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짓는 플레이어 120화
성도 방위전(1)
본격적으로 전투에 나서기 전에 크라울 비젠 부대를 강화할 필요가 있었다.
“크라울 비젠 부대의 첫 실전 투입은 포 힐케인 섬이었지.”
“예, 각하. 이미 전력의 상하관계가 명백한 상황에서 운용 시의 변수를 확인하기 위한 검토 작업에 불과했지만요.”
로아는 크라울 비젠 부대의 작전보고서를 펼쳐 훑어보며 대답했다.
“정예 오크 척탄병은 공수 부대로써 썩 나쁘지 않은 병종입니다만. 조금 더 정교한 전투를 지향할 수 있는 병종이 바람직합니다.”
“흐음.”
크라울 비젠 부대의 핵심은 적진의 한복판을 급습하여 메인 타깃을 타격하는 것이다.
야간 전투 시에는 귀신처럼 갑자기 등장할 수 있는 만큼 허를 찌르기 적합했다.
“에르멜만 처리하면 무력화되는 기갑 부대라…….”
솔직히 이번에도 루칸다와 비르겐슈타인 부대가 한 건 해내길 기도하는 게 베스트일지도 모른다.
전쟁 군주로써 꽤 경험이 축적되었다고 생각한다만. 지금까지 겪어 온 전투들을 하나하나 돌이켜 보자면, 도출되는 결론은 하나뿐이다.
전략이나 전술 같은 건 염병 쓸모가 없다는 것이다!
아니, 이번엔 개소리도 아니고 궤변도 아니다. 이건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지론이었다.
비유하자면 그런 거다.
저명한 과학자들은 결국 유신론자가 된다는 말이 있지 않나?
그런 것처럼 하이브 마인드도 그냥 빌어먹을 유신론자가 되는 것뿐이다.
아무리 야마 짜내서 작전을 세워도, 운과 직감에 몸을 맡긴 채 전장에 나서는 놈에게 눈탱이 씨게 맞는 일도 있는 법이다.
전장이란 작은 혼돈 그 자체다.
인간의 수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변수와 변칙 요소 중에서 몇 할이나 인지한 채 작전을 세울 수 있을까?
아무리 노련하더라도, 지휘관은 언제나 전장의 1할도 채 이해하지 못한 채 전투에 나설 것이다.
솔직히 생각해 봐라.
포위섬멸진에 당한 마족 지휘자 놈도 솔직히 자기 부대가 패배할 줄 알았겠나? 어?
그런 전법에 지는 날도 있는 것이다!
생각할수록 X신 같네 진짜.
어떻게 정예 마족병 5000마리가 오합지졸 300명한테 포위당해서 괴멸당할 수 있지?
그런데 이게 현실이다!
성격 파탄난 주사위의 신이 변덕 좀 부리면 포위섬멸진 전개도 충분히 가능하단 말이다.
결론이다.
나 누자베스는 오늘부터 기도 메타에 집중하기로 했다. 어차피 뭘 해도 옥냥이가 먼저 했다고 욕먹을 바엔 기도 메타나 할 생각이다.
괜히 머리 쥐어짜내서 전략을 짜는 척을 하면 어떻게 되겠나? 나중에 이 이야기를 원고로 써서 출판하면?
“젠장, 옥냥이나 단탈리안 열화판 파쿠리 소리나 듣겠지. 그렇지 않냐, 코틀러?”
“키륵? 흐끄윽?”
“어허, 코틀러 안 돼. 어허, 못된 말 안 돼. 명대사 표절하고 그러지 마라.”
“키륵! 던전 경영물은 표절이 국룰 아닌지?”
“어허! 각하는 패러디인 척하면서 표절하는 스타일이라 그런 말 하면 못써요!”
“키륵키륵! 손으로 직접 타이핑해서 쓴 표절 대사를 보면 표절작이라도 작가 입장에선 감사할 것.”
“그럼 각하도 단탈리안 명대사 표절해도 돼?”
“키륵! 국룰이라 괜찮다!”
“크흠! 역시 명대사라면 그거지.”
헛기침을 해서 목을 풀어준 후 코틀러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꺼져 빙딱 새꺄! 작업이나 하러 가!”
“흐끄윽!”
코틀러가 엉덩이를 부여잡은 채 토굴 작업장으로 돌아갔다.
바로 어제 13차폐구의 전쟁 군주들의 승인을 받아 차폐구의 동쪽 지역에 간이 둥지 건설에 착수한 참이었다.
오늘 잠깐 건설 현황을 확인하러 챔피언들을 대동하여 잠깐 얼굴을 비친 것이고 말이다.
루칸다와 스칼렛은 이제 익숙하다는 듯 내가 코틀러와 농담 따먹기를 하는 걸 무기질적인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왜 뭐가 문젠데?”
“아무것도 아닙니다, 각하.”
“주군은 질리지도 않는군.”
자꾸 그런 식으로 핀잔을 주면 주눅이 들지 않겠나. 이건 내 나름대로의 긴장 해소법이란 말이다.
로아는 루칸다와 스칼렛이 서있는 곳의 반대 방향에서 우물쭈물거리고 있었다.
‘얘는 또 왜 이래?’
로아는 뭔가 말하고 싶은지 입술을 오물거리더니 기어들어가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이봐…… 친구…… 로커를 잘못 찾은 거 같은데, 가죽 클럽은 두 블럭 아래라구…….”
“엉?”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각하!”
로아는 자기가 말해놓고 부끄러운지 고개를 홱 돌렸다. 귀가 새빨갛게 물들 만큼 부끄러운 건가? 아니, 그보다 가치무치 드립은 누구한테 배운 거야?
스칼렛과 루칸다는 입을 반쯤 벌린 채 멍하니 로아의 이상 행동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만 봐! 우리 로아 그만 쳐다보라고! 구경났냐, 내 동생이 구경거리야? 어? 가서 브리핑 준비나 해!”
부끄러워서 죽으려고 하는 로아를 최대한 감싸며 둘을 향해 손을 휘저었다.
스칼렛과 루칸다는 각자 한 마디씩 꿍얼거리며 먼저 자리를 떴고, 로아의 얼굴을 살피며 입을 열었다.
“그, 뭐냐…… 드립이 너무 훅 들어와서 각하가 미처 반응을 못 했네……. 그래서 그 로커룸 드립은 누구한테 왜 배운 거야?”
“저번에 코탈린한테…… 각하께서 이런 농담을 좋아하시는 것 같아서 배웠습니다.”
눈이 질끈 감겼다.
역시 코볼트 놈들이었나.
물론 이건 매우 대중적이고 메이저한 드립인 덕분에 대다수가 이해할 수 있는 무난한 흐름이 보장되어 있다.
간략히 ‘훡유’라고 받아치는 게 정석적인 주고받기 아닌가?
“훠…… 훡…… 아, 안 돼! 못 하겠다 젠장! 브라더 훡커가 될 순 없어!”
다른 놈들이라면 가능하겠지만, 로아는 진심으로 위험하다. 지금 이 부끄러워하는 모습까지 내 스트라이크 존의 테두리에 아슬아슬하게 들어오고 있었다!
조금만 방심해서 이성의 끈을 놓치는 순간이 끝이다!
‘지자스 크라이스트……! 남동생만, 남동생만 아니었다면……!!’
좋아, 누자베스.
진정하자. 진정. 밀리아의 거대한 가슴이라도 상상하며 의식을 전환시키자.
“괜찮아, 괜찮아. 내가 이럴 줄 알고 성별반전비약도 설정에 넣어 놨어.”
애초에 성별이 없는 헬베르카의 외견에도 영향을 미칠지는 미지수이지만 말이다.
“일단은 하려던 거나 마저 하러 가자.”
두 번째 메모리얼 전투의 시간이 돌아왔다. 슬슬 수수께끼를 풀어야 할 때였다.
* * *
메모리얼 전투!
그거슨 내가 주인공 류시혁에게 각종 아이템과 아티팩트를 마구잡이로 퍼주기 위해 만든 작가편의적 설정!
리스크는 거의 없는 것이나 다름없고, 그에 비해 얻을 수 있는 보상은 어마무시한 이벤트다!
자, 이제 메모리얼 전투가 뭔지 대충 기억났으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
[메모리얼 전투 : 성도 방위전]
[전투 등급 : 3성]
[정보 : 성도의 은사자 오르키아나는 초극에 실패하였고, 존재의 소멸로 그 대가를 지불하였습니다. 절대적이었던 맹주의 부재는 혼란을 야기시켰지만, 반대로 그림자에 가려져 웅크리고 있던 자들이 활개를 펼칠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헬베르카의 마장 바하무트에겐 천재일우의 기회였겠죠.]
<목표>
-메를로의 생존(0/1)
-바하무트의 퇴각(0/1)
<부가 목표>
-바하무트 처치(0/1)
-오르키아나의 성물 수집(0/3)
[인원 제한 : 4명]
[보상 : 헬베르카 정예 척탄병*100]
[부가 보상 : 레릴의 오메가, 오르키아나의 왼쪽 눈]
이번 메모리얼 전투의 개요를 잠시 훑어본 후. 원탁 주변에 모여 앉은 챔피언들을 향해 물었다.
“혹시 ‘레릴의 오메가’가 뭔지 아는 사람?”
그렇게 묻자, 셋은 잠시 서로를 향해 시선을 나눈 후 각자 다른 대답을 내놨다.
“이 세계선이 도달할 수 있는 결말의 여러 가능성 중 하나일세.”
라고 스칼렛이 대답했고.
“현상의 최종점입니다. 리케릴 성찬회에서는 극구 부정하고 있는 개념입니다만.”
이게 루칸다의 대답이었고.
“레릴은 게르나의 고어로 ‘위대한 의지’라는 뜻이야. 외신들의 우두머리 격인 신이라는 모양인데. 어쨌든 레릴의 오메가는 위대한 의지가 지닌 일면을 인지했다는 증거고.”
로아의 설명이 가장 상세했지만.
셋이 말하는 ‘레릴의 오메가’에 관한 설명을 들어도 이해가 안 되긴 마찬가지였다.
“젠장, 너희들 너무 설명 어려운 거 아냐? 각하가 단번에 이해할 수 있게 가장 먼저 설명한 사람에겐 각하와 뽀뽀 1회권을 지급하겠습니다.”
“쉽게 말해서 초극 증명서입니다. 구태여 초극에 도전하지 않아도 레릴의 오메가를 지니고 있다면 초극한 존재로써 세계에 인식될 겁니다.”
루칸다가 가장 먼저 대답했고, 로아가 어깨를 부들부들 떨며 루칸다를 죽일 듯이 노려보기 시작했다.
아니, 그냥 농담인데 저렇게 필사적이면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든다.
‘한 마디로 주기 싫으니 침만 흘리라는 말이군.’
바하무트는 헬베르카의 전설적인 장군 아닌가? 그런 놈을 무슨 수로 격퇴하겠나.
혹여나 운이 좋아서 바하무트를 격퇴하는데 성공하고, 레릴의 오메가를 얻는다면?
그렇게 초극한 존재가 된다면 이 소설은 그냥 완결이다 완결!
‘그리고 오르키아나의 왼쪽 눈은 또 뭐야?’
‘오, 이번에 그걸 얻을 기회가 생긴 건가?’
‘갑자기 튀어나오지 마. 다중인격장애라고 독자들이 착각할 거 아냐?’
‘하핫, 뭐 비슷한 것이겠지.’
그…… 저번에 고문의 후유증으로 생긴 상상 친구다. 나하고 비스무리하게 생긴 은발의 소년 말이다.
앞으로도 상상 친구라고 부르기 불편하니 적당히 이름도 지어줬다.
세바준이라고 말이다.
‘세바준 넌 이 보상이 뭔지 아는 모양이네?’
‘말 그대로 반 르낙시아의 맹주 오르키아나의 왼쪽 눈이지.’
‘그런 징그러운 걸 왜 주는 건데? 포르말린에 절여 놓은 건가?’
‘얻어 놓으면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걸. 특히 누자베스 너처럼 헬베르카의 형질을 이어받은 마물이라면.’
세바준의 설명을 간단히 요약하겠다.
‘오르키아나의 왼쪽 눈을 얻는 것만으로도 영적 위계가 상승되고.’
혈통의 정당성을 강화시키는 효과도 있었다. 하지만 이 보상품의 진짜 가치는 따로 있었다.
‘허상 증폭장의 구현이라…….’
한 마디로 자연적인 물리법칙 이외의 현상 간섭을 강화시키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단순히 주먹으로 때리거나 검으로 베는 물리적 간섭은 강화되지 않지만 말이다.
내가 지닌 스킬들이 구현될 때 위력을 증폭시키는 필드를 형성할 수 있었다.
‘이거면 류시혁이나 백주월한테 비벼볼 수 있는 거 아냐?’
그 증폭이 어느 정도일지에 따라 결정되겠지만!
어쨌거나 바로 이번 메모리얼 전투의 개요를 설명하고 후딱 다녀오도록 하자.
“이번 메모리얼 전투의 행선지는!”
스칼렛을 흘깃 바라보며 뜸을 들이자, 스칼렛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얼른 말해 보라고 눈빛을 보냈다.
“밤의 성도다. 그것도 바하무트 놈이 바짝 약이 올라서 쳐들어오고 있는 시점이지.”
스칼렛은 쓴웃음을 머금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