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짓는 플레이어 119화
사각문해(4)
13차폐구의 트라이어드와 적당히 협상을 마치고 배정받은 방으로 돌아왔다.
내 병력이 주둔지를 완성할 동안 임시로 머물 수 있도록 둥지 내부에 공간을 마련해 준 것이다.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방에는 이미 루칸다와 두르난이 한창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런 이런, 이런 원시적인 공학 장치를 볼 때마다 오히려 가슴이 아파지는군. 도대체 이 섬의 기술력이 얼마나 정체되어 있는 건지.”
“두르난 이쪽에도 라우트 크리스탈이 배치되어 있다만, 파장 간섭의 가능성이 있나?”
“크카캇! 어린아이가 장난감을 숨겨 놓는 꼴이로군. 제 딴에는 교묘하게 설치해 놨다고 생각했겠지만. 림 테인글 방식의 송신 구조는 구성이 뻔하네.”
두르난은 뭔가 잔뜩 신이 난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는 루칸다가 찾아낸 크리스탈을 받아 위치를 바꿔 배치하기 시작했다.
“아, 각하. 벌써 오셨군요. 놈들이 도청 장치를 설치해 놨을지도 모르기에 미리 확인을 해두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과는 빙고였어?”
루칸다는 피식 웃으며 두르난에게 바톤을 터치했다. 두르난 아재는 오늘따라 더욱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가슴을 펼쳐 보였다.
“드워프 기술자에게 걸리면 이까짓 도청 장치는 금방 무력화시킬 수 있지! 이 섬의 원시적인 기술력은 코웃음이 나올 정도니 말일세!”
“오호라.”
내 둥지의 병력 중 유일하게 ‘비비큐 클럽’이 대륙에서 소환된 부대였다.
대륙의 서부와 동부의 기술력 차이도 엄청났지만, 바체트령은 대륙의 동부보다 더 낙후된 지역이다.
그러니까 대륙의 서부에서 온 드워프 기술자들이 보자면 200년 전의 과거로 타임리프한 기분이 들지도 모르겠다.
두르난이 루칸다와 함께 크리스탈의 위치를 교묘하게 바꾸고 있는 걸 침대에 걸터앉아 구경했다.
그러던 도중 문득 의문점이 하나 떠올랐다.
“내가 미처 이상하게 생각하지 못했던 건데. 혹시 바체트령에서 자체적으로 전차를 생산할 수 있었나?”
이번 13차폐구 전투에서 가장 막강한 전력을 지닌 쪽은?
물론 나는 아니다. 일단 규모부터가 다른 놈들하고 비빌 수 없을 만큼 후달리지 않나?
그렇다면 우렌?
루칸다의 보고에 따르면, 우렌이 현재 동원한 병력은 고작해야 7천의 규모라고 한다.
전에 내가 상대한 카타쿨라의 둥지 병력이 그 정도쯤 됐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카타쿨라를 상대할 때와 같은 감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이브 마인드의 군대는 어디까지나 ‘민병대’라는 개념으로 이해해야 하니까. 그와 반대로 마왕군의 군대는 정규군에 해당한다.
동규모의 민병대와 정규군이 맞붙는다면 결과야 뻔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우렌의 가용 전력이 당장 13차폐구의 트라이어드를 앞서는 건 아니다. 아무리 민병대 수준이라도 6만의 대군은 개무시할 수 없는 법이니까!
그런 6만 대군을 지닌 트라이어드 놈들조차 지레 겁을 먹을 만큼.
에르멜의 기갑연대는 글로레나 왕조의 최강의 군부대 중 하나였다.
글로레나 왕조의 최후통첩.
그것이 할칸 기갑연대다.
루칸다에게 들은 정보만으로도 할칸 기갑연대가 어느 정도 수준의 부대인지 어림짐작할 수 있었다.
“전차 200여 대. 전차 운전병을 제외하고도 보병 전력이 1400여 명. 수송과 보급을 담당하는 병참 부대가 3천여 명.”
머릿수만 따지자면 13차폐구의 둥지에 비견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갑화된 전차 부대가 어느 정도의 효용성을 지니는지 카타쿨라와 맞붙으며 질리도록 체감하지 않았나?
“베놈이 200대 있다고 생각하면 되려나? 젠장, 벌써 닭살 돋네.”
정확히 말해서 닭살이 아니라 소름이다, 소름! 베놈 200대가 일제히 돌격해 온다면 롬멜 할아버지가 와도 칼서랜 치자고 눈물 6개 사고 우물에 처박힐 게 뻔하다!
몸을 부르르 떨며 그렇게 말하자, 두르난이 바쁘게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이보게, 애송이.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이런 촌구석에서 무슨 재주로 베놈 수준의 전차를 양산할 수 있겠나, 엉?”
“베놈 하위 호환 정도는 될 거 아냐?”
그리고 내 둥지에서 운용하고 있는 전차 10대 역시 베놈의 하위 호환에 속한다.
기동성을 상당 부분 포기한 베놈 아닌가?
다섯 대는 전차형, 나머지 다섯 대는 자주 박격포 형태다. 동일하게 동축 기관총을 탑재하고 있다는 것이 공통점이다.
두르난은 자못 불쾌하다는 듯 혀를 차며 반박했다.
“하위 호환도 아닐세! 글로레나 왕조의 공학 기술력이 그 정도라고 생각한다면 과대평가일세!”
“아니, 그래도 철판 달고 달리는 전차라는 건 사실일 텐데…….”
철판으로 무장하고 달리면서 대포를 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둥지의 병력을 모조리 피떡으로 만들기에는 말이다.
“애초에 이 섬에는 온전한 동력 기관을 만들 만큼의 기술력이 없네. 에스텔 컴버스천 기술은 서대륙에서도 개발된 지 60년밖에 안 된 기술이니 말이야.”
“그럼 혹시 안에 사람이 타서 페달이라도 밟아 움직이나?”
농담이다. 농담으로 해 본 말인데 그렇게 경멸하는 시선으로 쳐다보는 건 그만뒀으면 좋겠다.
“각하, 할칸 기갑연대가 기동하기 위해 불가결히 필요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루칸다는 품속에서 주먹만 한 주머니를 하나 꺼내 열어서 안을 보였다.
“이것이 요즘 동대륙에서 수입되어 오는 ‘말리늄767’입니다.”
주머니 안에 들어 있던 것은 손톱만 한 조약돌들이었다. 검은빛을 띠고 있는 무광의 광석. 얼핏 보자면 돌맹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만.
“할칸 기갑연대의 전차는 말리늄767을 탑재하여 반영구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동력 장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와우…… 혹시 이거 방사능 나오는 광석이니? 그런 걸 지금 맨손으로 각하 앞에서 꺼낸 거야?”
요, 요오드 용액을 미리 마셨어야 했는데.
“방사능이 뭡니까?”
“아무것도 아냐. 나중에 코탈린한테 물어봐.”
“어쨌든 이 광석 자체로는 아무런 에너지도 발산할 수 없고, 유해한 영향을 미치지도 못합니다.”
어쨌든 저 말리늄767이 탑재되어 있어 별도의 연료 없이 반영구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니. 내가 보기엔 연료를 연소시켜 움직이는 대륙의 전차나 베놈보다 더 진보되어 있는 것 같은데.
“그리고 이 말리늄767을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양의 신성력이 필요합니다.”
“신성력이라면 스텔라 교단 쪽의?”
“예, 각하.”
이제야 두르난이 할칸 기갑연대의 전차를 과소평가하는 이유가 명확히 도출되었다.
루칸다는 다시 주머니를 품속에 넣으며 이어 말했다.
“말리늄767을 이용한 동력 기관이 탑재된 전차가 200여 대입니다. 왕국 내에서도 그 정도 규모의 전차를 동시에 운용할 수 있는 지휘관은 극소수입니다.”
“성처녀 에르멜이 나선 이유가 있었군.”
“들리는 소문으로는 말리늄767이 탑재된 고대 병기들까지 운용할 수 있을 정도의 신성력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자면?”
“대륙간 강습 병기 ‘타르틸리엇’과 동분류의 제압 병기 ‘델시미르 파광기’ 같은 것들 말이죠. 실제로 성처녀가 파광기와 비공정을 동시에 운용하는 걸 전장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따지자면 이번 전투에선 에르멜이 상당히 가벼운 무장으로 전장에 나선 것이다.
결전급의 고대 병기를 들고나오지 않은 것을 보자면 말이다.
“어쨌거나 200대의 전차를 정면에서 상대한다면 승산 따윈 없습니다. 병력이 모조리 증발하는 걸 보고 싶지 않다면 추천해 드릴 수 없는 전술이군요.”
“역으로 말해서.”
“예, 각하.”
결론은 확실했다.
200여 대의 전차를 무력화할 수 있는 방법은 매우 명확했다.
“에르멜만 제거하면 끝이란 말이군.”
“지금까지 그 간단명료한 목적을 달성한 마족 지휘관이 없었다는 게 유일한 문제로군요.”
이번 전투에서 비르겐슈타인 부대와 크라울 비젠 부대의 역할이 확실해졌다.
* * *
인간의 순도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그런 의문을 몇 살 때까지 진지하게 품은 채 살아왔는지, 오늘의 밤에 이르러서야 기억이 흐릿했다.
에르멜은 어슴푸레한 촛불의 빛 앞에 앉아 밀리아의 편지를 펼쳤다. 싸구려 종이의 거친 촉감이 손끝으로 전해졌다.
그리고 그 위에 먹이 흐르듯 번진 동글동글한 글자들을 바라보며 에르멜은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 편지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밀리아’라는 소녀가 어떤 인간인지 또렷이 느낄 수 있었다.
이 싸구려 종이는 밀리아의 검소하며 청렴한 인품을 대변했고, 모난 곳 없이 부드러운 성격이 필체에 묻어났다.
만약 스텔라의 가장 큰 사랑을 받는 처녀가 성녀로 간택되는 것이라면. 밀리아만이 스텔라에게 사랑받을 자격을 갖췄을 것이다.
그것이 에르멜의 진심이었다.
“쉬르센 가문이 믿고 있는 정제 과정을 부정하기 위해 밀리아 너를 내게 보내신 것이겠지.”
인간의 순도란 그런 식으로 정제되는 것이 아니다. 스텔라는 그런 얘기를 들려주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에르멜은 편지의 글자가 번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밀랍을 칠했다. 이미 수백 장이 넘는 밀리아의 편지는 에르멜의 보물이나 다름없었다.
시답잖은 신변잡기나, 에르멜을 걱정하거나, 혹은 그녀를 격려하거나, 때때로 어린아이 같은 고충을 토로하는 내용이 전부인 편지였다.
하지만 밀리아의 편지는 에르멜이 지닌 오랜 지병의 유일한 치료약이었다.
그 지병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었고, 때문에 밀리아의 편지는 에르멜에게 성서와 다름없었다.
순수함을 향한 갈증은 이런 비뚤어진 형태로 충족되고 있었다.
“밀리아…… 현왕과 공화정의 늙은이들은 너와 내가 없는 수도에서 무슨 꿍꿍이를 품고 있을까?”
갑작스러운 이계 용사의 소환.
그리고 밀리아를 용사의 동료로서 여정에 참여시켰다. 뒤이어 스텔라 교단의 성처녀 에르멜까지 중부 너머의 전선으로 파견한 것이다.
스텔라 교단의 수족을 수도에서 멀어지게 한 것이 그저 우연의 일치일까?
그럴 리가 없다.
에르멜은 고개를 가로저은 후 간만에 펜을 손에 쥐었다. 밀리아에게 자신이 솔리엔령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려야만 했다.
지금까지 밀리아에게 답장을 보낸 적은 손에 꼽았지만, 이번엔 필요한 일이었다.
에르멜은 간결하게 현재 상황을 기록한 후 벽에 걸려 있던 새장을 열었다.
새장에는 한 마리의 종달새가 들어 있었고, 에르멜은 편지를 종달새의 다리에 꼬옥 묶었다.
“만약 이 전투가 교단의 힘을 깎아 놓으려는 함정이라면.”
에르멜을 제거한 후 다음 타깃이 되는 건 밀리아였다. 에르멜은 자신의 사후까지 검토하며 각오를 다졌다.
에르멜이 종달새를 밖에 놔주자, 힘차게 날개짓을 하며 밤하늘을 날았다.
“키륵…….”
“지금이다, 보르가.”
그리고 할칸 기갑연대의 주둔지에서 3㎞ 정도 떨어진 수풀 사이에 대여섯 마리의 고블린이 잠복하고 있었다.
루칸다가 명령을 내리자, 보르가가 바로 하늘을 향해 석궁을 겨누고 볼트를 날렸다.
피슉!
석궁의 볼트가 밤의 어둠을 가르며 날아갔고, 기적처럼 주먹만 한 크기의 종달새의 몸을 꿰뚫었다.
“키륵, 키륵!”
“그 석궁은 메모리얼 전투 때 얻은 전리품이었나? 어쨌거나 기묘한 무기로군.”
루칸다가 낮게 말하고 있는 사이, 보르가가 석궁에 달린 가늘은 실을 당기기 시작했다.
이윽고 볼트에 꿰뚫린 종달새가 실에 매달린 채 나타났다.
루칸다는 바로 종달새의 다리에 묶여 있던 편지지를 풀어 내용을 읽었다.
“오호라.”
루칸다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으며, 할칸 기갑연대의 주둔지 쪽을 바라봤다.
드디어 그림자의 군세가 움직일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