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짓는 플레이어-127화 (127/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127화

    붉은 달(2)

    붉은 달의 메를로.

    브루고뉴 지방에서 멀지 않은 북쪽 태생의 흡혈귀. 나르시안의 죄악 중 ‘허무’를 이어받은 아이.

    그 외견적 특징이 셋째 딸인 ‘카베르네’와 크게 다르지 않기에 동일한 현상으로 오해받을 때가 많았지만.

    카베르네의 근본이 되는 죄악은 ‘표상 숭배’였기에 그 근원이 명백히 달랐다.

    물론 카베르네로 오해받는 일이 많은 이유는 그 외에도 여럿 있었다. 대륙의 각지에서 굵직한 사고를 치고 다니며 문제아로 악명을 떨친 카베르네와 달리 메를로는 그다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흡혈귀였으니까.

    포옹을 통해 자식을 만들지도 않았기에 혈계를 지니는 일도 없었고, 헬베르카의 초대 당주 ‘세프네’의 합류 권유를 거절하며 은둔 생활을 지속했다고 알려졌지만 말이다.

    딱 한 번.

    메를로가 역사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있었다.

    “그런가…… 기억을 잃은 거구나. 그래서 자기가 오르키아나라는 자각이 없는 거였어. 아무리 머릿속을 읽으려 해도 해괴한 형상만 보이고. 특히 그 흑백의 그림이…….”

    “잠깐, 그 얘긴 이제 그만해. 15세 이용가 걸라고 항의 메일 오니까. 어쨌든 저기, 메를로? 그래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내가 오르키아나인 척 하면서 상황을 유리하게 굴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도저히 양심에 찔려서 거짓말을 못 하겠어.”

    “네가 오르키아나가 아니라 누자베스라는 아일라드의 피조물이라는 얘기?”

    “그래! 알아 들었네! 아까부터 계속 못 알아듣는 척 해서 어떻게 알기 쉽게 설명해야 할지 고심했잖아!”

    “그리고 그 전엔 다른 세계선에서 한주호라는 작가였고?”

    “너는 그 얘길 끝까지 안 믿었지만.”

    메를로는 의아하다는 듯 큼지막한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그 가정이 사실이라면. 오르키아나 너는 박리 차원으로 도약할 수 있는 능력을 얻었다는 말이잖아? 그 능력으로 미래의 나와 함께 이 차원으로 온 거고?”

    “역시 스칼렛, 아니 메를로 씨는 뭐든지 척척 알아들어서 설명하는 수고가 줄어듭니다.”

    누자베스의 입에서 ‘스칼렛’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오자. 메를로는 눈을 가늘게 뜨며 입꼬리를 치켜 올렸다.

    “왜?”

    “미래의 나는 네게 스스로를 스칼렛이라 소개했구나.”

    “어차피 메를로나 스칼렛이나 가명이잖아? 흡혈귀의 진명은 아무한테나 알려주는 게 아니라며.”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라. 스칼렛은 이쪽의 은어야.”

    “무슨 뜻인데?”

    메를로는 쿡쿡 웃으며 말했다.

    “축생들의 방식으로 비유하자면 스칼렛은 창부라는 의미인데.”

    “오우, 생각보다 화끈한 의미였네.”

    흡혈귀들 사이에선 무분별한 포옹을 통해 개체수를 늘리는 동포를 ‘스칼렛’이라는 멸칭으로 불렀다.

    지금까지 한 번도 자식을 만들지 않은 메를로의 가명으로 사용하기엔 아이러니한 칭호였다.

    “어쨌든 이야기를 들어보니 대략적인 흐름이 유추되네.”

    메를로는 대략적인 가닥을 잡은 듯 고개를 끄떡이며 설명을 시작했다.

    “아마도 미래의 나는 네게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숨기는 사실이 있겠네. 지금의 나도 충분히 추론해낼 수 있는 가능성의 이야기를 아직도 해주지 않은 걸 보면.”

    “그게 뭔데?”

    누자베스가 되물었지만, 메를로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누자베스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의자에 앉아 있던 누자베스의 무릎 위에 털썩 걸터 앉았다.

    “미래의 내가 말하지 않은 것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 지금의 내가 그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아무런 이유도 없이 오르키아나 너를 괴롭힐 리 없잖아.”

    “힌트. 힌트 줘라.”

    “이건 스무고개가 아니야, 오르키아나.”

    “젠장, 그럼 가슴이라도 만지게 해줘.”

    “……오르키아나는 화제 전환이 너무 빨라서 의식이 따라가기 힘드네.”

    메를로는 누자베스의 손을 붙잡아 천천히 자신의 목 쪽으로 끌어 당겼다. 누자베스의 손끝이 유려한 선을 그리고 있는 메를로의 쇄골에 닿았다.

    “오르키아나. 확증이 없는 상황에서 도대체 뭘 맹신하고 있는 거야? 스스로 박리 차원을 도약할 수 있으면서 시야가 너무 좁네.”

    “독자들이 단번에 알아먹을 수 있을 만큼 쉬운 힌트로 부탁드립니다.”

    “확실한 진짜는 아무것도 없어. 이미 차원 도약을 거듭하고 있잖아? 시간의 흐름도, 기억도, 종래의 상식도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해. 그렇다면 마땅히 도출되어야 할 의문이 있겠지.”

    메를로의 추론은 누자베스가 오르키아나와 동일한 존재라는 전제로부터 시작된다.

    “오르키아나 네가 한주호라는 인물로 실존했던 세계선도 박리 차원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잊지 마.”

    “잠깐, 그러면 마치…….”

    “네가 누자베스라는 아일라드의 피조물로써 존재하고 있는 세계선은 어떨까?”

    확실한 진짜는 아무것도 없다.

    어느 쪽이든 의심의 여지를 둬야만 한다.

    지금의 메를로가 누자베스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조언이었다.

    “결국은 스스로 증명할 뿐이야, 오르키아나. 너는 네가 마땅히 도달해야 할 형태로 진실을 결정하겠지.”

    메를로는 거기까지 말한 후 붙잡고 있던 누자베스의 손을 놓았다.

    누자베스가 슬그머니 손을 아래쪽을 옮기려 했지만, 메를로가 누자베스의 손을 손등으로 쳐내며 벌떡 일어났다.

    “초극에 실패한 여파였을까? 아니면…….”

    메를로는 베시시 웃었다.

    “아직도 초극의 시험이 진행 중인 걸까.”

    어느 쪽이든.

    이 세계선에 누자베스의 발이 묶이는 건 메를로가 바라는 일이 아니었다.

    누자베스와 만난 후 피폐해져 있던 정신이 조금씩 회복되었고, 이제는 어느 정도 이성적인 판단이 가능했다.

    이렇게 다시 재회하게 되어 솔직히 기쁜 마음이 앞섰지만, 이대로 누자베스를 잡아둘 수는 없었다.

    누자베스의 곁을 지키는 건 지금의 메를로의 몫이 아니었다. 지금의 메를로는 그저 누자베스가 멈춰 서지 않도록 등을 밀어주는 역할에 만족해야 했다.

    “오르키아나. 나는 그저 불안한 것뿐이야. 너무 오래 살아서 자신의 기억조차 신용하지 못하게 되었고, 과거를 투영한 이 차원에서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증거를 갈구하는 것뿐이겠지.”

    메를로는 창밖의 먼 풍경을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그녀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방향엔 밤의 성도의 바깥쪽. 칼리아나 정원이 위치한 곳이었다.

    “흡혈귀란 본래 시건방진 놈들뿐이라. 다루는 방법을 모르면 고생 좀 하겠어.”

    “그래? 흡혈귀 다루는 법 좀 전수해 주면 좋겠는데.”

    누자베스가 한숨과 함께 그렇게 말하자, 메를로는 쿡쿡 웃으며 창틀에 걸터앉았다.

    “전에 채웠던 목줄이 풀린 것 같은데, 다시 채워줄래?”

    “한창 날뛰는 중이라 상냥하게는 못 할 것 같은데.”

    “살짝 난폭한 편이 더 좋아.”

    “그런 취향이었을 줄이야. 미리 알려줬으면 좋았잖아?”

    누자베스는 킬킬 웃으며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벗어놨던 셔츠의 소매로 팔을 넣던 중, 어깨에 선명하게 남은 흡혈흔이 보였다.

    저택의 정문 앞으로 박쥐 떼가 몰려오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 * *

    루아 카날다는 전설과 신화 속의 존재.

    밤의 성도에서 멀지 않은 칼리아나 정원의 흡혈귀들에게도 구전되어 알려진 윤왕이다.

    하지만 고혈종에 속하는 흡혈귀들 조차 루아 카날다를 직접 목격하거나, 그가 모습을 드러낸 전장에서 싸운 경험을 지닌 흡혈귀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무수한 무용담을 남기고, 먼 극동의 섬으로 떠났다는 것이 루아 카날다에 관한 전설의 종막이었으니까.

    어째서 다시 이 밤의 성도에 모습을 드러낸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렇지만 한 가지 사실 만큼은 확실했다.

    루아 카날다의 전설은 전혀 과장되지 않았다는 사실뿐이다.

    쩌억!

    공간 그 자체가 부숴지는 굉음이 전장을 양단했다. 그 소리의 정체가 무엇인지 이해하기도 전에 참상이 벌어졌다.

    수백여 마리의 흡혈귀가 검은 연기로 변해 그 자리에서 증발했고, 어슴푸레한 밤하늘에 새빨간 절단선이 그어졌다.

    루아 카날다가 검을 한 번 휘두른 것만으로도 하늘과 땅이 갈라지며 수백의 흡혈귀가 소멸되는 것이다.

    물론 흡혈귀들은 짙은 불사성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런 불사성조차 루아 카날다의 앞에선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했다.

    회복할 새도 없이 증발하는데 불사성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저것이…… 윤왕…….”

    “반신의 영역에 발을 들이고 있는 존재라더니, 소름이 돋는군.”

    “이대로 가다간 전멸입니다!”

    혈계의 가주들은 루아 카날다의 모습을 목격하고는 새파랗게 질렸다.

    수만에 달하는 그림자의 군세도 위협적이었지만, 루아 카날다의 존재만으로도 승산은 밑바닥으로 곤두박질 치는 것만 같았다.

    칼리아나 정원에서 출전하여 성도를 향하던 스칼렛 군세는 가장 큰 난관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루아 카날다를 상대한다는 건 마치 밤하늘과 싸우는 것과 마찬가지다. 밤하늘과 싸워 이기라는 명령을 받아도, 어떻게 승리할지가 아니라 어떤 식으로 싸워야 하는 건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와…… 저게 윤왕이구나. 처음 봤어! 언니는?”

    “글쎄, 처음 봤다고 해야 할지 아니라고 해야 할지.”

    스칼렛은 자신의 옆에 다가온 카베르네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시선을 옮겼다.

    그 순간 스칼렛은 자신을 향하고 있는 살의를 느낄 수 있었다. 수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루아 카날다도 스칼렛을 응시하고 있었다.

    ‘끝까지 이쪽의 방해를 할 셈이로군.’

    스칼렛이 그렇게 생각한 순간.

    부웅!

    루아 카날다가 다시 한 번 검을 치켜들었다. 이번엔 공간을 횡단하듯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휘둘렀고, 방출된 흡수체가 수백 마리의 흡혈귀를 갈라내며 스칼렛 쪽으로 날아왔다.

    “아무리 반신의 존재라도 그런 적당한 공격은 조금 자존심 상하는데.”

    흡수체가 스칼렛을 덮치는 것보다 먼저 카베르네가 앞으로 나섰다.

    키이이잉!

    카베르네의 눈이 붉게 빛났고, 그와 동시에 루아 카날다의 검격이 허공에서 굉음을 내지르며 산산히 부숴졌다.

    카베르네의 전문 분야는 ‘공간’의 제어다.

    물리적인 에너지를 비롯해서 어지간한 상위 간섭까지 상쇄해 낼 수 있었다.

    “아차, 이쪽은 미처 못 봤어.”

    카베르네가 뒤늦게 오른쪽을 돌아보자, 근처에 서있던 흡혈귀 가주 둘이 상반신이 사라져 죽어 있었다.

    가주는 흡혈귀 병사들의 지휘를 위해 없어서는 안 될 존재들이다. 방금의 일격으로 가주를 둘이나 처리했으니 꽤나 쏠쏠한 수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스칼렛과 카베르네 자매는 허둥대는 기색이 없었다. 마치 이런 일의 수습 정도야 너무나 당연하게 해낼 수 있다는 듯 말이다.

    카베르네의 전문 영역이 공간이라면.

    스칼렛의 전문 영역은 관념이다.

    반신의 존재였던 나르시안의 피를 가장 짙게 이어받은 자매가 함께 나선 이상. 이 전장에서 통용되는 상식은 없었다.

    카베르네가 스칼렛의 앞으로 다가왔고, 스칼렛은 카베르네를 가볍게 안아 입을 맞췄다.

    붉은 입술이 포개졌고, 혈액이 뒤섞인 붉은 타액을 주고받은 후. 스칼렛은 루아 카날다 쪽을 바라보며 입술을 뗐다.

    혀끝과 혀끝 사이로 이어진 붉은 타액이 실처럼 끈적하게 늘어진 순간.

    쩌저저저적!!

    일대 수십 평방 킬로미터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분리되었다. 그리고는 마치 되감기를 하는 것처럼 모든 현상들이 거꾸로 흐르기 시작했다.

    루아 카날다의 검격에 의해 절단된 흡혈귀들도, 가주들도 모두가 거짓말처럼 되살아 난 후에야 시간의 역행이 멈췄다.

    그 기적을 증명하듯 지평선에 붉은 달이 반쯤 걸쳐져 그 거대한 자태를 드러냈다.

    공간을 분리시켜 시간을 되감는다니.

    정말이지 터무니없는 능력이었다.

    “그래, 해보자 이거지.”

    루아 카날다는 쓴웃음을 머금으며 진격 명령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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