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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짓는 플레이어-135화 (135/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135화

    할칸 기갑 연대(2)

    “적습! 적습입니다!”

    “빌어먹을 마족 자식들! 비겁한 짓거리를!”

    “그 개자식들은 포르지나 조약 지킨 적이 없다니까!”

    쿠웅! 쾅!

    비비큐 클럽의 자주 박격포는 3킬로미터 떨어진 거리에서 할칸 기갑 연대의 주둔지를 타격하기 시작했다.

    피아의 식별이 불가능한 환경 조건과 거리에서 공격하는 것은 포르지나 조약에 위배되는 전쟁 범죄에 해당한다.

    물론 누자베스가 그런 시답잖은 조약을 하나하나 지키며 전쟁을 할 만큼 신사적인 전쟁 군주는 아니었다.

    포르지나 조약을 지키기 위해선 나란히 열을 맞추고, 모습을 드러낸 상황에서 총포를 번갈아 가며 쏘는 게 전부였을 테니까.

    “초계반은 뭘 하고 있었던 겁니까! 적의 중병기가 이 거리까지 접근하는 동안!”

    이렇게 어처구니 없게 기습을 허용하고 말다니. 펜리르는 울분을 토해내듯 병사들을 다그쳤다. 하지만 주둔지 일대를 경계하고 있던 초계반을 다그쳐 봤자 소용이 없는 일이다.

    비비큐 클럽이 운용하고 있는 중병기는 고대 병기에 속하는 ‘베놈’의 개변형이다.

    할칸 기갑 연대의 전차와 달리 말리늄767을 분열시켜 얻는 에너지로 움직이는 병기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동력 기관의 요란스러운 소음도 없었고, 무한궤도가 굴러가는 소리조차 없었다.

    게다가 기동 시에는 반드시 주홍색의 빛을 발산하는 할칸 기갑 연대의 전차들과 달리, 빛을 전혀 내지 않고 접근할 수 있었다.

    “진짜 뒤지고 싶어서 환장해 버린 것인가? 5분 전에 막 잠들었는데 포를 갈겨? 이 시간에?”

    포격으로 무너진 천막 안쪽에서 에르멜이 모습을 드러냈다. 속살이 반쯤 여과되어 보이는 반투명한 란제리 위에 투박한 야전 코트를 걸치며 가까스로 기어 나오고 있었다.

    “내 군화 가져와! 아, 모자도.”

    “에르멜 님! 적의 특작 부대가 침투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펜리르 경. 이런 상황에서 당연한 소리 좀 그만해. 어떤 미친 새끼가 포탄 몇 개 던져보려고 여기까지 기어 나오겠어?”

    에르멜은 신경질적으로 바닥에 침을 내뱉었다. 그 사이에 병사가 에르멜의 군화를 가져왔고, 군화의 끈을 묶으며 에르멜이 재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트라이어드 놈들이 둥지 바깥에서 싸우길 원하진 않을 텐데.’

    전쟁 군주의 군단은 최상의 퍼포먼스를 발휘하기 위해 홈그라운드에서 싸울 필요가 있었다.

    둥지의 내부에서 싸우는 것이 베스트.

    그게 불가능하다면 둥지의 근처까지 적을 끌어 들여야 한다.

    그렇기에 13차폐구의 트라이어드가 지리적 이점을 버리고, 이런 기습을 감행했다고 생각하기 힘들었다.

    “어디서 세상물정 모르는 망나니 새끼를 하나 데려왔나 봐.”

    사방에서 포탄이 터지고, 병사들이 팝콘처럼 솟구치는 와중에도 에르멜은 꽤나 침착했다.

    외견은 어린 아이처럼 보여도 에르멜은 수많은 난전을 경험해 온 베테랑 장교다.

    때때로 불패의 전설을 자랑했던 ‘피르에나 왕녀’와 비견될 정도로. 그녀가 전장에서 도출해내는 성과는 엄청난 것들뿐이었다.

    “고작 이 정도 거리에서 안심했다 이거지? 그러니까 저렇게 아주 자리에 엉덩이 붙여 놓고 쏴갈기는 거잖아?”

    에르멜은 야전 코트의 앞주머니에 들어 있던 담배갑을 꺼내, 한 개비를 입술 사이에 끼워 넣었다.

    할칸 기갑 연대의 주둔지를 습격한 정체불명의 지휘관. 에르멜은 그 지휘관의 윤곽을 천천히 그리며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에르멜 님! 개전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펜리르 경 시부랄 도대체 얼마나 천국 가고 싶은 거야? 이런 상황에서 내가 기도나 하고 자빠져 있어야겠어?”

    “하, 하지만 스텔라 님께 보고되지 않은 살상을 저지른 병사들은 죽어서 천국에 갈 수 없지 않습니까?”

    펜리르는 그러한 교리를 진지하게 믿는 남자였다. 오히려 스텔라 교단의 성처녀인 에르멜 쪽이 원리적인 교리에 회의적인 입장이었고 말이다.

    ‘사후의 구원이 필요한 건 도대체 누구일까.’

    그녀의 앞에 모인 병사들은 간절한 눈빛으로 고개를 조아렸다.

    에르멜은 담배 연기를 토해내며 잠시 그런 단상을 품었다.

    사후의 구원이란.

    이런 격전지에서 죽음을 향해 몸을 던져야 되는 병사들에게 필요한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민족의 이데올로기와 이상주의로 스스로를 치장하고, 자신의 잇속을 챙기기 위해 젊은이들을 사지로 내모는 기득권 층에게 필요한 것일까?

    에르멜은 담배 꽁초를 발밑에 내던진 후 가래침을 뱉어 불을 껐다.

    그리고는 야전 코트의 주머니에 양손을 푹 찔러넣은 후 밤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스텔라 님. 지상에서 행해지는 인간의 일이란 언제나 이렇게 추잡합니다만. 이런 더러운 놈들이라도 뒤지면 천국에 들여보내 주십셔. 오늘도 시답잖은 기도 들어주셔서 감사함다.”

    잘 부탁한다는 듯 한 손을 들어 하늘을 향해 휘적휘적 저은 후 에르멜이 펜리르와 병사들을 향해 돌아섰다.

    “기도 끝났어. 슬슬 움직이자구.”

    “에, 에르멜 님…… 조금 더 제대로 된 기도는…….”

    “펜리르 경. 교단의 성처녀보다 더 제대로 된 기도 올릴 수 있으면 자기가 직접 해. 내가 이게 맞다면 맞는 거야.”

    에르멜은 킬킬 웃으며 펜리르의 뺨을 가볍게 툭 쳤다.

    “그럼 우리가 목숨 걸고 지켜야 되는 건 뭘까? 우선 순위를 정해 봐야지?”

    너무나 당연한 질문이었다.

    전차의 운용에 필요한 탄약을 저장해 놓은 탄약고를 제1순위로 지켜야만 했다.

    “탄약고 쪽으로 경비 병력을 돌리겠습니다.”

    현재 주둔지를 침투한 적의 특수 부대가 탄약고 파괴에 성공한다면, 다음 보급까지 전차 부대의 발이 묶이게 되는 것이다.

    “아니지, 탄약보다 더 소중한게 있잖아.”

    펜리르가 그런 정석적인 판단을 내렸지만. 에르멜은 바로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기호품 창고에 제2부보대 병력 전부를 돌려. 적의 지휘관에게 알려줘야지. 우리에겐 탄약 한두 발 보다 홍차와 위스키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에르멜은 거기까지 말한 후 뒤늦게 떠오른 것처럼 덧붙여 말했다.

    “아, 그래도 창고에서 담배는 좀 챙겨놔. 혹시나 파괴당하면 풀잎 말아서 피워야 되니까.”

    주둔지 방어는 병사들에게 맡겼고, 에르멜은 따로 할 일이 있었다.

    스텔라 교단의 성처녀 에르멜을 상대한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똑똑히 알려줄 차례였다.

    에르멜이 전차가 있는 곳으로 다가가는 동안. 그녀의 머리카락이 늦은 오후의 태양처럼 주홍빛으로 일렁였다.

    * * *

    [누자베스 : 저 새끼들이 아주 그냥 탄약고 위치를 알려주는데? 바로 크라울 비젠 부대 투입시켜.]

    적의 병력이 압도적으로 많은 상황에서 루칸다의 비르겐슈타인 부대를 계속해서 운용할 수는 없었다.

    비르겐슈타인 부대는 어디까지나 암살 및 정찰 임무에 특화된 병종이다. 대규모의 병력을 상대하는데 적합하진 않았다.

    적이 침투를 인식하기 전에 초소를 제압하고, 누자베스와 비비큐 클럽의 호위를 맡기 위해 돌아왔다.

    할칸 기갑 연대의 주둔지에 직접 침투하여 타격하는 임무는 로아와 루칸다가 그리고 크라울 비젠 부대가 맡게 되었다.

    그리고 누자베스와 비르겐슈타인 부대, 그리고 비비큐 클럽은 후방 지원을 맡고 말이다.

    [루칸다 : 각하, 후방이라고 안심하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스텔라 교단의 성직자들은 본래 기괴한 재주를 하나씩 가지고 있습니다.]

    [누자베스 : 아, 이번 지휘관은 성처녀 에르멜이었지?]

    누자베스도 루칸다에게 어느 정도 정보를 들어 에르멜에 대해 알고 있었다.

    쉬르센 가문의 순혈 공정을 통해 완성된 스텔라 교단의 최종병기라는 느낌이다.

    교단의 장로회에 의해 ‘정적 봉인’을 당한 밀리아와 비교하자면 그 위험도는 한없이 높았다.

    [누자베스 : 스텔라 교단 애들은 가슴이 다 수박만한데. 상상만 해도 벌써 이그니션 서킷에 불 들어올 거 같네.]

    어쨌거나 이번 작전은 핵심은 할칸 기갑 연대의 탄약고를 파괴하는 것이다.

    당장 움직일 수 없도록 발을 묶는 효과도 볼 수 있었고, 계속해서 보급품을 파괴당한다면 냉철함을 유지할 수 없게 된다.

    할칸 기갑 연대의 지휘관 에르멜이 조바심을 내기 시작할 때가 집어삼킬 타이밍이었다.

    ‘이쪽의 공수 부대가 주둔지에 침투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까지 생각했군.’

    에르멜은 거기까지 판단을 했고, 바로 병사들을 움직여 방어선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누자베스는 마인드 모드로 할칸 기갑 연대의 보병들이 어디로 집결하는지 빤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저 창고겠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할칸 기갑 연대의 제2부보대 병력이 우선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모여든 창고. 그곳에서 빙고의 예감이 들었다.

    [누자베스 : 로아, 재빠르게 폭탄 설치하고 튀자고. 어차피 탄약고니까 유폭 일어나기 시작하면 일망타진이야.]

    [로아 : 예, 각하.]

    [누자베스 : 루칸다는 내가 지시한 물건 제대로 전달해 주고.]

    [루칸다 : 두르난이 직접 쓴 러브레터에 기뻐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누자베스 : 우리 두르난 아재가 손재주가 좋아서 말이다. 손글씨도 여자애처럼 동글동글하게 잘 쓰더라. 깜짝 놀랐다니까! 그런 글씨를 가랑이에 털 숭숭난 아저씨가 썼다고 누가 알겠어?]

    루칸다의 정보 수집 능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어떻게 보자면 탄약고 파괴가 임무의 부수적인 목적처럼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누자베스가 명령을 내리기가 무섭게 허공에서 병력이 나타났다. 할칸 기갑 연대의 병사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뭐, 뭐야!?”

    “적군이다! 적군! 사격!”

    “쏴, 쏴죽여! 이 더러운 마물 놈들아 뒤져어어엇! 카악!”

    피슉!

    일반적인 화살에 비해 짧고, 석궁의 볼트보다 긴 화살이 병사의 가슴을 꿰뚫었다.

    낙하하기 시작한 헬베르카 정예 척탄병들은 공중에서 사격을 개시했다.

    헬베르카 정예 척탄병의 주무장은?

    기괴한 리로드 애드온이 장착된 금속제 단궁이다. 한번에 여섯 발의 화살을 장전할 수 있었고, 활시위를 당겼다 놓기만 하면 되니 연사력도 엄청났다.

    머스킷으로 무장한 기갑 연대의 보병들은 화망을 형성하기도 전에 화살에 꿰뚫려 바닥을 나뒹굴었다.

    “죽어어엇, 죽어!”

    “돌격! 마족 놈들을 죽여어!”

    지면에 착지한 헬베르카 정예 척탄병들을 향해 병사들이 착검 돌격을 시도 했지만!

    카앙!

    푸욱!

    헬베르카 정예 척탄병들은 재빠르게 단궁을 거두고, 허리춤에 차고 있던 세이버를 뽑아 응전하기 시작했다.

    임금을 지불하고 모집해 온 인간 병사들.

    그리고 태어나는 순간부터 헬베르카 가문의 군사로 사용하기 위해 훈련받아 온 정예 척탄병의 싸움이다.

    애초에 콜드 게임이었단 소리다.

    “퇴로를 먼저 확보해 두겠다. 병사 머릿수 하나 더 줄여보겠다고 괜히 시간을 지체하지 말도록.”

    “알고 있어! 잘난 척 하지마.”

    거기에 로아와 루칸다까지 합세한 상황.

    할칸 기갑 연대의 보병들에겐 한없이 승산이 희박한 싸움이었다.

    [누자베스 : 자, 그럼 우리도 슬슬 빤쓰런할 준비나 할까?]

    [두르난 : 알았네! 바로 퇴각을 준비하지.]

    누자베스는 작전의 진전 상황을 확인한 후 먼저 전장을 이탈할 준비를 시작했다.

    그 순간이었다.

    일대가 섬광에 휩싸인 듯 번쩍였고.

    슈우우욱.

    주홍빛의 연기가 피어 올랐다.

    누자베스가 마인드 모드를 종료하고 육안으로 주변을 살핀 순간.

    섬세하게 세공된 듯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쥐새끼처럼 숨어서 팰 때는 재밌었지?”

    그 목소리와 함께.

    사면을 포위하듯 50여 대의 전차가 모습을 드러냈다. 에르멜의 능력으로 3킬로미터가 넘는 이 거리를 일순간에 도약한 것이다.

    자신의 육체 뿐만이 아니라, 이런 거대한 질량체를 수십여 대 함께 도약시키다니!

    이런 기적을 목격한다면 에르멜이 지닌 신성력이 어느 정도일지 감히 상상조차 안 될 것이다.

    에르멜은 전차의 포신 위에 걸터 앉은 채 누자베스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나도 재미 좀 보게 해줘라, 응?”

    에르멜은 씨익 웃으며 발포 명령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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