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짓는 플레이어 136화
할칸 기갑 연대(3)
“밀리아, 제대로 망 보고 있어라. 나 이번에도 걸리면 퇴교란다.”
“보, 보고 있어요! 에르멜 언니. 그런데 지금 꼭 펴야 돼요?”
“얘가 뭘 모르네. 그 염병할 트롤 설사를 뱃속에 억지로 쑤셔 넣었는데 식후땡이라도 안 하면 소화가 될 리가 없잖아.”
“트롤 설사라니…… 오늘 오트밀 수프는 그래도 맛있었는데.”
“너어는 돌도 맛있다고 씹어먹는 애니까 그런 거고! 하아…… 수도원 똥국 생활도 이제 진절머리가 난다, 진짜.”
에르멜은 돌담 아래에 자리를 잡고 앉은 후 담배에 불을 붙였다. 밀리아는 혹여나 누가 볼까봐 안절부절 못하며 주변을 살피기 바빴다.
에르멜은 담배 연기를 길게 뿜어내며, 그런 밀리아의 모습을 바라봤다.
수도원은 기본적으로 흡연이 금지된 성소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수도원에서 성직자가 되기 위해 교육을 받고 있는 수도생들 역시 담배의 소지와 흡연은 불가능했다.
쉬르센 가문의 순혈 공정으로 태어난 에르멜도 예외는 아니다.
물론 밀리아 같이 출생 성분도 불분명한 천민이 수도원에서 담배를 폈다면, 신성 모독으로 그 자리에서 즉결 처형감이다.
에르멜이 쉬르센 가문의 후계이며, 차기 스텔라 교단의 성녀가 될 아이였기 때문에 빈번히 흡연 행위가 적발되어도 적당히 눈을 감아준 적이 많았다.
“밀리아 넌 좋겠다. 수도원에서 퇴교당해도 아무데나 내키는대로 떠나면 되잖아.”
“에르멜 언니는요?”
“나는 이 빌어먹을 짓거리 때려치고 싶은 마음만 굴뚝 같지. 그런데 퇴교당하면 바로 집으로 끌려가서 애 낳아야 돼.”
“아, 정략 결혼이요! 에르멜 언니의 평소 모습만 보면 귀족 출신이라는 걸 때때로 잊게 돼요!”
“……야, 내가 어때서? 나도 귀족 집안 출신이야!”
“에르멜 언니 목소리! 목소리가 커요!”
“너가 더 커! 아주 여기서 담배 핀다고 광고를 해라! 광고를! 아니, 가슴이 커서 성량이 좋은 건가!?”
“쉿! 쉬잇!”
“읍, 으읍……! 으으읍! 푸핫! 야이 미친년아 쉿쉿 하면서 입을 틀어막는 애가 어딨어!? 너 쉿이 뭔지 모르지!?”
“이게 아니에요?”
“스텔라 맙소사…….”
불량한 자세로 앉아 담배를 태우고 있는 에르멜의 모습만 보자면, 확실히 귀족 가문의 영애답진 않았다.
오히려 밀리아가 태어나고 자란 빈민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여자들 같은 느낌 아닌가?
물론 에르멜이 글로레나 왕조의 대귀족 쉬르센 가문 출신이라는 사실은 명백했다.
“그리고 정략 결혼이 아니라…… 아니, 됐다. 이거 설명하자면 복잡하니까.”
“음, 그러니까 여기서 지내는 것보다 집으로 끌려가는 게 더 싫다는 말이죠?”
“그래그래, 죽지 않게 방부처리 해놓은 노친네 애를 낳아야 되는데 누가 좋겠냐고?”
쉬르센 가문은 에르멜이 실패작이었을 경우도 상정해 뒀다는 말이다.
에르멜이 성녀가 되기에 적합하지 않은 결과물이었다면, 그녀의 몸을 통해 다시 한 번 더 순혈 공정을 거듭할 작정이었다.
밀리아는 에르멜의 얘기를 고개까지 끄덕이며 집중해서 들었다. 그리고는 무언가 결심한 듯 에르멜의 손을 꼭 쥐며 말했다.
“저 결심했어요! 에르멜 언니가 퇴교당하지 않게 매일 망을 봐줄게요!”
에르멜은 그런 밀리아를 멍하니 바라보다, 꼬옥 붙잡힌 손을 빼냈다.
“젠장, 나도 다리 사이에 그게 달려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왜요?”
“너한테 박아버리게.”
에르멜은 키득키득 웃으며 밀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만약 이 세상에 성녀의 자격이 있다면.
만약 스텔라가 규정해 놓은 그런 자격이 있다면 말이다.
이 세상과 스텔라가 바라는 성녀는 에르멜 자신이 아니라, 밀리아일 것이다. 에르멜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한순간 맞닿았던 밀리아의 손은 오후의 햇살만큼이나 포근하고 따듯했다.
“누가 이 신성한 수도원에서 담배를……!”
돌담 너머에서 노성이 들렸다.
이 근처를 우연히 지나던 수도사가 담배 연기를 보고 다가왔고. 담배 냄새까지 맡고 확신까지 했을 것이다.
에르멜이 황급히 담배를 숨기려던 찰나.
그녀보다 먼저 밀리아가 에르멜의 손에 들려 있던 담배를 낚아채 입에 물었다!
그 직후 수도사가 돌담의 모퉁이를 지나 나타났고, 입에 담배를 문 밀리아를 발견했다.
밀리아는 담배를 깊게 빨아들인 후 새하얀 연기를 토해내며 말했다.
“콜록, 콜록……! 오늘 저녁으로 나온 트롤 설사가 도저히 소화가 안 될 것 같아서 한 대 폈어요. 왜요? 안 돼요?”
수도사는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 만큼 분노하여 어깨를 부들부들 떨더니, 고함을 내질렀다.
“그래, 너였구나 밀리아. 이 천박한 잡종 년! 이 수도원에서 담배를 피는 천박한 년은 너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지금 당장 그 더러운 목을 쳐주마!”
수도원에서의 흡연은 즉결 처분을 당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중죄다.
바로 단두대 행이란 말이다.
밀리아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 정도의 규율은 숙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에르멜의 손에 들린 담배를 낚아채기까지 일말의 주저도 없었다.
수도사가 검을 뽑은 채 밀리아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와 검을 치켜 들었고. 내려치기 직전 에르멜이 밀리아의 앞을 가로막듯 섰다.
“얘가 폈을 리가 없잖아.”
“에르멜 님! 이런 천한 년을 감싸실 필요 없습니다! 게다가 방금 눈앞에서 담배 연기를 뱉는 걸 직접 봤습니다!”
“그건 교리에 따른 행동이었을 뿐이야.”
자기희생이다.
그것도 수지타산이 전혀 맞지 않는 희생이다. 머릿속에서 주판을 두들길 생각도 하지 않은 순수한 행동 원리였다.
에르멜은 이 날을 기점으로 결정이 확고해졌다. 스텔라의 의지를 대행하는 성녀의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 누군지 말이다.
에르멜이 스텔라 교단의 총주교를 맡고 있는 백부까지 불러와 밀리아를 감싼 덕분에 밀리아는 태형 30대로 처분이 결정되었다.
밀리아가 형벌을 받고 돌아온 날의 밤.
에르멜은 밀리아의 엉덩이와 허벅지에 약을 발라주며 말했다.
“밀리아 너는 진짜 병신년이야. 그러게 뭣하러 그런 짓을 해서 이 고생이냐.”
“그치만 에르멜 언니가 퇴교당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저도 모르게 몸이 움직였어요.”
밀리아는 베시시 웃으며 멍청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그런 밀리아를 바라보며 에르멜은 혼자말을 중얼거리듯 입을 열었다.
“나는 더 더러운 짓도 할 수 있어.”
채찍에 맞아 뜯어져 나간 상처를 손끝으로 부드럽게 훝으며 에르멜이 말했다.
“지금보다 더 천박해질 수도 있고.”
에르멜에게 스텔라는 어디 있는지 가늠도 안 되는 먼 존재에 불과했다. 태양의 여신이 어떤 식으로 그녀의 삶을 보듬어주고 있는지 실감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눈앞의 소녀는 스텔라와 달랐다.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도 모를 태양보다, 눈앞의 소녀가 더 따뜻하게 느껴지는 법이다.
그녀의 빛도, 체온도, 모든 것이 온전하고 명확했다.
만약 모든 인간이 존재의의를 지닌 채 태어난다면. 쉬르센 가문의 이번 역할은 진정한 성녀를 그에 걸맞는 자리에 앉히는 것뿐이다.
“밀리아.”
“예?”
에르멜은 한참 동안 입술을 오물거리며 말을 골랐다. 그녀가 밀리아에게 어떤 얘기를 해줄 수 있을까?
그런 생각만이 머릿속을 한참 동안 맴돌았고, 엎드려 있던 밀리아가 고개를 돌려 에르멜 쪽을 바라보려 했지만.
에르멜이 밀리아의 머리를 붙잡아 다시 돌린 후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툭 치며 말했다.
“이렇게 까놓고 보니까 엉덩이가 예쁘네.”
“아으으…… 아직 엄청 아프다구요, 에르멜 언니.”
“뭐지? 어째서 엉덩이를 까놓고 누워 있는 거지? 이 언니를 유혹하려는 것인가?”
“그거야 언니가 약을 발라준다고 벗으라고 해서…… 자, 잠깐만요! 아하핫! 거기, 거기 간지러워요!”
아직 그녀의 진심을 전할 때가 아니었을 뿐이다. 스텔라와 다른 태양을 숭배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입에 담을 때가 아니었다.
* * *
에르멜이 수도원의 정규 교육 과정을 수료한 후. 정식 성직자로 활동하기 시작하여 지금에 이르기까지. 전장에 나선 경험은 결코 적지 않았다.
그리고 에르멜은 언제나 최상의 결과를 도출해내는 야전 장교이기도 했다.
첫 출전 때부터 거침없는 공세를 펼치며 적군의 기세를 순식간에 꺾은 일화는 야전 교범에 실렸을 만큼 유명했다.
물론 앞뒤 가리지 않고 돌격과 진격을 강행하는 것이라면, 무능하고 멍청한 지휘관의 표본이 되었겠지만.
에르멜은 전장에 흐르는 바람을 읽는 능력이 탁월했다.
그리고 어줍 잖게 자신과 같이 바람을 읽으려는 적의 지휘관을 위해 바람의 방향을 날조하는 능력도 갖추고 있었다.
거기에 병사들과 함께 최전선에 나서길 두려워하지 않는 강인한 성품.
쉬르센 가문의 순혈 공정으로 완성된 어마어마한 신성력.
한 번 사냥감을 포착하면 숨통을 완전히 끊을 때까지 멈추지 않는 호전적인 성격!
그 결과.
스텔라 교단의 성처녀 에르멜은 마왕군이 가장 두려워하고, 맞붙길 꺼려하는 장교 중 한 사람이 된 것이다.
까앙!
전차의 포신에서 뿜어져 나온 포탄이 비스듬히 소환된 대형 방패에 튕겨 나갔다. 최대한 도탄을 유도하기 위한 각도 설정이었다.
“이야, 할렐루야다 할렐루야! 이 거리를 순식간에 도약했다고? 미친 거 아냐? 기갑 부대를 순간이동시킬 수 있는 능력이면 그냥 사기잖아. 전술이고 전략이고 뭐고 없잖아!”
“퇴로를 열어야 되네! 아무리 베놈이라고 해도 집중 포화를 당하면 벌집이 될 걸세!”
“알고 있어요! 알고는 있는데, 저런 사기캐들하고만 맞붙다 보니까 위장이 먼저 벌집될 거 같네!”
소환 위치도 완벽하기 그지 없었다.
50대의 전차가 사면을 포위하듯 나타났고, 전차들의 화망이 서로를 간섭하지 않도록 절묘한 지리적 고도에 자리를 잡았다.
가둬 놓고 만신창이가 될 때까지 패버릴 수 있는 베스트 포지션을 아무런 전조도 없이 잡아버린 것이다!
지리적 이점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노력하거나, 방어할 새도 없었다.
누자베스는 필사적으로 비비큐 클럽의 전차와 자주 박격포를 지키며 도망칠 궁리를 하기 바빴다.
처음 할칸 기갑 연대의 전차들이 나타났을 때는 응전 사격을 해봤지만, 에르멜은 누자베스의 병대가 발사하는 포탄만 신묘하게 배리어로 막아냈다.
사방팔방 뛰어다니며 방패를 소환해 꽂아야 되는 누자베스와 달리, 에르멜은 앉은 자리에서 50여 대의 전차 전부를 지킬 수 있었다.
대규모 공간 도약.
화력 무력화.
에르멜의 능력 중 극히 일부만을 사용한 결과다. 아직 스텔라의 대기적을 발현한 것도 아닌데 이 정도란 말이다.
‘오늘은 인사만 하고 돌아가려 했는데…… 너무 환영이 격해서 당혹스럽네.’
누자베스는 주머니 안에 챙겨온 ‘오르키아나의 눈’을 손끝으로 더듬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로아 : 각하! 탄약고가 아니었습니다! 빌어먹을…… 시답잖은 속임수를!]
[루칸다 : 젠장, 이대로 가다간 포위당한다! 탄약고를 찾을 시간은 없어.]
[누자베스 : 탄약고 찾으러 돌아다니다가 각하 팝콘된다 얘들아! 빨랑 돌아와!]
간단하게 잽을 한 대 꽂아 보려다가 제대로 카운터 펀치를 맞은 셈이다.
에르멜의 사정거리에 섣불리 발을 들인 댓가는 값싸지 않다는 교훈을 얻은 게 유일한 위안일 것이다.
“와, 진짜 개빡돌게 하네! 맞다이 뜨면 내가 처발라 버릴 수 있는데!”
에르멜은 포탑 위에 벌떡 일어서서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누자베스를 내려다 봤다.
지금 저 발언은 도저히 흘려들을 수 없었다.
직후, 에르멜과 누자베스의 시선이 교차했고. 에르멜은 전차의 포탑 위에서 폴짝 뛰어내려 지면에 섰다.
참고로.
에르멜에게 죽빵 맞고 평생 입 못 닫게 된 마물만 사열종대로 연병장 세 바퀴 반 정도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