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짓는 플레이어 133화
반환점(4)
스칼렛이 찾아온 건 늦은 밤이었다.
이번 메모리얼 전투의 부가 보상으로 얻은 오르키아나의 왼쪽 눈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던 도중이었다.
“오, 왔냐?”
보상으로 받을 때부터 오르키아나의 눈을 감싸고 있던 검은 천으로 덮은 후 방으로 들어온 스칼렛을 향해 가볍게 말을 걸어봤다.
스칼렛은 문앞에 서서 이쪽을 위아래로 훑어 보기 시작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어쩐지 겁을 먹은 기색이다. 한껏 경계하듯 날카로워진 눈빛이 그렇게 보였다.
“갑자기 그렇게 째려보고 그러면 무섭잖아. 각하의 멘탈은 이미 넝마조각이라 당분간은 마음 편히 쉬게 해줘라.”
“딱히 째려본 건 아닐세.”
“그럼 뭔데? 아, 유대 관계 때문에?”
스칼렛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나한테는 별도의 선택지가 없었다.
눈앞까지 들이닥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메를로와 유대 관계를 맺는 게 유일한 타개책이었단 말이다.
그리고 흡혈귀에겐 이 유대를 맺는 행위가 얼마나 중대한 일인지도 대충 설명을 들었다.
‘거의 종신노예계약이지…… 그런 걸 본인의 허가도 없이 맺었으니. 화를 내도 어쩔 수 없지만.’
유대 관계란 흡혈귀가 자신과 동등한 위계라 인정한 상대와 맺는 게 일반적이고, 이 관계 역시 같은 흡혈귀 끼리 성립하는 것이다.
위계가 한참 아래인 타종족과 유대를 맺는다는 건 대부분의 흡혈귀들에게도 논외의 문제겠고.
게다가 스칼렛이 나르시안의 둘째 딸이라는 사실이 명확해지지 않았나? 그런 상속 신분의 흡혈귀가 나 같은 잡종하고 유대를 맺게 되었으니 눈탱이가 얼얼하겠지!
스칼렛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조심 입을 열었다.
“스칼렛, 들어봐라. 나는 별로 유대 관계를 맺은 상대로써 권리를 주장할 생각도 없고, 의무를 강요할 생각도 없어.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나중이라도 관계를 해제할 수 있다며?”
“혈계의 규율에 따르자면 최소 200년 동안은 유지해야 되네.”
“영원히 사는 분들이라 그런지 시간 감각이 엄청 다르시네…….”
스칼렛은 뭔가 마음 속에서 단념한 듯 한숨을 푹 내쉬며 천천히 다가왔다.
“아, 그런데 박리 차원에서 맺은 거니까 스칼렛 너와 동일한 개체라고 볼 수 없지 않냐?”
“나도 그렇게 생각했네. 어느 정도의 영향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역시 영향이 아주 없을 순 없는 건가.”
내가 묻자, 스칼렛은 고개를 가로저은 후 대답했다.
“영향을 미친 정도가 아니라, 주군이 이번 박리 차원에서 만나고 유대 관계를 맺은 흡혈귀와 이 늙은이가 완벽하게 동일한 개체로서 취급받게 되었네. 기억의 혼선이나 병합 정도가 아니라, 과거 그 자체가 개변된 걸세.”
“잠깐, 그러면…….”
“과거 그 자체에 개입한 꼴이 된 것이지. 앞으로는 메모리얼 전투라는 차원 도약을 자제할 필요가 있네. 처음 경험했던 메모리얼 전투와 이번 메모리얼 전투는 성질 자체가 상이했네.”
“한 마디로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과거가 없었던 일이 되었다는 건가?”
스칼렛은 고개를 끄덕인 후.
마치 증거를 보이려는 듯 블라우스의 단추를 푸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절반 정도 벌어진 블라우스를 손으로 잡아 펼쳐 보였다.
“지자스…….”
상흔이 없어져 있었다.
분명 이전까진 스칼렛의 가슴골 사이엔 검으로 꿰뚫린 흔적이 남아 있었다. 바하무트에게 당한 그 상처가 거짓말처럼 사라진 것이다.
이번 메모리얼 전투로 내가 과거에 개입했고, 과거를 변화시켰다. 그리고 그 결과가 현재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는 흐름이다.
‘그럼 내가 이번 메모리얼 전투에서 만났던 메를로가 지금 눈앞에 있는 스칼렛이라는 말이지…….’
그것도 수만 년의 시간이 흐른 뒤에 말이다. 솔직히 내 시점에서 보자면 오늘 일어났던 일에 불과하지만, 스칼렛의 시점에서 보자면 수만 년 전에 만났던 하이브 마인드를 오늘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스칼렛은 내 옆에 나란히 앉으며 입을 열었다.
“혈질의 변화가 생겼을 걸세. 내일부터는 혈계의 능력을 제대로 제어하는 연습을 시작하지.”
“그럼 나도 그 최면술 같은 거 쓸 수 있어? 빈큐럼이라고 했나?”
“이 늙은이가 가능한 일은 주군 역시 가능하다고 생각하게. 지금 완벽한 영적 동위에 위치해 있으니.”
이건 예상치도 못한 파워업이다.
붉은 달의 메를로와 동일한 능력을 구현할 수 있다는 건 상당한 이점이었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메를로라고 하면 죽지 않는 불사의 군단으로 유명한 흡혈귀 아니었나? 그 능력을 고스란히 내 병단에 적용할 수도 있었으니까.
“그리고 개변된 과거의 영향으로 무엇이 바뀌었는지 다시 상세하게 조사할 필요가 있네. 아주 작은 영향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큰 반향을 일으킬 수 있지 않나?”
쉽게 말해서 나비 효과가 적용될 수 있다는 말이다.
머릿속에서 해야 할 일들의 리스트를 재빠르게 작성했다.
선결 과제는 역시 13차폐구의 온전한 점령이었지만, 부수적인 일들이 꽤나 늘어난 느낌이다.
“좋아, 그럼 슬슬 스퍼트 올려 보자고. 13차폐구의 트라이어드 양반들을 너무 오래 기다리게 만들었네.”
실제로는 하루 정도 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중간에 메모리얼 전투를 진행하느라 원고 분량을 20편 정도 뽑지 않았나?
내가 이번 메모리얼 전투에서 얼마나 피똥을 쌌는지, 그 노고와 고생에 대해 적자면 13만 자 정도는 족히 나올 것이다!
“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스칼렛은 평소처럼 내 무릎 위에 걸터 앉았다. 코끝이 맞닿을 만큼 상체를 가까이 해오며 스칼렛이 입을 열었다.
“역시 주군은 오르키아나가 아닐세. 이게 내 최종적인 결론이라고 못 박아두고 싶었네.”
“그럼 내가 오르키아나일 경우의 전제는 모두 거짓이라고 생각해도 되겠군.”
“글세. 모두가 이 늙은이와 같은 생각일 리는 없으니, 판단을 보류하는 것도 괜찮겠지만.”
스칼렛이 내 어깨를 부드럽게 밀어냈고, 자연스럽게 상체가 침대 위로 쓰러졌다.
“주군이 오르키아나가 아니라는 전제 하에서 성립하는 의문이네만.”
시선을 숨기듯, 스칼렛은 내 목덜미 안쪽으로 얼굴을 묻으며 작게 속삭이듯 말했다.
“조금 더 이성적인 판단이 가능하지 않았나? 주군을 배신한 흡혈귀를 구할 이유가 있었는지 묻고 싶었을 뿐이네.”
스칼렛이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지만. 나는 사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한 번 돌려준 적이 있었다.
메를로와 유대를 맺기 전에 똑같은 질문을 들었던 것이다. 내가 스칼렛을 포기하는 것으로 얻을 수 있는 이득이 무엇인지, 그런 얘기까지 들었지만.
‘기억이 병합되었고, 과거의 메를로와 스칼렛이 동일한 개체가 되었다고 했지.’
그렇다면 스칼렛 역시 내가 뭐라 대답했는지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뭐, 기억하고 있지 못하거나 너무 오래된 기억이라 희미해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다시 한 번 말해주도록 하자.
결국 영원을 살아가는 스칼렛과, 필멸의 숙명을 지닌 나의 관계란 그런 식으로 밖에 성립하지 않는 것이라 생각한다.
결함 투성이의 되다 만 녀석들은 결점과 결락된 기억과, 충족된 적 없는 감정의 공백을 이런 식으로 메울 수밖에 없으니까.
“내가 오르키아나는 아니지만.”
가을날의 냇물 만큼 서늘한 스칼렛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이번 만큼은 오르키아나 녀석과 똑같은 대답을 내놓을 수밖에 없겠지.”
수만 년 전 나는 녀석에게 무슨 대답을 돌려줬을까? 그 오랜 기억을 더듬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땅히 이리 되어야 했을 관계였을 뿐이야. 대수로운 이유가 어딨겠냐. 나 같이 결점 투성이인 놈은, 그런 식으로 필사적일 수밖에 없어. 한 번 손아귀에 들어온 건 죽을 때까지 꽉 쥐고 있어야 된다고.”
지닌 것이라곤 그런 저열한 탐욕 뿐이다.
아무것도 지니지 못했기에, 긴 시간 동안 홀로 품어올 수밖에 없었던 소유욕에 불과하다.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고, 오르키아나처럼 멋드러지게 말하는 재주도 없지만.”
내가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는 건 단 하나였다.
“내 소유물은 그리 쉽게 포기 안해. 내가 뒤통수 한두 대 쳐맞은 정도로 질질 짜면서 내뺄 거라곤 생각하지 마라.”
갑자기 스칼렛이 상체를 일으켜 이쪽을 내려다 봤다. 커다란 눈망울에는 어째선지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그런 스칼렛을 향해 멋쩍게 웃어 보이자.
스칼렛이 볼멘 목소리로 불만을 토해냈다.
“역시 납득이 안 되네.”
“그야 그렇겠지…… 그냥 원래 이런 놈이구나, 하고 이해만 해줘라.”
스칼렛은 고개를 가로저은 후.
갑자기 내 셔츠를 거칠게 벗겼, 아니 거의 찢는 것처럼 거칠게 벗겨냈다!
“유대를 맺었다는 실감이 전혀 없는데, 유대 관계라는 건 역시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잠깐, 잠깐만! 이미 유대 관계인데……!”
스칼렛은 쿡쿡 웃으며 쇄골 위쪽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덥썩 물었다.
차갑고,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에 어깨가 흠칫 떨렸다.
“기억 같이 애매모호한 것보다, 선명한 실감을 몸에 새겨주게. 두 번 다시 잊지 못하도록.”
밤이 길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흡혈귀는 야행성 아닌가?
* * *
“누자베스? 아아, 포 힐케인 섬에서 봤던 그 하이브 마인드 말이군.”
우렌은 손에 들고 있던 봉제 인형을 내려놓으며, 기억을 더듬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왕군 직속 13021편제 부대 ‘카쿠쟈’의 부대장이자 상급 감찰관 ‘우렌’은 이번 특명 수행을 위해 13차폐구에 근접한 이즈미 령에 주둔중이었다.
바체트 령 제일의 전쟁 군주 처리반.
철혈의 중재자라는 이명답지 않게 우렌은 평소에도 봉제 인형을 만드는 취미를 지니고 있었다.
표면적으로 보여주는 잔혹무도한 모습을 떠올리자면, 우스꽝스러울 만큼 기괴한 취미였다.
“역시나 아리카 섬과 포 힐케인 섬으로 만족할 생각은 없었군. 기어코 본도에 발을 들이다니.”
“우렌 상무관. 13차폐구 제압을 우선적으로 생각하시오. 손톱 만한 섬을 한두 개 차지한 애송이 따위에게 신경을 할애할 순 없소.”
우렌의 맞은편에는 황소의 머리를 달고 있는 거구의 사내가 못마땅하다는 듯한 시선으로 우렌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곳, 이즈미 령의 전쟁 군주 ‘타우저 백작’이었다.
확실히 타우저 백작의 의견은 타당했다.
당장 큰 장애물이 되는 것은 13차폐구의 트라이어드다. 게다가 글로레나 왕조의 ‘할칸 기갑연대’까지 눈독을 들인 상황.
이제 막 전장에 데뷔한 신예 하이브 마인드 따위가 미칠 수 있는 영향은 한없이 적었다.
“백작, 놈은 애송이가 아닙니다. 아리카 섬을 통일시켰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우렌은 누자베스를 꽤나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전쟁 군주들을 사냥해 온 우렌이 이 정도로 인정하는 하이브 마인드는 손에 꼽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즈미 령의 전쟁 군주 타우저는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흥! 그깟 코딱지만한 섬을 차지한 게 무슨 대수라고. 우렌 상무관도 슬슬 감이 무뎌지는 모양이군. 아니면 나이를 먹어서 젊었을 적 만큼 용감하지 못한 것이 아니오?”
“하하…….”
우렌은 힘없이 웃으며 타우저의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백작. 이 감찰관 나부랭이의 감이 무뎌진 것이길 바라십시오. 이 우렌이 예전 만큼 용감하지 못하길 바라시는 게 좋겠습니다.”
만약 우렌의 감이 이번에도 정확하다면.
피를 보는 건 우렌 한 사람뿐만이 아닐 것이다.
‘이런 노인을 주책맞게 두근거리게 하는 재주가 있는 놈이었지.’
최근들어 사냥하는 맛이 없는 전쟁 군주들 뿐이었다. 우렌이 진심을 다하게 만든 상대는 없었다.
우렌은 일전에 파악해 놨던 누자베스의 능력과 병력 상황을 검토하듯 떠올리며 다시 봉제 인형을 집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