을 가할 수 있을 리도 없었다.

    ‘자의로 발을 들인 것이라면…….’

    에르멜은 대략적으로 누자베스의 둥지 규모를 추측해 봤다.

    솔직히 말해서 변두리의 촌구석에선 큰소리 좀 내고 다닐 정도는 됐지만.

    본도 론트라에선 보잘것없는 애송이에 불과하다.

    본도는 인간의 군대도, 전쟁 군주도, 마왕 정규군도 모두 상당한 수준이었으니까.

    “도저히 말할 생각은 없는 모양이네.”

    에르멜은 누자베스의 머리를 꾸욱 짓밟은 후 단검을 꺼내 들었다.

    이미 이곳의 병대는 모두 제압당한 상태다.

    에르멜이 자비를 베풀듯 누자베스의 목덜미에 칼날을 꽂아 넣기 직전이었다,

    누자베스의 시선이 에르멜의 가슴 쪽으로 향했다.

    정확히 말해서 목에 걸려 있는 로자리오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왜? 너도 천국에 가고 싶어? 일단 용서받을 권리를 잃지 않았으면 마물도 천국에 갈 수 있긴 한데. 기도라도 해줄까?”

    누자베스의 눈빛에서 공포의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마치 놀라운 발견을 한 아이처럼 한껏 놀란 눈빛이었다.

    “태양 목걸이…….”

    “태양 목걸이가 아니라. 스펠리카 로자리오다, 얼간아.”

    스텔라 교단 고위 성직자의 신분 증명서를 겸하는 로자리오다.

    교인들에겐 숭배와 존경의 대상이고, 마물들에겐 공포와 경외의 대상이 되는 성직자의 상징이다.

    누자베스는 로자리오와 에르멜을 번갈아 바라보며 뭔가를 떠올린 것처럼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밀리아의 동료? 그, 그럼 적이 아닌 인간이야?”

    누자베스의 입에서 밀리아라는 이름이 나오자, 에르멜의 눈빛이 일변했다.

    누자베스가 뱉어내는 지리멸렬한 어절의 조합에서 미심쩍은 냄새가 풍겨왔다.

    적이 아닌 인간이라니?

    마치 밀리아의 적인 인간도 있다는 소리 같지 않나?

    에르멜은 한껏 진중한 어조로 천천히 말했다.

    “그 녀석에게 적이 있을 리가 없잖아.”

    에르멜은 그렇게 믿었다.

    밀리아는 태양의 여신 스텔라의 사랑을 독차지할 만큼 순수한 아이였다.

    만인의 사랑을 받기 충분한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

    설령 밀리아에게 적이 있다고 한다면.

    만약 밀리아의 적이 있다면 말이다.

    그 녀석을 위해 에르멜이 친히 천국 급행열차 티켓을 끊어줄 수 있었다.

    “그, 그럼 밀리아에게 바로 전해줘. 수도로 돌아가면 안 된다고!”

    에르멜은 순식간에 퍼즐 조각을 짜 맞췄다.

    밀리아와 접점을 지니고 있는 전쟁 군주 누자베스.

    본도에 진출할 만큼의 기량도 갖추지 못한 녀석이 허겁지겁 솔리엔령에 발을 들인 것이다.

    이 비합리적인 행위가 자의로 이뤄진 것이라면?

    ‘……설마.’

    13차폐구의 점령을 에르멜 같은 거물에게 맡긴 것부터가 부자연스러웠다.

    그리고 바로 얼마 전 밀리아를 용사의 동료로 선발하여 본도의 중부로 보낸 것도 이상하기 그지없었다.

    에르멜이 머리를 짓밟고 있던 발을 떼주자, 누자베스가 허겁지겁 품속에서 서류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에르멜을 향해 내밀었다.

    “에르바키나 연맹의 거래명세서?”

    글로레나 왕조와 에르바키나 연맹의 최근 거래 내역이 적힌 서류였다.

    에르멜은 눈을 가늘게 뜨며 서류를 훑어본 후, 이를 빠드득 갈았다.

    “이런 개새끼들이 감히…….”

    에르멜이 13차폐구로 진격한 이후부터 품고 있었던 의문이 해소된 순간이었다.

    “나, 나를 죽여도 상관없으니까! 밀리아를, 밀리아를 지켜줘……!”

    누자베스는 자신의 무력함에 몸부림치듯 바들바들 떨며 에르멜에게 무릎을 꿇었다.

    에르멜은 그런 누자베스를 내려다본 후.

    “꼬맹이. 내일 다시 찾아와.”

    이번 만큼은 누자베스와 에르멜이 해야 할 일이 같았다.

    * * *

    “판을 짜는 건 특기가 아니지만, 이렇게나 좋은 재료가 모여 있으면 어쩔 수 없이 판을 짤 수밖에 없잖냐.”

    “품고 있던 근거 없는 의혹에 확신을 준 것뿐이지만요.”

    “쉽게 말해서 확증편향의 오류에 빠졌다는 얘기지. 어라? 진짜 내 생각이 맞았네!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그냥 자기가 품고 있던 생각에 딱 들어맞는 증거와 정황만 보이고 들리는 법이야. 인간은 원래 그렇게 불완전한 존재니까.”

    무사히 임시 둥지로 돌아온 후.

    바로 이번 작전의 성과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본래의 수순대로라면 끈질기게 보급품을 파괴하며, 멘탈을 으깨놓은 뒤에 천천히 구슬려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예상 이상으로 에르멜이 사기 같은 능력을 지니고 있던 덕분에 수순이 앞당겨진 것이다.

    뭐…… 결과론적으로 오케이였으니까.

    “에르바키나 연맹 놈들을 페쉬나이트로 포섭해서 가짜 명세서 한 장 만들어 두길 잘했지?”

    “정말이지 신의 없는 장사치 놈들입니다. 녀석들이 돈이라면 뭐든지 할 놈들이라는 사실을 저희도 기억해 둬야겠습니다.”

    “내가 말했잖냐. 그 에팔이 새끼들이 가장 적폐라고!”

    어쨌거나 이번에 짜놓은 판을 마지막으로 한번 검토해 본 후 움직이기 시작하자.

    “지금쯤 에르멜은 두르난 아재가 정성스럽게 쓴 러브레터를 읽고 야마가 제대로 돌아버렸겠지.”

    “밀리아의 필체를 100%에 가깝게 재현해 냈습니다. 전문 감식반이 아니라면 도저히 구분할 수 없겠죠.”

    “그래, 야마가 제대로 돌아버린 에르멜은 이 13차폐구에 오래 묶여 있고 싶은 생각이 없을 거야. 땅크를 몰고 가서 뚝배기를 깨버릴 놈들이 한둘이 아니잖아?”

    “내부의 협력자를 활용하여 시간을 단축할 작정이겠죠.”

    그리고 이번 내부의 협력자를 연기할 배우는? 바로 나 누자베스다!

    “그리고 13차폐구의 트라이어드들은?”

    “내가 예상했던 것만큼 결속이 단단하진 않았네. 어차피 자기 배를 불리기 바쁜 놈들이었을 뿐이니.”

    좋다.

    이제 슬슬 금이 가기 시작한 13차폐구를 에르멜을 이용해 꿀꺽 삼키기만 하면 끝이다!

    물론 동쪽에서 호시탐탐한 한입 얻어먹어 보려는 우렌 놈을 어떻게 쥐어 패버릴지가 남은 문제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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