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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짓는 플레이어-118화 (118/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118화

    사각문해(3)

    “근현대 윤리주의의 기반을 토대로 얘기하자면 처녀가 아니라는 명확한 증거가 제시되지 않을 경우, 만인은 처녀라는 전제를 유지할 권리를 지닌다. 이것을 처녀추정의 원칙이라고 하지.”

    “각하, 이번에도 뜬금없는 착안점입니다만.”

    루칸다는 내가 물고 있던 담배에 불을 붙이며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확실히 이런 중세 시대가 배경이 되는 세계에서는 이해하거나 동조하기 힘든 인권론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들어봐라 루칸다. 예를 들어서 여우 귀가 달린 여자애가 창관에서 일하고 있으면 처녀일 것 같냐? 아닐 것 같냐?”

    “인간인데 여우 귀? 키메라나 수인입니까? 구태여 창관까지 가서 그런 괴물과 놀고 싶어하는 놈이 있을까 싶습니다. 그러니 처녀일 것 같습니다만.”

    “…….”

    나는 가끔 루칸다의 저 예리한 통찰력이 너무너무 섬뜩하다. 당연히 여기선 ‘창관에서 일하는데 처녀일 리가 없지 않습니까?’라고 대답하면, 내가 멋지게 반박해 줄 차례였는데 말이다.

    “창관에서 일한다고 했잖아. 인간의 시점에선 엄청 예쁘다는 설정을 붙여 둘게.”

    “정말이지 인간 놈들의 역겨운 취향에는 토악질이 나옵니다. 더러운 자식들!”

    “……루칸다, 각하는 지금 네 인간혐오론을 듣고 싶은 게 아니다.”

    그렇게 혐오하는 표정을 지으면, 괜히 각하가 위축되어서는 어깨를 움츠리게 되니까 그만둬 줬으면 좋겠다.

    “어쨌든 손님을 받고 있다면 처녀일 리가 없지 않습니까?”

    루칸다는 담배를 입에 물며 당연한 소리를 뭐 하러 입 아프게 묻냐는 투로 대답했다.

    “그래, 그게 바로 간접적 추론이 도출해낼 수 있는 오답의 가능성이다.”

    그렇다.

    우리의 하루히메는 창관에서 5년 동안이나 일했는데 사실은 처녀였다는 기적의 히로인이란 말이다.

    아니, 그나저나 미친놈들이 왜 남의 던전에서 만남을 추구하고 지랄들이지? 어? 엄연한 가택침입죄 아닌가? 신개념 염장질인가?

    던전 관리자로써 매우매우 불쾌하다!

    “어쨌거나 이번 작전의 핵심이다. 정황상의 증거를 손에 넣은 놈들은 간접적 추론을 하기 마련이지.”

    망토를 걸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요점은 흙바닥에 떨어진 사과를 먹고 싶어 하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나무에 열린 사과를 따먹고 싶어 하는 놈들은 넘친단 말이다.”

    그렇기에 정황상의 증거는 언제나 나무에 열린 사과여야 한다.

    자신의 힘으로 노력해서 딴 것처럼 보이는 사과를 의심하는 인간은 별로 없으니까.

    “오답으로 점철된 전장만이 헬베르카의 무대라는 사실을 녀석들에게 알려줄 차례다.”

    작전 테이블에 펼쳐진 지도 위에 국화의 깃발을 꽂았다.

    “모조리 갈기갈기 찢고 해체해서 집어 삼켜야지. 자기들이 무엇에게 잡아먹힌지도 모를 거야.”

    론트라 섬 진출의 발판이 될 13차폐구.

    난류와 혼돈이야말로 헬베르카의 홈그라운드였다.

    * * *

    아리카의 엘베제 누자베스 변경백.

    단기간에 아리카 섬을 집어삼킨 괴물이라는 소문은 론트라 섬에도 전해졌다.

    게다가 그 대척점에 존재했던 하이브 마인드는 ‘카타쿨라 남작’이 아니었던가?

    카타쿨라는 비록 헬베르카의 적계 후예는 아니지만, 분가 캘러제드의 명맥을 잇는 하이브 마인드였다.

    적어도 손쉬운 상대가 아니었으리란 사실은 명백했다.

    ‘카타쿨라를 찍어 누르고, 아리카 섬을 집어 삼킨 것이 전부는 아니었지.’

    13차폐구 88호 둥지의 관리자 아일크라나는 누자베스에 대한 경각심을 지니고 있었다.

    단순히 운이 좋았던 어린 아이라고 생각하기엔 지금까지의 활약이 경악스러울 정도였으니까.

    ‘포 힐케인 섬에서 그 카쿠쟈를 얌전히 뒤로 물렸고.’

    감찰관 우렌은 13차폐구의 트라이어드에게 있어서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의 협위 세력이었다.

    우렌은 행동과 결과가 명확한 사내다.

    그런 그가 군대를 이끌고 포 힐케인 섬을 성공적으로 포위한 것이다.

    하이브 마인드에겐 사형 선고와 같은 일이었지만. 누자베스는 멀쩡히 포 힐케인 섬을 빠져나왔다.

    무쇠와 냉혈의 사내 우렌을 어떤 식으로 겁박했는지 상상조차 안 될 정도였다.

    이미 솔리엔 령 바깥에서도 누자베스에 대한 소문은 파다했다. 그가 ‘엘베제’의 칭호를 허락받은 덕분에 소문은 과장에 과장이 거듭되었다.

    일각에서는 누자베스를 ‘국화의 재림’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국화의 이름은 최초의 밤이 도래하기 이전 가장 위대한 동맹을 이끌었던 맹주에게만 허락된 극찬이었다.

    ‘만약 진정한 국화의 후계라면 고작 인간의 군대나 감찰관 따위를 두려워할 때가 아니겠지.’

    아일크라나는 ‘리케릴 성찬회’의 일원.

    순혈의 헬베르카가 품고 있는 위험성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다.

    광기와 닮은 집요한 탐욕.

    모든 목적과 의도와 이유에 경중을 따지자면, 헬베르카의 탐욕은 가장 무거운 행동원리였다.

    “왜 그렇게 표정이 심각해? 병력 한 마리도 아쉬웠던 차에 그 꼬맹이가 원군 요청을 수락했는데 좀 더 기뻐해야지?”

    5호 둥지의 관리자 뤼클라 남작이 와인잔에 한손에 들고 가볍게 흔들며 말했다.

    “이쪽에게 항만 시설의 개방과 통행 허가를 요구하려는 셈이겠지. 하지만 큰 리스크를 부담하는 것보단 낫지 않겠나?”

    24호 둥지의 관리자 세도루프 역시 한숨 돌렸다는 투로 얘기했다.

    하지만 아일크라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둘을 쏘아 붙이듯 말했다.

    “엘베제의 칭호를 수여받은 전쟁 군주다. 좀 더 경계하는 편이 어떤가.”

    “소문은 과장되는 법이야. 고작해야 카타쿨라 녀석보다 조금 더 운이 좋았던 꼬맹이잖냐.”

    “뤼클라. 누자베스는 수년 동안 벌어진 격차를 순식간에 뒤집은 놈이다. 조금 더 운이 좋았다는 식으로 납득할 수 있나?”

    누자베스에게 원군을 요청하는 것을 마지막까지 반대한 건 아일크라나였다.

    물론 이곳 13차폐구의 둥지는 다수결로 안건이 결정되기에 뤼클라와 세도루프가 찬성한 이상 아무런 영향도 끼칠 수 없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셋의 전쟁 군주가 각자의 자리에 앉아 기다리는 동안 이런저런 얘기가 오갔다.

    그들도 서쪽과 동쪽에서 동시에 일어난 문제에 관해 인지하고 있었고, 순서에 관한 얘기를 나누던 찰나.

    “엘베제 누자베스 변경백이 도착했습니다.”

    정갈한 슈트 차림의 임프가 방문객의 도착 소식을 알렸다.

    직후 거대한 출입문이 열렸고, 루칸다와 스칼렛을 대동한 누자베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저것이 아리카의 엘베제…….’

    ‘상상했던 것보단 흉악해 보이진 않는데.’

    ‘눈빛부터가 글러 먹었군.’

    13차폐구의 전쟁 군주들 앞에 나타난 누자베스는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쭈뼛거리고 있었다.

    한껏 긴장한 티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스칼렛은 그런 누자베스를 흘깃 보더니 슬며시 옆으로 다가가 등을 토닥였다.

    “괜찮네, 긴장하지 말고 연습한 대로만 말하면 될 테니.”

    “으, 응…….”

    목소리에 패기라곤 눈곱만큼도 없었다. 잔뜩 움츠린 어깨, 양팔을 가슴 앞쪽으로 끌어 당겨 경계하는 기색이 짙었다.

    하물며 13차폐구의 전쟁 군주들을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바닥을 향하고 있는 눈동자엔 벌써부터 눈물이 맺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촌구석 출신이라 기본적인 예의도 모르는군. 이곳은 챔피언을 대동하는 자리가 아니다.”

    먼저 입을 연 쪽은 프리스커스 뤼클라 남작이었다. 사뭇 불쾌하다는 어조로 쏘아 붙이자, 누자베스가 어깨를 흠칫 떨며 스칼렛의 등뒤로 숨었다.

    스칼렛은 누자베스를 안정시키려는 듯 머리를 쓰다듬으며 뤼클라 쪽을 바라봤다.

    “누자베스 변경백! 챔피언을 바깥에 대기시키라는 말이 안 들렸나!”

    “솔리엔의 프리스커스인가? 천박하게 언성을 높이는 짓은 누구에게 배웠나?”

    “…….”

    스칼렛과 시선이 마주친 뤼클라는 잠시 멈칫했다. 세도루프와 아일크라나가 그런 뤼클라를 ‘갑자기 뭐야?‘라는 눈으로 바라봤다.

    뤼클라는 손에 들고 있던 와인잔을 내려놓고, 꼬고 있던 다리를 풀어 예의 바르게 앉았다.

    양손을 무릎 위에 올리고, 정자세로 앉자 그제야 스칼렛은 뤼클라를 향하고 있던 시선을 거두며 조곤조곤 말했다.

    “주군께서 이런 자리는 익숙치 않기에 이례적으로 챔피언의 대동을 허락해주길 바라네.”

    “그, 그렇게 하겠습니다.”

    뤼클라는 흡혈귀의 혈계에서 파생된 전쟁 군주였고. 본능적으로 스칼렛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정확한 정체나 진명까지는 아니지만, 스칼렛이 ‘상속 신분’이라 불리는 나르시안의 직계 자손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뤼클라가 전통적인 흡혈귀는 아니라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속 신분인 스칼렛을 막 대할 수는 없었다.

    적어도 프로릴의 불사왕 ‘브람스’의 노여움을 사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혈계의 규율에 따르자면 상속 신분은 가장 존귀한 흡혈귀였다. 그리고 뤼클라 역시 혈계의 규율에 순종하기로 맹세한 덕분에 브람스의 지원을 받아오지 않았나?

    ‘어째서 상속 신분께서……?’

    뤼클라는 얼어붙은 채 이 상황을 이해해보려 했다. 상속 신분이라면 나르시안의 배덕 행위로 태어난 1세대의 흡혈귀다.

    나르시안이 자신의 모친과 누이들의 몸을 통해 얻은 아이들은 태어난 순간부터 그 존재 자체가 ‘죄악’이자 ‘금기에 대한 저항’이었다.

    가장 초극에 가까운 존재.

    신을 초월할 가능성을 상속받은 흡혈귀.

    상속 신분의 흡혈귀는 자신의 존귀함과 고결함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어지간한 귀족 따위는 보잘 것 없는 잡종 취급을 할 만큼 안하무인이 아니던가?

    그런 상속 신분의 흡혈귀가 하이브 마인드를 ‘주군’이라 부르며 옆에서 보좌를 하는데 만족하고 있다?

    이건 확실히 뤼클라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누자베스가 자리에 앉아 협상에 나선 직후. 뤼클라를 포함하여 13차폐구의 전쟁 군주들은 불쾌하고도 놀라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 이번 일만 무사히 끝내면 통행 허가를 내주도록 하지. 3개월 간의 항만 시설 개방까진 이쪽이 양보할 수 있다만.”

    세도루프가 조력의 보상에 대해 먼저 언급하자, 누자베스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스칼렛과 루칸다의 눈치를 살피기 바빴다.

    “저기…… 그게, 아니…… 어, 잠깐만요…….”

    왼편에 서있던 루칸다가 고개를 숙여 누자베스의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그제야 누자베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사, 상호 방위 동맹? 이, 이거 맞아? 루칸다?”

    “예, 각하.”

    “상호 방위 동맹 기간을 1년 유지한다는 조건으로…….”

    13차폐구의 전쟁 군주들은 누자베스의 왼편에 서있는 루칸다를 노려봤다.

    그리고 아일크라나가 혀를 차며 입을 열었다.

    “헛소리를 들어줄 여유는 없다. 무사히 본도에 상륙하게 해주는 것만으로도 고맙게 여기는 게 어떤가? 그리고 상호 방위 동맹? 네놈의 뒤를 막아줄 방패 역할을 떠넘기려는 수작이 뻔하군.”

    이번엔 오른편에 서있던 스칼렛이 누자베스의 귓가에 또 무언가를 속삭였다.

    “바, 방패 역할을 떠넘길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후방에 잠재적 적군을 둔 채로 진출하는 건…….”

    “언어도단일세, 주군.”

    “으, 응. 언어도단입니다.”

    협상의 내용 따위보다 더 중요한 게 보이기 시작했다.

    13차폐구의 전쟁 군주들은 서로를 향해 짧게 시선을 교환한 후. 똑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꼭두각시로군.’

    ‘상속 신분께서 표면적으로 내세울 대리자로써 이 하이브 마인드를 이용하는 것이라면 납득이 되지.’

    ‘무능한 전쟁 군주와 그 혈계의 명성을 이용하려는 두 챔피언이라. 재밌군.’

    이걸로 확실해졌다.

    누자베스는 별 볼 일 없는 허수아비에 불과하다. 진짜 아리카의 주인은 루칸다와 스칼렛이었다.

    그것이 13차폐구의 전쟁 군주들이 내린 결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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