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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짓는 플레이어-128화 (128/210)

던전 짓는 플레이어 128화

붉은 달(3)

[누자베스 : 로아. 병력 생산이 완료되면 바로 동쪽으로 달려라. 바하무트의 별동대 놈들부터 막아 보자고.]

[로아 : 저택의 지하를 통째로 부화장으로 만들다니…… 이런 발상은 솔직히 놀랍습니다.]

[누자베스 : 덕분에 흡혈귀 놈들을 모조리 이쪽 병력으로 만들었잖냐.]

단순한 폭발로 흡혈귀 병대에 제대로 된 피해를 줄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부화장의 흡수 능력을 이용해본 것이다.

물론 이 능력은 일전에 스칼렛의 구울들로 먼저 시험해 봤다. 스칼렛의 능력으로 불사성을 한계치까지 상승시킨 구울 조차 상급 부화장의 떨어지면, 회복보다 흡수가 더 빠르게 진행되었다.

이번에도 통용될까 싶었는데 다행히도 흡혈귀 놈들도 별거 없었던 모양이다.

[샤도네이 : 저, 저기? 누자베스 님? 저기 진짜 대모님이 이쪽 맞는 거죠?]

[소비뇽 : 대모님이 두 분이나 계시다니, 솔직히 믿기 힘듭니다.]

[누자베스 : 거 그놈들 참…… 중국인 빤쓰를 뒤집어썼나, 사람 말 더럽게 못 믿네.]

덤으로 흡혈귀 병대를 이끌고 저택으로 쳐들어 왔던 샤도네이와 소비뇽까지 포섭했다.

당장 수중에 챔피언이 로아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급하게 야전 지휘자가 필요한 참이었다.

[누자베스 : 원래 이런 상황에선 잽싸게 눈치 살피면서 줄을 잘서야 돼. 너희들 잘 생각해 봐라? 지금 가짜한테 속아서 진짜 상속 신분한테 바득바득 개기다가 가짜가 사라지면 어쩌려고 그래?]

[샤도네이 : 사, 상상도 하기 싫을 만큼 끔찍해요…….]

[누자베스 : 그래! 짜식아 머리가 좀 돌아가네. 애초에 메를로가 뜬금없이 육체를 분리시켜 놓았다는 게 말이 되냐? 그럴 이유도 없었고 필요도 없었는데.]

[소비뇽 : 확실히 듣고 보니 그렇습니다.]

[누자베스 : 하여간 이놈들은 상속 신분 말이라면 뇌의 사고가 정지하는 게 종특이야, 아주.]

흡혈귀들은 상속 신분이 나타나 지구가 사각형이라고 말해도 의심 없이 믿을 놈들뿐이다.

스칼렛이 과거의 영적 위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덕분에 칼리아나 정원의 흡혈귀들을 포섭할 수 있었던 것이다.

상속 신분이라는 그 지위만으로도, 그 어떤 논리도 개연성도 필요 없었을 테니까.

게다가 진짜 메를로는 오르키아나가 소멸된 덕분에 멘탈 깨져서 저택에 틀어박힌 상태가 아니었던가?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테니 행동에 거침이 없었을 것이다.

[누자베스 : 어쨌든 로아는 크라울 비젠 부대를 이끌고 가서 바하무트의 발을 묶는다. 샤도네이와 소비뇽은 나하고 일 좀 하자.]

이 전장에서 하이브 마인드가 채택 가능한 수단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런고로 내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은 세균처럼 점점 가장자리를 감염시켜 나가는 것뿐이었다.

‘루아 카날다의 그림자 군세는 논외로 두고, 가장 덩치가 큰 먹잇감은 정해져 있지.’

칼리아나 정원의 흡혈귀들이다.

현재 스칼렛이 총지휘를 맡고 있는 그 병대를 야금야금 갉아 먹어가며 균형을 무너뜨리는 게 급선무였다.

[로아 : 각하, 바하무트와 별동대가 둘로 나뉘었습니다.]

[누자베스 : 재빠르게 노른자만 집어 먹고 싶었나 보네. 하기야 이 지옥 같은 전쟁터에서 오래 머물고 싶은 놈이 어디 있겠냐.]

나르시안의 직계손. 상속 신분의 흡혈귀와 3인의 윤왕 중 한 사람인 루아 카날다가 모습을 드러낸 전장이다.

아무리 바하무트라도 이런 격전지에 몸을 던지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을 것이다.

‘별동대는 바하무트의 뒤를 쫓는 놈들부터 블로킹하는 게 최선이겠지.’

스칼렛도 루칸다도 어부지리 엔딩은 원치 않을 테니까. 혹여나 바하무트의 동선을 파악하게 된다면 병력을 보내 노른자만 빼먹으려 한 얌체 놈을 조지는 게 수순 아니겠나?

[누자베스 : 로아, 바하무트는 헬베르카 본가 출신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놈이라던데. 얼마나 버틸 수 있겠냐?]

솔직히 이 명령은 부조리하기 그지 없다.

분가인 루스날 출신의 로아에게 바하무트를 1:1로 상대하며 발을 묶으라니.

바하무트가 헬베르카 본가 출신의 어중이떠중이라고 해도 승산이 희박하긴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건 마치 테르미어에게 제필프의 요새 공략을 맡긴 오르키아나 같은 짓이군.’

여기서 로아가 단호하게 거절해도 이상하진 않았다. 부조리한 명령에 목숨을 걸었던 테르미어의 말로가 어땠는지 잘 알고 있을 테니까.

게다가 그 명령의 저의가 무엇인지도 말이다.

‘내 경우엔 로아를 손절하려는 게 아니지만…….’

그렇게 오해를 사도 이상하지 않은 지시였다는 말이다.

하지만 내가 묻기가 무섭게 로아에게 대답이 돌아왔다.

[로아 : 각하께서 바라신다면.]

간결하고 망설임 따윈 없는 어조였다.

[로아 : 제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바하무트는 성도에 발을 들일 수 없을 것입니다.]

[누자베스 : 젠장, 백억점만점 짜리 대답이다. 각하가 원래 잘 우는 사람이 아닌데 오늘은 눈물이 날 것 같네.]

그 대답과 함께 크라울 비젠 부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로아가 바하무트의 발을 묶는 동안 이 전장을 완성시켜야만 했다.

* * *

의식이 몽롱했다.

스칼렛은 반쯤 잘려나간 목덜미를 꽉 쥐며 출혈을 막으려 했지만, 더 이상 육체가 회복되는 게 느껴지지 않았다.

혼령만 가까스로 회복한 상태에 불과했고, 나머지 육체는 빈껍데기나 다름없었다.

과거 불사의 군단을 이끌었던 적영귀의 전성기 때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힘에 불과했다.

소리가 멀게 느껴졌다.

눈앞에서 날붙이와 날붙이가 충돌하는 금속음도, 포탄의 폭음도, 병사들의 비명 소리도 멀리서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불완전한 윤회를 완성시킨 게 이 정도였단 말인가.’

스칼렛은 진흙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무수한 혈액으로 질척해진 대지 위에서 스칼렛은 사방을 둘러봤다.

이미 그림자의 군세가 완전한 포위진을 갖추고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외부의 간섭으로 윤회가 성립될 것이라고 상정하지 못한 탓이 컸군.’

게다가 그 불완전한 윤회도 도저히 무시할 수 있는 레벨이 아니었다.

유물을 모두 모으지 못한 상태에서 이뤄진 윤회였지만, 루아 카날다는 스칼렛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물론 완전한 육체와 혼령을 갖춘 상태였다면, 불완전한 윤회로 완성된 루아 카날다와 대등하게 맞설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스칼렛과 같은 상속 신분의 흡혈귀 카베르네까지 합세한 결과가 처참하게 도출되었다.

‘아니, 단순히 전력의 차이가 전부는 아니었다.’

스칼렛은 전투의 흐름을 다시금 곱씹었다. 뭔가를 놓치고 있었다.

차라리 어마어마한 태풍에 휩쓸린 것이라면, 그 이유를 쉽게 유추해 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전장의 균형을 빠르게 붕괴시킨 건 그런 어마어마한 힘이 아니었다.

“막아라, 놈들을 막아라! 대모님을 지키는…… 큿, 크아아악!”

우득!

젊은 흡혈귀 장교 하나가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게 목덜미를 붙잡힌 듯 공중에 붕 떴다.

흡혈귀 장교는 발을 바둥거리며 발악을 하던 중, 그의 목덜미를 붙잡은 무언가가 형태를 드러냈다.

검은 안개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것은.

달빛 없는 밤하늘만큼이나 어두운 머리카락을 지닌 청년이었다.

칠흑 같은 머리카락 사이로 붉은 두 눈이 번뜩이고 있었다.

“너무나 당연하고도 유감스러운 결과로군. 실제로 검을 맞댄 적은 없었기에 조금 기대했다만, 결국은 나르시안에 미치는 힘은 지니지 못했던 것인가. 청출어람도 참으로 개소리였어.”

루아 카날다였다.

스칼렛은 어금니를 꽉 물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화르륵!

루아 카날다가 붙잡고 있던 흡혈귀 장교의 몸이 검은 불꽃에 휩싸여 잿더미가 되었다. 루아 카날다는 궐련을 입에 물고, 살짝 고개를 들어 흩날리는 불씨에 담배불을 붙였다.

그리고는 무언가를 시선으로 쫓듯 먼 밤의 지평선을 훑었다.

“자, 원죄의 딸이여. 이것으로 위계의 상하 관계가 정립되었다. 밤의 어머니께 문안 인사를 먼저 부탁하겠네.”

“카학!”

우지끈!

자리에서 비틀거리며 일어나려 하는 스칼렛의 목을 짓밟으며, 루아 카날다가 검을 치켜들었다.

목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흡혈귀가 죽음에 이르기엔 부족했다.

루아 카날다는 자신의 검을 쓰는 것조차 아깝다는 듯 전장에서 주인을 잃은 검을 주워 든 것이다.

“아, 안 돼…… 언니, 언니…….”

머리의 절반이 날아간 카베르네가 필사적으로 바닥을 기어 오고는 있었지만, 루아 카날다를 저지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스칼렛은 달빛에 번뜩이는 칼끝을 멍하니 응시했다.

저것이 다가올 죽음이었다.

피할 수도 없고, 막을 수도 없는 데드 엔딩이었다.

‘이런 형태를 바라진 않았지만, 드디어 안식에 도달했군.’

스칼렛는 줄곧 죽음을 꿈꿔왔다.

그녀가 원죄의 아버지 나르시안의 자식으로 태어난 순간부터 말이다.

딱히 비관주의자처럼 굴고 싶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모든 관계와 과정이 피할 수 없는 죽음으로 귀결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부터, 눈에 보이는 풍경이 바뀌어 있었다.

어쩌면 나르시안의 자식들과 리케릴 성찬회의 학자들이 외신 ‘크리스델’을 숭배하며 영원불멸을 갈구하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결국은 초극 역시 영원한 존재가 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나르시안은 그 행위를 신앙으로부터 비롯된 통속적 금기에 대한 저항이며, 저항으로 이뤄지는 진정한 자기 극복이라 정의했지만.

불사의 군단을 이끌고 성도를 공격한 것도 단순한 자살 행위에 불과했다.

성도의 은사자 오르키아나라면 스칼렛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으리라 믿었으니까.

하지만 오르키아나는 불사의 군단을 제압하고, 스칼렛을 생포해 자신의 곁에 두는 쪽을 택했다.

그런 식으로 다른 방식의 삶을 서로를 향해 주절주절 떠드는 관계였다.

상대의 동의 없이 멋대로 길들이고, 동조 없이 길들여지는 관계였을 뿐이다.

‘최후의 형태가 죽음이라 할지라도, 그 이후 무엇을 남길 수 있는지가 중요하지 않겠어? 그 흔적을 위해 너와 내가 이 유구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삶을 영위하는 것일 테니까.’

스칼렛의 질의에 대해 오르키아나는 마지막 순간, 스스로의 최후로 대답을 대신했다.

은사자 오르키아나, 그의 삶이 무엇을 남겼는지. 그가 남긴 흔적이 무엇을 증명하려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언제나 해석은 남겨진 자들의 몫이었으니까.

‘그릇된 기억 탓에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군.’

스칼렛은 먼저 떠난 친우를 향해 사죄하듯 눈을 감았다. 루아 카날다는 폐기물을 처리하듯 검을 내려쳤다. 그 어떤 감정도 없이 무기질적인 동작이었다.

검의 칼날이 스칼렛의 머리를 반으로 양단하기 직전.

카앙!!

날붙이가 충돌하는 소리와 함께 스칼렛의 목을 짓밟고 있던 루아 카날다의 발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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