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짓는 플레이어-123화 (123/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123화

    성도 방위전(4)

    덜컹!

    방의 문이 거칠게 열리며 누자베스가 그 안으로 발을 들였다. 닥치는대로 저택의 방을 뒤지며 오르키아나의 성물을 모으는 중이었다.

    방금 전 얻은 목걸이까지 포함해서 현재까지 손에 넣은 성물은 2개. 이제 마지막 하나만 더 찾아내면 부가 목표 중 하나를 달성하는 것이었다.

    ‘방위대 병력은 몰려오고 있고, 곧 있으면 바하무트와 녀석의 별동대까지 들이닥친다고 생각하니 심장 떨리네.’

    저택을 침입하고 지금까지 30여 분도 채 지나지 않았지만, 벌써 성물 2개를 손에 넣은 것이다. 꽤나 운이 좋았다.

    마지막 성물만 손에 넣으면 바로 병력을 움직여 바하무트의 별동대를 요격할 작정이었다.

    루칸다까지 연락두절이 된 것은 예상 밖의 일이지만, 메모리얼 전투가 개시된 이상 어떻게 해서든 목표를 달성할 수밖에 없었다.

    영원히 이 박리 차원에 갇힐 생각이 아니라면 말이다.

    ‘생각해 보니까 이거 존나게 위험한 작업이잖아?’

    누자베스는 문득 이 시간선 도약의 위험성을 떠올렸다.

    자신이 쓰던 소설에선 메모리얼 전투를 클리어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애초에 주인공 류시혁이 실패한다는 가능성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그렇기에 메모리얼 전투를 끝내는 별도의 방법을 마련해 두지 않았다. 목표만 달성하면 알아서 본래의 세계로 돌아가게 해놨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돌아갈 방법이 하나뿐이라는 사실은. 반대로 생각해서 그 하나뿐인 목표 달성이 불가능할 경우 돌아갈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만약 목표 달성에 실패한다면?

    그 경우도 어떤 일이 벌어질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슬슬 루칸다와 스칼렛도 움직이기 시작했겠지.’

    가능성은 검토해 둔 상태다.

    누자베스의 추론은 의식적이지 않게도 소설의 작법과 흡사했다.

    이야기를 쓰다가 막힐 때면 잠시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이 다음에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전개를 하나씩 떠올리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전개들을 하나씩 소거해 나가다 보면, 일어날 수밖에 없거나 일어날 확률이 높은 전개만 남게 된다.

    그 추론에 의거하자면, 루칸다와 스칼렛이 단독 행동을 벌일 것이라는 가능성 자체는 염두에 둬야만 했다.

    ‘줄곧 나이브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던 덕분에 활개를 칠 시기가 앞당겨진 것이겠지.’

    누자베스는 비책이나 계략에 관해선 하수 수준. 하지만 헬베르카의 특성은 짙게 드러나고 있었다.

    게다가 본래의 직업이 소설가였던 만큼 거짓말에 능숙할 수밖에 없다. 본래 소설가란 거짓말을 주절주절 늘어놓는 걸로 생계를 연명하는 인종이니 말이다.

    ‘이제 그만 퍼즐 조각을 완성시켜야지.’

    이번 메모리얼 전투에서 얻어야 할 것이 아직 하나 더 남아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다시금 떠올리며 누자베스가 방안을 둘러봤다. 꽤나 깊게 들어온 덕분인지 지금까지 뒤졌던 방보다 더 넓고 호화스러운 공간이었다.

    “도대체 무슨 짐승의 모피로 만든 거지? 구름 위를 걷는 것 같은데.”

    깜짝 놀랄 만큼 부드러운 카페트를 조심조심 밟으며 안을 살폈다. 서랍장이나 목함이 어디에 놓여 있나 찾아보던 중.

    부스럭.

    잡음이 들려왔고, 그와 거의 동시에 누자베스가 검을 뽑아 들었다.

    “…….”

    소리가 들려온 방향.

    조명이라던가 광원과 가장 멀찍이 떨어진 구석이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나무의 잔뿌리처럼 복잡한 문양이 양각으로 새겨진 관짝이 하나 놓여 있었다.

    ‘흡혈귀? 별로 달갑지 않은 상대인데.’

    하물며 오르키아나의 저택에 머물고 있는 흡혈귀라면 말이다. 어중이떠중이 같은 애송이 흡혈귀일 리가 없으니까.

    누자베스는 천천히 뒷걸음질을 치며 퇴로를 다시 확인했다.

    ‘그래, 그렇게 얌전히 잠이나 더 자고 있으라고. 이쪽은 바쁜 사람이니까.’

    흡혈귀 문제는 스칼렛 하나로 충분했다.

    여기서 또 다른 흡혈귀와 엮여서 혈투를 벌이는 것만큼은 피해야만 했다.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누자베스는 마른침을 삼켰다. 혹시 흡혈귀의 단잠을 방해한 것이라면? 녀석이 잔뜩 야마가 돌아서 관짝을 박차고 나와 달려든다면?

    그때는 이승에서 밥숟가락 놓을 각오를 해야될지도 모른다.

    [누자베스 : 로, 로아…… 내 위치 보이지? 혹시 연락 끊기면 내 시체 회수하러 와라.]

    [로아 : 죄송하지만, 지금 농담을 받아줄 만큼 한가하지…… 큭!]

    로아도 밀려드는 병력을 막아내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중이었다. 당장 달려와서 도와줄 증원도 기대하기 힘들었다.

    다시 한 걸음.

    최대한 소리를 죽인 채 문을 열고 복도를 내달려 도망칠 심산이었다.

    천천히 문고리를 향해 손을 뻗으려던 찰나.

    “오르키아나?”

    누자베스는 입을 꾹 다물며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되삼켰다! 분명 관짝 안에서 앳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루칸다에게 들은 흡혈귀 정보가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상위계의 흡혈귀일 수록 인간을 유혹해 혈액을 수급하지 않아도 됩니다. 외형이 어린 아이거나, 노인일 경우 최소한 엘더급의 흡혈귀입니다.’

    상위계의 흡혈귀!

    바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려던 순간이었다. 관짝이 열리며 다시금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르키아나……? 설마, 오르키아나야? 어, 어떻게…….”

    누자베스는 눈을 가늘게 뜨며 잠시 의식을 집중시켰다.

    ‘이 목소리 스칼렛 아냐?’

    상당히 비슷한 목소리였다.

    아니, 비슷한 정도가 아니라 본인 목소리 그대로다.

    잠시 관짝이 놓인 곳을 응시하자, 검붉은 머리카락의 소녀가 상체를 일으켜 누자베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을 보자 누자베스도 확신할 수 있었다.

    ‘스칼렛이네. 아, 저건 빼박 스칼렛이네.’

    하지만 이 시간대의 스칼렛은 누자베스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둘이 만나게 된 것은 한참 후의 일이니까.

    스칼렛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한참 누자베스를 바라봤다.

    “오르키아나 너 설마 바, 바깥 고리에서 살아 돌아온 거야? 어떻게? 설마 초극에 성공했어?”

    게다가 어째선지 누자베스를 ‘오르키아나’라고 부르고 있었다.

    “아니, 사람을 잘못 본…… 우왁!?”

    순식간이었다.

    사냥감을 포착한 맹수처럼 스칼렛이 누자베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들고 있던 검이 무색할 만큼 무방비하게 기습을 허락한 것이다.

    누자베스가 지면에 쓰러졌고, 그 위에 스칼렛이 걸터 앉은 모양새가 되었다.

    ‘하, 염병…… 이렇게 앗싸리 끝나는구만. 어차피 뒤질 거……!’

    최후를 각오하며 손을 뻗으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스칼렛이 거리를 좁혀와 누자베스를 와락 끌어안았다.

    “죽은 줄 알았잖아! 죽은 줄 알았다고……! 아니, 차라리 죽어! 그냥 죽어 이 멍청아!”

    스칼렛이 누자베스의 목덜미를 덥썩 물었다! 기껏해야 주먹으로 앙증맞게 토닥토닥 정도를 예상했지만, 이건 예상 이상으로 위험했다!

    “로아! 로아아아!! 각하, 죽는다아! 아파, 아파아파아파!”

    누자베스가 발버둥치는 동안 목덜미에 닿아 있던 송곳니의 감촉이 사라졌다.

    스칼렛은 깨물었던 곳에 입술을 댄 채로 누자베스를 꽈악 끌어 안았다.

    가녀린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어째서, 어째서 갑자기 그런 무모한 짓을 한 거야? 왜 나를 혼자 두고 멋대로 떠난 거야…….”

    스칼렛이 고개를 들자.

    커다란 눈망에 그렁그렁 맺힌 눈물이 뚝뚝 흘러 떨어졌다.

    누자베스도 어린애처럼 엉엉 우는 스칼렛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아연히 그 모습을 올려다 보고 있자, 스칼렛이 베시시 웃으며 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다행이다…… 살아 있어서 다행이야…….”

    그렇게 말하며 스칼렛은 누자베스의 손을 꽉 움켜 쥐었다.

    * * *

    “의도한 건 아니지만 이걸로 한숨 돌렸군.”

    “운이 좋았습니다.”

    스칼렛을 어찌어찌 설득하여 저택의 경비 태세를 해제한 후. 뒤늦게 로아와 합류할 수 있었다.

    로아는 복잡한 퍼즐을 마주한 것처럼 미간을 찌푸렸다.

    “그 흡혈귀가 각하께서 오르키아나라는 사실을 알고 있던 덕분이지만…….”

    그 말에는 어폐가 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스칼렛이 나를 ‘오르키아나’라고 오해해 준 덕분이다.

    나를 오르키아나라고 생각하는 건 로아와 이쪽 시간선의 스칼렛뿐이다.

    “스칼렛의 성격은 이쪽 시간선이 더 귀여운 것 같지 않냐? 도대체 저 귀여운 아이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상상도 하기 싫네. 아주 그냥 세월의 풍파를 직격으로 맞은 모양이야.”

    “……애초에 동일한 개체의 흡혈귀인지 의심스럽습니다.”

    목소리나 외견까지 판박이다.

    스칼렛이 아니라고 생각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닫혀 있는 문쪽을 슥 바라봤다.

    이 안쪽에는 스칼렛이 잠들어 있었다.

    한참 동안 엉엉 울다가 지쳐서 잠에 든 것이다.

    “로아. 오르키아나의 곁에 있던 흡혈귀가 누구라고 했지?”

    “붉은 달의 메를로입니다. 한때 불사의 군단을 이끌고 성도를 공략하려 했던 상속 신분의 흡혈귀죠.”

    “내가 찾아낸 저 흡혈귀는?”

    “아마도 각하께서 생각하시는 대로 붉은 달의 메를로일 겁니다.”

    “그럼 스칼렛의 정체가 메를로였다는 사실이 증명되는 거 아냐?”

    물론 ‘메를로’라는 이름은 흡혈귀의 진명은 아니다. 세간에서 흡혈귀를 구분하여 인지하기 위한 가명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스칼렛의 설명을 고스란히 옮겨 적자면 ‘흡혈귀가 주체로서 일으킨 현상의 카테고리’라는 모양이지만.

    그러니까 다른 시간대에 완전히 동떨어진 지역이라면 동일 개체의 흡혈귀라도 다른 이름의 카테고리로 분류될 확률이 있다는 말이다.

    내 덜떨어진 머리로 이해한 사실을 바탕으로 비유하자면 그렇다.

    ‘스즈키 사토루가 사실은 모몬이고, 모몬은 아인즈 울 고운이었다가 모몬가일 수도 있다는 것과 같은 이치지.’

    어쨌거나 지금 당장 중요한 문제는 이게 아니었다.

    “아, 맞아. 스칼렛은 가슴에 큰 상처가 있었어! 그걸 확인하면 바로 알 수 있겠네.”

    “그걸 어째서 알고 있으신 겁니까?”

    “……그냥, 어쩌다. 어쩌다 그렇게 됐어. 어쨌든 상처가 있으면 동일 개체라고 확정해도 되겠지?”

    “흡혈귀의 몸에 상흔이 남는 일은 드뭅니다. 온몸이 갈기갈기 찢겨도 거짓말처럼 회복하는 게 일반적인데…….”

    그러니까 더더욱 확실한 증거가 되는 것이다. 흡혈귀의 몸에 상흔이 남는 일이 좀처럼 없으니까!

    “로아, 여기서 기다려 봐. 바로 확인하고 올게. 스칼렛의 정체만 파악하고 작전을 세워 보자고.”

    “알겠습니다, 각하.”

    로아에게 그렇게 말해둔 후 바로 스칼렛이 잠들어 있는 방으로 들어왔다.

    아니, 스칼렛? 메를로라고 불러야 하나?

    아니아니, 지금은 메를로와 스칼렛이 동일한 흡혈귀인지 확인하는 작업이 먼저다.

    ‘가슴의 가운데에 열상의 흔적이 있었지.’

    바로 명치의 위쪽이다.

    상처의 위치를 다시금 떠올리며 호화로운 침대 쪽으로 다가갔다. 다행히도 관에 틀어박히지 않아 확인 작업이 손쉽게 가능했다.

    “…….”

    스칼렛이 잠들었는지 다시 확인한 후.

    조심조심 침대의 머리맡으로 다가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혹여라도 잠에서 깨기라도 한다면 이상한 오해를 살 수 있었으니까!

    말해두지만 결코 이상한 짓을 할 생각은 없다. 그냥 가슴을 보려고 이러는 거다. 아니, 이렇게 말하니까 이상하게 들리는데…… 그러니까 가슴을…… 아니, 아니아니 가슴의 상처를 보려고 그런 거니까 오해하지 말아줬으면 한다.

    “후우…….”

    평온한 표정으로 잠든 스칼렛의 얼굴을 보자니 괜히 더 손끝이 떨리기 시작했다.

    ‘누자베스 이 미친놈아! 이상한 생각 그만하고 후딱 상처나 확인하자.’

    당장 바하무트가 쳐들어오고 있는 이 시국에!

    스칼렛이 걸치고 있는 얇은 원피스를 살짝 내려 상처만 보고 방을 나오자. 그렇게 다짐하며 옷자락의 끄트머리에 살짝 손가락을 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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