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짓는 플레이어 125화
성도 방위전(6)
“만약 이 자리에 내가 아니라, 오르키아나가 있었다면 더 능숙하게 문제를 해결했겠지.”
“꼬맹이, 이번엔 또 무슨 얘기를 하려고 그렇게 뜸을 들이는 건데?”
“아니 그냥 문해 풀이는 내 주특기가 아니란 말을 하고 싶었을 뿐이야.”
마인드 모드로 성도의 외곽 지역을 확인한 후 담배갑을 꺼내 들었다.
“이 녀석이고, 저 녀석이고. 모두가 내게 오르키아나 같은 모습과 성과를 기대하잖냐. 염병, 생각을 해봐라. 오르키아나는 반 르낙시아의 맹주였다면서? 그런 엄청난 놈하고 비교하면서 기대해봤자…… 내가 기대에 응할 수 있을 리가 있겠어?”
세바준은 드물게도 입을 다물며 진지하게 내 얘기를 듣기 시작했다.
“이번 성도 방위전도 오르키아나가 맡았다면 더 깔끔하지 않았겠냐?”
“그건 어떨지.”
“마족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동맹의 총지휘관이었다며. 이런 문해 따윈 변기에 앉아서 하품하며 풀었을 걸.”
“누자베스.”
세바준은 담배 연기의 너머에 서서 입을 열었다.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오르키아나는 완전무결한 존재가 아니야. 녀석도 실패하고, 패배를 경험하고, 뼈아픈 실책 뒤에 죄책감에 몸부림치던 밤도 있었겠지.”
오히려 같은 헬베르카의 혈족인 바하무트가 무결에 가까운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다른 이들의 기대에 부응할 필요는 없어. 누자베스, 너는 너의 방식으로 헬베르카의 존재 의의를 증명할 뿐이야.”
세바준의 은빛 머리카락이 담배 연기에 뒤섞여 하늘거렸다.
“죽어버린 오르키아나 따위와 감히 비견될 수 없는 구심점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해.”
담배를 붙잡고 있는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 그리고 해야만 하는 일과 실패해선 안 되는 일을 선별하여 머릿속에서 우선 순위를 나눴다.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자, 어느새 세바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 뒤진 자식의 부랄은 그만 어루만지라고 말해줄 차례겠지.”
담배의 끄트머리를 벽면에 문질러 불씨를 떨군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자베스 : 제군들, 오늘밤은 삼방의 난적이다. 녀석들에게 아릿카사를 상대한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똑똑히 알려줘라.]
전투모는 담배를 쥐고 있던 반대편 손에 들려 있었다. 가볍게 털어낸 후 머리에 푹 눌러썼다.
“나는 쐐기도 송곳도 아니다.”
바하무트나 윤왕 혹은 나르시안의 직계손의 시선에서 보자면 그럴 것이다.
하지만 나는 오르키아나처럼 적의 허를 찌르는 송곳일 필요가 없었다.
스스로를 납득시키듯 중얼거리며 복도를 걸었다. 전장이 점점 가까워졌다.
“하지만 진검 승부에서 잔가시 만큼 거슬리는 것도 없겠지.”
보잘 것 없는 잔가시가 흐름을 바꾸는 순간. 가치 있는 패배는 이쪽의 전리품이었다.
* * *
“다시 한 번 같은 전장에 서게 되어 영광입니다, 대모님.”
“메를로. 죄인의 구속 해제. 정당하지 못하다.”
“이 순간만을 기다렸습니다. 부름을 받은 순간부터 멸진의 각오로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위대하신 아버지의 유지를!”
“상속자여. 엘리시움의 급작스러운 해제에 관해 불만이 없는 건 아니지만, 날벌레들부터 정리하고 얘기를 나누도록 하지.”
스칼렛이 욕조에서 일어나자 시종들이 다가와 몸에 묻은 붉은 물기를 닦아냈다.
젖은 머리카락을 가다듬을 새도 없이 기다리고 있던 가주들이 입을 열었다.
그녀의 형제들이 첫 포옹으로 빚어낸 ‘최초’의 흡혈귀들. 2세대라고 불리는 이 흡혈귀들은 스스로를 귀족이라 칭하며 인간들처럼 가문을 만들어냈다.
순수한 흡혈귀인 스칼렛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러한 인간의 관습을 흉내내는 2세대들의 작태가 우스꽝스러웠지만.
적극적인 포옹을 통해 흡혈귀의 수세를 불린 이 가주들은 전쟁에서 써먹기 좋은 장기말들이었다.
스칼렛은 대충 알았다는 듯 가주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준 후.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던 샤르도네를 향해 말을 걸었다.
“성도의 상황은?”
“바하무트의 별동대와 루아 카날다의 군단이 동시에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윤왕이라. 슬레뷔네의 잔꾀로 빚어진 재활용품 주제에 분수에 걸맞지 않는 것을 갈구하는군.”
“대모님. 하지만 루아 카날다는 이미 생전에 반신의 경지에 도달한 인간이었습니다…… 윤회를 거듭한 지금은…….”
샤르도네의 입이 멈췄다.
스칼렛은 샤르도네를 향해 빙긋 웃어 보였다.
“함부로 입에 담아서는 말을 경솔하게 내뱉을 뻔 했군, 샤르도네. 앞으로는 조심하게.”
“죄송합니다, 대모님.”
하지만 스칼렛도 알고 있었다.
나르시안과 오르키아나가 초극에 실패한 이상. 현재 생존해 있는 마물 중 가장 초극에 가까운 존재는 루아 카날다였다.
조금 과장되게 말하자면 루아 카날다는 앞으로 두세 번 정도의 윤회를 거듭한다면, 초극에 비견되는 경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시종들이 스칼렛의 긴 머리카락을 빚는 동안 보고가 이어졌다.
“바하무트와 루아 카날다라. 나쁘지 않은 재활 치료가 되겠어.”
스칼렛의 외형은 2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여성의 형태였다.
그녀가 나르시안에게서 스텔라의 저주를 이어받아 괴물이 되어버린 것이 29살의 생일이었으니. 현재의 형태가 그녀의 원형에 가장 가까운 모습이었다.
비록 물질적인 육체는 손상된 상태라지만, 이곳 밤의 성도에 도착한 이후 손실되었던 혼령의 대부분이 회복되었다.
물리적인 전투 능력은 기대할 수 없지만, 흡혈귀로써의 능력을 100% 발휘할 수 있는 상태였다.
“아, 그리고 저택에 숨어든 녀석들은 어떻게 할까요?”
누자베스가 오르키아나의 저택을 점거하여 베이스로 삼고 있다는 사실은 샤르도네도 파악하고 있었다.
“그런 사소한 일까지 내게 물어봐야겠나?”
스칼렛은 누자베스를 ‘사소한 것’이라 일축하며 샤르도네를 핀잔했다.
샤르도네는 바로 고개를 숙였다.
“청소해 놓겠습니다.”
확실히 헬베르카의 적계나 윤왕에 비하자면 누자베스는 보잘 것 없는 문제였다.
“그럼 부지런히 움직이도록 하지. 윤왕 쪽은 내가 직접 맡겠네.”
그렇게 말하며 스칼렛이 커튼을 걷으며 창문 앞에 섰다. 성채의 외곽에서 짙은 어둠이 몰려오고 있었다.
그림자 시해자.
윤왕 루아 카날다의 군세였다.
* * *
“아아, 어째서 내가 이런 시시한 일을 맡아야 되는 건데? 나도 대모님하고 같은 전선에 나서고 싶었다고.”
길고 풍성한 백발의 여인.
샤도네이는 불평불만을 토해내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뒤편에 몰려온 박쥐 떼가 순식간에 모습을 바꾸며 수백 마리의 흡혈귀 병사들이 되었다.
한 마리, 한 마리가 짙은 불사성을 지닌 정예병. 이런 밤 시간대라면 어지간한 공격으로는 저지할 수 없었다.
게다가 혈액을 연소시켜 가속하는 기능을 지닌 대륙의 공학 무기로 무장하고 있다.
짙은 혈액 성분을 지닌 흡혈귀일 수록 검의 가속도는 비약적으로 증가한다.
그런 흡혈귀 병사가 400여 마리.
어지간한 연대 급의 병단도 상대할 수 있을 정도였다.
“샤도네이. 대모님의 아량으로 근신 처분이 풀린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라. 네놈이 발정난 개처럼 블러드돌을 잔뜩 만들지만 않았어도…….”
“알았어, 알았다고! 몇 번을 말하는 거야 진짜? 짜증나게. 그럼 이 저택을 점거하고 있는 녀석만 처리하면 그 후엔 마음대로 행동해도 되는 거지?”
“샤르도네에게서 별도의 지시가 없다면 말이다.”
“오케이, 그럼 후딱 잔챙이 해치우고 대모님이 계신 곳으로 가야겠네.”
샤도네이는 자신의 부관으로 따라온 소비뇽에게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이번에 샤르도네가 샤도네이에게 맡긴 임무는 간단했다. 오르키아나의 저택으로 향하여 그곳을 무단으로 점거하고 있는 녀석을 해치우고, 메를로의 신변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아? 대모님은 지금 칼리아나 정원에 계신다고 했잖아. 그런데 이 저택에 계신 대모님의 신변을 확보해?”
“정확히 말하자면 대모님의 분리된 육체다.”
샤도네이는 그제야 이해가 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런 얘기였구나. 그런데 왜 육체를 분리시켜 놨을까? 바다라도 건너실 생각이었나? 아니면 초극에 도전하거나…….”
“쓸데없는 추측은 됐다, 샤도네이. 맡은 일이나 끝내도록.”
“나한테 명령하지 마, 소비뇽. 나는 네 아랫것이 아니야.”
“나는 대모님의 명령이 제대로 이행되는지 감시하고 있는 것뿐이다.”
“딱딱하긴.”
샤도네이는 이런 시시한 작업은 후딱 끝마치고 전선으로 나서고 싶었다.
모처럼 흥분될 정도의 대규모 전투가 벌어지려 하고 있었으니까. 그 동안 주변 마을에서 인간 처녀를 잡아 블러드돌로 만드는 것 외엔 여흥 거리가 없었던 샤도네이에겐 좋은 자극제였다.
“뭐라고 했더라? 아일라드의 피조물이었지. 그 녀석 전부터 해괴한 것을 곧잘 만들었으니까. 하여간 기분 나쁜 놈이라니까.”
샤도네이는 자신이 상대하게 될 적에 대해 떠올리며 저택의 정문 안으로 발을 들였다.
분명 샤르도네에게 들은 정보로는 ‘하이브 마인드’라는 생소한 마물이었다.
하지만 큰 경각심은 없었다.
기껏해야 아일라드의 조잡한 피조물에 불과하다. 샤도네이 정도의 위계를 지닌 흡혈귀와 감히 비견될 규격이 아니었다.
“알아서 나타나 주지 않으려나? 괜히 숨어 있거나, 도망치려고 하다간 샤도네이가 많이 화가 나서 곱게는 안 죽여줄 텐데.”
샤도네이는 마치 이 저택에 숨어든 누군가에게 말을 걸듯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혹시 기습이라도 해보려고 하는 거라면 소용없어. 차라리 지금 바로 나타나면 먼저 한번 찌르게 해줄게.”
자기 스스로와 흡혈귀 병단의 불사성에 대한 확신이었다. 어둠 속에 숨어 있다가 기습을 해봤자 큰 효과를 볼 수 없었다.
“오, 진짜? 한번 찌르는 거 말고, 여러 번 찔렀다 뺏다 하는 건 안 될까?”
앳된 소년의 목소리가 널찍한 복도를 잔잔하게 울렸다. 웃음기 섞인 그 목소리는 분명히 샤도네이의 귓가에 들렸다.
샤도네이는 쿡쿡 웃으며 정면을 응시했다.
“당연히 되지. 그러니까 얼른 나올래? 이래보여도 꽤 튼튼한 몸뚱이라 한두 번 찌르는 걸로는 상처도 안 나.”
샤도네이가 그렇게 말하는 사이 복도의 끄트머리에서 누자베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짙은 잿빛의 제복.
기묘하게도 윤왕 제필프의 냄새가 나는 의복이었다.
그리고 그 냄새는 샤도네이를 불쾌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동시에 아주 약간의 경계심까지 말이다.
“뭘로 찌를 줄 알고 그렇게 자신만만한 거지?”
누자베스는 유쾌하게 웃으며 담배에 불을 붙였고, 불이 붙은 성냥을 그대로 난간 밖으로 내던졌다.
“폭발은 예술이야.”
뒤늦게 샤도네이의 시선이 추락하고 있는 성냥 쪽으로 향했다. 난간 아래쪽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하려던 찰나.
쿠우웅!
굉음과 함께 섬광이 저택 전체를 집어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