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짓는 플레이어-131화 (131/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131화

    반환점(2)

    나는 이 자리를 빌어 얘기해야만 하는 사실이 있었다.

    여러분에게 담담하게도 도발적인 질의를 던질 의무가 있었다.

    그리고 이 의무는 이야기의 화자인 나의 유일한 권리이기도 했다.

    자, 그리하여 오늘의 아젠다를 공개하겠다.

    오늘의 아젠다.

    주인공이 구르기만 하는 웹소설에 수요가 있을까?

    안다. 나도 안다. 빌어먹을! 알고 있단 말이다!

    이 토론 주제가 너무나 도발적이며, 민감하고, 눈살이 절로 찌푸려지면서도, 충전해 놨던 소장권을 환불하고 싶어지는 주제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단 말이다.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면 여기서 겪은 일을 그대로 원고로 써서 코코아페이퍼에 런칭하겠다는 내 장대한 계획이…….’

    손발이 주르륵 흐르고, 눈물이 떨린다.

    현실이 소설처럼 녹녹치 않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이건 진짜 경우가 없는 거 아닌가?

    뭐 하나 쉽게쉽게 해결된 적이 없지 않나?

    만약 내가 겪은 일을 각색이나 편집 없이 있는 그대로 원고로 만들어서 런칭한다고 생각해 봐라!

    아아, 들린다.

    핸드폰 너머로 박태준 팀장의 빡친 목소리가 들려온다.

    ‘작가님, 이번엔 진짜 고소할게요. 손해배상청구 할게요. 정산서요? X질래요, 진짜? 아주 그냥 인생을 청산시켜버리고 싶네. 뭐요? 표지가 구려서 망했다고요? 그거 제 조카가 그림판으로 그린 건데 불만 있어요? 작가님 불만 있으면 조카한테 직접 전해줄까요? 다이 함 뜨실?’

    ‘……솔직히 팀장님 조카 사람 아니잖아요. 동물원에서 고릴라 한 마리 훔쳐와서 바리깡으로 털만 밀어놓은 것처럼 생겼더만.’

    ‘그 말도 그대로 전해줌. 작가님 이제 뒤졌음.’

    ‘팀장님 다 큰 어른이 초등학생 조카 빽 믿고 그러는 거 보기 흉합니다.’

    ‘쫄?’

    ‘유치하게 그러지 맙시다, 진짜.’

    ‘쫄??’

    아니, 생각하다 보니까 빡치네.

    어떻게 소설 표지 작업을 조카한테 외주를 줄 수 있지? 초등학생 조카가 그린 졸라맨은 너무하잖아…….

    그리고 박태준 팀장놈 조카를 실제로 본 적이 있었는데, 이미 초등학생의 골격이 아니었다. 도대체 집에서 애한테 뭘 먹이는지 상상도 안 될 정도다!

    초등학교 5학년생이 188센치에 105킬로라니 상상이 되나? 웹툰 작가가 꿈이라는데 내 생각엔 그놈은 주먹 쓰는 일이나 사람 뚝배기 깨는 일이 적성에 맞을 것 같다. 하기야 히틀러도 화가 지망생이었으니까.

    더 웃긴 얘기가 듣고 싶나?

    박태준 팀장의 조카 이름이 무려 ‘살’이다.

    이게 안 웃긴가? 안 웃겨!? 애 이름을 죽일 살이라고 지은 사이코 집안이다! 성까지 합쳐서 ‘박살’이란다. 정말 21세기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가정이 맞는지 의심이 될 정도로 환장할 일이다.

    아니, 아니아니 전작 표지와 팀장의 조카 얘기는 일단 접어두자. 애초에 요즘 애들은 졸라맨이 뭔지도 모른단 말이다.

    ‘박태준 넌 뒤졌어 진짜…… 내가 이 개고생하는 것도 다 그 자식 때문이잖아.’

    목표를 갱신시켜 두자.

    내 몸뚱이 하나만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둥지를 통째로 전이시킬 방법을 찾는 것이다.

    전이가 성공하는 날이 박태준 팀장의 제삿날이다. 아주 그냥 포스트 모더니즘 오버로드 한편 찍는다고 생각하는 게 좋을 것이다.

    ‘어쨌든 지금 당장은 이곳에 소환된 용사놈을 저지하는 게 우선이지.’

    사이다 한번 못 먹여주는 무능한 주인공이라 미안한데, 이건 진짜 어쩔 수 없다.

    지금 상황이 뭐 찬밥 더운밥이라던가, 사이다라던가 고구마 같은 걸 가리고 따질 처지가 아니었다.

    멍하니 아가리 벌리고 있다가 대인유탄 쑤셔 넣어지게 될 테니까!

    ‘챔피언들이 바하무트를 상대하는 동안 놈의 발을 묶어야만 한다. 내가 용사의 발을 묶고 있는 동안 바하무트가 도망치기 시작한다면 해피 엔딩이겠고.’

    바하무트가 도망치거나 죽기 전에 내가 먼저 당해버린다면 데드 엔딩일 뿐이다.

    ‘내가 박태준 그 새끼 아구창에 죽빵 쳐박기 전까진 절대 안 죽는다. 절대 못 죽지.’

    마음을 다잡으며 스칼렛이 붉은 점으로 표시해 놓은 균열 파장 쪽으로 내달렸다.

    그리고 높게 치솟은 언덕의 끄트머리에 도달하자, 드디어 메모리얼 전투에 돌입할 때 형성되는 포털의 빛이 보였다.

    이제 막 이쪽 세계선에 도착한 모양이다.

    ‘자, 어느 쪽일가. 백주월이냐 류시혁이냐.’

    어느 쪽이냐에 따라 대응 방법이 약간 달라질 수 있었다. 게다가 어느 시점의, 어느 세계선에서 왔는지도 중요하다.

    만약 내가 있던 세계선과 상당히 근접해 있는 곳이라면, 류시혁은 나를 이미 알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어…….”

    나도 모르게 그런 얼빠진 소리를 흘렸다.

    이미 내가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챘는지 시선이 내게 똑바로 날아오고 있었다.

    “뭐야, 저 꼬맹이는?”

    목소리의 주인은 백주월이었다.

    투박해 보이는 워커화에 한 사이즈 큰 후드집업을 대충 어깨에 걸친 복장. 손목과 손가락에 과할 만큼 치장된 은제 액세서리.

    성별이 분간되지 않을 만큼, 아니 그냥 성깔 더러운 여자애로 보일 만큼 예쁘장한 얼굴이라던가.

    내가 몇 번이고 묘사했던 왼쪽 눈 밑의 눈물점.

    백주월이 확실했다. 옷까지 벗겨보면 더욱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백주월은 등과 가슴, 그리고 어깨까지 복잡기괴한 문신을 새기고 있었으니까. 무슨 사탄 숭배자처럼 말이다.

    “이 일대는 마물의 영역이다. 인간이 있을 리 없으니, 저건 당연히 마물이겠지.”

    그리고 그 옆에 서있던 류시혁이 설명을 덧붙였다.

    저런 로맨스물 표지에 그려질 것 같이 완벽한 미남은 그리 흔치 않으니까. 류시혁이라는 사실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저 시가전 사양의 야전복과 글로레나 왕조의 문양이 새겨진 망토까지. 빼박 아닌가?

    “그래? 꼬맹이 잠깐 여기로 내려와 봐.”

    마치 백주월은 얘기라도 하려는 사람처럼 담배를 꼬나문 채 손짓을 했지만. 당연하다는 듯 반대편 손으로 권총을 한 자루 소환했다.

    아직 이쪽에 큰 흥미가 없다는 듯한 반응이다. 하지만 흥미의 여부는 백주월이 상대의 생사를 결정하는데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가 아니겠지.

    이대로 경계하지 않고 다가갔다간 미간에 총알 한 발 박아 넣고, 나머지 할 일을 하러 갈 것이다.

    미친 사이코패스 새끼의 행동 원리는 원래 그런 법이다.

    ‘아니 그보다 왜 둘이야? 둘이라고? 왜 저놈들이 사이좋게 메모리얼 전투에 참여하고 지랄이야…….’

    뇌간이 아찔했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다.

    염병, 한 놈도 빡센데 둘이 같이 덤비면 어찌 되겠나. 어찌 되긴…… 너비아니 피반죽이 되겠지.

    그렇다고 저 놈들을 이대로 놔둘 수도 없었다. 바로 바하무트와 내 챔피언들이 격돌하고 있는 장소를 찾아낼 테고, 아주 그냥 모조리 박살내 놓을 테니까!

    여기선 사나이답게 결단을 내려야 했다.

    ‘누자베스, 할 수 있다. 아자아자! 누자베스 화이팅!’

    이를 악 물며 각오를 다진 후.

    숨을 크게 내뱉으며 천천히 발을 내딛었다.

    * * *

    카앙!

    날붙이가 격돌하는 굉음과 함께 바하무트의 몸이 크게 밀려났다.

    흙먼지가 밤하늘에 뒤섞였고, 그 찰나의 순간 첨예한 어둠이 뿌연 흙먼지를 꿰뚫으며 거리를 좁혀왔다.

    눈을 의심할 수 밖에 없는 속도였다.

    마치 질량을 지니지 않는 물질이 점과 점 사이를 도약한 것처럼 보일 만큼 말이다.

    어둠은 궤적조차 남기지 않았다.

    만약 이 자리에서 맞서는 사내가 바하무트가 아니었다면, 1초도 채 되지 않아 온몸이 조각났을 것이다.

    윤왕 루아 카날다와 맞선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윤왕은 최초의 밤이 도래하기 이전부터 신과 동등한 힘을 지닌 영웅들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했던 존재다.

    고혈종에 속하는 스칼렛이나 바하무트 조차도 윤왕은 어디까지나 ‘전설’ 속에 존재하는 개념이었으니까.

    이렇게 직접적으로 맞붙어 볼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았다.

    “확실히 나쁘지 않군. 내 아우 녀석이 고전한 것도 이해가 돼.”

    오르키아나는 동맹을 배신한 루아 카날다를 추격했고, 추격전 끝에 세 번의 접전을 치뤘다.

    그 결과는?

    오르키아나의 3전 3패로 끝맺어졌다.

    루아 카날다의 그림자 군세는 성도의 은사자가 이끄는 동맹군을 세 번이나 연속으로 뒤로 물린 것이다.

    결국은 루아 카날다가 먼 극동의 섬으로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고, 오르키아나가 가혹한 질타와 혹평을 감수해야만 했다.

    하지만 바하무트의 앞에 나타난 루아 카날다는 쓴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주제 파악이 빠르군. 이런 조잡한 군대를 이끌고 베짱을 부린 건 높게 평가한다만. 슬슬 물러나야 할 때가 아니겠나?”

    가능하다면 이 자리에서 바하무트를 처치하고 그 보상을 받는 게 최선이었다.

    하지만 루아 카날다에겐 그다지 시간이 많지 않았다.

    지금도 누자베스가 소환된 용사 둘을 상대로 발버둥을 치고 있을 테니까.

    가능한 빨리 바하무트를 물리고 이번 메모리얼 전투를 끝맺어야 했다.

    “그래, 모두가 오르키아나의 자격을 의심하고 무책임한 비난을 토해냈지만.”

    바하무트는 저릿저릿한 팔목을 가볍게 풀어준 후 다시 자세를 잡았다. 윤왕 루아 카날다를 눈앞에 두고도 조금도 주눅이 든 모습이 아니었다.

    헬베르카의 마장이라는 평가와 칭호가 전혀 아깝지 않은 기세였다.

    “내 아우는 의미 없는 패주를 연거푸 마실 만큼 멍청하지도, 무능한 놈도 아니다. 녀석은 비루한 승리 조차 선별하여 가려낼 만큼 깐깐한 성격이니까.”

    “동맹의 배신자를 처단하는 일이 비루한 승리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싶은 것인가? 같은 핏줄이라고 너무 과대평가하는 모양이군.”

    “글세. 이미 죽어버렸으니 진실이 어땠는지 알 길이 없다만. 적어도 눈앞의 비루하고도 가시적인 승리보다 먼 미래를 위한 가치 있는 패배를 적립해 놨다고 생각하는데.”

    그저 직감이다.

    바하무트가 지닌 감은 때때로 소름이 돋을 만큼 정확했다. 논리적인 근거도, 현실적인 물증도 없지만 말이다.

    그리고 바하무트의 추론은 정확하게 지금의 상황에 들어맞고 있었다.

    루아 카날다가 어째서 이곳에서 싸우고 있는지. 그가 무엇을 위해 검을 들었는지를 고려하자면 말이다.

    “루아 카날다. 빚을 갚을 생각이군.”

    “헛소리를 주절거리며 시간을 벌 생각인가?”

    루아 카날다는 바하무트가 더 입을 놀리기 전에 끝장을 내려고 했지만.

    그보다 먼저 바하무트가 결론을 내렸다.

    그 예리한 눈빛이 무언가를 꿰뚫어 본 것이다.

    바하무트가 빙긋 웃어 보인 건 그 후였다.

    “아우님이 살아 있었군.”

    콰앙!

    바하무트와 루아 카날다가 격돌한 곳에서 5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폭음이 울렸고, 잿빛의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 폭연이 봉화처럼 위치를 알리고 있었다.

    “아즈마! 뒷일은 맡기겠다!”

    바하무트는 그렇게 짧게 외치고는 폭연이 피어오르고 있는 곳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밤의 성도를 손에 넣는 것보다 급하고 중요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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