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짓는 플레이어 117화
사각문해(2)
천재의 그림자에 가려진 범재.
스텔라 교단의 성처녀 에르멜을 표현하기에 이보다 더 적합한 말이 있을까?
대륙의 북동부에 위치한 국가 ‘쉬르센 대공국’ 출신인 그녀는 4대에 걸친 순혈 공정을 통해 빚어진 걸작이었다.
쉬르센 가문은 630년 전 스텔라교를 국교로 지정한 이후 적지 않은 성녀를 배출해 낸 명문가.
특히나 쉬르센 가문 내에서 ‘순혈 공정’을 거쳐 만들어진 아이들은 상식의 범주를 뛰어넘는 신성력을 지니고 있었다.
스텔라의 현신이라고 불렸던 쉬르센 가문의 ‘마리야’ 역시 4대 순혈 공정을 거친 아이였으니까.
마리야가 4살 무렵 교단 5대 기적 중 하나인 ‘모라토리엄’을 발현시킬 수 있었던 것처럼. 에르멜 역시 5살이 되기 두 달 전에 기적 ‘영원한 태양의 성지’를 구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쉬르센 가문이 주변국들의 경계를 피해 글로레나 왕조를 따라 바체트령을 공략한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그 결과 다시 한 번 순혈 공정이 완성되었고, 마리야의 환생이라고 불릴 정도의 완성도를 지닌 에르멜을 빚어내는 데 성공했으니까.
에르멜이 스텔라 교단의 차기 성녀가 되는 것은 가정 사실이었다.
출생 성분도 불분명한 빈민가 출신의 여자 아이가 장로들의 관심을 받기 전까진 말이다.
“포 힐케인 섬이라…….”
“뭘 그렇게 읽고 계십니까, 에르멜 님?”
덜컹거리는 전차 포탑 위에 걸터 앉아 있는 건 작은 체구의 소녀였다.
신장은 145센치도 채 되지 않았고, 젖살과 솜털이 도드라진 뺨을 보자면 어린아이 그 자체였지만.
에르멜은 올해 생일이 지나면 22살이 되는 성인 여성이었다. 투명해 보일 만큼 새하얀 머리카락과 피부. 청량함을 고스란히 머금은 사파이어 색의 눈.
그리고 살짝 권태감에 젖어 있으면서도, 염세적인 분위기를 흘리고 있는 날카로운 눈매라던가.
자세히 보자면 마냥 어린애 같은 느낌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밀리아가 또 편지를 보냈어. 얘는 진짜 성실하다니까.”
“수도원 시절엔 에르멜 님을 많이 따르고 의지했다고 들었습니다.”
“아니, 그건 그냥 걔가 제멋대로 쫓아다닌 것뿐이야.”
에르멜은 피식 웃으며 편지를 소중히 접어 야전 코트의 안주머니에 넣었다.
“눈치가 없는 건지 멍청한 건지…… 아니면 순수한 건지.”
출생 성분이 고결함과 순수함 그 자체인 에르멜과 달리, 밀리아는 빈민가에서 거둬져 수도원의 잡무나 맡던 아이였다.
이후 어느 정도의 신성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견습 수련생으로 생활하기 시작했고.
수도원에 들어온 지 정확히 8년째.
밀리아는 스텔라의 5대 기적 중 3개를 구현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스텔라의 현신이라고 불린 마리야도 4개가 한계였고, 에르멜 역시 현재에 이르러서도 2개의 기적을 구사하는 게 고작이었는데 말이다!
스텔라 교단의 장로들은 밀리아가 세습의 정통성을 훼손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뒤늦게 ‘정적 봉인’의 처분을 내린다.
장로회의 만장일치 허가가 내려졌을 때에 한하여 ‘5대 기적’의 발현이 가능하며, 신성력의 9할 이상을 봉해두게 된 것이다.
물론 밀리아의 봉인 처분을 종용한 것은 쉬르센 가문이었다. 출생 성분도 불분명한 천한 계집이 성녀가 되기라도 한다면 교단의 권위 역시 바닥을 치게 될 것이란 명목 때문이다.
진짜 이유는 쉬르센 가문의 에르멜을 성녀 자리에 앉히기 위해서였지만 말이다.
밀리아의 봉인에 에르멜이 직접 관여한 것은 아니지만, 봉인 처분이 결정된 후 에르멜은 밀리아를 이전처럼 대할 수 없었다.
오랫동안 축적된 열등감에 죄책감이 뒤섞였고, 아주 약간 연민과 닮은 애틋함. 그것만이 에르멜이 지니고 있는 밀리아에 대한 감정이었다.
“솔직히 성녀 자리는 밀리아 같은 애가 어울리지 않아?”
“에르멜 님. 문제가 될 수 있으니 발언에 주의를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에르멜의 부관인 펜리르는 눈살을 찌푸렸다. 펜리르는 훤칠하고 시원시원한 이미지의 청년이었다. 올곧은 눈매와 강단 있게 꾹 다문 입이 그의 성격을 대변하고 있었다.
그런 펜리르를 내려보며 에르멜이 키득키득 웃었다.
“아니, 들어봐 펜리르 경. 성녀 임기가 죽을 때까지라면서? 그럼 만약 내가 성녀가 되면, 난 평생 못해보는 거야?”
“에, 에르멜 님!! 그런 불경한 말을 입에 담으시면 안 됩니다!”
“펜리르 경은 지금 남의 얘기라고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거라니까! 펜리르 경한테 죽을 때까지 숫총각으로 살라고 하면 빡쳐 안 빡쳐? 어? 지금 자기는 잔뜩 해봤다고 으스대는 거야 뭐야?”
에르멜의 추궁에 펜리르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수, 순결은 평생의 반려와 소중히 나누는 것입니다.”
“헛소리 그만해. 지금 태양 펀치 아구창에 박을 뻔 했어.”
“태양 펀치는 또 뭡니까…… 아니, 그리고 헛소리가 아니라 진심입니다! 저는 이미 교리에 순종하는 삶을 살기로 맹세했습니다.”
“그럼 이번 작전 끝나고 돈 줄 테니까 다녀와 봐. 다녀와서 상세하고 보고서 작성해서 제출해. 보고서 화끈하게 잘 쓰면 매일 다니게 해줄게.”
“제발 봐주십시오, 에르멜 님…….”
펜리르가 깊은 한숨을 푹푹 내쉬는 사이에 선두의 전차가 멈춰서기 시작했다.
“자, 그럼 더러운 마족 놈들하고 진탕 뒹굴기 전에 한숨 쉬고 갈까?”
드디어 에르멜의 할칸 기갑연대가 작전 집결지에 도착했다.
수백여 대의 전차가 집결한 모습은 어떤 의미로 장관처럼 보였다.
“그나저나 고작 페쉬나이트 광맥 몇 개 때문에 왕정파와 공화정파의 어르신들이 합심하다니 이상하지 않아?”
“페쉬나이트의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게 될 것입니다. 빼앗을 수 있는 건 빼앗아 두자는 생각일 겁니다.”
“그런 이유라…….”
확실히 확보할 수 있는 페쉬나이트 광맥은 확보해 두는 게 일반적인 판단일 것이다.
하지만 성처녀 에르멜이 지닌 상징성과 능력에 비하자면, 페쉬나이트 광맥 확보라는 명목은 빈약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 허접한 명분으로는 애새끼도 납득시킬 수 없을 텐데.’
하지만 어쩌겠나?
에르멜이 교단의 성처녀라 할지라도 소속을 따지자면 군부의 인간이었다.
“하여튼 까라면 까야지. 그치, 펜리르 경?”
에르멜이 전차의 포탑 위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살포시 지면에 착지한 후 시선을 들자. 13차폐구의 풍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조만간 할칸 기갑연대의 먹잇감이 될 땅이었다.
* * *
“스텔라 교단의 성처녀 에르멜이라. 밀리아처럼 미드가 엄청난 애겠지. 내가 지금까지 ‘스텔라’라는 접두어 붙은 애들 중에 가슴 작은 애들을 본 적이 없어.”
“훌륭하신 추론입니다, 각하.”
루칸다가 영혼 없는 박수를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내가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한 것도 아닌데 저런 반응은 부조리하다. 실제로 스텔라의 석상만 보더라도 엄청나지 않나?
카를린도 컸고, 밀리아는 더 컸단 말이다! 그러니까 이건 한없이 진리에 가까운 추론이다.
“로아 넌 어떻게 생각해? 내가 본능적으로 거대한 가슴에 끌리는 이유가 역시 헬베르카의 아이가 유당에 취하는 체질이라 그런 거라고 생각하지 않냐?”
“생각 안 해.”
“…….”
로아는 아직도 잔뜩 토라져 있는 모양이다. 일단 급한 불부터 끄고 나중에 느긋하게 보자고 어르고 달랬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젠장, 거물놈들 노는 물에 한 다리 걸쳐 보려니까 좀 후달리네.”
어쨌거나 이번 충돌 양상은 상당히 복잡기괴한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가시적인 형태만 보자면 13차폐구의 트라이어드와 에르멜의 할칸 기갑연대의 격돌이다.
‘하지만 1:1의 정정당당한 승부는 아니지.’
13차폐구의 트라이어드 놈들은 바로 아군 정글러를 부른 셈이다.
그 정글러가 바로 1티어 정글러 ‘누라뎃’ 님이란 소리다. 미안하다, 그냥 이런 식으로 자뻑이나 하며 긴장을 풀고 싶었다.
어쨌거나 이렇게 보자면 2:1의 승부가 되지만. 아쉽게도 골치 아픈 요소가 하나 더 추가된 것이다.
바로 아군 탑솔러가 따이면 시에스 주워 먹으려고 부시에 숨어서 대기타는 딜서폿 놈이 하나 있는 것이다.
그 망나니 같은 트롤러 새끼가 바로 감찰관 ‘우렌’이다!
“우렌이든 에르멜이든. 13차폐구를 차지하게 된다면 나도 골치 아파지지.”
그게 바로 내가 이번 원군 요청을 무시할 수 없는 이유였다.
“반대로 만약 이번 방위전을 성공적으로 끝내도록 돕는다면, 이후 13차폐구의 항만 시설과 도로 사용의 허가를 받을 수도 있고.”
13차폐구의 트라이어드는 급한 불을 끄기 위해 허겁지겁 지원을 요청한 것이다. 이쪽이 협상 테이블에 앉아 주기만 하더라도 감지덕지란 말이다.
그러니까 살짝 불합리한 조건까지도 배짱 있게 밀어붙여 볼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러니까 이번엔 곤경에 처한 이웃사촌을 적극적으로 돕게 되었다는 말이다. 질문 있나, 제군들?”
“마음에도 없는 말을 잘도 하는군.”
스칼렛이 유쾌한 농담을 들은 것처럼 쿡쿡 웃었다.
“질질 흐르고 있는 군침이나 닦고 그런 거짓말을 하게.”
“당연히 이건 빌어먹을 농담이지.”
고작 통행 허가나 받고자 내 군단을 이끌고 나설 리가 없지 않나?
세포 단위로 각인되어 있는 헬베르카의 본성이 들끓고 있었다. 이건 밤의 어머니께서 허락하신 절호의 기회였다.
13차폐구의 트라이어드는 지금의 내가 맞다이 떠도 승산이 희박한 상대다.
하지만 이번에 13차폐구의 트라이어드는 동쪽에서 밀려오는 에르멜의 기갑연대를 상대하며, 서쪽에 진을 치고 있는 우렌도 섭섭지 않게 상대해 줘야만 한다.
이 상황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겠나?
“밤의 어머니께서 론트라 섬 진출을 재촉하시는군.”
13차폐구의 원군 요청을 받은 것이니 막대한 희생을 치르며 상륙 작전을 강행하지 않아도 된다.
육상 병력을 피해 없이 온전하게 본도에 상륙시킬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이점이었다.
“쮸, 쮸쮸!”
“어? 벌써 왔어? 이쪽 지부장의 오른팔이라더니 엄청 빠릿빠릿하네.”
잠깐 브리핑이나 해두고 움직이려던 찰나였다. 햄토리가 데려온 녀석은 내 새로운 담당자 ‘데이나’였다.
이미 햄토리의 안내를 받아 저장소를 보고 왔는지, 얼굴에는 어떤 의미로 비장한 기색이 감돌았다.
“안녕, 장돌뱅이 양반. 대충 내가 이번에 뭘 매각할지 잘 보고 왔지?”
“예, 각하.”
데이나는 침착하게 서류철을 꺼내 직접 기록해 온 페쉬나이트의 수량을 다시 한 번 검토했다.
그 매각량이 상상을 아득히 초월한 것인지 눈빛이 살짝 떨리는 게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데이나는 꽤나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누자베스 각하. 어줍잖은 흥정은 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보유하고 계신 페쉬나이트 주괴 전량을 에르바키나 연맹에서 매입하고자 합니다. 가능한 한 모든 조건을 수용하고자 하오니, 편히 말씀해 주십시오.”
저 반응은 꽤나 현명하다.
괜히 몇 푼 아끼려다, 내 심기를 건드리는 실책을 저지르지 않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표명했다.
확실히 내가 보유한 페쉬나이트 주괴는 대륙 전체의 스케일로 보자면 얼마 되지 않겠지만.
가뭄에는 몇 방울의 단비에도 혈안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좋아, 저 정도의 저자세로 나온다면 충분했다.
“따까리하고 할 얘기는 없고, 지부장 데려와. 네가 이 섬에서 본 것과 들은 것 모두 지부장에게 고스란히 전해. 거래는 그다음이다.”
에르바키나 연맹 같은 장사치 놈들도 써먹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번 사각문해의 열쇠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