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짓는 플레이어-122화 (122/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122화

    성도 방위전(3)

    “무슨 요술을 부렸는지 모르겠지만, 이곳에 도달하는 데 성공했네, 루아 카날다.”

    “확정된 결과였을 뿐이다. 선택과 결단으로 위장된, 지루한 기다림의 과정이었을 뿐이지.”

    루칸다는 경비병의 목에 꽂아 넣었던 검을 빼 들며 웃음을 흘렸다.

    이미 주변은 피바다가 되어 시체가 난잡하게 흐드러져 있었다. 밤의 성도 내에는 밤의 어머니 ‘테네브레’를 모시는 신전이 있었다.

    그리고 그 신전의 지하 깊숙한 곳에는 신관이 사용하는 비밀스러운 공간이 있었다.

    신전을 지키고 있던 경비병들은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루칸다를 막아낼 수 없었다.

    순식간에 지하 공간에 도착한 루칸다는 테네브레의 거대한 동상 앞에 멈춰 섰다.

    5각형의 지하 공간엔 각 벽면마다 상징성을 지닌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3인의 윤왕.

    리케릴 성찬회.

    나르시안의 직계손.

    8의 기둥.

    사룡족 벤테인.

    각각 동맹의 주축이 되고 있는 마족들의 문양이다.

    그리고 바닥에는 백색의 국화 문양.

    밤의 시종 헬베르카의 상징이 새겨져 있었고 말이다.

    루칸다는 국화의 꽃잎을 가볍게 지르밟으며 앞으로 나섰다.

    “피차 안부나 물을 만큼 한가하지 않을 것 같군. 중재자여, 맹약에 따라 그릇을 돌려받고 싶다만.”

    검은 로브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뒤집어 쓰고 있는 여성. 중재자 슬레뷔네는 루칸다를 바라보며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루아 카날다. 이 간섭은 외신의 힘을 빌린 결과잖아. 정당한 수단이었다고 말할 수 있어?”

    “수단과 과정 따위보다 명백한 결과로 정당한 요구를 하는 것이다. 슬레뷔네, 그 알량한 목숨을 부지하려면 서두르는 게 좋겠군.”

    “중재자를 협박할 셈이야? 이 밤의 성도에서?”

    루칸다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대로 슬레뷔네의 앞으로 바짝 다가가 머리채를 붙잡아 계단 밑으로 집어 던졌다.

    뼈가 부러지는 섬뜩한 소리가 울렸지만, 루칸다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단을 따라 내려가 슬레뷔네의 목덜미를 짓밟았다.

    “격조한 탓에 내 성격을 잊었나 보군.”

    그렇게 말하며 왼손으로 슬레뷔네의 손목을 붙잡았고, 반대편 손으로 단검을 뽑아 엄지를 잘라냈다.

    날카로운 비명이 지하의 공간을 울리며 하울링처럼 번져 나갔다.

    “어머니께서 지켜보는 앞에서…… 이런 짓을 벌인 걸…… 요, 용서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진 않겠지…….”

    “용서 따위를 바란 적이 있었나? 그딴 권리를 내가 일순간이라도 지니고 있었는지 의아스럽군.”

    루칸다는 끌끌 웃으며 슬레뷔네가 뒤집어쓰고 있던 로브의 후드를 거칠게 벗겨냈다.

    화상과 피부병으로 문드러진 얼굴이 그대로 드러났고, 루칸다는 슬레뷔네의 입안에 단검을 박아 넣었다.

    “중재자여. 주인을 잃은 밤의 성도는 늑대의 무리에 의해 갈기갈기 찢어질 것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 내 몸뚱이를 돌려준다면, 최소한 오늘 밤만큼은 목숨을 보장하지.”

    슬레뷔네에겐 선택지가 없었고.

    루칸다에겐 남은 시간이 없었다.

    ‘헬베르카 사냥은 신중하게 진행해야 하는 법이지.’

    루칸다는 처음부터 만전의 상태로 임할 각오였다.

    헬베르카를 집어삼키는 작업이다.

    과해서 나쁠 건 무엇 하나 없었다.

    '속임수는 본의가 아니다만.'

    이번엔 개인의 취향을 고려할 여유가 없을 만큼 진지해야 했다.

    좌측의 벽면.

    3인의 윤왕을 상징하는 문양이 붉게 물들었다. 두 마리의 뱀이 ‘람다’의 형태로 얽혀 있고, 나머지 한 마리의 뱀이 큰 원을 그리듯 테두리를 만든 모양새였다.

    “어머니께서 이 일을 기억하시겠지. 죽음 따위의 값싼 대가일 것이라 생각하지 마. 윤회의 권리를 박탈당하고, 영원한…… 카악!”

    루칸다가 슬레뷔네의 입을 단검으로 찢었고, 슬레뷔네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토해내며 대리석 바닥 위를 나뒹굴었다.

    “충고 고맙군. 내 소소한 보답으로 그 흉측한 얼굴을 조금 더 볼만하게 만들어 봤는데, 마음에 들었나?”

    이미 루칸다는 고블린의 모습이 아니었다. 185㎝는 훌쩍 넘을 듯 훤칠한 청년의 모습이었다.

    허리까지 닿을 만큼 긴 검은 머리카락.

    매섭게 깎아진 콧대와 턱선.

    붉은빛이 은은하게 서린 눈매.

    전설과 신화 속에 묘사되던 존재 ‘루아 카날다’의 외견이었다.

    그림자 시해자.

    왕을 잡아먹는 검은 짐승.

    스텔라의 저주를 받아 영원한 속죄의 순례길을 방황해야 하는 죄인.

    루칸다는 슬레뷔네의 입을 베어낸 단검을 내던지며, 돌아서서 입을 열었다.

    “이로 하여.”

    또각.

    가볍고 경쾌한 소리가 울렸지만, 루칸다의 발걸음을 어느 때보다 무거웠다.

    “그대들이 몰락할 때 비난을 짊어질 죄인이 돌아왔음을 알리노라.”

    루칸다는 낡고 오래된 주문처럼 자신의 재림을 이곳에서 선언하였다.

    “보아라.”

    천공에서 검은 액체처럼 응어리진 어둠이 쏟아져 내렸다.

    “최초의 밤이 도래하기 이전부터 존재했던 원초의 어둠을 이 그림자로 증명하였다.”

    쏟아진 어둠은 바닥에서 꿈틀거렸고, 그 안에서 칠흑처럼 새까만 이형의 존재들이 팔을 뻗어 모습을 드러냈다.

    지옥의 유황불조차 밝히지 못하는 밑바닥에서 기어 올라온 악마와 같은 형상이었다.

    “미아 나크랏의 사생아들이여, 유배지의 불사자들이여. 윤왕 루아 카날다의 부름에 응하여라.”

    고오오오.

    지면을 번져 나가는 그림자의 안쪽에서 흑철로 전신을 무장한 기사들이 기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하룻밤 사이에 바체트 제도를 집어삼켰던 그림자의 군세가 드디어 현세에 강림한 것이다.

    * * *

    "어라? 젠장, 루칸다가 갑자기 대답이 없는데? 스칼렛도 연락이 안 되고……."

    "각하! 뒤쪽에!"

    카앙!

    등뒤에서 내질러진 창날을 빗겨 쳐내며 누자베스가 재빠르게 카페트 위를 굴렀다.

    "미안하지만."

    멈춰 서는 것과 동시에 자세를 고쳐 잡았고, 주저 없이 방향을 바꿔 전방을 향해 도약했다.

    "뒤에서 찔러주는 플레이는 별로 안 좋아해."

    촤악!

    창을 쥐고 있던 병사의 목을 쳐내기까지 1초의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로아나 루칸다에 비하자면 어린애의 재롱에 불과한 전투 능력이지만. 전쟁 군주가 이 정도로 전장에서 싸울 수 있다는 건 기적 같은 일이었다.

    타고난 재능이나 능력은 평균 이하.

    아니, 오히려 바닥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하지만 축적된 난투 경험과 스칼렛의 꾸준한 검술 지도 덕분에 누자베스는 그럭저럭 자신의 몸 정도는 지킬 수 있게 된 것이다.

    '역시 각하께서는 이런 놈들 앞에서 진짜 실력을 드러낼 생각이 없는 건가.'

    로아의 시선에서 보자면 누자베스의 근접전은 엉망진창에 불과했다.

    기괴하고 난잡하게 팔과 다리를 휘두르는 게 전부였다. 정교함이 결여된 난동과 닮은 것이다.

    술에 잔뜩 취한 망나니가 뒷골목에서 다른 취객과 뒤엉켜 싸우는 것 같지 않나?

    일전에 로아를 상대할 때 보여줬던 그 정갈한 움직임의 흔적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설마.'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후.

    로아는 머릿속에 떠오른 불경한 의구심을 서둘러 지웠다.

    '그럴 리가 없어. 각하께서는 분명 오르키아나의 현신. 내 눈이 틀렸을 리가 없어.'

    만약 지금의 실력이 전부라면 이 메모리얼 전투에 참가한 것이 말이 안 된다.

    헬베르카의 마장 바하무트를 성도에서 내쫓는 일이 손쉽고 간단할 리 없었으니까.

    “크라울 비젠 부대에게 정문 수비를 지시하겠습니다!”

    로아는 의문보다 먼저 지금 해야 할 일을 상기시켰다.

    오르키아나의 저택을 지키고 있었던 것은 헬베르카의 사병들이었다.

    맹주의 죽음 이후 동맹의 일원들은 순식간에 뿔뿔이 흩어졌고, 반 르낙시아의 군대 역시 성도에서 철수한 후였다.

    만약 이 저택을 지키고 있던 병사들이 반 르낙시아의 정규군이었다면 누자베스에게 승산 따윈 없었다.

    오히려 저택에 발을 들인 순간 이렇다 할 저항도 하지 못하고 창에 꿰뚫렸을 것이다.

    헬베르카의 사병들도 훈련 수준이 낮은 건 아니었지만, 야간에 이뤄진 급습에 적지 않은 피해를 입게 되었다.

    게다가 누자베스의 ‘크라울 비젠’ 부대는 전쟁 수행용의 군부대다. 사유지를 지키고 있는 사병들보다 철저하게 무장하고 있었다.

    덕분에 누자베스와 로아는 저택의 안까지 무난하게 뚫고 들어오게 되었다.

    “이게 저택인지 축구장인지 모르겠네. 이렇게 넓은 곳에서 성물을 어떻게 찾아?”

    “각하, 서두르지 않으면 성도에 잔류한 방위 병력이 도착할 겁니다!”

    성도의 방위대는 저택 경비용 사병들에 비해 위협적일 것이다.

    게다가 머지 않아 바하무트도 성도에 도착할 예정. 누자베스에겐 그다지 시간이 많지 않았다.

    “제가 길목을 막겠습니다.”

    로아는 복도의 뒤편에서 몰려오고 있는 사병들을 향해 돌아서며 말했다.

    “오케이, 그레이브 야드 부대를 대로변에 깔아서 방위대의 발목을 붙잡아 놓자고.”

    누자베스는 전투모를 고쳐 쓰며 저택의 안쪽으로 내달렸다.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본 후 로아는 혼잣말처럼 작게 중얼거렸다.

    “결국 이런 식으로 증명되는군요. 윤왕도 흡혈귀도 각하의 아군이 아니었습니다.”

    밤의 성도에 도착한 직후.

    먹잇감을 발견한 짐승들처럼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급급했다.

    이 성도에서 무언가를 얻어갈 수 있는 건 누자베스뿐만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오히려 더 늦기 전에 썩은 가지를 쳐낼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된 것이다.

    * * *

    스칼렛은 생각했다.

    일종의 자문자답이다.

    어쩌면 합리화를 위한 변명 찾기라거나.

    아니라면 선문답을 흉내내려는 우자의 허식일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스칼렛은 다시금 생각한다.

    누자베스에겐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는 것일까?

    스칼렛은 기적처럼 과거에 머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메모리얼 전투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많은 기묘한 현상이다.

    하지만 스칼렛은 이전에 경험했던 메모리얼 전투의 기억으로부터 한 가지의 가능성을 도출해냈다.

    본래의 시간선으로 돌아갈 방법은 하나뿐이라는 사실이다.

    메모리얼 전투의 주체가 되는 ‘누자베스’에게 부여된 목적이 달성되어야만 이 박리 차원이 매듭지어지고, 원래의 시간선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반대로 생각하자면.

    그 목적이 달성되지 못한다면 돌아갈 방법이 전무하다는 것이다.

    “저택에 줄곧 틀어박혀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오랜만에 외출이시네요.”

    스칼렛의 뒤를 쫓아 걷던 고조 흡혈귀 ‘샤르도네’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샤르도네는 밤의 성도 엘리시움의 치정관이며 동시에 프리모겐의 직위를 지닌 흡혈귀였다. 흡혈귀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 정점의 지위에 오른 귀족이었지만.

    상속 신분인 스칼렛과의 상하 관계는 명백했다.

    “갑자기 이런 부탁을 해서 미안하게 됐네. 일전에 샤도네이의 처분은 취하해 둘 테니 너무 괘념치 말게.”

    “그 아이는 자업자득인걸요. 블러드돌로 만들어도 되는 가축의 수는 대모 님의 결정. 따르지 않은 샤도네이의 잘못이랍니다.”

    샤르도네는 쿡쿡 웃으며 스칼렛의 뒤를 바짝 쫓았다. 상속 신분의 곁에서 걸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자신이 특별한 존재가 된 것 같아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다.

    “일단 못난 여동생의 신변을 이쪽이 직접 맡도록 해주게. 그리고 동쪽 성채의 혈진을…….”

    “대모 님?”

    샤르도네는 의심 어린 눈초리로 스칼렛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스칼렛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샤르도네의 시선을 마주했다. 무언가 낌새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것일까?

    “성격이 많이 유해지셨네요.”

    “그런가…….”

    스칼렛은 속으로 크게 안도의 한숨을 토해냈다. 그런 스칼렛을 바라보며 샤르도네는 키득키득 웃으며 대답했다.

    “바로 카베르네 님의 구속을 해제해 놓겠습니다.”

    “아, 그리고 현시점부터 엘리시움의 유효 기한을 6시간으로 하겠네. 다른 혈족의 아이들을 설득해 줄 수 있겠나?”

    “대모 님의 전언이라면 제가 쩔쩔매며 설득할 필요는 없을걸요. 그냥 가서 통보할 뿐이죠.”

    샤르도네는 스칼렛의 명령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카베르네의 봉인 구속 해제.

    성채에 전개해 놓았던 혈진의 활성화.

    엘리시움의 기한 만료.

    “언제나 도움을 받는군. 고맙네, 샤르도네.”

    “대모 님의 의지라면 따를 뿐입니다. 위대하신 아버지의 뜻을 현세에서 대행하는 분이시여.”

    스칼렛이 벌이려는 짓은 간단하다.

    혈족의 총력전을 상정한 혈전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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