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짓는 플레이어-134화 (134/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134화

    할칸 기갑 연대(1)

    “각하는 이 세상에 최소한의 상도덕이 있어야 된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렇다.

    이 사람과 사람의 도리가 땅에 떨어지고, 혐오가 만연하며, 스스로의 삶에 고통받는 인간들이 증오를 중독적으로 소비하게 되는 세상이라도 말이다.

    모두가 가슴 한켠에 품고 있는 최소량의 도덕에 대해 얘기하고자 한다.

    눈앞에 서서 한껏 토라진 로아를 향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피자집 간판을 걸어 놨으면 그 가게는 피자를 팔아야 한다. 중국집 간판을 걸어 놨으면 짜장면을 팔아야지. 그게 섭리이고 도리라고 생각한단다.”

    피자집에 피자를 먹으러 온 사람한테 짜장면이 토핑으로 듬뿍 얹어져 있는 피자를 내놓는 건 장사하는 사람으로서 해서는 안 될 짓이란 말이다.

    설령 저 길 건너편 피자집에서 짜장면 토핑 피자 같은 신박존박한 메뉴로 대박을 터뜨렸다고 해도!

    전국의 모든 피자집이 그 대박집을 따라하겠다고, 피자에 죄다 짜장면을 얹어서 손놈들 주둥이에 쑤셔 넣으면 어찌 되겠나? 어?

    물론 원래 짜장면 좋아하던 손님들은 그런 해괴한 피자도 좋아하겠지만, 평범한 피자를 먹고 싶었던 손님들은 어찌하란 말인가.

    아니, 그럼 간판에 큼지막하게 써 놓던가!

    우리집 피자는 절반쯤 먹다 보면 짜장면 토핑이 나옵니다! 이런 식으로!

    “로아야. 짜장면 토핑은 손님을 기만하는 행위다. 그리고 짜장면 먹고 싶은 놈들은 중국집에 가면 되는 거야. 괜히 피자집 와서 짜장면 맛이 났으면 좋겠다고 헛바람 넣지 말고.”

    그리고 짜장면 토핑으로 대박난 그 피자집은 말이다. 원래 피자도 짜장면도 잘 만드는 요리사가 있어서 성공한 거다! 어줍잖은 실력으로 피자하고 짜장을 섞었다가는 사탄 뿔 빠는 맛밖에 더 나겠나?

    “이제 알겠지? 각하는 피자도 제대로 못 만들고, 짜장면은 먹어 본 적도 없는 사람이야. 피자 하나 제대로 만들기도 벅찬데 짜장면 토핑 개발할 시간이 어디 있겠냐.”

    솔직히 고백하자면 피자에 춘장 소스를 살짝 섞는 취향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풍미를 살리기 위한 편법이다.

    본격적으로 짜장면을 토핑으로 들이 붓는 가게들하곤 노선이 다르단 말이다.

    “젠장, 이건 그냥 어렸을 때 OK목장의 결투를 너무 감명 깊게 봐서 그래. 와이어트 어프와 닥 할리데이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기류는 남자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거든.”

    “저기 각하…….”

    “알아! 나도 알아! 더 이상은 묻지 마라, 로아. 각하는 이번에도 쪽박 차면 피자집 폐업하고 중국집이나 개업하려니까.”

    로아는 여전히 이해가 안 되는지 입을 삐죽이며 다시 물었다.

    “어젯밤 그 흡혈귀와 뭘 했는지 물었습니다만.”

    “나는 이미 그 대답을 돌려줬다고 생각한다. 각하가 비록 피자를 만들긴 했지만, 그건 각하가 짜장포비아라서가 아니라 여기가 원래 피자집이라서 피자를 만든 것뿐이야.”

    그리고 로아에게 모든 일을 솔직하게 토로하게 된다면, 이후의 전개가 불 보듯 뻔했다.

    로아의 저 곱상하고 귀여운 얼굴 좀 봐라.

    분명 저런 얼굴의 작화가는 구지라겠지. 구지라 선생님 외엔 적임자가 없다고 생각한다!

    저런 얼굴로 애절하게 유혹하기 시작하면, 내가 견뎌낼 수 있을까? 아니다. 결코 아니다. 본인 이미 춘장 볶고 수타면 뽑는 상상했다.

    “그리고 어? 우리 집은 짜장면 팔고 싶어도 팔 수가 없어요! 저기 봐라, 루칸다가 입을 5밀리만 열면 짜장면 먹으러 왔던 손님들 죄다 화들짝 놀라 욕하면서 도망칠 텐데!”

    벽쪽에 서있던 루칸다가 옆머리를 긁적였다.

    “일단 짜장면이 뭡니까, 각하?”

    “그건 됐고. 비르겐슈타인 부대의 부대원들은 모두 인간 여자들로 대체하겠다.”

    내가 말하기가 무섭게 루칸다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물소 설사똥이라도 뒤집어 쓴 사람처럼 오만상을 찌푸린 저 얼굴이 보이나!?

    “인간 암컷으로 구성된 부대라. 적에게 역겨움과 혐오감을 선물하기에 딱 좋은 선전 부대가 되겠군요.”

    “봐라! 루칸다의 저 발언 좀 들어 봐라! 저 발언이 짜장면을 팔겠다는 마음가짐이 1그램이라도 있는 것 같냐!?”

    끝이다.

    루칸다 님의 어록 덕분에 우리집이 짜장면을 팔게 되는 날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다.

    “루칸다 공평하게 인간 수컷도 욕해줘라.”

    “사실 외견만 보자면 인간은 수컷과 암컷을 구분하기 힘듭니다. 하지만 행동 양상을 보면 쉽게 구분할 수 있죠.”

    “좋아. 각하도 기린이나 하마 같은 거 봐도 암수 구분 못하니까 그 느낌이 뭔지 이해가 된다.”

    루칸다는 끌끌 웃으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자잘한 얼간이 짓을 하고 다니면 암컷이고, 도저히 눈뜨고 못 볼 병신 짓을 하는 것이 수컷이죠.”

    여러분 잘 들었길 바란다.

    이걸로 루칸다에 대한 오해를 하나 풀고 가겠다. 루칸다는 암컷 혐오자가 아니라, 그냥 인간 혐오자란 말이다.

    “스칼렛은 오전부터 안 보이는데, 오늘 바쁜가 봐?”

    “뤼클라가 집요하게 접근하기 시작했습니다. 미끼를 물었군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역시나 가장 거리감이 가까운 뤼클라가 먼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녀석이 흡혈귀 계열의 하이브 마인드라는 게 도움이 됐네.’

    스칼렛은 나르시안의 둘째 딸이 아니던가? 대다수의 흡혈귀들은 상속 신분이라면 간도 쓸개도 떼어줄 만큼 정신을 못 차리는 놈들뿐이다.

    게다가 실질적으로 아리카와 포 힐케인의 주인이 내가 아닌 스칼렛과 루칸다라고 위장을 해놓은 상태.

    ‘스칼렛이 모종의 이유로 하이브 마인드를 이용하고 있다고 판단했겠지.’

    그렇다면 뤼클라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내가 그 놈보다 못한 것도 없고, 잘난 구석 뿐인데 환승하지 않겠냐고 꼬셔볼까?’

    실제로 나 같은 하꼬 둥지의 관리자보단 잘난 게 사실이니까 말이다. 뤼클라는 본도 론트라에 영토를 지닌 하이브 마인드다.

    비록 컴플렉스 형태의 둥지라고는 해도, 13차폐구의 트라이어드라면 어디 가서 무시당할 클래스는 아니지 않나?

    스칼렛이 그저 하이브 마인드를 뒤에서 조종하며, 이용해 먹을 뿐인 녀석이라고 해도.

    뤼클라의 입장에선 스칼렛을 등에 업고, 스칼렛의 장기말 노릇을 하는 게 지금보다 더 형편이 좋을 것이다.

    “루칸다 너한테는 붙은 놈 없냐?”

    “아일크라나에게 저녁 식사 자리에 초대받았습니다만. 뤼클라 만큼 노골적으로 의도를 드러내지 않은 상황입니다.”

    “로아는?”

    “뤼클라와 세도루프 둘에게 서신을 받았습니다.”

    로아는 지니고 있던 편지를 꺼내 내게 건넸다. 가볍게 내용을 훑어보자.

    ‘세도루프 놈이 로아에게 관심이 많으시군.’

    뤼클라는 거의 찔러보기 수준이었다.

    당장의 메인 목표는 스칼렛이지만, 로아도 가능하다면 우호적인 관계로 두고 싶다는 의사 표명이다.

    그에 비해 세도루프는 명확하게 호의를 표명했다. 녀석이 써놓은 루스날 찬양론은 잠깐 훑어본 것만으로도 얼굴이 화끈거릴 지경이다.

    “이 새끼들은 급한 원군 요청을 받아줬더니, 챔피언 빼먹을 생각밖에 안 하네. 물에 빠진 놈을 구해주려고 하니까 봇짐 훔칠 생각만 가득해.”

    이번에 무사히 에르멜과 우렌을 물리친 후 챙길 수 있는 건 더 챙겨놓자는 심보다. 하기야 하이브 마인드란 족속이 원래 다 이렇지 않나?

    “저울을 이리저리 기울이며 속 좀 뒤집어 주자고. 스칼렛에겐 아일크라나 쪽으로 붙어서 뤼클라 속 좀 타게 만들라고 전해라.”

    “예, 각하.”

    “로아는 뤼클라 쪽을 커버.”

    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내가 어젯밤에 스칼렛과 뭘 했는지 추궁하고 싶은 기색이다만.

    밤의 어머니께 맹세코 망측한 행위는 없었다! 애초에 유대 관계를 맺는다는 건 단순히 설명해서 피를 섞는 것뿐이다.

    그러니까…… 내가 스칼렛에게 물리거나, 물거나, 빨리거나, 빨거나 한 것뿐이다.

    아니, 이렇게 말하니까 또 이상하게 들릴 것 같은데. 빨았다는 건 피를 빨았다는 얘기다. 뭐 다른 신체 부위와 일절 관계없다!

    물론 의복이 더러워지는 걸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탈의를 하긴 했지만. 이건 그냥 남자끼리 같이 샤워실에 들어가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행위다.

    진짜, 진짜로 오해는 그만둬 주길 바란다.

    “어, 어쨌든 기갑연대의 발을 묶어놓은 후 천천히 이 차폐구를 찢어 먹어 보자고. 에르바키나 연맹 놈들이 준비가 되면 바로 연락하겠다고 했으니까.”

    로아에게 보이지 않게 옷깃을 세워 목의 상처를 가렸다. 이제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해야 할 때였다.

    “자, 그럼 도시에서 온 아가씨한테 질척질척하게 노는 법을 가르쳐 주자고. 화끈한 승패의 분기점 따위 없이 끈적하고 더러운 싸움이 이쪽의 특기 아니겠냐.”

    에르멜의 할칸 기갑연대를 상대로 신병종 ‘헬베르카 정예 척탄병’을 시험해 볼 차례였다.

    * * *

    “이봐, 야간 경계 중엔 불을 켜지 말라고 했잖아.”

    “딱딱한 소리 좀 하지 마, 13차폐구의 전쟁 군주 놈들이 땅굴에 틀어박혀서 나올 생각도 않는데 뭐가 무섭다고 그래?”

    “하긴 그건 그렇네. 이번 임무는 중부까지 나온다고 해서 걱정했는데, 할칸 기갑 연대의 호위라니 꿀이 뚝뚝 떨어지는구만.”

    초소에 틀어박혀 있던 두 젊은 병사들은 지루한 시간을 보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건 그렇고 뭘 보고 있는 거야?”

    “마을을 떠나기 전에 약혼자한테 받은 편지야. 이번 임무만 끝나면 돌아가서 결혼할 예정이거든.”

    “오, 약혼한 사람도 있었어? 나한테 약혼자가 있었으면 이 직업도 때려쳤을 텐데. 마을에서 얌전히 농사나 지을 생각이야.”

    “나도 이 임무만 끝나면 퇴역해야지. 수당도 좋고, 할칸 기갑 연대의 호위 임무라 위험도 적으니 지원했을 뿐이야.”

    “하기야 우리 같은 무식쟁이들이 돈을 잔뜩 벌 수 있는 게 이런 일밖에 더 있겠어? 그나저나 글을 쓸 줄 아는 여자라니 좋은 여자를 잘도 찾았군.”

    “그렇지? 가슴도 호박만 해.”

    “크하핫! 이거 서러워서 나도 얼른 하나 만들…… 어?”

    호쾌한 웃음을 터뜨리던 병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행복한 미소를 머금은 채 대화하던 동료의 머리가 사라져 있었다.

    그의 현재와, 그가 꿈꾸던 행복한 미래와 함께 말이다. 좁은 초소 안에서 핏줄기가 뿜어져 나왔고,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나머지 병사도 목이 잘려나갔다.

    어둠 속에서 정예 고블린 살수들이 모습을 드러냈고, 그 광경을 지켜보던 루칸다가 바로 보고를 올렸다.

    [루칸다 : 동측 관측초소 일제 제압되었습니다. 탄약고의 위치를 표시하겠습니다.]

    [누자베스 : 좋아좋아, 전쟁은 머리통 많이 따는 놈이 이기는 게임이 아니라는 걸 녀석들에게 알려줘야지. 로아, 크라울 비젠 부대의 위치 갱신시켜.]

    [로아 : 갱신했습니다. 비비큐 클럽의 화력 지원을 요청합니다.]

    [두르난 : 우린 언제든 준비 오케이야! 저런 구시대의 전차가 상대라면 전속력으로 질주하면서도 명중시킬 수 있겠군!]

    [누자베스 : 두르난 아재요…… 내가 아까 뭐라고 말했는지 들었어요?]

    이번 야습의 목표는 탄약고의 파괴다.

    비르겐슈타인 부대로 길을 열고, 비비큐 클럽이 곡사포 포격으로 정신없이 두들기는 동안 크라울 비젠 부대가 적의 주둔지로 강하하여 탄약고가 유폭을 일으킬 정도로 파괴한다는 것이 작전의 핵심이었다.

    [누자베스 : 물론 탄약이야 금방 보급해 오겠지. 철도 보급이 가능한 전선이니까.]

    하지만 신경을 갉아 먹는 야습이 거듭될수록 그 진가가 발휘될 것이다.

    한 번 으깨진 멘탈은 최전선에서 다시 보급되기 힘든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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