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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짓는 플레이어-112화 (112/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112화

    누군가의 방법(4)

    -여자는 일회용 흡연장처럼 다루는 거야.

    시혁은 옛 상관이 입버릇을 떠올린다.

    문을 열고 안을 살핀 다음?

    자리가 있으면 비집고 들어가 담배를 입에 꼬나물고 ‘빌어먹을, 추잡한 흡연장이로군’이라고 지껄이며 불을 붙이는 것뿐이다.

    담뱃재와 가래침으로 한껏 더럽혀져 있더라도, 역한 담뱃진내로 가득 찬 공간이라도 말이다.

    잠시 숨을 돌리며 담배를 태우는 데 부족함은 없을 것이다.

    “담배 태우는 놈은 흡연장에게 그 이상을 바라면 안 돼. 흡연장이 담배나 한 대 태우러 온 남자가 떠나는 걸 당연하게 여기듯이 말이야. 그게 당연한 관계의 예의지.”

    시혁은 이름 모를 야생화를 자주 옮겨 심었다. 신앙으로 무장한 광신도들을 향해 방아쇠를 당길 때마다 햇살이 따뜻한 곳에 심어 놓은 야생화를 떠올린다.

    “이봐, 류 대위. 어렵게 생각하지 마. 누구에게나 한숨 돌릴 구석이 필요한 법이잖아?”

    담배를 입에 물고, 새하얀 야생화의 곁에 앉아, 불을 붙인 후 자신의 어제와 오늘이 픽션이길 기도했다.

    아버지를 잃은 아이들의 눈물도.

    평생을 함께 해온 남편을 잃은 아녀자의 오열도.

    모든 것이 거짓이길 바랬다.

    비뚫어진 신앙이 그들의 삶을 갉아 먹지 않더라도, 이 세상은 충분히 각박했으니까.

    그리하여 시혁은 자신의 최후를 상상한다. 야생화의 앞에 다가가, 텅 빈 담배갑을 꺼내 들고. ‘미안, 담배가 다 떨어졌어.’하고 멋쩍은 미소를 머금는 것이다.

    새하얀 들국화를 옮겨 심는 동안 시혁은 낯선 땅의 조문객이었다.

    물론, 지금도 그의 역할은 무엇 하나 바뀌지 않았다.

    끊임없이 야생화를 옮겨 심듯, 정의라는 이름의 비열한 폭력을 휘두를 구실과 변명거리를 갈구해야만 했다.

    “…….”

    시혁은 눈을 떴다.

    미약하게 흔들리던 의식이 윤곽을 그리며 명확해졌다.

    조용하고도 깊은 한숨이 입 밖으로 토해졌다. 눈앞으로 불씨가 가까스로 남은 모닥불이 일렁였다.

    타닥타닥, 장작이 타는 소리가 밤의 적막 위에 번졌다.

    '꿈을 꾼 것도 오랜만인데.'

    시혁은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안쪽 주머니에서 담배갑을 꺼내 불을 붙이려 했지만, 모닥불 너머에서 새근새근 잠든 두 사람이 보였다.

    밀리아와 누자베스였다.

    어느새 사이가 좋아져 이제는 남매처럼 보일 정도였다. 시혁은 담배를 다시 담배갑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둘이 가까이 있는 곳에서 담배를 태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기묘한 일이군.'

    시혁의 시선은 누자베스를 향했다.

    이제 함께 행동한지 며칠 밖에 되지 않았지만, 누자베스는 기묘한 힘을 지닌 소년이었다.

    단순히 활기차고 어른스러운 척을 하는 아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시혁은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누자베스는 밀리아를 변화시키고 있었다.

    수도에서 시혁이 처음 만났던 밀리아는 그저 프로그래밍된 스크립트를 읊조리는 인공지능 혹은 안드로이드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 섬에 도착하여 누자베스와 만난 이후부터 눈에 띌 만큼 변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이 섬에 있던 그 하이브 마인드도…….'

    포 힐케인 섬 동부의 하이브 마인드 넬쟈도 그다지 작위적인 느낌이 들지 않았다.

    누자베스는 마치 이 흑백의 세상을 색채로 물들이는 물감 같았다.

    그렇다면 자기 자신도 변하고 있는 것일까? 시혁은 숙영지에서 벗어나 밤의 해변을 걸었다.

    누자베스와 밀리아가 잠든 곳에서 100여 미터 떨어진 곳에서 발을 멈췄고. 담배에 불을 붙이려던 찰나였다.

    “불이 필요한가?”

    정갈한 공용어였다.

    그 발음의 정확도와 점잖은 억양은 어딘가의 왕족을 연상시킬 정도였다.

    시혁은 입술 사이에 끼워 둔 담배를 까딱이며 뒤를 돌아봤다.

    그의 뒤에 서있던 것은 밤의 어둠을 한층 더 짙게 투영한 것 같은 고블린이었다.

    고블린은 투박한 손가락 사이에 성냥을 쥐고 손톱으로 튕겼다.

    화륵!

    고블린은 발소리도 없이 다가와 시혁이 물고 있던 담배에 불을 붙였다.

    “이 섬은 초행인데, 깜짝 놀랄 만큼 친절한 고블린이군.”

    “최소한의 격식과 마땅한 예의가 있다면 종의 차이란 의외로 별 것도 아니지.”

    루칸다는 킬킬 웃으며 자신도 담배를 물었다.

    “그래서 이 섬에 인간 모험가가 무슨 일인가? 인간들에게 해를 끼친 적도 없고, 해를 끼칠 우려도 없는 마물뿐인데.”

    루칸다는 인간 용사를 향해 물었다.

    바체트 령을 침략하여, 무수한 동포들의 목숨을 앗아간 건 인간들이다.

    그들에게 그 어떤 대의명분도 없을 것이고, 정의도 없을 것이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대답해 두지.”

    “마땅히 해야 될 일이라.”

    루칸다는 어깨를 으슥이며 대충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수백, 수천 년이 지나도 인간들은 변치 않는군. 그런 옹졸하고 편협한 명분으로 검을 뽑아들 수 있는 종은 인간뿐이다.”

    “내가 혹시 깊은 이해를 구했나?”

    “전혀.”

    “그럼 피차 해야 할 일을 해야 될 때군.”

    류시혁은 자신의 분신처럼 허리춤에 차고 있는 검을 뽑아 들었다. 마왕 라바노스의 어금니로 만들어졌다는 마검 '니벨룽겐’이다.

    동시에 루칸다 역시 윤왕 루아 카날다의 유물인 흑요석 검을 가지런히 정렬시켰다.

    “네놈은 이 섬에서 무엇 하나 얻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와 동시에 루칸다의 등 뒤에서 포탄이 포물선이 그리며 날아들고 있었다.

    * * *

    [누자베스 : 아아, 이 화약의 향기! 폭음과 격발음!]

    콰과광!

    누자베스의 주변으로 박격포 포탄이 터지며 빛무리를 흩뿌렸다. 얼마 전 개량되어 살상량을 높이기 위해 쇠구슬이 추가된 포탄이었다.

    누자베스는 지면에 바짝 엎드린 채 속으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드디어 그리웠던 전장으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야, 야습? 용사님은 어디 가신 거야!?”

    그리고 밀리아는 누자베스를 보호하듯 바짝 끌어안으며 몸을 낮췄다.

    물론 박격포 포격이 둘에게 직격할 리 없었다. 누자베스의 지원 좌표 설정은 완벽에 가까웠으니까.

    하지만 그런 사정을 알 리가 없는 밀리아는 지체없이 '불가침의 성역' 스킬을 발동시켰다.

    스텔라 교단의 성직자 중에서도 고위급에 속하는 차상위계 전령만이 사용할 수 있는 스킬이었다.

    스킬의 범위 안에서는 그 어떤 충격도 느껴지지 않을 만큼 완벽한 방호 능력이다.

    “트올리카가 군대를 보낸 거예요……! 도, 도망쳐야 돼요!”

    “그건 나도 알지만!”

    밀리아가 아무리 교단의 고위성직자라도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은 명확했다.

    근접전 능력과 기적의 재현 능력이 왕국 내에서도 손에 꼽을 수 있는 수준이라곤 하지만.

    홀로 군대에 맞설 수 있는 건 아니다.

    혹여나 류시혁이 부재한 상황에서 포위당한다면 생존 확률은 한없이 낮아진다.

    질낮은 철과 가죽으로 무장한 오크 보병들이라도 규모가 갖춰진다면 충분히 위협적이기 때문이다.

    병력의 소모를 각오하고 밀리아를 몰아붙이기 시작하면? 먼저 체력과 마나가 고갈되는 건 밀리아 쪽이었다.

    단신의 인간이란 그만큼 무력한 것이다.

    군단을 상대로 홀로 맞설 수 있는 존재는 오로지 ‘용사’라는 칭호를 얻은 사내뿐이다.

    밀리아는 공포에 질려 굳어버린 누자베스를 잠시 바라본 후 아래입술을 깨물었다.

    각오를 다질 때였다.

    '스텔라 님. 성직에 임하며 제 목숨과 삶은 이미 당신의 것이었습니다.'

    태양의 가르침과 은총의 전파를 위해 언제든 순교할 각오는 되어 있었다.

    하지만 어린 소년의 목숨에 대해 같은 논리를 대입하는 짓은 도저히 할 수 없었다.

    밀리아는 누자베스를 안심 시키듯 꼬옥 끌어 안으며 자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누자베스. 내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너를 보호해줄 수 없어.”

    불가침의 성역 스킬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정신력의 대부분을 할애해야 했다.

    그렇다고 이 포격 속에서 스킬을 해제했다간, 밀리아는 무사할지 몰라도 누자베스 같은 평범한 소년은 멀쩡할 수 없었다.

    밀리아는 배시시 웃으며 이어 말했다.

    “누자베스는 어린애 취급하지 말라고 늘 그랬지? 지금이 어엿한 한 사람의 사내라는 사실을 증명할 때야.”

    “미, 밀리아…….”

    “뒤도 돌아보지 말고 달려. 동쪽의 둥지까지.”

    “싫어요! 저도 싸울 수 있어요. 용사님과 밀리아를 돕고 싶어요!”

    “누자베스!”

    밀리아가 드물게도 누자베스를 향해 언성을 높였다. 누자베스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고, 밀리아는 단호하게 말했다.

    “도망치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야. 아, 그리고 혹시 가능하면 동쪽의 그 하이브 마인드에게 도와줄 수 있는지 부탁해 줄 수 있어?”

    결코 본심은 아니었다.

    스텔라 교단의 성직자가 하이브 마인드의 원군 따위를 요청할 리 없었다.

    다만, 이 자리에서 누자베스를 이탈시킬 적당한 이유가 필요했을 뿐이다.

    누자베스는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넬쟈에게 가서 전할게요! 그러니까 기다려야 돼요. 절대로, 절대 죽으면 안 돼요.”

    “당연하지. 이래 뵈도 실력에는 자신 있으니까!”

    밀리아는 빙긋 웃으며 과장스럽게 가슴을 펼쳐 보였고, 누자베스는 눈을 질끈 감으며 뒤로 돌아 내달리기 시작했다.

    “하아…….”

    밀리아는 뒤늦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누자베스가 이 지역을 벗어날 때까지 보호막을 유지하기만 하면 된다.

    물론 그것뿐만이라면 밀리아에게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었겠지만.

    밀리아는 어둠 속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강대한 존재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숨이 턱 막힐 정도의 살의다.

    각종 마물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지니고 있으며, 많은 수의 마물과 조우해 봤지만.

    이 만큼 위압적인 살의를 느껴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마왕군의 장교, 아니면 그 이상일까.'

    최소 마왕군의 직속 장교 수준은 될 것이다. 최악의 경우라면 ‘반 르낙시아’에 해당하는 고혈종의 확률도 아주 없진 않았다.

    밀리아가 누자베스의 보호에 정신력을 할애하고 있지 않았더라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상대일 것이다.

    “실제로 보니까 뭐가 그리 좋은지 모르겠는데?”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정복을 갖춰 입은 금발의 미소년이었다.

    자신의 체구에 비해 한참 거대한 대검을 질질 끌며 밀리아를 위아래로 훑어보고 있었다.

    저런 미형의 인간 형태를 취하는 마물은 몇 종인가 있었지만.

    이 정도로 강대한 사기를 내뿜는 마물은 한 종류 뿐이다.

    국화의 가문.

    반 르낙시아 동맹을 이끌었던 수장.

    헬베르카 혹은 헬베르카의 분가에 속하는 마물뿐이다.

    “되도록이면 상처를 입히지 말라고 명령을 받긴 했지만…….”

    로아는 천천히 거리를 좁혀오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 적나라한 살의에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였다.

    “불의의 사고로 두 동강이 나버리는 경우도 있겠지?”

    밀리아에겐 그런 자격이 없었다.

    인간 주제에 헬베르카의 전통성을 계승하는 고결한 존재의 관심을 받아서는 안 된다. 헬베르카의 고결함과 순수함은 결코 더럽혀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이 로아의 결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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