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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짓는 플레이어-126화 (126/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126화

    붉은 달(1)

    “이런 미친 새끼가……!”

    샤도네이는 몸을 짓누르고 있던 석재벽을 내던지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저택을 가득 채울 만큼 폭약을 설치해 놨을 줄이야!

    당연한 얘기지만 이런 시가전에서 부비트랩의 가능성은 충분히 고려될 수 있었다.

    하지만 오르키아나의 저택은 밤의 성도 내에서 상당히 신성시되는 건축물이다.

    그런 역사적 가치가 있는 건축물에 폭약을 설치하고,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폭파시키다니.

    샤도네이는 누자베스에 대한 정보를 갱신시켰다. 아일라드의 하잘것없는 피조물이 아니라, 천박한 야만인이라고 말이다.

    “흡혈귀의 군대를 상대해 본 적이 없다고 광고를 하는 꼴이네.”

    하지만 샤도네이는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이런 폭발로 기선 제압을 했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평범한 병력이었다면 붕괴하는 건물의 잔해에 깔려 큰 피해를 입었겠지만, 샤도네이가 이끌고 있는 병사들은 모두가 흡혈귀다.

    불사성이 강화된 흡혈귀들은 건물의 잔해에 깔리는 정도로는 죽지 않는다.

    몇몇 불운한 흡혈귀 병사들만이 폭발에 직격으로 휩쓸려 전사하긴 했지만 그 피해는 미미한 수준이었다.

    “소비뇽! 부대를 재정렬시켜!”

    샤도네이는 신경질적으로 명령을 내리며 혀를 찼다. 누자베스의 다음 행동이 대충 예상이 되고 있었다.

    폭발로 기습한 후 메를로를 데리고 도망칠 생각이었을 것이다. 고작해야 아일라드의 조악한 피조물이다.

    3세대 흡혈귀에 속하는 샤도네이를 정면에서 상대할 수 없으리라는 심산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 잔재주로 발을 묶을 수 없어.”

    잔해에 깔린 병사들이 모두 빠져나오면 바로 추격을 개시할 생각이었다.

    먼저 탈출에 성공한 흡혈귀 병사들이 다른 병사들을 잔해 밑에서 꺼내기 위해 작업에 착수하고 있었다.

    “이렇게 발악했으니 곱게 죽을 생각은 없다는 뜻이겠지?”

    반드시 생포해서 묶어놓고 모조리 벗겨서 블러드돌로 만들 작정이었다. 샤도네이의 잔악함을 알고 있는 소비뇽은 그녀의 표독스러운 눈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으, 으아악!”

    “뭐야? 뭐야 이건?”

    “우, 우에웩……! 빌어먹을 놈들!”

    흡혈귀 병사들이 저마다 비명을 내지르며 잔해에서 슬금슬금 물러났다.

    그 행동을 이상하게 여긴 소비뇽이 다가가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소비뇽 님. 이, 이걸 보십시오…….”

    흡혈귀 병사가 보인 것은 잔해에 깔려 있던 다른 병사였다. 폭발에 휩쓸린 탓인지 몸의 절반이 사라져 있었다.

    허리 아래쪽이 완전히 사라져 반쪽이 된 상태. 인간이라면 즉사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부상이다.

    하지만 흡혈귀들에겐 그다지 대수롭지 않은 부상이다. 충분한 양의 혈액만 있다면 금세 재생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하체가 사라진 흡혈귀 병사는 도저히 재생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성수인가? 은의 파편을 쓴 폭탄이었나?”

    소비뇽은 숙련된 야전 부사관답게 재빠르게 가능성을 검토하며, 병사의 절단면을 살폈다.

    “……끔찍하군.”

    절단면이 빠른 속도로 분해되고 있었다. 분해되며 발생하는 열기에 의해 피거품이 부글부글 일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소비뇽?”

    “샤도네이. 탈출한 병사들을 이끌고 이곳을 이탈해야 합니다.”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다.

    하지만 소비뇽의 직감이 속삭이고 있었다. 이곳에 머물러 있는 건 위험하다.

    잔해에 깔린 병사들을 포기하고, 퇴각하여 다시 정비를 할 필요가 있었다.

    소비뇽은 그렇게 충고했지만, 샤도네이는 소비뇽을 매섭게 째려보며 말했다.

    “입 닥쳐, 소비뇽. 잔해에 깔린 병사들을 당장 다 꺼내. 정비하는 동안 놈이 멀리 도망치기라도 한다면 언니에게 혼나는 건 나니까.”

    “하지만!”

    타다다당!!

    소비뇽이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머스킷의 발포음이 일대를 크게 뒤흔들었다.

    “캬아악!”

    “크악!”

    치이익!

    머스킷 탄환이 몸에 박힌 흡혈귀들이 비명을 내지르며 주저앉았고, 몸에 뚫린 구멍에서 새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은탄……!!”

    샤도네이는 자신의 몸에 박혔던 탄환을 손톱으로 끄집어내 확인했다. 순도는 낮지만, 은이 함유된 탄환이었다.

    샤도네이나 소비뇽 정도의 고위급 흡혈귀에겐 거의 통하지 않을 정도였지만, 흡혈귀 병사들에겐 치명적일 수도 있었다.

    머리나 심장에 맞는다면 그대로 회복하지 못하고 죽을 수도 있었다. 그런 은탄이 일순간에 수백여 발이 발사된 것이다.

    마치 처음부터 이 상황을 가정하고 있었던 것처럼 정확한 화망 형성이었다.

    “개자식이…… 같잖은 짓거리를!!”

    샤도네이가 노성을 토해내며 자신의 오른손을 물어뜯었다.

    촤악!

    그러고는 팔을 휘둘러 지면에 자신의 피를 흩뿌렸다. 브루고뉴의 흡혈귀들이 곧잘 사용하는 고유 능력 ‘패러사이트 블러드’를 시전할 작정이었다.

    이 일대를 포위한 병력은 고작해야 한없이 영적 위계가 낮은 구울 머스킷티어 무리다.

    샤도네이의 혈액에 감염된다면 순식간에 제어권이 소멸할 것이다.

    흩뿌려진 샤도네이의 혈액이 일순간 빛을 발하며 증발되었고, 구울 머스킷티어들의 제어권을 빼앗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지만.

    “뭐, 뭐?”

    파아아앗!

    눈에 보이지 않는 충격파가 샤도네이의 혈액을 대기 중에서 지웠다.

    “얌전히 구덩이 속으로 기어들어 갔으면 좋았을 텐데. 뭘 또 바둥거리며 기어 나와서 일을 번잡하게 만드냐.”

    “너 이 새끼……!”

    샤도네이의 앞에 나타난 건 누자베스였다. 이미 승리를 확신했다는 듯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샤도네이의 스킬 ‘패러사이트 블러드’를 침묵의 밤으로 지워낸 것이다. 침묵의 밤은 백주월의 고유 능력까지 1회에 한하여 상쇄시킨 스킬이다.

    어떻게 보자면.

    누자베스에게 입장에서 보자면.

    그는 처음부터 류시혁이나 백주월에 저항하기 위해 계획된 성장을 거듭해 왔다.

    세계관 최강이자, 사기적이라는 수식어가 수천, 수만 번 덧붙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난적을 상정한 전쟁 군주다.

    그런 누자베스에게 시선에서 보자면 3세대 흡혈귀인 샤도네이는, 그저 보너스 게임에 불과했을 것이다.

    실제 전투 능력의 상하 관계에 상관없이 말이다. 누자베스는 이 자리에서 샤도네이에게 기세로 밀릴 만큼 평화롭게 자라난 하이브 마인드가 아니었다.

    “아일라드의 조악한 피조물 주제에!!”

    샤도네이가 레이피어를 뽑아 들며 누자베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고작해야 아일라드의 능력으로 빚어낸 하급 마물에 불과하다. 그런 하급 마물에게 3세대 흡혈귀인 자신이 당할 리 없다.

    하지만.

    카앙!

    거짓말처럼 누자베스는 샤도네이의 검격을 흘려냈다. 이 속도를 눈으로 쫓는 게 고작이라 예상했음에도 불구하고!

    “역시 스칼렛보다 정교함이 부족하네. 젊은 애라 기세는 좋지만.”

    그 순간 샤도네이는 누자베스의 붉은 안광을 목격했다. 그리고 그 눈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위계의 존재감.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설마 유대 상태?’

    그럴 리가 없다.

    외종의 유대 상태는 극히 드물게 일어나는 사고에 불과하다. 그것이 샤도네이가 지니고 있는 상식이었다.

    흡혈귀가 다른 누군가와 ‘유대 관계’를 맺는다는 건 가장 깊은 부분까지 허락한다는 의미였으니까.

    일반적으로 ‘포옹 행위’만 해도 그렇다.

    아무나 포옹하여 동족으로 만들고 다니는 흡혈귀는 가볍고 천박한 존재로 경멸을 받았다.

    그렇기에 흡혈귀는 자신의 존귀함을 지키기 위해 포옹 행위도 신중히 행해야 했다.

    그리고 ‘유대 관계’를 맺는다는 건 포옹보다 더 무거운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일생에 단 한 번, 진명을 알려줄 수 있을 만큼 친밀한 사이가 아니라면 유대 관계를 맺지 않는다.

    일반적인 경우 흡혈귀는 자신의 형제나 가족과 유대 관계를 맺는다.

    샤르도네와 샤도네이가 유대 관계이듯.

    상대를 자신과 완전한 동격이라 인정하는 행위란 말이다.

    흡혈귀가 다른 종의 마물과 유대를 맺는 일은 거의 없었다. 물론 윤왕이나 사룡족 정도쯤 되는 고위급의 마족이라면 극히 드문 확률로 흡혈귀와 유대를 맺을 수도 있겠지만.

    외종의 유대 자체는 흔히 있는 일이 아니란 말이다. 게다가 그 상대가 아일라드의 피조물?

    차라리 죽는 게 백 배는 나을 만큼 끔찍한 일이다.

    “어떤 정신 나간 놈이…….”

    샤도네이는 누자베스와 재빠르게 거리를 벌렸다.

    흡혈귀와 유대를 맺은 존재는 모든 능력을 공유하게 된다. 하지만 외종과 가벼이 유대를 맺을 정도라면, 필시 보잘것없는 흡혈귀일 것이다.

    샤도네이는 누자베스를 처리한 후 그와 유대를 맺은 흡혈귀까지 처단할 작정이었다.

    저런 조잡한 피조물과 유대를 맺는 흡혈귀는 혈족의 망신일 뿐이니까.

    다시 한번 샤도네이가 누자베스의 가슴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캉!

    이번엔 갑자기 나타난 방패에 가로막혔고, 이 기괴한 현상을 이해할 새도 없이 샤도네이가 측면으로 돌았다.

    끼릭!

    바로 누자베스가 발을 틀어 방향을 바꿨고, 붉은 안광이 궤적을 그리며 샤도네이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아무리 발버둥 쳐봤자 하위종. 위계의 상하 관계는 바뀌지 않아.’

    쿠구궁!!

    이번엔 지면에서 붉은 기둥이 솟구쳤다.

    방금 전 뿌려놨던 샤도네이의 혈액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혈액을 이용한 기술은 혈계의 자손들에겐 당연히 가능한 일이었다. 이렇게 극소량의 혈액으로 기둥을 솟구치게 하는 것 역시 말이다.

    “큿!”

    솟구친 피의 기둥이 누자베스의 복부를 꿰뚫을 뻔했지만, 간발의 차로 빗겨 나갔다. 그러나 완전히 피하지 못한 탓에 옆구리가 찢겨 나간 것이 보였다.

    “주제 파악을 시켜줄게. 너 같은 하위종이 흡혈귀에 대적한다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콰과과광!

    기세를 잡은 샤도네이는 이대로 누자베스를 몰아붙일 작정이었다.

    지면을 뚫고 수백여 개의 붉은 기둥이 길게 뻗어 나왔다. 솟아난 기둥들은 각자 의지를 지닌 것처럼 누자베스를 쫓기 시작했다.

    쾅, 쿠웅!

    누자베스가 필사적으로 내달리거나 구르며 도망치기 시작했지만, 체력이 고갈되는 건 시간 문제였다.

    얼마 버티지 못하고 샤도네이가 소환한 피의 기둥에 꿰뚫릴 순간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하하핫, 버러지처럼 도망쳐 다니는 건 일품이네. 네 목을 따버리고 저 냄새나는 구울들도 모조리 처리해야 되니까 어서 죽어주지 않을래?”

    아무리 유대를 통해 신체 능력을 강화시켰다고 해도, 그 태생은 아일라드가 만들어낸 하급 피조물이다.

    위대한 아버지 나르시안의 혈액을 짙게 이어받은 샤도네이의 상대가 될 리 없었다.

    게다가 아직 샤도네이는 자신의 능력의 1할도 채 발휘하지 않았다. 만약 이 공격에서 누자베스가 살아남는다 하더라도 사용 가능한 수단은 수십, 수백 개가 더 남아 있었다.

    휘익!

    쿠구궁!

    누자베스가 소환해낸 방패가 기둥을 필사적으로 막아냈지만, 사면에서 덮쳐 오는 공격을 전부 방어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일순간 누자베스가 회피 후 중심을 잡지 못하고 휘청였고.

    나뭇가지처럼 가늘은 피의 기둥이 측면에서 접근해 빠르게 궤도를 바꿨다.

    콰득!

    바로 눈앞이었다.

    눈앞에 나타나자 마자 방향을 틀어 누자베스의 왼쪽 눈을 꿰뚫었다.

    기둥은 그대로 눈을 뚫고, 뒤통수로 뻗어 나왔다. 누자베스는 꼬챙이에 꿰인 것처럼 그대로 축 늘어졌다.

    “잡종 주제에 번거롭게 하긴.”

    샤도네이는 시시하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저런 하위종을 상대로 싸워 이겨봤자 별다른 감흥도 없었다.

    샤도네이가 바로 남은 병력을 정리하려던 찰나. 머리를 꿰뚫린 누자베스의 몸이 움찔거리며 떨렸다.

    “……뭐야?”

    샤도네이의 시선이 잠시 누자베스를 향했고. 누자베스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돌아가거라, 죽음이여. 붉은 달의 밤엔 네 사냥감이 없음을 고하노라…….”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샤도네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누자베스를 바라봤다.

    “마, 말도 안…… 그런, 대모 님의…….”

    누자베스의 등 뒤로 거대한 붉은 달이 걸쳐져 있었다. 마치 지면에 닿을 듯한 적월.

    신의 영역에 한쪽 발을 걸치고 있는 반신의 기적이 이 자리에서 재현되고 있는 것이었다.

    일대 전체에서 ‘죽음’이란 관념을 지우는 신기였다. 그리고 저런 기적을 구현할 수 있는 존재는 그리 많지 않았다.

    누자베스가 누구와 유대를 맺었는지 확실해진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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