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짓는 플레이어 124화
성도 방위전(5)
“결론부터 말하자면 상흔이 없었다.”
얼얼한 뺨을 문지르며 로아에게 말했다.
로아는 내 뺨에 선명하게 새겨진 붉은 손자국을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동일한 개체가 아니거나, 혹은 상흔이 생기기 이전의 시간선으로 온 모양이군요.”
확증을 손에 넣지는 못했다.
확실한 퍼즐 조각을 하나 손에 넣을 수 있나 싶었는데 말이다.
얻은 것이라곤 강렬한 뺨따귀와 경멸하는 눈초리뿐이다.
일부 업계에선 포상 따위의 말은 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뺨따귀가 포상이면 팔콘 펀치도 포상이어야 하니까. 참으로 기괴한 시대다.
‘지금 이 저택에 있는 흡혈귀와 스칼렛이 동일한 개체라면. 이후 스칼렛이 취할 행동을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는데.’
스칼렛은 이번 메모리얼 전투에서 독단적으로 움직이기로 했다.
만약 스칼렛이 ‘붉은 달의 메를로’라면 어느 정도 행동 원리가 유추된다.
실패했던 과거를 고치고 싶어하는 건 만인 공통이니까.
오르키아나의 부재 상황. 성도를 떠맡게 된 메를로는 방위에 실패하게 된다.
바하무트의 공세 이후 남은 기록이 전혀 없었고, 바하무트에 의해 토벌되었다는 것이 세간의 일반적인 인식이지만.
“스칼렛이 메를로라고 가정하자면 말이야. 메를로는 성도 방위에는 실패하게 되지만 어찌어찌 죽지 않고 도망치는 데 성공하게 된다. 그리하여 초극에 도전하였지만, 실패한 후 모종의 이유로 아리카 섬에 잠들었다. 이런 흐름이 되는데.”
“연유를 추측하기 힘든 행동만 골라서 하는군요.”
로아가 피식 웃으며 말했고, 나 역시 그 말에 동감할 수밖에 없었다.
“헬베르카의 당주 오르키아나가 초극에 실패하는 걸 직접 목격한 흡혈귀입니다. 오르키아나조차 해내지 못한 일을 자신은 해낼 수 있으리라 과신할 만큼 메를로는 멍청하지 않았을 겁니다.”
“두 번째 이유로는 어째서 아리카 섬에 잠들었냐는 것이지. 이 성도에서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극동의 섬까지 올 이유가 있었을까?”
“게다가 흡혈귀는 자의로 바다를 건널 수 없습니다. 흡혈귀가 바다를 넘기 위해서는 타인의 손을 빌려야 하죠. 스스로 피와 살점과 뼈와 혼령을 나눌 필요가 있습니다.”
얄궂은 수수께끼 같았다.
오히려 메를로와 스칼렛이 동일 개체가 아니라고 추측하는 편이 더 개연성이 짙게 느껴지지 않나?
“흡혈귀의 파편은 아무나 옮길 수 있는 거야?”
“예, 일단 옮기는 것 자체는 누구나 가능합니다. 하지만 흡혈귀의 위계와 이동 거리에 따라 목적지까지 운반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기도 합니다.”
로아의 설명을 간략하게 정리하자면.
상속 신분 정도나 되는 흡혈귀의 파편은 소유자의 정신을 좀먹고, 결국은 광인이 되어 타락하게 된다고 한다.
짧은 거리를 잠깐 운반하는 것이라면 강한 정신력을 지닌 존재가 해낼 수 있겠지만, 이 밤의 성도에서 아리카 섬까지는 아무도 해내지 못할 것이다.
“로아. 역시 루칸다와 스칼렛을…….”
말을 하던 중 방문이 살짝 열려 있는 게 보였다.
시선을 향하자, 메를로가 문틈 사이로 이쪽을 빼꼼히 바라보고 있었다.
“메를로? 뭐야, 할 말이라도 있어?”
메를로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아, 아까는 미안해……. 깜짝 놀라서 나도 모르게…….”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나도 자고 있을 때 누군가 바지를 벗기려 하고 있다면, 주저 없이 죽빵을 박았을 테니까.
‘매직 어묵은 대구에 가서 먹어, 자식아!’라고 말이다.
메를로는 방안을 흘깃거리며 살피다가, 로아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고 보니 스칼렛과 로아는 사이가 좋지 않았지.
여기서도 메를로가 로아에게 적대적인 자세를 취한다면 증거 중 하나가 되지 않을까?
“루스날?”
메를로가 먼저 물었고, 로아는 사뭇 심기가 불편한 듯 찡그렸다.
“루스날이 이 저택에 있으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
가시 돋친 말투였지만, 메를로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루스날의 당주, 테르미어의 일은 유감이야. 앞으로도 테르미어만큼 용맹한 장군을 찾아보기 힘들겠지.”
로아는 이게 어찌 된 일이냐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아니, 나한테 물어봐도 모른단 말이다.
“루스날은 동맹의 큰 축을 맡고 있는 혈족이니, 이 저택에 머물 자격은 충분해. 머물면서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말해줘.”
그렇게 메를로가 문을 닫고 돌아간 후.
로아는 잠시 신음을 흘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는 이내 대답을 도출해 냈다.
“동일 개체가 아니라고 확신합니다.”
“결론이 너무 성급하잖아!”
어쨌거나 당장 해야 할 일은 메를로와 협력하여 성도의 방위전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 * *
마장 바하무트.
헬베르카 가문이 자랑하는 3대 명장.
은사자 오르키아나와 가장 가까운 계통 성질을 지니고 있던 덕분에 ‘묵과 은의 형제’라고 흔히 알려져 있었다.
실제로 오르키아나와 바하무트는 오랫동안 긴밀히 소통하며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오르키아나가 초극에 도전하여 스스로 목숨을 잃게 된 후, 동맹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고, 3인의 윤왕이 재빠르게 자신의 몫을 챙기는 것에 자극을 받은 ‘8의 기둥’은 자신들을 스스로 ‘마왕’이라 칭하며 대륙의 각지를 차지하게 된다.
그리고 바하무트는 3인의 윤왕과 8의 기둥과 대척점에 존재하는 세력이었다.
밤의 어머니 테네브레의 계시를 전하여 자연스럽게 동맹을 결성한 오르키아나와 달리. 바하무트는 무력으로 제압하여 힘으로 통솔해야 된다고 믿는 쪽이었지만 말이다.
맹주로서 정당성을 얻기 위해선 밤의 성도가 필요했다.
오르키아나의 사후 밤의 성도를 맡게 된 메를로를 몰아내는 작업은 필수불가결한 일이었다.
“군단은 흩어졌고, 밤의 성도를 맡게 된 메를로는 시체나 다름없는 상태입니다. 먼저 도착한 쪽이 손쉽게 먹을 수 있겠군요.”
“그런가?”
부관 아즈마는 말의 고삐를 가볍게 당기며 말했다.
바하무트는 허리춤에 걸치고 있던 검의 손잡이를 손끝으로 경쾌하게 두들기며 모노스코프를 꺼내 들었다.
“일이 쉽게 흘러갈 땐 언제나 예상치 못한 걸림돌을 생각해야지.”
“걸림돌이라.”
부관 아즈마는 실소를 흘리듯 피식 웃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아즈마의 오만과 자만심은 오롯이 바하무트에게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바하무트는 지금까지 패배를 경험한 적이 없는 장군이다.
곧잘 성도의 은사자와 비견되지만, 아즈마의 관점에서 보자면 애초에 오르키아나와 바하무트는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난해한 전장을 풀이하며 수없이 실패하고, 패배도 적지 않게 경험했던 오르키아나와 달리 바하무트는 무패의 전설을 계속해서 갱신했을 뿐이니까.
‘바하무트 님은 전쟁의 신이다. 바하무트 님께서 나선 전장에 패배 따위가 존재할 리 없지.’
그런 바하무트가 걸림돌이란 표현을 쓰다니. 그야말로 농담조차 될 수 없는 실언이다.
“아즈마. 나는 오르키아나 녀석과 달리 그다지 머리가 돌아가는 편이 아니라서.”
펼쳤던 모노스코프를 눈에서 떼며 바하무트가 말했다.
“그렇기에 비루한 승리와 가치 있는 패배를 선별할 수 없는 것뿐이다. 이번만큼은 가치 있는 승리를 손에 넣기 위해 신중해지고 싶다만.”
“바하무트 님의 그 겸손한 자세는 모두가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바하무트는 아즈마를 슥 바라보며 쓴웃음을 머금었다.
“혹여라도 메를로가 수성 태세를 갖춘다면 이 병력으로는 돌파가 힘들어지겠지. 아즈마, 샤르도네에게 별도의 보고는 없었나?”
“예, 어제부터 조용하군요. 하기야 이 성도의 주인인 메를로가 그 모양이니 특별한 일이 있을 것 같진 않습니다.”
메를로는 여전히 침묵 상태.
성도를 노리고 있는 제3의 세력도 보이지 않는다.
대놓고 차려진 밥상이란 말이다.
하지만 바하무트는 꺼림칙한 예감을 도저히 머릿속에서 지울 수 없었다.
“오르키아나를 잃은 슬픔을 나누는 동지에게 검을 겨눠야 하기 때문인가?”
“바하무트 님. 성도의 지배권을 온전히 인정받기 위해서는 흡혈귀를 살려둬서는 안 됩니다.”
“그건 나도 알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사내답지 못한 일이군. 그 녀석의 죽음에 오물을 끼얹는 느낌이라.”
바하무트가 성도를 차지하고, 동맹의 새로운 맹주로서 인정받는데 메를로는 불순물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메를로는 오르키아나의 죽음에 관여한 죄인이 되어야만 했고, 바하무트는 그 죄인을 처단한 영웅이 되어야만 했다.
바하무트는 얼음 조각 같은 턱선을 매만지며, 생각을 정리해 보려 했지만.
“하긴 고결하신 헬베르카 도련님에겐 어울리지 않는 일이군. 그런 더러운 짓거리는 전문가가 따로 있지 않겠나?”
어둠이 귓속으로 파고드는 듯한 소리였다.
온몸의 털이 모조리 곤두서는 감각이다. 아즈마는 잔뜩 경직되어서 허겁지겁 검을 뽑아 들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짙은 어둠의 악취.
태곳적부터 본능적으로 품고 있던 공포를 상기시키는 감각이었다.
“큭, 캬악!”
“끄윽! 끄르윽!”
아즈마가 뒤를 돌아보자 몇몇 병사들이 신음을 토해내며 지면을 나뒹굴고 있었다.
바하무트도 병사들의 이상을 확인하고는, 시큰둥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좀 놀라운데. 요즘 먼 동쪽에서 바쁘다는 소식은 들었다만.”
바하무트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응축된 어둠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윽고 어둠 속에서 윤왕 루아 카날다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모습에 아즈마를 비롯한 모든 병사가 얼어붙었다.
전설이나 신화 속에서나 등장하는 초월적 존재란 그런 것이다.
목격하거나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생체 기능이 오작동을 일으킬 정도였다.
이 자리에서 루아 카날다와 대등하게 눈을 마주칠 수 있는 존재는 바하무트뿐이었다.
“오랜만이군, 루아 카날다.”
“정답게 나눌 인사는 없으니 바로 본론을 말하지.”
루아 카날다의 뒤편으로 지평선을 길게 뒤덮고 있는 어둠이 보였다.
저것이 루아 카날다가 이끄는 ‘그림자 군세’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은사자 오르키아나조차 루아 카날다를 상대로 세 번 도전하여 모두 패배를 경험하지 않았나?
그림자 군세가 어느 정도의 위력을 지닌 병단인지 바하무트도 직감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루아 카날다는 바하무트와 밤의 성도 사이를 가로막는 위치에 섰다.
그리고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말하듯 툭 내뱉었다.
“붉은 달의 메를로는 이쪽의 사냥감이다. 물론 밤의 성도 역시 받아가도록 하지.”
밤의 성도를 노리는 제3의 세력이 나타난 것이다.
루아 카날다는 자신이 모든 것을 차지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루아 카날다. 혹시 협상이나 타협이란 말을 알까?”
바하무트는 루아 카날다의 안하무인 태도에 질렸다는 듯 쓴웃음을 머금었다.
루아 카날다도 웃음으로 화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알고말고. 아주 잘 알지. 협상이란 건 말이다.”
루아 카날다는 품속에서 담뱃잎을 꺼내 우적우적 씹으며 바하무트를 향해 말했다.
“꺼져, 목 따버리기 전에.”
바하무트가 만면에 미소를 머금었고, 날카로운 이빨이 달빛에 드러났다.
“밤의 성도에서 다시 마주치지 않길 바라지. 만약 다시 만난다면 그때는 사랑하는 동생 곁으로 보내 주마, 바하무트.”
루아 카날다는 자신이 할 말만 끝낸 후 바로 자취를 감췄다.
별동대의 병사들이 모조리 겁에 질린 것과 대조적으로, 바하무트만이 유쾌한 웃음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