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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짓는 플레이어-129화 (129/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129화

    붉은 달(4)

    도대체 누가?

    루아 카날다를 방해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스칼렛이 다급히 시선을 돌리자, 진흙탕 위를 나뒹굴고 있는 누자베스의 모습이 보였다.

    루아 카날다의 검을 막은 것까진 좋았지만, 그 충격에 지면을 데굴데굴 구르게 된 것이다.

    “어째서…….”

    누자베스가 어째서 자신을 살리기 위해 몸을 던졌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어떻게 이곳에 있는지도 이해가 안 됐다.

    진흙탕에서 가까스로 일어선 누자베스의 양팔은 이미 만신창이였다. 한 번 가볍게 휘두른 검격을 막아낸 것만으로도 피부가 찢어지고 그 사이로 파열된 근육이 튀어나올 정도였다.

    루아 카날다는 그런 누자베스를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였다. 설마하니 스칼렛을 구하기 위해 몸을 날릴 줄은 몰랐다는 듯이 말이다.

    스칼렛 역시 이 순간만큼은 루아 카날다와 같은 감상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누자베스가 자신을 감쌀 이유는 없었다.

    스칼렛은 누자베스의 목적을 방해하기 위해 가장 먼저 움직이지 않았나? 이번 메모리얼 전투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게 방해하려던 스칼렛을 지킬 이유 따윈 어디에도 없었다.

    게다가 상대는 윤왕 루아 카날다.

    아일라드의 피조물 따위가 나서서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단 말이다.

    실제로 루아 카날다가 가볍게 휘두른 검을 막아낸 것만으로도 양팔이 완전히 박살나지 않았나? 제필프의 유산을 장비하고 있지 않았다면, 그 검격을 막아내는 것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어째서냐고 생각하고 있겠지.”

    누자베스는 그런 스칼렛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입을 열었다.

    “하찮은 하이브 마인드 따위가 반 르낙시아의 존재를 막아설 수도 없을텐데 말이야.”

    적어도 무지에서 비롯된 만용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누자베스는 자신의 능력과 실력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지금 지키려고 하는 흡혈귀가 무슨 짓을 하려고 했는지도, 자신이 맞서려 하고 있는 존재가 얼마나 강대한지도.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을 것이다.

    진저리가 날 정도로, 스스로의 무력함에 도망치고 싶을 만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누자베스는 스칼렛과 루아 카날다의 앞에 이렇게 모습을 드러냈다. 이 모든 이유와 제약이 어떠한 의미도 지니지 못한다는 것처럼 말이다.

    “만약 이 선택이 만용과 오만의 결과로 남게 된다면, 그냥 관짝 하나 늘어나는 것뿐이야. 어렵게 생각할 건 없어, 스칼렛.”

    제필프의 최종선고는 빠르게 누자베스의 혈액을 흡수하며 파손된 신체와 의복을 재생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제복이 밤의 달빛에 감화되듯 붉은 빛을 띠기 시작했다. 메를로와 유대를 맺은 후 혈질이 변화한 것이다.

    “귀공이 이 늙은이를 구할 이유는 없네…….”

    스칼렛은 아연히 누자베스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지금이라도 당장 도망치라고 윽박지르고 싶을 만큼 가슴이 답답했다.

    먹먹한 감정이 시선을 흐렸다.

    누자베스를 당장 이 자리에서 밀쳐내고 싶었지만, 스칼렛은 도저히 움직일 수 없었다.

    적어도.

    그래, 적어도 말이다.

    아마도 이 순간만큼은.

    알량한 과거의 회한 따위로 밀어낼 수 있을 만큼 가벼워 보이지 않았으니까. 누자베스의 시선은 자신이 믿는 정답을 올곧게 향하고 있었다.

    “잘 봐라, 스칼렛. 이번에 너를 구하는 건 오르키아나가 아닐 테니까.”

    누자베스는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깊게 빨아들인 후, 천천히 하얀 연기를 토해내며 루아 카날다를 응시했다.

    “나는 오르키아나가 아니야.”

    하물며 바하무트도 아니었고, 헬베르카의 명맥을 잇는 적계조차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실패가 당연했던 무기력한 작가 한주호도 아니었다.

    누자베스가 물고 있던 담배의 끄트머리가 잿더미가 되어 툭 떨어졌고.

    “어차피 관짝에 들어갈 거면 명패에 박힐 이름 정도는 스스로 정해야지. 안 그러냐, 루칸다?”

    루아 카날다는 묵묵히 허리춤에 결속시켜 놓았던 검을 뽑아 들었다.

    “무엇으로 죽을지 정했다면 망설일 필요는 없겠군요.”

    루아 카날다는 누자베스를 향해 짐짓 위협하듯 험악한 어조로 말했다. 이번에야 말로 끝장을 내겠다는 듯 자신의 검을 뽑아든 것이다.

    그 순간 루아 카날다는 누자베스의 눈빛을 세심하게 살폈다. 일말의 공포나, 아주 약간의 망설임이 보인다면 주저 없이 베어버릴 생각이었다.

    그 생각만큼은 진심이었다.

    윤왕을 눈앞에 두고 침착할 수 있는 존재는 없을 것이다. 하물며 헬베르카의 마장 바하무트라도 말이다!

    루아 카날다는 바하무트의 눈빛에 깃들어 있던 동요의 감정을 분명히 보았다. 윤왕의 존재란 그 자체만으로도 본능적인 공포를 상기시킬 수 있었다.

    바하무트 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루칸다, 온전한 공멸과 불완전한 공존. 어느 쪽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냐?”

    루아 카날다는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금 누자베스가 제시한 선택지에 그 어떠한 의미도 없다는 사실을 금새 깨달았으니까.

    허세일까?

    마치 누자베스가 윤왕인 루아 카날다의 선택을 종용할 수 있다는 듯한 말투 아닌가?

    그 순간 루아 카날다의 시선이 지면을 타고 흐르고 있는 혈액 줄기로 향했다. 왼쪽에 뒤편에 쓰러진 카베르네와 오른편에 있는 스칼렛.

    그리고 메를로와 유대를 맺은 누자베스가 그 가운데에 위치해 있었다. 세 혈액은 완전한 동위성을 지니고 있었고, 불길한 붉은 빛을 내뿜으며 공명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누자베스는 헐떡이는 숨을 고르며 낡고 오래된 주문을 입에 담았다. 루아 카날다가 누자베스의 다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검신이 직접 닿지 않더라도, 방출된 흡수체에 의해 허벅지가 절단될 것이다.

    파아앗!

    하지만 이미 누자베스는 그 가능성을 염두에 뒀던 것처럼 침묵의 밤이 발동되고 있었다.

    메를로와 카베르네 자매의 혈액이 공명하며 그 위력을 한계치까지 증폭시킨 결과. 루아 카날다의 검격을 완전히 상쇄해낸 것이다.

    “그대들에게 유예를 허락할 선고인이 돌아왔음을 알리노라.”

    온몸을 불태우는 듯한 작열통이 덮쳐왔다. 주문을 내뱉을 때마다 끓는 기름을 삼키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마치 누자베스에게 그 선고를 담기엔 그릇이 부족하다고 경고하는 것처럼 말이다.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을 나뒹굴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의 극통이었다. 하지만 누자베스는 어금니를 꽉 물며 몸을 지탱했다.

    죽을지도 모른다.

    이번엔 진짜 죽을 수도 있다.

    아니, 확실하게 죽게 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이브 마인드라는 태생은 그 한계가 명확했다.

    상위 차원의 초월자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는 행위는 자살에 가까웠다. 윤왕들 조차 수만 번의 윤회를 거듭한 끝에 이뤄낸 위업을 흉내내려 하는 것이다.

    메를로와 카베르네의 위계를 빌렸다고 해도, 그릇이 버틸 수 있을 리 없었다.

    “아, 안 돼! 누자베스 그 이상 주문을 읊으면……!!”

    스칼렛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지금 누자베스가 하려는 짓이 무엇인지 이제야 이해한 것이다. 자신의 존재를 상위 차원의 초월자들. 즉 외신들에게 노출하려는 것이다.

    “……들어라.”

    검게 덩어리진 혈액이 입밖으로 토해졌다. 귀와 코, 눈에서도 검고 끈적한 핏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미 외신들이 자신들을 향한 부름을 듣고, 시선을 향한 것이다. 그 시선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육체가 붕괴하기 시작한 증거였다.

    누자베스는 고통에 몸부림치듯 가슴을 쥐어뜯으며 힘겹게 주문을 토해냈다.

    “밤의 은혜가…… 쿨럭! 허억, 헉…… 도래하기 이전부터, 존재했던…… 원초의 어둠을 이 혈액으로 증명하였다.”

    루아 카날다가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피자. 어느덧 흡혈귀들을 학살하고 있던 그림자 군세의 병사들이 움직임을 멈췄다.

    ‘세피로스, 맹약을 깰 생각인가? 세피로스가 아니라면…….’

    지금 누자베스를 바라보고 있는 외신이 누구인지 알 수는 없다. 지금까지 역사 속에서 간섭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던 외신은 세피로스와 크리스델 뿐이다.

    지금 이 주문으로 어떤 외신이 흥미를 갖게 됐는지 루아 카날다도 알 수 없었다.

    “미아 나크랏의 사생아들이여…… 유배지의…… 커헉! 불사자……들이여.”

    다시 시선을 누자베스에게 향하자.

    누자베스는 검은 피를 콸콸 쏟아내며 루아 카날다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그 눈빛은 ‘봐라, 내가 말한 대로였지?’라고 웃음을 머금은 것처럼 보였다.

    “……헬베르카의 부름에 응하여라.”

    “급조한 자격으로 외신의 간섭을 이끌어 낼 수 있을 리가!”

    카가가각!!

    루아 카날다의 외침 소리를 지우듯 거대한 균열음이 밤하늘의 중앙에서 울려 퍼졌다.

    루아 카날다와 스칼렛은 그 광경을 올려다 보며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균열과 함께 쏟아져 나온 어둠이 그림자의 군세를 뒤덮기 시작했다.

    기본 베이스는 누자베스가 본래 지니고 있던 스킬 ‘헬베르카의 부름’이다. 하지만 그 위력이 메를로와 카베르네 자매의 혈액을 통해 강화되었고, 외신의 간섭까지 이끌어낸 결과. 루아 카날다의 지배력을 일순간 초월한 것이다.

    어둠에 감화된 그림자의 군세는 누자베스와 루아 카날다가 서있는 곳으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어때, 루칸다? 이건 상상도 못했지?”

    누자베스가 클클 웃으며 비틀거리더니, 갑자기 휘청인 후 뒤로 넘어졌다. 누자베스의 몸이 지면에 쓰러지기 전에 루아 카날다가 먼저 다가가 누자베스의 몸을 가볍게 안아 들었다.

    “젠장, 너무 과했습니다.”

    어느 정도 자격을 증명해주길 바란 건 사실이지만, 이렇게까지 막 나갈 줄은 몰랐단 말이다.

    “나도 좀 과하다 싶었어. 빌어먹을, 이 개 같은 짓을 잘도 유지하고 있네. 우리 루칸다가 각하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대단한 녀석인가 보다.”

    그림자의 군세의 지배권이 10초도 채 되지 않아 루아 카날다에게 돌아왔다. 하지만 수 초 동안 누자베스가 윤왕 루아 카날다에게서 지배권을 빼앗았다는 사실은 명백했다.

    누자베스는 다시 몸을 일으키며 스칼렛의 앞으로 다가갔다.

    “스칼렛. 그…… 뭐냐, 내가 오르키아나가 아니라 미안한데. 젠장, 그래도 어쩌겠냐. 이미 유대 관계를 맺었는데 싫어도 참으며 살아야지, 안 그래?”

    “유대? 무슨 유대를 말하는 겐가? 설마, 유대 관계를……!?”

    스칼렛은 전에 보여준 적 없을 정도로 화들짝 놀랐다. 얼굴에는 당혹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

    “주군…… 아무리 과거의 시간선이라도 그 영향이 전혀 없다고 단언할 수 없지 않나? 아니, 진짜 유대를 맺은 겐가?”

    “그렇다니까! 이게 바로 그…… 쾌락 없는 책임이라는 것이지.”

    “맙소사.”

    스칼렛은 머리를 부여잡으며 멍하니 누자베스를 노려봤다. 그런 스칼렛을 바라보며 누자베스는 킬킬 웃었다.

    “그러니까 이 시간선에서 꽁하니 틀어박혀 있어봤자 소용없다는 말이다! 할 일이나 후딱 끝내고 돌아가자.”

    “이 늙은이는 주군을 배신했던 몸일세. 어디로 돌아가자는 말인가?”

    그 질문이 우스웠는지 누자베스는 빙긋 웃어 보이며, 스칼렛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당연히 우리 둥지지 어디겠냐.”

    “어린애 취급하지 말게!”

    스칼렛은 쌀쌀맞게 누자베스의 손을 쳐냈지만, 어딘지 모르게 안도한 기색이었다.

    누자베스는 얼굴에 묻은 핏물을 적당히 털어낸 후 담배를 입에 물었다.

    “어쨌거나 이러고 있을 여유가 없어. 지금 우리 로아가 바하무트 상대로 영혼의 딜교 중이거든.”

    이 시간선에서 남은 마지막 일을 정리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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