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짓는 플레이어-121화 (121/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121화

    성도 방위전(2)

    이번 메모리얼 전투의 인원 제한은 4명.

    덕분에 고민할 필요 없이 바로 엔트리 멤버가 결정되었다.

    ‘나를 포함해서 4명이니까.’

    루칸다와 비르겐슈타인 부대.

    스칼렛과 그레이브 야드 부대.

    로아와 크라울 비젠 부대.

    각 부대의 지휘자들과 직속 부대를 동원할 수 있었다.

    ‘비르겐슈타인 부대는 정예 고블린 살수가 12마리. 그레이브 야드 부대는 구울 머스킷티어가 1500여 마리 정도. 크라울 비젠 부대는 정예 하이오크 척탄병이 100여 마리.’

    대략적으로 1600마리의 병력을 이끌고 메모리얼 전투에 참가할 수 있는 것이다.

    많다면 많은 수준이지만, 이번 메모리얼 전투에서 마주해야 하는 적은 호락호락한 놈이 아니었다.

    “마장 바하무트. 헬베르카의 직계 중에서도 루스날에 가장 가까운 성질을 지닌 놈입니다. 가장 가까웠던 형제인 오르키아나가 메리브렌 분가와 흡사한 성질을 지닌 것과 상반되죠.”

    루칸다가 이번 전투의 메인 타깃인 바하무트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했다.

    바하무트와 오르키아나.

    묵과 은의 형제.

    헬베르카 가문이 배출해 낸 걸작이라는 점은 같지만, 추구하는 지향점이나 성질 자체는 상당 부분 상이했다.

    바하무트가 분가 루스날에 가깝다는 말은 즉. 성격이 흉폭하고 호전적이며 헬베르카 계열답지 않게 타고난 피지컬이 뛰어나다는 의미다.

    그에 반해 오르키아나는 분가 메리브렌에 가까운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거짓말에 능숙하며, 밑도 끝도 없는 탐욕을 품고 있는 짐승. 거기에 ‘마법’에 관한 소양도 지닌 것이다.

    아, 물론 오르키아나가 사용하는 마법은 세간에서 인식하고 있는 통상적인 마법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기본적으로 ‘마법’이란 밤의 어머니 테네브레의 허가 하에 발현되는 이형의 현상.

    반대로 태양의 여신 스텔라의 힘을 빌린다면 ‘기적’이라는 형태로 발현된다.

    하지만 테네브레도 스텔라도 아닌 외신의 힘을 빌려 마법을 구사하는 집단이 ‘리케릴 성찬회’다. 놈들은 외신 ‘크리스델’의 바깥 고리 간섭을 연구하여 마법의 형태로 구사하는 것이니까.

    그런 리케릴 성찬회와 마찬가지로 오르키아나 역시 외신인 ‘세피로스’의 바깥 고리 간섭의 영향을 의도적으로 조율할 수 있었다.

    “루스날이 흉폭하다는 말은 다 헛소문이야. 우리 로아 좀 봐라. 얼마나 귀여워? 젠장, 남동생만 아니었으면…….”

    “각하, 외람되지만 그 녀석은 성질 더럽기로는 바체트령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 겁니다.”

    루칸다는 로아의 따가운 눈총을 웃어 넘기며 이어 말했다.

    “어쨌거나 이번 메모리얼 전투는 이전처럼 간단하진 않을 겁니다. 센 엘티나 라인에서 썩은 고기나 쫓던 잡병들과 격이 다른 상대입니다.”

    확실히 이전 메모리얼 전투에서 상대했던 스컬지 부대와는 규격 자체가 다르다.

    바체트령이 아니라 월드 클래스급의 네임드 마족인 바하무트가 이번 상대란 말이다!

    그 바하무트를 퇴각시켜야 한다니 벌써부터 방광 수문 개방되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런 괴물 놈과 10미터 내에서 조우한다면, 바로 실금하며 기절할 자신이 있었다.

    실금뿐이겠나!

    아주 그냥 방분방뇨하며 파킨사 확정이다!

    아리카 섬을 통일시킨 누자베스 변경백의 마지막 유언이 ‘뎃, 데뎃! 데샤아악!’이라니 너무 꼴사나운 결말이다…….

    “염병, 메모리얼 전투 시작 전부터 위석이 쓰라리네.”

    “어디 아픈 거야? 괜찮아?”

    “아니, 그냥 말이 그렇다고. 아니아니, 진짜 배 아픈 거 아니니까 배 쓰다듬지 마.”

    이쪽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로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준 후 바로 다음 내용으로 화제를 옮겼다.

    “그래서 이번 메모리얼 전투의 경험자인 스칼렛 씨에게 정보 제공을 부탁하고 싶은데.”

    이전 메모리얼 전투에선 루칸다의 기억을 토대로 정보를 얻었다. 그러니 이번엔 스칼렛에게 과거 전투가 어떤 식으로 전개되었는지 물어보면 된다고 생각했다만.

    물론 스칼렛이 메를로라는 확증은 없었다. 루칸다도 내 말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주군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이 늙은이는 밤의 성도에 머문 적이 없네만.”

    스칼렛은 시치미를 떼듯 클클 웃으며 대답했고. 루칸다가 바로 질문을 던졌다.

    “각하, 혹시 이 흡혈귀가 메를로라고 생각하신 겁니까?”

    “응? 메를로 아니었어?”

    로아도 스칼렛을 완전히 메를로라고 생각했는지 살짝 놀란 기색이었다.

    스칼렛을 메를로라고 가정한 건 나와 로아. 루칸다는 이쪽과 다른 추론 결과를 지니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건 나르시안의 셋째 딸입니다. 적영귀 카베르네일 확률이 높습니다.”

    “아니, 그러면 포 힐케인 섬에서 얻은 정보가 말이 안 되잖아.”

    나와 로아 그리고 루칸다의 시선이 동시에 스칼렛을 향했다.

    스칼렛은 그 반응을 즐기는 것처럼 느긋하게 와인잔을 들며 입을 열었다.

    “바하무트의 병력은 1천 정도일세. 정예병으로 별동대를 조직해 하룻밤 사이에 성도를 점령하려 했다더군.”

    거기까지 말한 후 스칼렛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둘러야 할 이유가 있었을 게야. 사자가 떠난 자리를 냉큼 집어 삼키려 했던 늑대 무리에겐 그런 이유가 있었겠지.”

    찰나의 순간.

    스칼렛의 동공에 희미한 증오가 서려 있었다. 빛이 바랜 듯 풍화된 감정의 부스러기처럼 말이다.

    “주군, 이번 전투에선 독단적으로 움직이겠네. 허락을 구할 수 있겠나?”

    역시나 이쪽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스칼렛은 내게 무엇 하나 기대하고 있지 않는 것이다.

    스칼렛의 시선이 나를 향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나는 그저 스칼렛에게 실존하는 촉매일 뿐이다. 과거의 기억을 상기시키기 위해서 말이다.

    “주군이라고 부를 필요 있었냐?”

    담배를 입에 물며 어린애처럼 투정을 부리는 게 전부였다. 하기야 이런 꼴사나운 놈을 진심으로 좋아해 줄 상대가 어디 있겠나.

    스칼렛은 한숨을 내쉬며 쓴웃음을 머금었다.

    “귀공에겐 미안하다고 생각하고 있네.”

    기대하지도 않았고, 바라지도 않았던 대답이 돌아왔을 뿐이다.

    * * *

    “오히려 잘됐습니다, 각하. 그 흡혈귀가 드디어 본색을 드러낸 것뿐입니다. 메모리얼 전투만 끝나면 이번 기회에 퇴출시키는 게 어떠십니까?”

    “누자베스…… 나는 언제든 네 편이니까. 죽을 때까지 같이 있을 테니까 너무 풀 죽어있지 마…….”

    포털을 통해 메모리얼 전투에 돌입한 후.

    스칼렛은 그레이브 야드 부대를 이끌고 바로 이탈했다. 일단 그레이브 야드 부대는 우선적으로 내 지휘에 따르게 하겠다고 했지만.

    “위로는 필요 없어! 각하는 말이야. 존나게 프로 하이브 마인드다! 공사 구분이 아주 칼 같은 남자란 말이라고!”

    “그, 그럼 다행이지만.”

    멍 때리고 있을 틈은 없었다.

    메모리얼 전투에 돌입한 후 시간이 흐르고 있었으니까.

    지금 이러고 있는 순간에도 바하무트가 별동대를 이끌고 성벽을 향해 내달리고 있을 것이다.

    “여긴 대충 외성의 외곽쯤이겠군.”

    “바로 시야를 밝히겠습니다.”

    루칸다가 그렇게 말한 직후 모습을 감췄다. 이번에 함께 동원된 비르겐슈타인 부대의 고블린 살수들까지 함께 말이다.

    고블린 살수가 넓게 퍼져 지형을 탐색한 덕분에 마인드 모드로 일대를 빠르게 살필 수 있었다.

    [누자베스 : 몇 마리는 따로 빼서 바하무트의 진격 방향 확인을.]

    [루칸다 : 이미 성채의 바깥쪽으로 보내 놨습니다.]

    [누자베스 : 역시 각하가 입 아프게 말할 필요가 없구만. 그럼 오르키아나의 유물 수집을 우선적으로 진행하자. 녀석의 거처 탐색을…….]

    [루칸다 : 그쪽 역시 탐색을 진행 중입니다.]

    [누자베스 : 각하는 그냥 입 다물고 있어야겠다. 할 말이 없네 아주.]

    앞으로 루칸다처럼 유능한 챔피언을 10마리만 더 영입하면 둥지 운영도 한결 쉬워지겠지.

    밥 먹고 뒹굴거리기만 해도 둥지가 알아서 성장하는 기적을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각하.”

    “응?”

    단둘이 남게 되자 로아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걸어왔다.

    “역시 그 흡혈귀는 마음에 안 들지만. 둥지에서 퇴출시키는 건 안 됩니다.”

    이건 또 꽤나 예상도 못한 발언이다.

    애초에 스칼렛을 퇴출시킬 생각도 없었지만, 로아가 스칼렛을 챙겨주려는 모습을 보이다니?

    “하긴…… 둥지에 사내놈들만 있으면 홀애비 냄새날 거 아냐? 그치?”

    “아니, 그런 게 아닙니다.”

    로아는 주변을 곁눈질로 살핀 후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루칸다가 윤왕의 그릇일 확률이 높습니다.”

    “상상도 못한 정체라 내 양팔을 기괴한 방향으로 꺾어버리고 싶어지네…….”

    “농담이 아닙니다, 각하! 전에는 과대망상에 사로잡힌 고블린이라고 생각했지만…… 루아 카날다의 현신일지도 모른다는 증거가 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게 스칼렛을 퇴출시키면 안 되는 이유와 무슨 상관인데?”

    루칸다가 실은 윤왕 ‘루아 카날다’이며 윤회의 완성을 목전에 두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게 스칼렛을 퇴출시키면 안 되는 이유와 무슨 연관성이 있는지 바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윤왕 루아 카날다를 견제하기 위해선 영적 동위계의 존재가 필요합니다.”

    “즉, 윤왕 놈하고 균형을 맞추려면 나르시안의 직계 자손도 데리고 있어야 된다?”

    “예. 그리고 무엇보다…….”

    로아는 숨을 길게 내뱉으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림자의 군세가 노리는 건 언제나 밤의 어둠 속에서 흩어진 무리입니다. 지금은 충성을 다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뿔뿔이 흩어져 등을 보이는 순간 주저 없이 등을 찔러올 겁니다.”

    루아 카날다는 반 르낙시아 동맹의 품에서 조용히 힘을 기른 후 자신의 왕국을 건국하는데 성공했던 윤왕이다.

    이미 동맹을 배신한 전과도 있는 놈이란 소리다.

    “하지만 각하께서 제게 해주신 말씀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결국 윤왕도 흡혈귀도 신뢰하고 있지 않다고 말씀하셨죠.”

    그건 잔뜩 토라져 있던 로아를 어떻게든 풀어주려고 급하게 내뱉은 말이었다만.

    “각하. 로아는 무슨 일이 있어도 언제까지나 각하의 충복입니다. 각하께선 저만 믿고 의지해주시면 됩니다.”

    “당연하지, 짜식아! 우린 형제잖아, 형제!”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말이다.

    머릿속에서 세바준이 쓸데없는 소리를 주절주절 늘어놓고 있었다.

    ‘충의는 진짜. 호의도 진짜. 말하고 있는 사실들도 모두 진짜지만. 의도가 삐뚤어져 있군.’

    ‘지금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형제끼리 우애를 돈독히 하고 있는데 꼭 그런 쓸데없는 소리를 해야겠냐.’

    ‘꼬맹이. 루스날이 아무리 분가라도 헬베르카의 계열이라는 사실을 잊으면 곤란해. 헬베르카의 입을 통해 내뱉어지는 소리는 항상 일그러져 있으니까.’

    세바준은 로아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짓궂은 미소를 머금었다.

    ‘윤왕의 야심도 위험하고, 상속 신분의 기괴한 취미도 위험하지만. 이 삐뚤어진 집착도 간과해선 안 되겠지.’

    그렇게 말하며 세바준은 로아의 등뒤에 서서 어깨에 손을 올리고는 말했다.

    ‘오르키아나와 테르미어가 어떤 식으로 관계를 끝내게 됐는지 떠올려 봐. 거리 조절에 실패한 관계는 그렇게 끝나는 법이니까.’

    마치 오르키아나의 불합리한 명령이 무엇에 기인했는지 알고 있다는 듯한 말투다.

    쓸데없는 충고는 앞으로도 필요 없다고 말하려던 찰나.

    [루칸다 : 각하, 거처를 찾아냈습니다.]

    루칸다의 빠른 일처리 덕분에 바로 움직여야 할 시간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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