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짓는 플레이어 111화
누군가의 방법(3)
포 힐케인 섬의 고착 상황은 계속됐다.
누자베스의 군대는 포 힐케인 섬의 모든 둥지를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용사 류시혁의 등장과 함께 공세를 멈추게 되었고, 숨을 죽인 채 상황을 지켜보게 된 것이다.
“패 받았으면 뜸들이지 말고 걸어.”
“그렇게 재촉하는 걸 보니 나쁘지 않은 패가 걸린 모양이군.”
로아는 피식 웃으며 금화 한 줄을 손등으로 밀어 테이블의 중앙으로 옮겼다.
루칸다는 손에 쥐고 있는 카드를 훑어보다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각하께 연락은 없었나? 어젯밤부터 별도의 지시가 없다만.”
“글세. 애초에 사흘 전부터 이렇다 할 지령이 없었잖아.”
“그렇긴 하군. 그 인간의 젖가슴이 이러쿵저러쿵하는 얘기밖에 없었으니까.”
“가끔씩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이 안 되는데.”
루칸다는 한숨과 함께 패를 내려놨다.
창을 든 병사의 카드가 두 장, 여왕이 그려진 카드가 한 장이었다.
“손바닥 좀 보지.”
“고작 8천 벨에 너무 추잡한 거 아냐?”
“추잡한 짓을 하는 게 어느 쪽인지 확인해 두는 편이 좋지 않겠나?”
“야, 잠깐. 증거 있어?”
루칸다가 손목을 붙잡기 직전, 로아는 손바닥 안쪽에 숨겨 놨던 카드를 소매 안쪽으로 숨겼다.
“장난질 칠 상대를 잘못 골랐군. 지금까지 깡방에서 잘라낸 손목만 한 수레다.”
“노잣돈 꼬라박아서 엄한 화풀이나 하고 다닌 게 자랑은 아니잖아.”
“이 빌어먹을 사기꾼 자식이!”
루칸다와 로아가 또 한바탕 나뒹굴기 직전이었다.
[누자베스 : 내 둥지에선 도박 금지라고 하지 않았냐? 보르가처럼 독방에서 일주일 동안 썩고 싶나 보네.]
[로아 : 이, 이건 도박이 아니라…… 그냥 심심해서 게임한 거야! 게임!]
[루칸다 : 죄송합니다, 각하. 여긴 넬쟈의 둥지라 허용되는 줄 알았습니다.]
[누자베스 : 아니, 그런 것보다 각하는 지금 목숨 걸고 용사 따라다니면서 개고생하는데 너무한 거 아니냐, 어?]
[로아 : …….]
[루칸다 : …….]
별로 고생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일주일 동안 누자베스의 보고를 종합해 보면 밀리아라는 여자의 가슴에 얽힌 에피소드뿐이었으니까.
‘와…… 루칸다 그거 아냐? 스텔라 교단의 성직자 복장은 물에 젖으면 장난 아니다?’
‘로아! 로아 들어봐! 각하가 지금 쿠퍼 인대의 최대 부하량을 두 눈으로 목격하고 있다!’
‘나이를 13살이라고 해볼까? 13살 정도면 남자로 안 보여서 같이 잘 수 있는 나이 아니냐? 같이 목욕하자고 하는 건 어때?’
‘할렐루야…… 할렐루야다 진짜! 진화론은 모두 개헛소리였어! 저런 가슴이 수학적 확률로부터 도출된 결과물일 리가 없어!’
‘태양 만세! 스텔라 만세! 각하는 오늘부터 스텔라 교단의 신도다. 이 세상의 섭리는 그리 먼 곳에 있는 게 아니었어…… ’
‘여러분, 님이 무엇입니까? 언제나 그리운 이름입니다. 우리가 사모하고 눈물 흘리며 오랜 세월을 목말라해 온 이름입니다! 님은 바로 밀리아의 가슴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부우우운!’
루칸다도 로아도.
누자베스가 아리카 섬의 통일까지 혹사당했으니 어느 정도의 힐링 기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본래 목적과는 조금 틀어졌지만, 누자베스의 멘탈이 많이 회복되어 가는 게 느껴졌기에 별 다른 말은 하지 않는 것이다.
[루칸다 : 어쨌거나 휴양을 만끽하고 계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누자베스 : 휴양이라니! 아니, 설령 지금까진 휴양이었을지 몰라도 제대로 된 작전을 세웠다니까!]
[로아 : 누자베스…… 그 ‘후에엣, 밀리아 마망’ 작전은 저번에도 얘기했어.]
[루칸다 : 그 전엔 ‘박진! 모성애 자극의 비기!’ 작전이었죠, 각하.]
[누자베스 : 그런 거 아니라고, 짜식들아!]
누자베스는 사뭇 억울하다는 어투로 말했다.
[누자베스 : 이번엔 진짜 제대로 된 작전이야. 슬슬 포 힐케인 섬을 정리할 때니까.]
[루칸다 : 명을 받들 준비를 하겠습니다.]
[로아 : 용사라는 녀석이 어느 정도일지 기대돼서 몸이 근질근질하던 참이었어.]
[누자베스 : 크흠!]
누자베스는 헛기침을 해서 목을 풀어준 후 입을 열었다.
[누자베스 : 녀석에게 아리카의 방식을 가르쳐 주겠다. 용사 나부랭이 따위가 존귀한 전쟁 군주의 의지에 그 어떤 영향도 끼칠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할 때 아닌가?]
탐색은 끝났다.
누자베스는 자신의 결론을 검증할 뿐이었다.
* * *
트올리카의 둥지에 로아가 찾아온 것은 늦은 오후였다.
대동한 병력은 정예 하이오크 척탄병 두 마리뿐. 꽤나 대담한 행동이었다.
자신의 무력을 과신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반대로 트올리카의 둥지를 과소평가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실제로 로아가 단신으로 트올리카의 병력 대부분을 괴멸시킬 수 있다는 건 사실이었다.
도저히 이런 변방 둥지의 챔피언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다.
‘저것이 아릿카사의 챔피언인가.’
국화꽃을 입에 문 삵의 문양.
포 힐케인 섬을 지옥으로 만든 군대의 상징이었다.
로아는 아릿카사의 문양이 새겨진 외투를 벗어 하이오크에게 건낸 후 트올리카에게 시선을 던졌다.
일개 챔피언이 고개를 뻣뻣히 치켜 들고 전쟁 군주의 앞에 선 것이다. 무력의 상하 관계를 명확히 정의하듯 말이다.
“아리카의 엘베제 누자베스 각하의 전언이다. 경외하여 듣도록.”
트올리카는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을 꿇었다. 일순간 둥지의 병사들이 술렁였지만, 트올리카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누자베스와 맞붙어 승리할 확률은 0%에 수렴한다. 그렇다면 이 평화적인 제안에 고개를 숙일 필요가 있었다.
트올리카가 경청할 준비를 끝마치자, 로아는 양피지를 펼쳐 읽기 시작했다.
“각하께서는 북부 둥지의 관리자에게 자비로운 선택의 기회를 허락하셨다.”
자비로운 선택이라.
트올리카는 속으로 실소를 흘렸다.
누자베스는 자신과 같은 하이브 마인드다. 아무리 대단한 존재라도 그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렇기에 하이브 마인드의 행동 양식에 ‘자비’라던가 ‘아량’이 존재하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하이브 마인드의 행동이란 그저 효율적인 수단과 합리적인 선택의 결과물이다.
“북부 둥지는 아릿카사와 협력하여 인간 용사의 요격에 나선다. 요격 이후 포 힐케인 섬은 엘베제 누자베스 각하의 직할 영지로서 합병된다.”
인간 용사 퇴치에 협력하고, 섬을 통째로 내놓으라는 말이다.
트올리카는 잠자코 기다렸다.
그 조건을 수락하는 대신 무엇을 내줄 수 있는지 말해줄 차례였다.
“이번 일의 성과에 따라 흡혈귀의 존속이 허가된다. 또한 동부 둥지의 관리자와 마찬가지로 종속령의 관리를 허락받을 수 있을 것이다.”
트올리카는 시선을 슬쩍 올려 로아의 표정을 살폈다. 여전히 무기질적인 무표정이다.
하지만 누자베스의 제안은 그야말로 파격적인 것이었다.
‘마치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꿰뚫어보고 있는 듯하군.’
종속령이 된다면 섬의 생산품을 지속적으로 조공해야만 한다.
하지만 포 힐케인 섬은 본래 비옥하여 농업에 적합한 땅이었다. 만약 누자베스가 더 많은 보급을 원하는 것뿐이라면 합당한 선택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넬쟈가 경작지를 돌보고, 트올리카가 섬의 방위를 책임지는 형태가 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트올리카가 가장 간절히 바라고 있는 건 카베르네의 안위였다.
‘카베르네를 살릴 수 있다.’
이미 누자베스는 넬쟈를 제압하고, 비올리네를 처치한 전쟁 군주다.
흡혈귀의 뼈와 피를 손에 넣었을 것이다. 한시가 급한 트올리카에겐 단비 같은 제안이었다.
“시간이 많지 않으니 지금 바로 대답을 듣지.”
“존귀하신 아리카의 엘베제 누자베스 님의 의지에 순응하겠습니다.”
트올리카가 대답하자마자 로아는 옆에 있던 하이오크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하이오크 척탄병은 들고 있던 항아리를 들고 앞으로 나와 트올리카의 앞에 놓았다.
“이건…….”
“흡혈귀의 혈액이다. 나머지 파편은 일을 무사히 끝낸 뒤 넘겨주겠다.”
“가, 감사합니다.”
트올리카는 넘겨받은 항아리를 보물단지처럼 소중하게 감싸 안았다.
이걸로 카베르네를 지킬 수 있게 되었다. 쇠약하여 시름시름 앓기 시작한 카베르네의 모습이 지금도 동공에 새겨진 듯 선명했다.
“그럼 이번 공투에서 귀관의 공훈을 기대하도록 하지.”
로아는 그렇게 말한 후 바로 외투를 걸치고 돌아섰다.
트올리카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웅크린 채 머릿속을 차례차례 정리했다.
용사에게 대적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말이다. 인간들의 전설 속에 등장하는 구원자. 그 전설의 재현에 맞선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분명했다.
하지만 기묘하게도 두려움은 없었다.
건강해진 딸의 밝은 웃음을 떠올리자, 전혀 두렵지 않았다.
웃음과 죽음이라.
합리적인 거래는 아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모든 아버지가 그러하듯 트올리카 역시 잇속에 밝은 장사치가 아니었다.
카베르네가 활짝 웃으며 ‘고마워요, 아빠’라고 말해주는 것만으로도 그는 구원받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아버지는 승산이 0에 수렴하는 전장에 나선다.
아마, 죽음 따윈 눈꼽 만큼도 두렵지 않았을 것이다.
* * *
해가 저물고 있었다.
오늘도 흡혈귀의 뼈를 찾지 못한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비올리네를 죽이기 전에 살살 구슬려 볼 걸 그랬다.
‘스칼렛을 데려 왔었으면 죽인 다음에 바로 다시 살려서 술술 불게 했을텐데.’
이번 앤트리 멤버 선별에 살짝 실패한 기분도 들었지만. 이렇게 류시혁과 만나게 된 이상 아주 실패한 것도 아니었다.
로아와 루칸다는 1:1의 대인전 능력만 놓고 따지자면 성역급 둥지의 챔피언과 필적한다.
용사에 대응하기 위한 베스트 멤버란 말이다.
“음…….”
뒤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진 것과 동시에 뒤를 돌아보려 했지만. 밀리아가 뒤에서 갑자기 다가와 한손으로 내 어깨를 붙잡았다.
시트러스 향과 비슷한 체취와 함께 부드러운 감촉이 등쪽에 닿았다. 머리카락, 그래 부드러운 감촉이란 밀리아의 머리카락이다! 이상한 상상 좀 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저기, 밀리아?”
“잠깐만.”
밀리아는 갑자기 내 머리에 살포시 얼굴을 묻더니 금새 떨어졌다.
“누자베스 너 역시…….”
“예? 왜, 왜요?”
혹시 이 녀석…….
정수리 냄새만으로 마물을 구분할 줄 아는 건가? 솔직히 여기가 내가 쓴 소설이라고 하더라도 별의 별 해괴한 마물 판별법이 없으리란 보장은 없다.
게다가 밀리아는 교단의 고위성직자가 아니던가? 배설물만 보고도 인간인지 마물인지 식별해낼 수 있어도 이상할 건 무엇 하나 없었다!
두근거리며 밀리아의 입에 집중하고 있자.
“역시 제대로 안 씻고 있지? 내가 빌려준 오일도 전혀 안 줄어든 것 같구. 향기도 안 나는데.”
“그래요? 제대로 씻었는데 왜 그럴까요.”
미안하지만 거짓말이다.
전혀 안 쓰고 있었다.
밀리아가 준 오일을 한 번 시험삼아 써본 적이 있었고, 몸에 염산을 바른 듯한 통증이 번져서 두 번 다시 쓰지 않게 되었지만.
“아무래도 안 되겠네. 오늘부터는 내가 같이 가서 씻겨줄 거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바, 박태준 팀장. 당신이 옳았어…….
이걸로 박태준 팀장의 모든 죄를 용서할 수 있었다. 진심이다. 나는 농담을 모르는 사람이니까.