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짓는 플레이어 113화
누군가의 방법(5)
[누자베스 : 현 기점으로 본관이 직접 전병력의 지휘를 맡겠다. 각 부대장 현황 보고를.]
실시간으로 전투의 현황이 갱신되었다.
트올리카의 병력이 합세한 덕분에 효과적으로 류시혁과 밀리아의 이동 경로를 제한하는 동시에 내 부대의 직접적인 피해를 예방할 수 있었다.
실질적으로 류시혁과 밀리아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건 루칸다와 로아였지만.
‘솔직히 이 섬에서 끝장을 볼 수 있을 것 같진 않지.’
인간 소년으로 위장하여 며칠 동안 두 사람과 함께 지내며 능력의 수준을 검토해 봤다.
류시혁은 이제 막 소환되어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은 상태. 확실히 성장도는 우려했던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확실히 용사는 용사였어.’
의심의 여지없이 호랑이 새끼다.
내가 예상했던 캐릭터의 형태와 완전히 일치하진 않았지만, 그 능력 만큼은 내 설정과 일치하고 있었다.
둥지의 입구에 발을 들이기 전에 마인드 모드로 전투 상황을 살폈다.
‘거의 호각.’
소환된 지 한 달도 안 된 놈이 루칸다와 대등하게 맞서고 있는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소름 돋는다.
앞으로 얼마나 더 강해질 수 있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그리고 밀리아는…….’
드디어 내게 걸고 있는 스킬을 해제하고 로아와 하이오크 척탄병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아니, 근데 잠깐?
[누자베스 : 로아. 내 명령을 못 들었어? 최대한 상처를 입히지 말라고 했을텐데.]
[로아 : 하지만 손대중을 하며 상대하다간 병력의 손실이…….]
루칸다와 동등하게 맞서고 있는 류시혁과 달리, 밀리아는 이미 치명상을 허용한 상태였다.
아무리 용사의 동료라도 로아와 하이오크 척탄병들을 상대하게 된다면 저 정도가 최선일 것이다.
밀리아는 반쯤 절개된 옆구리에 쉴 새 없이 회복 마법을 시전하며, 이를 악 물고 버티고 있었다.
허벅지와 어깨에도 총탄에 꿰뚫린 관통상이 있었고.
[누자베스 : 야, 내 명령이 개 짖는 소리처럼 들렸냐?]
[로아 : 각하! 고작해야 하찮은 인간 계집입니다! 게다가 용사에게 협력하고 있다면 기회가 있을 때 죽이는 것이 상책입니다!]
[누자베스 : 로아, 너 이번엔 선을 넘었어.]
[로아 : 제 충의가 틀렸다면 이 목숨으로 대가를 치르겠습니다.]
아니다. 로아의 판단은 둥지의 챔피언으로써 도출된 것이 아니었다.
하이브 마인드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 톱니바퀴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사적인 감정이 앞서고 있는 것이다.
확실히 결점이 없을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로아는 병력의 지휘와 대인전 능력 모두가 상위 티어에 속하는 챔피언.
만약 결점이 없다면 마스터피스에 속할 정도일 것이다.
‘치명적인 결점을 지니고 있었군.’
로아는 내가 짠 대본보다 자신의 사심이 담긴 애드리브를 우선하는 배우다.
그리고 이 배우의 단점은 프로듀서인 내가 극복해내야 할 문제였고 말이다.
‘머리를 좀 식혀줘야겠네.’
때마침 트올리카 역시 접전지에 가까워지기 시작했고, 시간 벌이는 충분했다.
[누자베스 : 블랙 비즈니스 부대는 전투를 중지하고 퇴각. 동시에 로아의 모든 권한을 박탈한다.]
[로아 : 각하…….]
뭐, 로아의 돌발 행동은 아주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다. 솔직히 말해서 로아의 스트레스 임계점을 시험해 볼 좋은 기회가 아니었나?
하지만 앞서 나가려는 애는 붙잡아 세워둘 필요가 있었다.
* * *
로아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는 밀리아의 앞으로 다가갔다.
밀리아를 바라보는 표독스러운 눈동자엔 주체할 수 없는 살의가 뚝뚝 흘러 떨어졌다.
“스텔라의 개 주제에…….”
누자베스는 이미 로아의 신이었다.
그가 헬베르카의 전설적인 당주 ‘오르키아나’의 환생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황금처럼 고귀한 마호가니 빛의 눈동자. 광채를 머금은 회백빛의 머리카락.
그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요소.
그 모든 것들이 누자베스가 성도의 은사자 오르키아나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고작 이 열도에서 만족하고 안주할 그릇이 아니다.
바체트령을 집어 삼키고, 대륙의 절반을 집어삼킬 맹주로써 다시 자신의 이름을 떨칠 사내였다.
그때가 되면 마왕들도, 윤왕의 그릇도, 나르시안의 직계손들 조차 이 세상의 진정한 주인을 향해 무릎을 꿇을 것이다.
밤의 어머니께서 국화의 주인에게 세상의 절반을 약속하신 것이 결코 오래된 전설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제가 당신의 뜻에 순종하여 흐드러질 꽃이길 맹세했지만, 이번 결정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로아는 어금니를 꽉 물며 끓어 오르는 분노를 되삼켰다. 손끝이 파르르 떨릴 만큼 누자베스의 처분은 충격적이었다.
퍼억!
로아는 무릎을 꿇고 있는 밀리아의 얼굴을 전투화의 굽으로 걷어찬 후 바로 돌아섰다.
[누자베스 : 진정했냐, 로아? 그럼 바로 루칸다와 합류하여 용사를 몰아 붙여.]
[로아 : 뜻에 따르겠습니다, 각하.]
밀리아를 상대하고 있던 곳으로부터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다.
* * *
인과응보.
사필귀정.
새옹지마.
따위의 형편상 좋은 소리는 현실에 없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현실성과 개연성은 공존하거나 섞일 수 없는 개념이다.
현실적이며 개연성 있는 이야기?
그딴 게 어디 있겠나! 나는 단언할 수 있다. 현실적이며 개연성 있는 이야기란 개소리에 불과하다.
차라리 히X에 레이 선생님이 소년 순애물 만화를 그린다는 게 더 그럴싸하게 들릴 만큼 말이다!
미안, 비유가 너무 어려웠나?
그렇다면 정상적이며 교양 있는 지성인 분들께서도 알아들을 수 있는 비유도 해보겠다.
뭐…… 리처드 도킨스가 주말마다 교회 다니는 권사님이라거나. 젠장, 모르겠다. 그냥 비유가 그렇다는 거다.
어쨌거나 말도 안 되는 소리란 의미다.
현실은 개연성이라곤 쥐뿔만큼도 없는 우연의 연속일 뿐이고, 그 어떤 사건과 사건도 유기적인 연결 고리를 지니지 못하며,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이 논리적인 대화를 하고 있다고 착각하지만 지향점 없이 난잡한 음절의 집합을 내뱉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소설은 현실이 지닌 성질과 정반대의 세계여야 한다.
그렇다면 내 소설 ‘던전 부수는 플레이어’의 모든 캐릭터들은 존재 그 자체에 의미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넬쟈의 둥지 입구로 발을 들여 안쪽으로 걸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주인공이 둘이라.’
류시혁과 백주월.
왕정파와 공화정파에서 각각 소환해낸 이계의 용사들이다.
둘 중에 누가 먼저 마왕을 토벌하는데 성공하는지에 따라, 국민들의 지지를 받는 파벌이 결정될 것이다.
그렇기에 둘의 행보에 각 고위계층 인사들이 집중하고 있는 것이고 말이다.
어쨌거나 소설의 배경이 되는 이야기는 이쯤하고, 내가 이 주어진 환경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생각해 보자.
류시혁과 백주월은 능력은 다르지만, 맞붙는다면 호각에 가까운 실력을 지니고 있다.
만약 내게 엄청난 행운이 따라줘서 둘 중 하나를 처리하는데 성공하더라도, 나머지 한쪽을 처리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요행이란 연속으로 두 번 일어나지 않는 법이니까.
자, 결론이다.
‘이번엔 시혁이랑 얼굴 붉히지 말고 곱게 헤어져 줘야겠군.’
밀리아를 구태여 죽이지 않은 건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결코 그 거대한 수유기관에 현혹된 게 아니니 착각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작중에선 한 번도 조우하지 않았지만, 만약 류시혁과 백주월이 우연으로 가장된 필연으로 조우하게 된다면?’
충돌의 확률은 적지 않다.
애초에 상극에 위치해 있는 두 캐릭터다. 그리고 나는 이 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만큼, 가장 적극적으로 내 이득을 위해 활용해야만 한다.
‘류시혁을 살려 둔다는 선택지를 취한다면, 13차폐구의 트라이어드도 손쉽게 정리될테고.’
나는 그 뒤에 편하게 본도에 상륙하면 된다. 두 사람의 용사를 일종의 자연재해. 그러니까 태풍 같은 거라고 가정하면, 미연에 피해를 방지할 수도 있지 않겠나?
‘하지만 이 섬에선 류시혁의 캐릭터 설정이 내가 알고 있는 설정과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검증을 해봐야겠지.’
루칸다와 로아에게 일방적으로 얻어 맞다 보면, 자연스럽게 하나의 결론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하이브 마인드만 처리하면 된다.
물론 이 섬의 악당은 트올리카로 설정되어 있다.
때마침 트올리카가 둥지 밖으로 모습을 드러낼 것이고, 거기서 류시혁이 손쉬운 방법을 택할지 지켜보면 그만이다.
좋다, 문제없다.
이후 상황을 살핀 후 흡혈귀의 파편을 손에 넣을 수 있는 방법이나 궁리해 보자.
끼이익.
둥지 심부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넬쟈 외에도 못 보던 녀석이 하나 있었다.
마왕군의 장교복이다.
재빠르게 녀석의 어깨에 달린 계급장을 확인했다.
‘감찰관.’
당연한 얘기지만.
내가 한때 시트란테 서도의 감찰관 레오란드의 관리를 받았듯, 이 섬을 관리하고 있는 감찰관도 있었다는 얘기다.
“아리카의 엘베제 누자베스 변경백. 소문으로 듣던 신예 전쟁 군주를 직접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감찰관은 절도 있는 발걸음으로 다가와 오른손을 내밀었다.
“포 힐케인 섬의 감찰관 우렌입니다.”
“지금 이 제스처는 불쾌하군.”
악수를 청하듯 내밀어진 우렌의 오른손을 힐긋 내려다 보며 말하자.
우렌은 쓴웃음을 머금으며 냉큼 손을 거뒀다.
“하핫, 죄송합니다. 이거 반가운 마음이 앞섰군요.”
“그다지 반가운 얘기를 하러 찾아온 것 같진 않은데.”
넬쟈의 자리에 털썩 앉으며 담배를 입에 물자. 우렌이 냉큼 다가와 불을 붙이며 말했다.
“훌륭한 통찰력이십니다, 누자베스 님.”
우렌은 불을 붙인 후 두어 발자국 물러났다.
“접경하지 않은 지역에 관한 무력 행사 및 간섭 행위는 일부 특례를 제외하고 금지되어 있습니다. 저 같이 녹봉이나 먹는 말단 놈들이야 전쟁 군주님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쉬쉬하는 게 통상적인 경우입니다만.”
“본론만 말하는 게 어떤가?”
“엄밀히 따지자면 누자베스 님께서는 총령에 반하는 행위를 자행하는 중입니다. 이는 마왕군이 동원되어 무력 제압을 가하기 충분한 이유입니다.”
쉽게 말해 더 이상 깽판치지 말고 꺼지라는 소리다.
‘감찰관 나부랭이 주제에 누굴 믿고 있고 이러는 걸까.’
우렌은 실실 웃으며 굽실거리는 태도를 취했지만. 이미 무력의 상하관계가 정립되었다는 듯 자신만만한 분위기가 풍겼다.
“한판 벌이고 싶어서 몸이 근질근질한 모양이군.”
“아휴!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말이!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각하께서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주신다면야 제 선에서 무마시켜 놓겠습니다.”
우렌이 손사래를 치며 질겁하는 척을 했지만. 잠깐 마인드 모드로 섬의 주변을 살펴본 결과.
‘진짜 마왕군을 동원해 왔잖아?’
그것도 수십 척의 전함을 끌고 왔다.
만약 여기서 교섭이 결렬된다면 바로 상륙할 기세였다.
솔직히 마왕의 정규군은 현재의 병력으로 감당하기 힘든 수준이었다.
마왕군에 비하면 하이브 마인드의 군대는 민병대에 가까운 레벨이었으니까.
내가 잠시 생각에 잠겨 대답을 보류하자, 우렌이 슬쩍 다가와 소근거리듯 말했다.
“역시 이런 일의 매듭은 체면이 중요합죠. 전쟁 군주께서 행차하셨는데 빈손으로 돌아가는 건 폼이 안 살지 않겠습니까?”
“내가 혹할 만한 제안이길 바라지.”
우렌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넬쟈 쪽을 흘깃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